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녀를 닮은 눈빛.
2018.07.17.
테일러경이 제 여동생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내게 질문을 했다. 쯧쯧. 그러게 왜 여동생을 그렇게 과보호하고 그러셨대요? 그러는 와중에 자신에게 푹 빠진 제 연인에게 웃음 짓는 것을 잊지 않는 테일러였다.
"아직 아바마마의 명이 거둬지지 않은 상태라 황궁에 칩거 중이에요. 보고하러 온 아이들의 말로는 별다른 접촉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에이린과 유리아의 표정이 굳어들어갔다. 흐윽. 너네는 직접 만나지는 않잖아. 나는 맨날... 찾아오는 아이들 보는 게 얼마나 힘들다고!
검고! 크고!! 날아다닐 때도 있고!! 흐윽. 날 잘 따르는데, 정말 힘들다고!
때려잡아 죽일 수도 없고!!
"그런데, 측근 시녀들의 외출이 잦아서 예의 주시 중이에요. 외부 감시는 카일이 하고 있고요."
"이중, 삼중으로 감시하고 있어. 아무래도 영지로 내려간 콘스탄트 공작이 수상해서 말이지. 그림자군의 잔당들도 염려되고."
"그 흑마법사는 아직도 입을 닫고 있답니까?"
"마탑주가 일을 못하는 것 같아요. 흐음."
황 후쪽이 조용한 것이 사실 더 무서웠다. 곧, 그때 잡혀들어간 황후파들의 재판이 줄지어 예정되어 있었다. 그들의 재산은 모두 동결되어 있었고, 반역죄로 가족들도 연좌되어 감금 중이었다.
판결에 따라 그 가족들은 평민이 되거나 노역을 살게 되겠지.
그들의 처벌을 앞뒀는데도 불안한 것은 오히려 얌전히 자숙하고 있는 황후 때문이었다.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으니 원...
"너무 걱정스러운 얼굴 하지 마. 결국에는 악인들은 자멸하고 파멸하게 되어있으니까."
"맞아요. 누님, 그리고 우리가 철저히 준비하고 있으니 더 이상 당하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는 비 전하. 이제 정령의 딸이 되셨으니 변화가 있으시면 알려주십시오."
윽, 정령의 딸. 그거 뭐, 이름뿐인 정령의 딸이라서...
정령들에게 인정을 받고도 여전히 나는 정령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정령의 딸이면 정령을 언제든 만날 수 있어야 할 것 같은 이미지잖아. 하지만 정령 소환해봤는데 턱도 없었다.
오전 내내 연습했는데 안 됐다. 그래서 그럼 계약이라도 할까 했더니, 카일이 나는 마나가 없으니 생명력을 쓰게 될 거라고 펄쩍 뛰어서 못했다.
"뭐, 생길 것 같진 않지만 특별한 변화가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줄게요."
내 어색한 미소를 본 플로랄 영애가 말을 돌려주었다. 충복이 이래서 좋은 거구나.
"다음 주에 있을 아카데미 기공식은 두 분 전하가 함께 하시는 거죠?"
"응. 그러려고."
"탄생연 때처럼 꽃 쇼 보여주실 거죠?"
"어? 글쎄? 굳이..."
게다가 요즘은 말이야, 밖에 나가는 게 무서워서... 하하. 분명 또 사건 사고가 기다릴것 같아. 불안해...
이제 후작부인의 이혼은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다. 몬테 공작가는 비스 후작가에 상당한 배상금도 물러내야할 처지가 되었다.
아니 기사 가문이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영지전을 치르지 않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 상황이었다.
카일과 황실은 몬테 공작가의 죄를 묻기 위해 일부 영지를 비스 후작가에 떼어주라 명할 예정이었다. 그러면 이름은 공작이지만 후작가문보다 못한 영지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곧, 공작의 지위를 내어놓게 되겠지.
몬테가의 몰락...
그러면 곧, 어머니를 세상에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배상 규모를 정하느라 이혼 허가서가 내려지는 것이 미뤄지고 있었다.
나의 대외적인 친모의 사건이기에 나에게도 작은 타격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반역 사건의 재판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혼 허가서가 나가는 날 바로 재판을 열기로 했다.
여론 조작 같아 조금 못마땅하긴 하지만, 나를 위해서니까 뭐, 눈 감아야지. 이런 게 정치라니까 뭐.
정령들이 날 딸로 삼았다는 소문도 널리 널리 퍼졌다. 아니 열심히 퍼뜨렸다. 우리 보좌관은 정말 이미지메이킹의 대가야.
그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아카데미 기공식 전에 한 번 더 카일이 괴수를 퇴치하는데 따라갔다 왔다. 꼭, 그 이유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번에는 키메라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괴수였는데, 정화시키고 보니 정말 귀여운 햄스터였다. 되돌리기 전, 그 커다란 이빨과, 사나운 눈빛은 정말 상상이상이었다.
절레절레. 나름 힘들었다.
"키메라 외에 괴수는 왜 생겨요?
"정령수가 건강하지 못해서, 그리고 인간들이 만든 죄악의 흔적이 우연히 동물들에게 전염되었대."
흐음. 그런데 정령들은 죄 없는 괴수들을 죽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거야? 쯧!
"정령의 여왕이 얼른 돌아와야겠네요. 그런데 정령의 여왕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봐요? 정령들이야 영혼의 색으로 알아본다지만."
"너 같은 신비한 힘을 지녔거나, 아, 맞다. 정령들의 진짜 이름을 안다고 했어. 정령의 여왕은 그들과 계약하지 않았지만 진짜 이름을 알기에, 언제든 소환 가능하댔어."
오오, 진짜 이름을 불러주면 뿅 하고 나타나는 거야? 그럼 생명력도 안 쓰고 정령을 부를 수 있는 거구나.
"나한테는 진짜 이름 알려주지 않을 거래요? 딸이라면서 정령들이 해주는 것이 없네, 쳇."
"정령수 살려주면 생각해 보겠다던데?"
체에에엣,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차별쟁이들. 더럽고 치사해서 안 부른다! 두고 봐. 내가 정령의 여왕을 먼저 찾아서 정령들이 얼마나 못됐는지 다 이를테닷!
나 뒤끝 있는 황태자비라고!! 너네랑 계약 안 해!!
"정령수에게 힘을 주는 거, 나중에 다시 시도해 봐야 하나?"
"다시 가봤을 때도 실패했잖아. 괜히 거대한 힘 모았다가 그거 감당 못해서 쓰러질 뻔했는데, 무리하지 마."
어제 오랜만에 정령계로 가서 정령수 치료를 시도했다가 힘만 모이고 전달이 안 돼서 결국 넘치는 자연력에 코피만 흘렸다. 이번에는 너무 힘이 넘쳤다고나 할까?
지난번에는 힘이 모자라서 안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때도 어제도... 흠, 누군가가 가로막는 느낌? 본능적인 거부감? 그런 것이 있었다.
정령들도 실망이 크다고 했다. 얼른 여왕을 찾아줘야 할 텐데... 아니지, 여왕이 돌아올 수 있게 정령들 성격 개조를 해야지.
"그나저나 이렇게 구해줄 때마다 애완동물들이 늘어나네. 황궁 정원이 넓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윽, 이번 꼬꼬마님도 쫄래쫄래 날 따라왔다. 매번 이럴 것인가? 일단 황궁에서 알아서 살라고 정원 아무 곳에나 풀어 놨는데, 독수리랑 도마뱀은 만월궁에서 멀리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얘, 너는... 음, 태양궁에 잠입해서 살자."
거기 식량 창고 위치 이미 파악해뒀어. 먹을 것 많다더라. 지금 열심히 일해주는 아이들은 좀... 하하하. 황후에게 특별한 방문자가 있을 때만 대화 내용 듣고 떠올려주면 되는데.
"찍!"
햄스터가 좋다며 격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 냈다. 녀석, 귀엽네.
카일도 내심 내가 매번 보고하러 오는 아이들을 보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다. 게다가 벌레류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중요 정보원의 역할은 수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햄스터는 비교적 영리하고, 사람 말도 잘 기억하니까.
"내가 태양궁 가서 다른 동물들이 널 해치지 못하게 단도리를 하고 풀어줄게."
벌레 떼들이 질투하지 않아야 할 텐데.
돌아가는 길에 만난 제국민들은 우리를 보고 큰 환호성을 터뜨렸다. 중간중간 정령의 딸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우리의 보좌관께서 열일한 듯 했다.
예전에 카일과 갔던 디저트 가게에 들러 내가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와 다크쇼콜라 케이크, 티라미수, 거기에 머랭 쿠키랑, 어... 그니까 한마디로 가게를 털러 왔다.
마차에서 내린 뒤 가려고 하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트 중이십니까?"
"볼라드 공작, 오랜만이군."
"오랜만이에요. 헬레니아는요?"
"헬레니아가 여기서 파는 레몬 무스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해서 직접 사러 왔습니다."
아, 역시 볼라드 공작! 아내가 먹을 것은 직접 사러 오는구나. 이 사람도 타고난 애처가라니까!
"비 전하께서는 점점 명성이 높아지십니다."
"유능한 남편과 보좌관 덕분이죠."
"겸손하시기까지 하군요."
"뭘요, 호호."
"전하, 그런데 말입니다. 루피넬리아와의 국경지역에 난민들이 발생해서 제국으로 들어오려 한다는 소식은 들었습니까?"
남자들의 이야기가 길어 질 것 같았다. 나도 관심이 없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당장 내가 끼어들 수는 없으니까 먼저 가게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중에 카일과 의논해서 혹시 황태자비가 도울 일 있나 찾아봐야지. 왕국민들도 안 됐어. 겨울을 앞두고 내전이라니...
오늘은 어떤 새로운 디저트가 전시되어 있을까? 즐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차에서 내린 곳에서 가게까지는 몇 걸음 되지도 않으니 먼저 들어가야지.
내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호위들 몇이 붙었다. 물론 그중에는 친절한 나의 남동생도 있었다.
"꺄아악!!"
"히이잉!!"
응? 갑작스러운 소동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가게의 마차 대기소에서 큰 갈색 말 한 마리가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타고 있는 여자는...
"비 전하!"
우리 뒤쪽에서 놀라서 크게 외치는 볼라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 눈앞으로 말발굽을 들어 올린 거대한 말이 어느새 다가왔다.
"히이이잉."
"그래, 그래. 이런 길에서 갑자기 달리면 안 되는 거야."
알리페르도, 카일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카일은 놀라긴 했는지 조금 얼굴이 굳었다. 아니 화가 나서 굳었다가 정확한 표현이겠지.
말은 들어 올렸던 앞발을 내리고 내게 푸르릉 콧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콘스탄트 공녀! 무슨 짓이냐, 감히 비를 해치려 한 것이냐?"
말위에 타고 있던 공녀는 크게 당황한 상태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말이 말을 안 들어서 당황했나 봐? 그니까, 달려 나오던 순간 말고, 날 치어야 했는데 멈춰서 당황한 거지?
나에게 달려올 때의 표정을 내가 봐버려서 말이야. 죽일 듯이 달리더라?
에효. 요즘 외출할 때마다 조용히 돌아가는 법이 없네. 오래간만에 카일과 맛있는 것을 먹으며 시간 보내려 했는데.
"카일, 설마 공녀가 일부러 말을 내 쪽으로 몰았겠어요? 승마에 서툴러 말을 잘 못 다뤄서 그랬겠죠. 사실은 이렇게 순한 말인데."
내 목소리조차 듣기 싫은지 입술을 잘근 깨무는 공녀였다. 내가 정령의 딸이라는 소문 못 들었니? 하긴, 내가 동물들과 교감을 한다는 것까지는 모를 테니까.
카일은 말에서 내려오지 않는 공녀의 행태에 화가 났는지 검을 뽑으려 들었다.
"카일, 참아요."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검을 뽑으면 당신 이미지가, 하하.
"공녀, 아직 많이 놀란 것은 알겠는데, 계속 그러고 있으면 공작이 낙향한 것에 대한 원한으로 날 해치려 한 것으로 오해를 받는답니다. 어서 말에서 내려와요."
내 말에 부들부들 몸을 떨던 공녀가 말에서 내렸다.
"창공을 비추는 두 번째로 높은 태양과, 밤하늘을 비추는 작은 별, 두 분 전하께 콘스탄트가의 장녀, 릴리아나가 인사 올립니다."
"일어나라."
우리 남편은 날 해치려는 이들에게 언제나 그랬듯,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그녀를 일으켰다.
카일의 노란 눈에서 쏘아지는 인광은 맹수의 그것보다 날카롭고 소름 끼쳤다.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하라."
"화, 황태자 내외분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피하려다가 그만... 제가 아직 말을 다루는 솜씨가 부족해 황태자비 전하를 위태롭게 할 뻔했습니다."
"일부러 해치려던 것이 아니라?"
카일의 외침에 움찔하는 공녀였다. 흠모하던 남자가 한 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자신하게 냉랭하게 굴고 모욕을 주는 것이 얼마나 괴로울까 싶은 동정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날 해치려고 한 것을 용서해주고 싶다던가 그런 뜻은 아니었다. 단지, 피해가 없었으니 큰 벌은 주지 말아야지.
안 그러면 우리 남편이 아내 때문에 불같이 화내는 팔불출에, 여자한테 휘둘리는 못난 남자라는 오명을 들을지도 모른다고.
"카일, 아무도 다친 이가 없으니 공녀의 실수는 넘어가도록 하죠. 이렇게 많은 이들이 지켜보았는데... 설마, 또 이런 일이 생기겠어요?"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흠흠, 카일의 이미지는 나도 모르겠다. 일단 내 이미지만이라도 챙겨야지. 최대한 자애로우면서도 씁쓸한 얼굴을 지었다.
나는 이렇게 착하고 여린데, 너는 내게 왜 이러니?
"만약,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이번 것까지 묶어서 벌을 받으면 되는 거죠."
마지막 말을 내뱉는 순간만큼은 몸을 살짝 돌려 공녀에게만 내 얼굴을 보여주었다. '까불면 죽어' 라는 나의 서늘한 미소를 덧붙여 주었다.
"전하, 그렇게 하시지요. 제가 오늘 일의 증인이 되겠습니다."
볼라드 공작은 내 표정을 본 것 같았다. 하하하하! 화목한 부부라고 우리 지지해 줬는데, 이중적인 황태자비라고 실망하면 어쩌지?
"자애로운 황태자비가 네 무례를 용서하겠다고 하니 넘어가 주지. 다시 한 번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용서치 않겠다."
카일의 근엄한 목소리에 몸을 떨던 콘스탄트 공녀는 도망치듯 일어나서 사라졌다. 그런데 떠나는 순간... 나를 노려보던 공녀의 눈빛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게는 원망을 넘어선 증오. 카일에게는 집착.
나는 내 아버지를 바라보던 후작 부인의 얼굴이 떠올라 버렸다. 그녀를 닮은 눈빛은 나를 조금 불안하게 만들었다.
화근이 되진 않겠지?
"세이? 괜찮아?"
"아, 카일. 얼른 들어가서 디저트 골라요. 나 먹고 싶은 것 많아요."
"응. 괜찮은 거지?"
"뭐, 더한 습격도 많이 받았는데 이 정도는 무시할 수 있어요."
"미안."
"또, 그런다. 당신이 잘난 탓이긴 한데, 그런 남자를 내 반려로 삼은 내 탓이 더 크니까 미안해하지 마요. 대신 여기 디저트 전부 다 사줘요."
"이걸 다 먹게?"
헤헤. 설마 혼자 먹겠어요? 만월궁 가서 시녀들이랑 나눠먹어야지. 나는 그저 카일에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이것저것 포장할 것과 당장 먹을 것을 골랐다.
역시 사치는 먹을 것에다가 하는 것이 최고라니까. 이건 전부 다 내 살로... 남겠지. 하하하. 밤에 운동 열심히 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