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
2018.07.16.
"랄라라."
"어쩐 일로 다시 수틀을 잡으셨어요?"
"카일한테만이라도 선물하고 싶어서."
"흐으음."
"쳇, 내가 솜씨 없는 것 알고 있으니까 조용히 해줄래?"
에이린이 계속해서 날 공격할 타이밍을 노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네 시누이거든? 나한테 좀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을래?
유리아는 에이린과 달리 포기하지 않고 나를 가르쳐 주려고 했다. 그녀는 훌륭한 선생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제자인 내가 형편없었다.
"아얏!"
"누님, 아직도 수놓는 솜씨가 형편없으신 건가요? 어머니께서 그리 노력하고 가셨는데도 안 되나 보군요."
"비 전하께 자수는 정복 불가능의 영역 같습니다."
"펠, 프리케. 어서 와."
자수 공격은 차마 받아칠 수가 없었다. 팩트는 반박할 수가 없어. 누군가 사교계에서 내게 자수 솜씨로 시비를 건다면 꼼짝없이 당하겠군.
콘스탄트 공녀가 자수를 그것밖에 못하냐고 놀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우이씨!! 어떡하든지 성공하고 만다. 그전에 입단속을 해야지.
"내가 자수를 못 놓는다는 것은 철저한 대외비로 유지해줘. 나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니까."
다들 웃음이 터졌다. 나는 프리케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한때 내 첫사랑일까 하고 오해했었는데.
미안하다. 내 오해 때문에 내 남자가 널 괴롭혔어. 크흑. 마음의 빚이 또 늘었어. 그러니 빨리 짝을 지어줘야지.
그리고 알리페르. 많이 수척해진 듯했다. 그래도 연인을 보니까 얼굴에 꽃이 피긴 하네.
에이린, 내 동생 잘 부탁해.
"오랜만에 이렇게들 모였으니까 우리 다 같이 후원에서 티타임 할까? 이번 주 아니면 앞으로 추워서 야외에서는 티타임이 힘들 것 같은데."
"좋아요."
에이린이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아도 싫지 않은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프리케 쪽을 살짝 돌아보다 얼굴 붉히는 모습이 귀엽네.
"곧 플로랄 영애도 보고할 것 들고 오기로 했으니까, 테일러경이랑 카일도 부르자."
"그 깐깐한 보좌관은요?"
프리케가 어쩔 거냐며 물어왔다. 윽, 커플끼리 노는데 루카스가 끼면... 좀...
그렇다고 자기만 빼면 또 삐칠 텐데.
"다들 주변에 루카스에게 소개할만한 여자 없어?"
"글쎄요."
다들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나도 딱히...
도대체 왜 루카스는 인기가 없냐고!! 차기 황제의 최측근이고, 능력 있고, 집안도 좋고, 인물도 뭐 그 정도면 역겹지 않고! 좀 몸이 비실하니 부실하게 생겼지만. 흠, 이게 문젠가?
"좀, 찾아봐. 노총각 히스테리인지, 우리 카일을 마구 괴롭힌다고!"
다들 알겠다고는 하는데 믿음이 안 갔다. 왜 다들 무심해 보이냐.
일단 카일에게 기별을 넣어 두고 우리가 먼저 후원으로 갔다. 바람이 확실히 많이 차가워졌다. 혹시나 추울까 작은 화로를 준비했다.
"엣헴. 내가 불붙여 볼게."
사실 황족이 할 일은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었다.
한편 내 말에 프리케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능해? 괜찮겠어? 하는 날 염려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진 표정이었다.
염려하지 말게나!
열심히 부싯돌을 튀겨서 불을 붙였다. 그리고 열심히 후 불었다. 카일과 몰래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작게 튀어 오른 불씨는 불쏘시개로 준비한 지푸라기로 옮겨갔고, 나의 숨결이 더해져 점차 큰 불꽃으로 변해갔다.
드디어 크게 퍼진 불꽃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카일에게 칭찬해 달라고 해야지.
"비 전하, 이건…?"
"헤헷, 가족들이랑 카일 덕분에 불꽃 트라우마를 물리쳤다는 사실!"
프리케가 날 보고 마치 잘 키운 여동생을 시집보낸듯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가 대단하긴 하네요. 비 전하가 쉽게 못 벗어날 고통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정말 걱정 없이 가도 되겠네요."
또! 떠난다는 소리!!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말리고 싶었다. 옆에서 유리아도 크게 실망하는 표정이잖아.
"어딜 가려고? 유리아 두고 가지 마."
프리케는 유리아를 잠시 쳐다보았다. 어멋, 그 사이 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네, 있었어! 지레짐작으로 한 말이었는데! 표정이 살짝 흔들리는 거 나 다 봤어!
"제, 모국의 백성들이... 너무 힘에 겨워합니다."
프리케의 낮은 음성에 고통이 진하게 베여있었다. 자신을 버린 나라인데, 그래도 걱정하는 거야?
관심 없다고 하더니 그런 것만은 아니었나 보았다. 루피넬리아인가 뭔가! 왜 미친 왕자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느라 백성들 괴롭히는 거야??
프리케의 발목을 잡아온 나이기에, 말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리아가 저렇게 슬퍼하는 표정인데...
"지금 무작정 떠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세력도 없는 주제에? 괜히 그 상태로 왕권 다툼에 나섰다 비명횡사라도 하면 나의 비가 슬퍼한다고."
카일!!
"나의 비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 중 하나가 아닌가? 그냥은 못 보내지."
카일, 역시 내 남편!! 어쩜 저렇게 예쁜 구석뿐이야라고 말하기엔, 나 원 참. 분명 내가 아직도 프리케를 케이로 알고 있었다면 그를 당장 떠나보내 버렸을 것이다.
속셈은 뻔히 알지만, 뭐. 내가 늦지 않게 기억을 찾았으니 봐주자. 덕분에 프리케를 도울 수 있게 되었잖아.
"지금 루피넬리아의 상황이 상당히 좋지 않아. 둘째 왕자가 드디어 반란군을 모아서 왕위 찬탈을 시작한 모양이더군."
"으..."
"프리케, 자네 마음은 알지만, 지금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네."
괴로워하는 것을 보던 테일러도 거들며 말렸다. 내가 생각해도 맞는 말이었다. 지금 섣불리 덤볐다가는 꿈을 이루기도 전에 희생될 것이다.
그리고 프리케마저 희생된 후 그 미치광이 2왕자가 왕이 된다면 손쓸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 사이 희생되는 사람들은 더 늘겠지.
"왕위 찬탈 중에는 일단, 일반 백성들의 피해는 늘지 않을 걸세. 그 사이 두 왕자들의 불만세력을 은밀히 모으지. 다행히 왕국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은밀히 접촉한 귀족들이 있거든."
"사실입니까?"
"그럼. 게다가 거물급이고. 내가 자네에게 세이의 모친을 구해주면 선물을 준다 하지 않았나?"
아, 내 남편. 그래도 착한 남자였어. 그때 이미 도와주기로 마음먹었구나.
"유리아, 걱정 마."
나는 유리아의 손을 꽉 잡고 위로해 줬다. 나를 돌아보는 유리아의 눈에 눈물이 글썽했다.
"비 전하, 저... 프리케경을 따라갈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어? 그건."
나 말고 저기 저 남자한테 허락받아야지.
"유리아!!"
"영애!"
테일러경은 자신이 아끼는 여동생의 돌발 발언에 깜짝 놀라 큰 소리로 외쳤다. 프리케도 놀란 듯했다.
"나야, 유리아가 프리케를 곁에서 보살펴주면 좋지만... 힘든 길이 될 것 같은데. 네가 고생하면, 네 오라버니도 속상해할 거야."
"하지만, 이대로 보내면, 프리케님은 절 잊고 분명 왕국의 여인과 이뤄질 거예요. 지금도 온전히 마음을 열어주지 않으니... 차라리 정략혼을 하시겠..."
"영애. 나는 사랑 없는 혼인은 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가장 부러워 하는 게 여기 황태자 부부이신지라."
오오. 내 친구! 하긴, 우리 부부가 좀 부럽긴 하지, 엣헴.
"그리고 지금은... 사랑놀음 같은 것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
헉!! 야! 이 나쁜 놈아!! 여자를 울릴 작정이냐? 유리아는 애써 용기내서 따라간다 한 건데!!
다들 프리케의 말에 갑자기 분위기가 얼음이 되었다. 아무도 섣불리 말한마디도, 숨 한모금도 내뱉지 못하는 정적이 흘렀다.
"제가, 목표를 이루는 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릅니다. 그때까지 영애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못할 짓..."
"기다릴게요. 아니, 함께 할래요. 저도 아직 부족하지만 검을 다루는 여기사가 한때 꿈이었고! 검이 아니더라도 오빠가 다칠 때마다 치료한 경험도 많고, 쓸모 있을 거예요."
우와, 우리 유리아 멋지다. 나는 어린 시절의 세이와 케이가 떠올랐다. 케이도 그렇게 떠나면서 세이를 위험하다며 밀어냈었지. 그리고, 둘은 생각한 것보다 오랜 시간 떨어져서, 멀리 돌아서야 만났잖아.
"영애. 제가 가려는 길은 너무 위험합니다."
프리케는 끝내 유리아를 거절하려고 했다. 표정을 보니 자기가 좋다는 유리아가 싫진 않은 것 같은데.
남의 연애사에 내가 끼어도 될까?
"저기, 프리케? 음... 기다리게 하는 건 좋지 않아. 우리를 보면 알겠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맞아. 그건 나도 동감해. 그때 차라리 내가 세이를 데리고 환궁했다면, 세이가 기억을 잃거나 마음을 다치고 날 잊어버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겠지. 나는 그게 제일 후회되네."
카일이 날 은은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쳐다봐 주었다. 우리는 또 주변 사람 의식하지 않고 서로에게 뜨거운 눈빛을 쏘았다.
"어머! 설마!!"
"누님, 역시 매형이 케이였던 겁니까?"
"헤에, 응. 맞아."
"두 분은, 우와, 정말, 천생연분이시네요."
다들 호들갑인데 비하여 프리케만 표정 변화가 없는 것 보니 이 녀석은 알고 있었나 보군.
"아무튼 프리케. 음, 나는 네가 유리아에게 호감이 있다면, 두고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힘들 때 곁에서 위로해주고 지켜주는 든든한 이가 있는 것이 더 좋을 거야. 분명 네가 위험한 길을 갈 예정이니까 고생은 하겠지만,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고생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나 고생 안 시킨다고 놔두고 갔다가 후회한 우리 남편의 과거를 답습하진 말았으면 해.
"뭐, 그런데 테일러경이 여동생을 내어줄 수 없다고 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프리케경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습니다."
"그래, 그래. 내 아내의 친우고, 내 충신의 여동생인데, 둘이 힘들지 않게 도울 테니 걱정 말고 함께하라고. 진도도 팍팍 나가고, 기왕이면 혼례도 제국에서 얼른 치르고 가면 좋고."
저거 마지막 말이 진심인 것 같다? 여전히 경계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프리케를 빨리 유부남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단 말이야. 귀여운 남자 같으니.
"그것도 좋네요. 내가 성대하게 혼인 치러줄게. 하자!"
아직, 둘이 손도 못 잡아 본 것 같은데 우리가 너무 진도가 빨랐나? 하하하. 둘의 얼굴이 붉어진 것이 보기 좋았다.
곧 루시엘라도 합류해서 우리는 하하호호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루카스도 초대하긴 했는데, 멤버를 듣고는 오지 않겠다고 했다. 커플 속에서 외롭게 혼자 쭈굴하게 앉아있고 싶지 않다 했다나?
흠... 내가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루카스님 벌받은 거예요. 간택연때 카일이 나 알아볼 뻔했는데 잘못 알려준 벌인 것이 틀림 없다는.
그러나 불쌍하니 어디서 짝을 구해보자. 에효. 아, 여기서 불쌍한 것은 노총각 히스테리를 부리는 부하에게 당하고 있는 내 남편을 말하는 거랍니다.
"루시엘라, 테일러경이 잘해줘요?"
"네에…"
어머 얼굴 빨개진 것 봐. 이쪽 커플도 후끈후끈 진도 잘빠지나 봐?
남자들이 루피넬리아의 정세를 논의하는 사이 여자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제 일을 존중해 주는 분이라서... 게다가 다정하시고..."
테일러경 듣고 있구나. 힐끔힐끔 눈치 보기는!
"오라버니가 다정하다고요? 말도 안 돼!"
유리아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소리쳤다. 표정이 얼마나 어마무시했냐면 곧 이마에 뿔이라도 솟을 지경이었다.
"저 인간이 어릴 때 날 얼마나 괴롭혔는데요. 인형놀이하면 인형 들고 도망가고, 자수 놓고 있으면 어느 놈 주는 거냐며 찢고. 밤에 심각하게 할 이야기 있으니 자기 방에 들리라고 하더니 불 끄고 나가라고 하고. 디저트가게에서 사온 케이크 먹고 있는데 지가 다 처먹고!!"
음... 저런 것이 남매의 진정한 모습인가? 알리페르와 나는 저런 남매가 아니라서 다행이구나.
스타티나에게는 저랬으려나? 그것도 나름 추억일 수도 있긴 하겠다.
"어머, 테일러님은 어릴 때 개구쟁이였군요. 귀여워요. 호호!"
사랑의 콩깍지가 씐 사람은 무서운 법이지. 루시엘라의 말에 유리아의 표정이 썩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유베르 영애와 비스 소후작님은 언제 혼례를 올리실 거예요?”
"아, 비스가의 문제가 수습되는 대로 청혼서를 보낼 거라고 했어요."
오오, 우리 동생! 드디어 장가가는 것인가? 스타티나보다 먼저 가겠네! 스타티나도 얼른 시집가게 황후랑 몬테가를 다 치우고 데려와야겠어.
"내 허락 없이는 둘이 결혼 못 하거든?"
괜히 시누이의 심술을 부려보았다. 그런데 어째 아무도 안 믿는 듯했다. 쳇. 너무 착하게 살았나. 악녀처럼 보이고 싶었는데.
"비 전하께서 화려한 혼례식 치러 주실 거죠?"
루시엘라가 웃으며 물어왔다.
"내게 남는 것이 돈이니, 얼마든지. 셋 다 시집갈 때 내가 팍팍 지원해 줄 테니까 사랑하는 사람들 마음이나 꽉 잡아. 알았지?"
"네."
"감사해요."
"비 전하, 오늘 정말 감사해요."
유리아가 특히 고마워하며 울먹이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유리아. 프리케의 어디가 좋아?"
"잘생겼고, 말도 진중하고, 매너도 있으시고. 무엇보다 저희 오라버니보다 세잖아요. 황태자께서는 강하지만 짝이 있으셨으니까. 저 평생 시집 못 갈 줄 알았거든요."
어? 그게 다니? 하하하. 도대체 테일러, 저 사람 여동생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킨 거야?
저러니 오빠한테 질린 거지.
"저기, 유리아. 지금껏 연회에 파트너가 테일러경이었어?"
"네! 약해빠진 놈이 제 에스코트를 어찌하냐면서 제 파트너들 위협해서 떨궜었어요."
하하하. 유리아가 프리케랑 목숨 걸고 떠나려는 이유를 알겠네.
"어머, 여동생을 지키는 기사 오라버니라니 정말 멋져요!!"
저기 저 시누이와 올케, 잘 지낼 수 있겠지? 유리아의 질린 표정과 사랑에 빠진 루시엘라의 표정은 정말... 웃겼다. 푸하하.
이런 시간 자주 가져야겠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짝을 찾고, 이렇게 나처럼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구나.
"참, 비 전하, 요즘 황후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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