95화. 스칼라 아카데미.
2018.07.19.
어느새 가을은 성큼 지나고 겨울이 시작되려는지 바람이 차가워졌다. 그리고 바람과 함께 낙엽이 하나하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낙엽이 떨어지는 이 계절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아카데미 기공식이 열렸다.
"카일, 기대돼요."
사실 나와 카일이 만드는 아카데미의 건물은 공사가 많이 진척되어 있었다.
이미 건물의 기초공사가 끝났고,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는 이달 말이 되기 전에 외벽 공사는 끝날 예정이었다. 겨울 동안에는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진행해서 늦어도 내년 봄에는 입학식을 여는 것이 목표였다.
기공식은 아카데미의 본격적인 운영을 알리는 행사였다. 교수진 선임이 끝났고, 평민들에게 홍보하는 자리랄까?
"어릴 때도 세이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더니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네."
"내가 그랬어요?"
"응, 글자 다 배우고 나서는 마을에서 회계 책을 구해와서는 다짜고짜 가르쳐 달라 그랬었어."
"진짜요? 하필 회계래, 글자만 아는 주제에 그런 걸 배우겠다고 나섰다니, 하룻강아지가 참 용감했네요."
회계는 지금도 어려운 학문이었다. 외우는 것은 잘하긴 했지만 외운다고 이해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 물론, 모든 공부의 기초는 암기를 해두는 것이 유리하긴 했다.
"그런데 나 글자 공부할 때 맨날 케이 이름만 썼던 것 같은데."
"어 맞아. 그리고 그때 그 동굴에 가면 아직 네 이름과 내 이름이 새겨져 있을걸? 문제는 그 동굴이 어딘지 못 찾겠다는 거지."
진짜 우리 이름을 내가 적었더랬다. 카일은 날 찾으려고 그 동굴을 찾으려고 했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고 이름을 새긴 것만 기억이 났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 동굴을 찾지 못했고, 대략 비스 영지이고, 내가 비스가나 그 가신의 딸이라는 유추만 했다고...
겉으로는 화목해 보이나 속은 그렇지 않은, 그리고 남동생이 있고 세이라는 애칭을 쓰는 영애를 찾느라 고생했단다. 나이도 정확하지 않았다나?
"나중에 꼭 그 동굴 가봐야겠다."
"응. 꼭 가자."
아카데미로 가는 마차 안에서 카일의 품에 기대앉았다. 6개월 전에는 마차 안에서 마주 보고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떨어져 앉는 법이 없었다.
뭐, 우리가 연애질하느라 그런 것도 있지만, 이건 추워서 그런 것이다. 이제 바람이 차갑잖아. 물론 살리맨더를 불러도 되지만 작은 생명력도 마나도 낭비하기 아까우니까 붙어 있는 거라고.
흠흠.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핑계네, 쳇.
도착을 알리는 기사가 딱 들러붙어 있는 우리를 보고 큼큼,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테일러경, 알리페르, 프리케는 미리 가서 호위를 준비하고 있느라 곁에 없었다. 이런 모습에 익숙한 기사를 배치하라고.
"자, 가볼까요? 아카데미 이사장님?"
카일이 내게 언제나처럼 손을 내밀어 나를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자연스럽게 휘며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카일에 의지해서 마차에서 내린 뒤 행사장으로 걸어갔다.
"황태자비 전하!"
"어머, 너희들은!!"
예전에 고아원에 시찰을 갔을 때 만난 아이들이었다. 루시와 리아가 제일 앞에서 날 맞이했다.
"어머 이건!"
잘 말린 꽃으로 만든 화관 한 쌍을 들고 있었다.
"그때 너희들이 준 화관도 아직 잘 간직하고 있단다."
"정말요?"
"그럼. 카일, 내가 아카데미를 만들면 공부하러 오기로 약속했던 루시와 리아에요."
"오, 나의 비에게 영감을 준 꼬마 레이디들인가 보네. 열심히 공부해서 황태자비 같은 존경받는 어른으로 자라렴."
"네!!"
두 꼬마 아가씨는 우리의 머리에 정성껏 만든 화관을 씌워줬다.
"은혜에 감사드려요. 두 분 전하."
"열심히 공부할게요."
"오늘 잘 보고 가, 맛있는 간식도 나눠줄 거야. 그리고 봄에 입학식 때 다시 보는 거지?"
내가 고아원에 기증했던 방한복과 목도리, 장갑으로 중무장한 아이들이 너도 나도 우리에게 인사를 해줬다.
뿌듯한 마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런 한편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보자 가슴 한쪽이 시큰했다.
일단은 이 아이들의 미소를 지켜주기 위해 후원을 더 해줘야지. 그냥 귀족이면 불쌍한 아이 중 몇몇을 입양해서 보살펴줄 수 있는데... 황족이라 아무나 입양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대신 이 아이들의 행복을 더 지켜주자. 다음에 황궁에 초대라도 해야겠어.
그리고...
카일과 날 닮은 아이, 갖고 싶어. 쟤들처럼 뛰어노는 모습이 보고 싶다. 하아. 왜 안 생기지...
이제 조금 초조해졌다. 황궁의는 둘 다 너무 건강해서 탈이라고, 그저 하늘의 문제라고 했지만.
"세이, 아이들이 참 순수하고 맑네. 봄에 꽃 피면 만월궁으로 한 번 초대해."
"카일. 응, 그럴게요."
"이런 아이들도 커서 잘 살 수 있게 더 노력하는 황태자가 돼야겠어. 귀족이 아니더라도 성공할 수 있는 환경 만들어 주는 게 우리가 할 일이겠지?"
카일은 타고난 황족이라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책임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음, 내가 본 카일은 나만 예뻐라 하는 게 아니라 이 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멋진 황제가 될 거야.
"내가 곁에서 도울게요. 당신의 반려로서."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서로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배려를 약속했다.
기공식을 위해 아카데미 건물 앞에 마련한 단상 옆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단상의 좌우에는 귀족들이 앉아있었다.
"스칼라 아카데미의 기공식에 참석해 주신 내외빈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보좌관이 사회를 맡았다. 아카데미의 건립 계획 등을 후원자들에게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정을 간략하게 안내해 주는 역할을 맡아서 훌륭하게 소화 중이셨다.
"스칼라 아카데미의 창립자이자, 이사장직을 맡게 될, 자애로운 정령의 딸, 아르세이아 스텔라 데피니토르 황태자비 전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어우, 저 호칭 낯간지럽다. 자애로운이라니, 솔직히 내게 어울리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저 뒤쪽 구석에 앉은 고아원 아이들이 열렬히 박수 치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보다도 나를 환영해주고 좋아해 주는 모습에 저절로 걸음걸이가 당당해졌다.
내 머리 위에 쓰고 있는 잘말려진 꽃으로 만든 화관의 무게가 느껴졌다. 황태자비로서 이끌어 나가야 할 나의 소중한 백성들.
지금까지 잘해왔지만, 앞으로는 더 잘해야 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준비한 말들을 꺼내놓았다.
"스칼라는 계단을 의미합니다. 스칼라 아카데미는 평민이나 빈민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계단이 되었으면 합니다."
돈이 없어서, 신분이 낮아서 배움을 포기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또 귀족 여러분들이 훌륭한 인재를 찾을 수 있게 학생들과의 귀족 사이의 연결 계단이 되어 줄 예정이랍니다."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경제적 활동까지 책임지고 싶었다. 가장 밑바닥의 사람들까지 이 계단을 한 발자국씩 걸어 올라가서 높은 곳에 닿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지.
"그래서, 스칼라 출신의 학생들 중 뛰어난 인재는 황실에서도 눈여겨보고 영입할 예정이니 입학을 계획하는 학생들은 최선을 다해주세요."
나의 말에 고아원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커졌다. 평민이 황실에서 일할 기회는 하인이나 하녀 같은 허드렛일을 하는 이들뿐이었다. 이것도 그들에게는 꿈의 직장이었을 텐데, 다른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그들의 눈에 희망이 가득 차올랐다.
"누구나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랍니다. 귀족 분들은 신분이 다른 이들이 자신들과 나란히 서는 것에 불만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제국민들이 이 계단을 따라 올라와 아래에서 받쳐줄수록 그 위 귀족들이 딛고 있는 계단은 더 튼튼하고 건강하게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나의 연설에 광장은 조금 숙연해졌다. 분명 귀족들 중에는 어째서 평민 따위를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는지 불만인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초가 부실한 건물은 무너지는 법. 평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만큼 자신들의 특별한 삶을 보장해 주겠다는 내 말에 불만들이 쏙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여유 있는 웃음을 지으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함께 할 수 있게 홍보 부탁해요. 그리고, 볼라드 공작부인의 주최로, 이번달 중순, 송년회른 겸해 후원자의 밤을 열 예정이니 많은 귀족 분들의 참여 기대할게요. 우리 부부도 참석할 예정이랍니다."
마지막 인사를 끝내고 단상에서 내려가자 카일이 날 반겼다. 가볍게 안아주면서 내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역시 세이야, 멋져. 정말."
"당신 아내 정말 잘 고른 거예요."
"어, 맞아."
볼라드 공작부인이 단상에 올라 후원의 밤의 일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입학을 원하는 평민들의 입학지원서를 받는 것으로 오늘의 행사는 끝이 났다.
만 12살 이후의 어린 학생들이고 글을 알면 신분 고하에 관계없이 입학자격을 주기로 했다.
글을 못 배운 아이들은 맞벌이 부부들의 자녀를 위한 보육 시설에서 배워올 수 있게 단계를 맞춰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다.
이제 남은 것은, 형편이 대부분 어려울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의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평소 외부 파티에 잘나서지 않는 황태자 부부가 참석하는 자선행사이니, 짭짤하게 모이겠지.
생각보다 이런 일들이 재미있었다. 나, 알고 보면 황태자비가 내 적성에 맞는 직업이었나 봐. 목장에서 살면서 내 재능 썩힐뻔했네, 호호.
"뭐가 그리 좋아서 입꼬리가 내려올지 모르는 거야?"
"내 천성에 맞는 직업을 갖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걸 알아 본 건 나라고, 내 유능함이 빛을 발하는군."
"당신은 내 재능이 아니라, 그저 내가 좋아서 여기 들여 앉힌 것 아니었어요?"
뜨끔해하는 표정의 카일을 보니 웃음이 터졌다. 역시 맞았군.
"아니야! 너, 어릴 때 그 회계 책 가져와서 배울 때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치고는 진짜 빠르게 이해했어. 게다가 정체도 모르는 날 치료해주고 보살폈고, 또 추격꾼들을 따돌릴 때의 판단력과 재치가 얼마나 뛰어났다고!"
"그래도 첫 번째 이유는 날 사랑해서 잖아요. 아니에요?"
"어, 그게 나머지 백가지 이유보다 더 커."
나는 그의 말에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뭐, 내가 재능이 부족했더라도 카일의 애정과 정성으로 극복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보여준 사랑은 날 바꾸기에 충분했으니까.
귀족들과 인사를 나눈 뒤 다시 고아원 아이들에게 갔다.
"글 공부는 끝냈겠지?"
"네에!!!"
"그럼, 우리 봄에 다시 이곳 아카데미에서 만나는 거다! 학비 걱정은 하지 말고! 이 황태자비가 장학금 열심히 벌어 올게."
"와아!!!!"
"황태자비 전하 멋져요."
"사랑해요!"
"황태자비를 제일 사랑하는 것은 나니까, 넘보지 마!"
"이 인간이! 애들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내가 카일의 등짝을 후려치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나도 모르게 그만.
"와아, 황태자 아저씨보다 황태자비 언니가 짱 쎄다!!"
응? 어째서 난 언니고 카일은 아저씨니? 아직 아저씨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닌데, 불쌍한 카일!
"그럼, 이 황태자는 황태자비님께 묶여 있는 몸이란다. 그러니 다들 황태자비께 잘 하렴."
"네에!!!"
아이들을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나중에 우리 아기들이 태어나면 이렇게 자상하게 잘 놀아 주겠지?
나는 그런 내 남편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마차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머, 황태자비께서는 세이렌과 닮지 않았니?"
"엄마 미쳤어? 어딜 봐서 저 곱디고우신 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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