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다시 만난 우리.(1)
2018.07.11.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 눈이 번쩍 떠졌다. 내 옆에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반듯하게 누워 자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틀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새벽녘 하늘보다 더 검푸르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예쁜 노란 보석을 숨기고 있는 기다란 속눈썹. 매끈한 콧날과 턱 선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는 중 발견한 그의 작은 점.
살짝 몸을 일으켜 그의 가슴에 귀를대고 얼굴을 묻었다. 규칙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그의 가슴, 내 귀로 전해지는 느릿하면서도 고른 심장박동 소리가 너무 좋았다.
"나의 왕자님."
"으음, 세이? 벌써 깼어?"
속눈썹이 올라가면서 드러난 반짝이는 보석에 내가 비치기 시작했다.
"잘생긴 내, 왕자님. 이 바보!"
"왜 그래? 이상한 꿈꿨어?"
"어느 바보가 멍청하게 자신을 구해준 은인한테 제 정체를 숨긴다고 형의 애칭을 알려준 꿈 꿨어요."
"세... 이?"
카일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그의 몸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카일이 날 단단히 붙들어 그 꼴은 면했다.
카일은 내 이마에 머리를 맞대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봤다.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기억... 전부 난 거야?"
"응.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요. 내가, 당신 떠나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왜 이리 늦게 온 거예요? 얼마나 기다렸다고."
나의 투정에 카일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나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 음... 7년 기다리게 했으니까 이건 달래주지 않을래.
"미안, 더 빨리 찾으러 갔어야 했는데. 너무 바쁘고 힘들게 지내느라, 그만... 네 애칭 말고는 너에 대한 정보가 나도 흐릿해져버려서... 미안해. 아프게 혼자 뒀던 것, 지켜준다 해놓고 지켜주지 못한 것. 다 미안."
"결국 날 지옥에서 건져낸 건 당신이잖아요. 괜찮아요. 결국에는 이렇게 우리 만났잖아."
나의 케이는, 나의 카일은 결국 너무나 벅찬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 남자의 눈물이라니. 그의 나에 대한 순정이 느껴져 가슴 끝이 찡하니 시려왔다.
"왜 울어요?"
"네게 첫사랑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기억될 줄 알았어. 그게 나인데, 네가 다른 사람으로 구별해서 생각하는 게 속상했어. 다른 놈을 네 첫사랑이라 여기는 게 분하기도 하고. 그래서 다 말할까 하다가도, 네 기억에 혼란이 생기거나 하면 네가 고통받을까 봐... 아, 맞다! 안 좋은 기억들이 같이 살아난 것 아냐? 머리 아프지 않아? 괜찮아?"
역시, 날 과보호하느라 그랬구나. 바보같이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느라 우리 너무 돌아와 버렸잖아요. 더 빨리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는데...
"나, 괜찮아요. 일단 당신과의 추억만 떠올랐는걸요? 당신은 쓸데없이 나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해요. 과보호야."
카일의 눈에 맺힌 눈물을 손끝으로 닦아주었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꼭 잡고 제 뺨을 기댔다.
"동시에 여러 가지 기억이 떠오르면, 정신적으로 혼란이 생겨서 위험하다 그랬어. 기억이 뒤섞여 미쳐버릴 수도 있다 그랬는걸?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바로 말해야 해. 알았지?"
날 잡은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카일은 나를 다시 잃는 것이 정말로 무섭고 싫구나.
어찌 될지 알 수도 없는 일인데... 그 작은 가능성 하나 때문에 답답해하면서도 말을 못 꺼냈다니, 귀여운 내 남자.
"음, 당신이랑 관련된 기억만 조금씩 떠오를 뿐이에요. 다른 기억들은 전혀 아직 반응이 없어요."
"찾은 기억보다 잃은 기억이 아직 더 많은 거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아직 깜깜한 어둠이 더 많았다. 가령 화재사건 때 내가 화를 낸 대상이 누구인지 전혀 떠오르지 않는걸.
"당신이랑의 추억도 일부 밖에 떠오르지 않는걸요."
"절대 억지로 떠올리지 마. 궁금한 것은 내가 다 말해줄게. 큰일 나."
호들갑 떠는 카일의 모습에 꺄르르 웃음이 났다. 나 정말 이 사람에게 많이 사랑받는구나. 이 사람에게 나는 너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음, 듣는 것보다는 내가 스스로 떠올리고 싶어. 분명 당신은 왜곡해서 말해줄 거잖아. 다 자기가 멋진 쪽으로 꾸며 말할게 뻔해."
"세이, 이제 반말 자연스럽게 하네?"
"아... 단둘이 있을 때만 할게... 요."
"지금은 우리 둘만 있거든? 그때처럼 편하게 자연스럽게 지내고 싶어. 그때의 내가, 제일 자유로웠으니까."
"그럼, 카일. 음... 나중에 황후랑 다 정리되고 나면, 우리 추억여행하면 어때?"
"그럴까? 딱 보름, 아니다 한 달만 여행 다니자."
"응! 꼭!"
그때처럼 카일이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다정하고 부드럽게 움직이던 손길에 기대어 눈을 감는데 갑자기 손길이 멎었다. 뭐죠?
"그런데 세이. 도대체 왜 내 머리가 검은색이 되어 버린 거야?"
"아, 당신 처음 발견했을 때, 피랑, 오물이랑 범벅이었잖아. 어두운 데서 봤을 때는 누가 봐도 검은색이었는걸. 좀, 무섭기도 했고. 그래서 머리색이 검은색으로 각인된 것 같아요."
"네가 그 프리케를 계속 케이로 여기는 것 같아서 진짜 속상했었어."
우쭈쭈, 그랬어요? 그래서 그때 의자를 부셔먹었구나. 아, 괜스레 더 의자에게 미안해졌다. 처음에 케이한테 잘생겼다고 왕자라고 하니까 씰룩였던 것도 비웃는 게 아니라 좋아서였구나.
그의 행동이 하나하나 이해되기 시작하자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어쩜 그걸 지금까지 말하지 않고 참은 거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이 누구라고요?"
"나."
"정답!"
나는 카일의 코에 쪽 뽀뽀해주었다.
"참, 카일, 이것 기억나?"
아버지가 주셨던 낡은 오르골의 서랍을 열어 그을린 나무 반지를 가져왔다. 카일은 그을린 흔적에 잠시 눈을 찌푸렸지만 어느새 추억에 잠긴 듯했다.
"나도 아직 가지고 있어."
제 방으로 가서 나무 반지를 꺼내온 카일은 두 개를 나란히 두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넌 반지가 작아져서 못 끼겠네."
"이젠 꼬꼬마가 아니라서요. 그래도 나는 화려한 보석 반지보다 이게 좋아. 케이가, 카일이 날 위해 직접 깎아서 만들어 준 거잖아. 내가 얼마나 많이 쓰다듬었으면 이렇게 반질해졌겠... 아, 당신도 마찬가지구나."
카일의 나무 반지를 쓰다듬었다. 카일의 것도 내 것만큼이나 사람의 손을 타서 표면이 닳아있었다. 그것이 찡하게 아프면서도 가슴 터질 만큼 벅찼다.
우리는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를 매일같이 그리워했다. 각자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채.
그리고 이렇게 같은 시간과 공간을 나누고 있게 되었다.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살며시 노크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날씨가 좋으려나 보았다.
"우와, 예쁘다."
만월궁의 후원에 점차 햇살이 스며드는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밝고 아름다웠다. 이 따스하고 예쁜 광경을 함께 보는 사람이 당신이라서 참 좋아요.
나와 카일은 손을 잡고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창가에 걸터앉았다.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풀들에 맺힌 이슬들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광경을 한참이나 함께 바라보았다.
우리는 누가 먼저 말하기도 전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녀들이 깨우러 올 때까지 서로의 달콤한 입술을 탐하고 탐했다.
서로의 처음도 마지막도 바로 우리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라서 좋았다.
오늘 당신을 제일 먼저 보는 사람도, 오늘 밤의 끝에 당신과 함께하는 것도 나일 테지.
그럼에도 함께하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안타까워 서로에게 더 파고드는 우리였다.
* * * * * * *
"전하, 황태자비를 어서 세우셔야 합니다. 후계가 안정되지 않아서야 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립니다."
내가 20살이 넘은 이후로 귀가 따갑도록 듣게 된 이야기였다. 혼인해라, 후계자를 세워라. 정말 역겨운 소리였다.
"나는, 황태자로서 황권을 더 다질 예정이다."
"전하!! 이미 충분하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나의 반려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들에게 결국 살의를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웃긴 것은 내 반려의 자리를 가장 노리는 콘스탄트 공작과 몬테 공작이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내 형님을 죽인 원수들을 죽이기 전에는 절대 혼인을 치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혼인을 치르길 원하면 그 원흉을 잡아다 바치던가."
자신들의 손으로 황후를 내칠 황후파는 아니었다. 귀족파들은 능력이 모자랐고.
피식, 비열한 웃음이 나왔다.
결국에는 귀족들의 성화와 황제 폐하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간택연을 열게 되었다.
내 반려는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나의 꼬마 요정. 나를 황태자가 아닌, 그저 친구로 봐주던 신비한 소녀.
그 아이만이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고, 그녀의 품이 내 쉼터였다.
"보고 싶네. 잘 지내고 있겠지?"
그 아이는 귀족 소녀인 듯했다. 아마도 신비한 힘 때문에 힘들어 한 것이겠지? 가정에서 학대받고 힘들어했는데, 얼른 내 곁으로 데려와야 하는데... 나는 이제 그녀를 지킬 힘이 충분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보좌관의 능력이 부족한지 좋은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젠장, 보좌관을 바꿔야 하나?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그곳이 비스 영지라는 것, 그리고 세이라는 애칭. 금발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를 찾으러 다니던 사람들이 아가씨라 불렀으니 귀족일 가능성이 높았다.
진짜 이름을 들었었는데, 바보같이 흐릿해졌다. 한 번밖에 못 들은 데다가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여러 번 되뇌었음에도 잊다니 내가 한심했다.
다행히 대강의 나이를 기억하고 있는데, 곧 데뷔를 할 것이었다. 그래서 작년부터 간택연을 열었다. 제발 나의 세이가 귀족 영애가 맞아서 간택연에 나와주길...
첫해 두 번의 간택연에는 그 아이로 보이는 영애가 없었다. 대신 콘스탄트의 멍청한 여인이 계속 내게 들러붙으려 해서 곤란했다.
나를 바라보는 끈적한 시선이 소름 돋게 싫었다. 나의 온전한 몸도 마음도 다 내 꼬마요정에게 줘야 하는데, 어찌나 다들 들러붙는지...
"그냥 한 번 놀아주지 그래요? 전하가 좋다고 죽도록 달려드는데, 나 같으면 좋아라 놀다가 찾으시는 분이 나타나면... 죄, 죄송합니다."
루카스 놈은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 것 같다. 저러다 평생 늙어 죽을 것이다. 내가 노려보자 다시 열심히 찾겠다며 사라졌다.
내심 내가 24이 되던 해의 신년 간택연에는 세이가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세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하나, 귀족이 아닌 것은 아닐까, 혹시 사생아인데 인지를 못 받아 데뷔를 못하는 것일까 온갖 걱정으로 지쳐갔다.
그리고 24살이 되던 해 가을. 나의 탄생연을 또 세이 없이 쓸쓸히 보낸 뒤에 찾아온 간택연이었다.
이번에도 세이로 보이는 영애는 없었다. 한숨을 쉬면서 홀을 둘러보는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어째서?"
평범한 갈색 머리의 영애의 머리에 꽂힌 장미에서 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대지의 기운인가?
나는 홀린 듯이 그 영애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 영애는 내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주변만 연신 살펴댔다.
"저기 세이렌?"
옆의 남자가 그녀를 불렀다. 세이...렌? 하지만 나의 꼬마요정의 이름은 저것보다는 길었는데? 게다가 이 푸석한 갈색 머리가 아니라 화사하고 햇빛에서는 붉게 반짝이는 적금발이었어.
"너랑 춤 안 출 거라니까. 프리케, 응? 왜? 앗!"
그 순간 세이렌이라는 영애와 눈이 마주쳤다. 맑지만 깊은 푸른 눈. 나를 편하게 해주던, 나를 미소 짓게 해주던 소녀의 눈과 쏙 빼닮아 있었다.
어째서 머리색도 다르고 이름도 다른 영애에게서 나의 세이의 느낌이 나는 것일까?
내가 손을 뻗어 장미를 만지려 하자 영애는 움츠러들었다. 세이는 자신의 힘을 숨기고 싶어 했는데...
"혹시…?"
"아르세이아 비스 후작 영애가 들었습니다."
루카스가 급히 내게 보고했다. 현재까지는 내가 찾는 세이와 가장 유사한 영애였다.
최근 사교계에서 그녀와 마주치기 고대하며 쫓아다녔는데, 생각 외로 잘 마주쳐지지 않았다. 황태자와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는 느낌? 피하는 느낌도 있었다.
이번 간택연에 나타나지 않으면 직접 찾아갈까 생각도 했다.
"맞나?"
"예, 모든 면에서요."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혹시나 그녀가 온다면 주려고 했던 가장 싱싱한 장미꽃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애, 나에게 첫춤의 영광을 주지 않겠소?"
비스 영애는 내가 기억하는 세이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나의 요정이 눈앞의 영애가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릴 때보다 많이 자랐지만, 그때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까.
"영광입니다. 전하."
비스 영애는 입으로는 영광이라는데, 아까 내가 관심을 보인 갈색 머리의 영애를 힐끔거렸다. 이런, 세이에게 찍히겠어.
어릴 때 세이에게 입으로 허밍을 한 노래에 맞춰 왈츠를 가르쳐 준적 있었다. 그때 처음에는 계속 내 발을 밟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숙녀가 되어서 춤도 잘 추는구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더 사랑스러운 레이디가 되었어.
"아까 관심을 보이신 영애는 어쩌고 제게 춤을 청하셨나요?"
얼굴이 가까워진 사이 훅 들어온 그녀의 말에 당황했다.
"세, 세이, 화났어?"
"전하, 저는 제 애칭을 허락한 적 없습니다만. 처음 보는 영애에게 허락도 없이 애칭을 쓰시다니, 황족의 자신만만함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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