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사실 내 이름은 말이야.
2018.07.10.
"케이였어요. 지금의 전하께서 어찌나 애칭으로만 불렀던지, 많이 혼났었어요."
아, 뭔가 혼란스러워졌다. 사실 내가 애칭을 알려준 것처럼 케이도 본명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카일이 아주버님의 애칭을 내게 알려준 걸까? 아니면 아주버님이 진짜 케이? 도대체 어느 쪽이지?
으아아악!! 복잡해!! 이 바보 같은 머리야!! 케이의 얼굴을 떠올리라고!! 멍청한 아르세이아. 왜 하필 좋은 기억들까지 잊어버려가지고는!!
잠깐, 그런데 아주버님이랑 나랑 몇 살 차이지? 카일보다 네 살 많았으니까, 나랑 열 살??
완전 도둑, 아니 아니, 아닐 수도 있으니 비난하면 안 돼.
초조해졌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케이가 아주버님이면 어쩌지? 어린 영애들이 읽는 로맨스 소설에도 이런 막장은 없었는데!
더 이상 내가 질문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자 모일라는 잠깐 무엇을 가지러 간다며 나갔다.
잠시 혼자가 된 나는 케이의 머리색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검은색, 그냥 검은색인가? 푸른빛이 아니라 갈색빛이 도는 검은색이었니?
아, 잘 모르겠어. 붉은 기가 돌았 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와중에 푸르러 보이기도 했던 것 같고.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아!
모일라는 내게 황실 족보와 1황자님의 가장 마지막 초상화의 모사본을 가져다주었다.
"전하랑 전혀 다른 이미지죠?"
"응.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해 보여. 카일은 예리해 보이는데."
머리는 확실히 어릴 때 초상화보다 검게 보였다.
다른 이미지의 두 남자. 하지만 묘하게 닮았다. 콧대도, 입술의 인중도 똑같이 생겼잖아.
혹시 당신이 나의 케이인가요? 죄송해요. 기억을 못 해서... 그런데 당신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아주버님이 아니라 카일이 내 첫사랑이었으면 좋겠다.
모일라가 내 침의를 챙겨주고 오늘도 카일을 잘 부탁한다고 하고 초상화 모사본을 들고나가버렸다. 나는 모일라가 나가자마자 카일의 어린 시절 모습을 담은 화첩을 꺼냈다.
작은 화첩들에 담긴 어린 시절의 카일의 모습. 그 중간중간 담긴 아주버님의 어린시절 모습을 다시 보자 점점 마음이 답답해졌다.
뭐야 이게!!
"세이, 뭐 해? 왜 울상이야? 무슨 일 있어? 누가 너 괴롭혔어? 어느 년, 놈인데? 내가 다 죽여줄게."
"왜에, 당신 머리카락은 청남색인 거예요?"
"어?? 내가 문제였어?"
"좀만 더 진하지, 씨이, 바보!!"
내 말에 카일이 당황한 듯 다가오다가 우뚝 서버렸다. 그러더니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자신의 눈가에 대어 보았다.
"싫어? 내 머리색?"
"당신한테 싫은 구석이 어딨어요? 좋아요. 너무 좋고 예뻐요."
"그런데 왜 심통이야? 검은 머리로 염색이라도 할까?"
도망 다니느라 정체 숨기려 염색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요, 싫어요."
"그럼 왜 그래?"
"몰라요."
당신이 케이였으면 좋겠다고!! 내 첫사랑이 당신이었으면 정말 기뻤을 거라고!! 히잉.
나는 날 달래주려고 내 곁에 온 카일을 끌어안았다. 답답해, 심란해.
카일은 투정 부리는 나에게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눈치도 빠른 남자. 여기서 더 캐물었으면 마구 화냈을 건데, 센스도 어쩜 이렇게 좋냐고.
한참 후 카일은 내 이마에 쪽 소리를 내며 키스해 줬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으응. 아마도요."
"나한테 할 말 있는 거지?"
"아주버님 애칭이 케이였다면서요?"
"응. 내가 맨날 케이라고 불러서 혼났었지. 형에게 무슨 말버릇이냐고."
그분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은 민폐일까? 카일의 아픈 구석을 건드리는 걸까?
"혹시, 그분께는 연인이 없었어요?"
"있었을 거야. 유품 중에 증표 같은 게 있었거든."
"누군지 몰라요? 뭐였어요?"
"실로 엮은 팔찌. 누군지는 몰라."
아, 나는 아니겠지? 그런데 아니라고 하기엔 기억이 참... 전혀 없네. 머리를 정말 쥐어박을 수도 없고!!
"왜 그래?"
"네?"
"표정이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잖아. 또 너 스스로 괴롭히고 있는 느낌인데? 나한테 뭐 숨기는 것 있지?"
예리한 인간!
"윽... 아니거든요?"
어쩌면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형님이 내 첫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어떻게 말해요?
그냥 입 닫아야지.
"그냥, 내 첫사랑도, 끝사랑도 당신이었으면 좋겠다고요."
"당연한 소릴 하고 그래?"
"그렇죠? 너무 당연하죠?"
그래, 말하지 말자. 궁금해하지도 말고.
어쩐지 당연하다고 한치의 망설임 없이 말하는 카일을 보니 안심이 됐다.
그래서 그냥 그의 널찍한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비볐다.
"갑자기 아기가 되어버렸네. 괴수들 앞에서도 겁 없던 여장부께서?"
"당신이니까 어리 광부리죠. 내가 누구한테 이러겠어요?"
"당신 어머니나 아버지?"
"하아, 이젠 하다 하다 우리 부모님한테도 질투해요?"
"음, 질투라기보다는, 나한테만 모든 것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지, 뭐."
혼날까 봐 눈치 보는 것도 귀여웠다.
그래 케이가 카일인지 아주버님인지 뭐가 중요해? 내 진짜 첫사랑은, 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상대는 당신이니까.
당신이 내 진짜 첫사랑이야.
이젠 정말 과거 같은 것 억지로 떠올리지 않을래.
카일이 굳이 자신과 나의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고 새로 시작하려고 했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아무렴 현재가 중요하지!!
과거의 인연은 이미 흘러간 것이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고, 함께 만들어갈 인연이었다.
계속 가슴에 부비부비를 하자 카일은 언제 우리가 불태웠는지를 잊고 또 내게 달려들었다.
좋겠다. 당신은, 체력이 좋아서. 나는 이제 지쳐 잘래요.
* * *
오랜만에 꾸는 꿈이었다. 어린 시절의 꿈. 어째서, 이제 떠올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순간에 꾸는 걸까...
"자, 이게 에이야."
"요렇게 그리면 돼?"
"응. 세이는 뭐든지 잘하네. 똑똑해.:
"헤헤헤헤. 케이가 잘 가르쳐주니까 그렇지."
케이에게 받는 칭찬은 기분 좋았다.
나는 케이에게 글자를 배우고 있었다. 펜도, 잉크도, 종이도 없는 깊은 산속에서 이용할 것은 자연들밖에 없었다. 그래서 비둘기가 떨어트리고 간 꽁지깃을 깃펜 삼아 쓰고 있었다. 잉크는 물!
크고 편편한 바위 위에 물에 적신 깃대로 글자를 적으면 곧 글자가 사라졌다. 하지만 아쉽지 않았다. 배우고 싶었던 글이니까.
"이렇게 쓰면 케이야?"
"응. 똑똑해 세이."
"헤헤헷."
마르기 전에 반복해서 이름을 썼다. 또 쓰고, 또 쓰고.
"왜 계속 케이만 쓰는 거야?"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이니까."
내 말에 케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토마토도 아니고 왜 빨간 거야? 그리고 왜 계속 말도 못 하고 어버버하는 거지?
"내가 좋아하는 거 싫어? 왜 화난 사람처럼 얼굴이 빨간 거야?"
"아, 아니, 조, 좋아. 너무 좋아. 네가 좋아한다고 해주면 정말 기분 좋아. 세상이 다 내 것 같아."
"헤헷, 세이도 케이가 너무 좋아. 세상에서 제일 좋아. 케이가 죽지 않고 곁에 있어줘서 너무 좋아."
갑자기 케이가 날 꼭 끌어안았다. 왜 이러지? 그런데 참 좋다.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나.
나는 케이의 품에서 케이를 올려다봤다.
"우와, 케이는 밑에서 올려다봐도 잘생겼어. 왕자님 같아."
"세이, 진심이야? 나 잘생겼어?"
"응응!! 우리 아버지랑 내 남동생이라는 애가 제일 잘 생겼는 줄 알았는데, 케이가 더 잘생겼어."
"내 눈에도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그러니까 얼른 자라줄래? 얼른 커야 내가 잡아먹지."
뭐? 나 키워서 잡아먹는다고?? 나는 후다닥 몸을 비틀어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뭐? 날 잡아먹겠다고?"
"어?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내가 너의 모든 것을 갖겠다는 뜻이야."
"내가 케이 거 되는 거야?"
"응. 나만의 것. 다른 사람들이 넘보지 못하는 서로의 단 한 사람."
"그건... 음, 그럼 케이도 나만의 것이 되는 거지?"
"당연하지."
나는 케이의 말에 다시 그의 가슴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를 꼭 껴안았다.
"그럼 케이랑 나랑 평생 서로의 것이 되는 거네. 좋아. 약속해."
나는 케이를 다시 올려다봤다. 에잉, 뭐야. 케이 턱에 뭐가 묻었네. 닦아야지.
"세이, 간지러워."
이씨, 왜 이리 안 지워져? 내가 계속 거길 손톱으로 살살 긁자 케이도 내게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했다.
"꺄아, 케이!!"
열심히 장난치며 뛰어놀던 우리는 갑자기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에 멈칫했다.
"케이, 수상한 사람들이 산에 오르고 있대."
케이가 갑자기 덜덜 떨기 시작했다. 나는 케이의 가슴 쪽을 들여다봤다.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
"일단 다시 동굴로 가자."
케이를 이끌고 동굴로 들어가서 입구를 식물들로 막아버렸다. 덩굴 사이로 비쳐들어오는 빛 사이로 하얗게 질려있는 케이의 얼굴이 보였다.
"괜찮아. 우릴 찾지 못할 거야."
"나 때문에... 너까지 위험해지면..."
"음... 급하면 내 친구들 부를게. 형제들인데 진짜 강해. 케이 괴롭히는 사람들 다 쫓아내고 혼내 줄 거야."
내가 아주 우쭐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말하자 케이가 피식 웃었다. 진짜인데. 걔들이 지금까지 날 괴롭힌 사람들 얼마나 많이 혼내줬다고. 좀, 과격하긴 하지만.
"고마워. 그런데 형제? 남자들이야?"
"어? 어."
"그럼 됐어. 너는 그냥 내가 혼자 지킬게."
한참 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숨소리조차 죽이고 동굴에 웅크리고 있었다.
"샅샅이 뒤져!"
"놈을 찾으면 바로 죽여도 된다."
케이를 찾는 건가? 설마 케이를 죽이겠다는 거야? 나쁜 사람들!!
조금 괴롭혀도 되겠지? 나는 땅에 손을 짚고 덩굴들에게 부탁했다. 넘어트려달라고. 덤으로 두더지들에게 부탁해 구멍을 팠다.
걸려 넘어져라!! 발목 아작나게!!
나중에 늑대 대장에게 들었는데 신나게들 넘어졌다고 했다. 발목 돌아가서 절뚝이며 하산한 사람들도 있다고.
"세이, 무슨 짓을 한 거야?"
"응? 그게, 헤헷."
나는 케이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러자 케이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막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단해 세이, 정말 멋져."
그런 식으로 우리는 날 찾는 후작가의 사람들과 케이를 쫓는 암살자들을 따돌렸다. 힘들거나 무섭진 않았다.
우리가 꽉 잡은 두 손이 서로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단단하게 얽혀있는지를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다람쥐들에게 과일 따 달라고 하지 왜 네가 직접 올라간다는 거야?"
"케이, 여기 나무 위로 올라가면 얼마나 시원한대! 경치도 좋고!"
나무 위로 올라가려고 낑낑대는 나를 목마에 태운 케이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팔을 뻗어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케이, 올라와."
힘들게 낑낑대며 올라온 나와는 달리 케이는 가볍게 점프를 해서 나뭇가지 위로 올라왔다.
"자! 이거 먹어."
케이에게 사과를 내밀었다. 나무 위에서 맞는 바람은 더 상쾌했다. 우리가 도망자라는 것을 잊을 만큼.
"그런데 케이, 케이는 왜 머리카락도 이렇게 예뻐? 이런 머리색 처음 봤어."
"나는 네 머리카락이 더 예쁜데. 햇살보다 네 머리카락이 더 반짝거리잖아. 금빛으로, 때로는 루비처럼 반짝반짝."
"아니야. 네 머리가 더 예뻐, 머릿결도 비단 같고. 처음에 봤을 때는 거무죽죽해서 무서웠는데, 너무 예뻐."
그래, 처음에는 말라붙어버린 피 때문에 거무죽죽한 것이 괴물 같았다. 게다가 어두운 동굴에서 봐서 더 무서웠어. 피비린내랑, 으윽.
"네 덕분에 다시 내 머리색을 찾았잖아. 물로도 잘 안 씻겼는데. 세이는 볼수록 대단해. 어떻게 짓이겨서 물에 비비면 거품이 나는 풀까지 아는 거야?"
엣헴. 식물 중에 내가 모르는 게 어딨겠어? 케이는 언제나 나를 춤추게 만들었다. 그가 해주는 칭찬들은 가슴 어딘가가 간질간질한 게 재치기가 나올 듯 기분 좋았다.
계속 이상한 힘을 가진 아이라고 구박받다가 케이에게 칭찬을 받아서일까?
"나, 머리 쓰다듬어줘."
"뭐야, 세이, 아기였어? 여장부인 줄 알았는데 어리광을 부리네?"
"피, 그래서 내가 싫어?"
"하하. 아니, 그래서 더 좋아. 내 앞에서 거짓 없이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다 말해줬잖아."
"어??"
아닌데, 음. 내 이름. 거짓말했는데... 어쩌지? 케이는 내가 거짓말하지 않아서 좋아하는 건데 나중에 내 이름이 다른 것을 알면 실망할 거야.
"저기, 케이. 나 너한테 속인 게 있는데... 내 진짜 이름은 아르세이아야."
"아, 예쁜 이름이네. 너랑 너무 잘 어울려."
"내가 이름 속인 것, 화 안 났어?"
"왜 화가 나? 나도 네게 솔직하지 못한게 있어. 음, 사실 내 이름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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