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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91화 (91/126)

91화. 다시 만난 우리. (3)

2018.07.13.

"기억을 지우는 것이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너무 큰 충격을 받거나, 삶을 끝내고 싶은 사람이 하는 방어기제 중 하나라고 합니다. 저도 정신계는 잘... 하지만 확실한 것은, 기억이 한꺼번에 돌아오면 버티지 못한다는 겁니다."

"버티지 못한다고?"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야 버티겠죠. 그런데 기억 지운 사람의 멘탈이야 빤한 것 아닙니까? 게다가 힘들었던 기억이 한꺼 번에 돌아온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게는 형님의 죽음. 그것이 제일 힘든 기억이었다. 그것이 사라졌다가 갑자기 동시에 떠오른다면? 괴롭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세이는?

그러고 보니 세이는 며칠 사라졌다 돌아온 날, 엉엉 울면서 내게 매달렸었다. 그때 그 이야기를 더 주의 깊게 들을 것을…!

"옆에서 과거의 일을 하나씩 알려준다면 어떻겠나?"

"흠... 두 가지 반응이 있지요. 천천히 인지하면서 기억이 되살아 난다면 부작용 없이 기억을 되찾겠지요."

희망이 있었다. 케이를 그리워하고 기다린다 했으니,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기억을 찾으면 될 것이다. 처제가 황태자비 자리를 바꿔치기하는 것에 성공하면 그때 다 말해야겠어.

"그런데 혹시 그 이야기가 도화선이 되어 기억의 어느 곳을 자극하게 되면 말이죠. 자극을 받은 부분부터 폭발적으로 기억이 되살아 날 수 있습니다."

"뭐라고? 그렇다면?"

"같은 일이 일어나겠죠. 혼란으로 인한 정신착란? 특히나 그 기억에 대한 고통의 강도가 클수록 힘들어질 것입니다."

황궁의가 떠나고 나는 한참이나 혼자 고민했다. 세이가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까? 두 손으로 내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이럴 줄 알았다면 돌아오지 말고 세이를 데리고 이리저리 여행이나 다니며 함께 살 것을.

뭐 하러 황태자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이곳 황궁에서 발버둥을 쳤단 말인가? 그 아이에게 가장 높은 여인의 자리를 주기 위해서? 그 사이 그 아이는 고통받고 망가져 버렸는데?

나는 다시 몰래 비스 영지로 갔다. 세이는 오늘도 목장에서 양들과 뛰어놀고 있었다. 한참을 즐겁게 뛰어놀던 세이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공허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알비, 아르세이아가 황태자에게 시집가면, 후작 부인이 더 이상 날 괴롭히지 않겠지?"

"멍!!"

"어머니 보고 싶다. 그리고... 케이도."

케이를 부르는 순간 몸이 움찔하면서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검은 머리의 비밀 호위라는 놈이 나타났다.

"렌, 우리 오늘 뒷산에 올라가서 과일 따자."

"어? 갑자기?"

빙글빙글 웃던 놈은 억지로 세이를 끌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혹시나 세이에게 나쁜 짓을 할까 염려되어 멀리서 미행하며 뒤쫓았다.

비밀 호위라는 놈은 저택 쪽을 흘끗 거렸다. 한참을 산에 오른 뒤, 놈은 나무 아래에서 쉬고, 세이는 다람쥐들에게 부탁해 과일을 따고 있었다.

저택 쪽에는 손님이 왔는지 커다란 마차가 보였다. 그리고 저택 쪽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세이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에 그 소리가 들렸다.

"그 저주받은 년을 가만두면 안 되겠어."

기감을 최대한 끌어올려서 내용을 확인했다.

"그년이 황태자의 관심을 끌었다더구나. 화근이 될 수 있으니 그냥 두면 안 되겠어."

세이에게 벌이려는 낯 뜨거운 짓이 들렸다. 감히, 내 소중한 세이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세이, 나 잠깐 과일 담을 자루를 잊었어. 내려갔다 올게."

남자는 세이를 두고 급히 내려가더니 검을 뽑아들었다. 일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급히 정령의 도움으로 기척을 숨기고 세이 곁으로 갔다.

"비스가의 사용인으로, 가주께서 아끼는 비스가의 장녀를 해치려 하느냐?"

남자가 세이를 해하려는 자들을 혼내는 소리가 들렸다. 인원이 제법 되는데, 도와줄까? 놈과 실프를 몰래 보내 그 녀석을 엄호해 주었다.

그리고 세이를 함께 지켰다.

"프리케! 뭐야 너!!"

"미안, 미안. 참, 저기에 다친 토끼가 한마리 있던데?"

놈은 세이가 저택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이리저리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후작이 저택을 방문하자 그제서야 세이를 데리고 내려갔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직접 나서서 지켜주지도 못하고, 이름을 불러주지도 못하는 내가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처제의 계획을 완전히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형부. 일단, 국혼 3개월 후에 절 남부 왕국으로 도피 시켜주세요."

"제국 내에 머무는 것이 낫지 않겠나?"

"아뇨, 제 어머니도 외숙도 찾지 못하게 꽁꽁 숨어야 해요. 그리고 언니를 형부께 보내드리는 일인데, 저도 보답을 받아야죠? 남부 왕국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어요."

나를 계속 형부라고 지칭하는 것이 기분 좋았다.

"아버지께는 몰래 독대하셔서 허락받으셔야 할 거예요. 언니를 무척 아끼시거든요. 언니가 오해하고 아버지를 거부해서 그렇지..."

안타까워하는 처제였다. 그리고 내게 후작 설득이 생각보다 어려울 것이라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때는 몰랐다. 후작이 그렇게나 옹고집일 줄은...

"말도 안 됩니다. 첫째의 신분을 속이고 황궁으로 데리고 가신다니요. 그리고 둘째는 외국으로 보내신다고요? 절대 안 됩니다. 차라리 제 목을 베십시오."

가짜 국혼을 치르고 얼마 되지 않아 후작을 불러다가 말을 꺼냈는데 한 번에 거절당했다.

처제는 지금도 제 언니의 평소 모습을 흉내 내느라 글씨체도 바꾸고, 하기 싫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후작의 둘째 여식은 이복 언니의 행복을 위해 저리도 애쓰는데 후작은...

하지만 내가 약자였다. 세이를 얻기 위해서니까...

후작에게 대련을 청하며 내기를 하자고 했다가 외면당했다. 혹시 영지가 더 필요하냐고, 공작 위가 필요하냐고, 이권은 혹시 필요 없는지 이것저것 다 이야기했지만 전부 거절당했다.

심지어 장녀에게 청혼서를 보냈는데 차녀를 보낸 것은 황족 기만죄라고 협박도 해봤지만 안 통했다.

"쯧쯧, 전하, 제 아버지가 겨우 찾은 딸을 겨우 그런 것에 넘기겠어요? 진심을 보이세요. 그러다 아버지가 언니를 꽁꽁 숨길지도 몰라요."

처제의 조언에 밤새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후작을 한 번 더 찾아갔다. 구구절절 세이와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어째서 내가 세이를 필요로 하는지, 내가 어떻게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지...

분명 마음이 흔들린 것 같았는데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처제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계획대로 도망치고 말았다.

"전하! 저는 허락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저지르시다니요."

"후작..."

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애원했다.

"절대로 그대의 큰 딸을 외롭게 하지도, 아프게 하지도 않겠네. 세이에게 케이에 대해서 듣지 못했나? 그 아이도 날 그리워하고, 나도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어."

후작의 눈빛이 다시 크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래, 이거지. 나는 황족의 체면이고 뭐고 다 벗어던졌다.

"내 그대와 정령들에게 맹세하지. 내가 세이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면,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겠네. 반드시 행복하게 할 테니 날 믿어 주게."

"전하..."

"그리고 그대의 곁에 남겨 평생 끼고 살 것이 아니라면, 나 같은 신랑감이 어딨겠나? 나는 자네랑 달리 자네의 아내로부터 세이를 지킬 걸세."

내 마지막 말이 그를 크게 자극한 것 같았다.

"믿어도... 됩니까?"

"맹세하겠다 하지 않았나?"

"아니요, 제게 전하의 죽음은 필요 없습니다. 제 딸이 힘들어하면 언제든 돌려보내 주십시오."

"약조하지."

마지막 약속은 하는 게 아니었다. 후작이 두고두고 써먹을 줄이야!

아무튼, 후작의 허락하에 작전대로 순탄하게 세이가 내 품으로 오게 되었다. 세이는 처음 날 만났을 때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대신 하얀 강아지만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내가 곁에 있으면 친구라던 시녀와 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해서 다른 일이 있는 척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래서 세이와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해 아쉬웠다. 친해지지도 못했다. 그래도 돌아가면, 이제 매일 함께니까 황궁에 들어갈 때까지만 참자.

그런데 처제는 의외로 내게 세이에 대한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고 떠났다.

게이트로 가기 전날, 세이가 자신의 애완견이랑 산책을 나왔을 때의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나는 자리를 비운 척 멀리서 세이를 보고 있었다.

너무 멀리가진 않았다. 세이가 쫑알쫑알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 내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이의 시녀 손에 들린 마법등이 꺼졌다. 그리고 뒤돌아선 그녀는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신을 자해하기 시작했다.

"세이!!"

나는 실프를 소환해 날아가듯이 그녀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 짧은 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내가 날아가는 순간에도 세이는 온몸을 떨면서 고통스러워했다.

"전하!"

"유베르 영애, 무슨 일이지? 세이가 왜 이래?"

"비 전하는 불을 무서워하세요. 화재 속에서 죽다가 살아나셔서..."

세이는 이제 숨을 쉬지 못하는지 입만 벙긋하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초점을 잃어가는 눈동자가 보였다.

망설일 틈 같은 것은 없었다. 버둥거리는 몸을 내 품에 가두고 정령들을 불렀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려가는 세이의 입술에 내 입을 포개었다. 그리고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어 주었다. 여러 번 반복하자 점차 세이의 입술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흡도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하아... 하아..."

그런 그녀의 손을 하얀 강아지가 핥기 시작했다. 너도 네 주인이 걱정됐나 보구나.

"알비케라 고마워. 네가... 구해준 거야?"

점점 눈에 초점이 돌아오던 세이는 자신의 강아지를 향해 힘없이 웃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널 구한 것은 나인데, 네 앞에 내가 있는데, 안 보여?

세이. 나야. 케이야.

화재 속에서 살아남았던 고통을 받고 있다니... 불을 본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괴로워하는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황궁의의 말에도 불구하고 가졌던 미련은 완전히 지워져버렸다.

그녀가 날 알아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케이라고 말해 줄 수 없었다. 혹시나 세이가 다시 고통받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네가 아프면 나는 죽을 지도 몰라. 네가 힘든 것보다 차라리 내가 인내하는 것이 나으니까, 난 괜찮아.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입에서 심퉁맞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비는, 그댈 구해준 나는 안 보이나 보군."

저 하얀 털북숭이가 나보다 좋아?

내 목소리에 급히 돌아온 초점이 나를 향했다.

"화... 황태자 전하!"

"이제야 내가 보이나 보군."

파란 눈동자에 가득 찬 내 얼굴을 보자 조금 만족스러워졌다. 많이 자랐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세이는 작았다. 내 품 안에 가두어질 만큼 작은 어깨가 안쓰러웠다.

내 품 속의 세이에게서만 나는 숲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그리고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나는 너무나 지금 이 순간이 행복했다.

그런데 갑자기 세이가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내려달라고 떼를 쓰기에 엄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움직임을 멈췄다. 다행이야, 나 너무 무서워하지 마 세이.

내 품에 안겨있는 모습을 보자 옛 추억이 떠올라 충동적으로 뺨에 키스를 했다.

"뭐, 뭐예요?"

당황하는 세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하하하, 행복해. 그래, 내가 기다렸던 순간들이 이거야. 너와 나, 우리의 소소한 일상. 작은 행복.

억지로 끝까지 안아들고 세이의 막사 안까지 들어갔다. 여기에 더 일찍 들어오고 싶었는데...

아니야, 내일이면 이제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눈을 뜰 거니까. 괜찮아. 게다가 내일은 음...

세이랑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좀 놀렸다. 그랬더니 발끈하면서 내게 씩씩댔다. 조금은 내가 편해졌단 뜻이 아닐까?

"많이 놀란 듯한데 잠이 들 때까지 곁에서 지킬 테니까 이만 누워."

그런데, 그 말에 세이는 멀뚱멀뚱 나만 쳐다봤다. 옆에 있어도 된다는 뜻이겠지? 아닌가?

"아, 아직 옷이 그대로구나. 자 일어나 봐. 내가 갈아입혀줄 테니."

결국 세이에게 쫓겨났다. 쳇. 어릴 때는 내 눈앞에서 잘만 훌러덩 벗더니...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아까 그녀의 입과 볼에 내 입술이 닿았을 때 느낌이 생경하게 떠올랐다.

부들부들하고 말랑한 그녀의 피부가 떠오르자 열기가 오르는 듯했다.

아, 내일 환궁한 뒤의 밤이 너무 기대돼. 미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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