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카일의 과거사를 캐보자.
2018.07.09.
응? 에이, 이 사람이 또! 정령도 못 보는 정령의 여왕이 어딨다고!
"말이 안 되는 것 나도 아는데, 어, 그렇다는데? 살리맨더도 지금 당황했어."
"신기한 일이군요. 비 전하가 알고 보면 진짜 정령의 여왕인 것 아닙니까?"
"테일러경. 영혼의 색도 다르댔고, 나는 정령도 못 봐요."
"그러면 더 대단한 것 아닙니까? 정령의 여왕도 아닌데 이런 힘을 쓰는 거면? 정령의 여왕이 아니라, 대자연의 축복을 받은 성녀 그런 것일 수도 있지요."
프리케!! 성녀라니! 그건 너무 낯부끄러운 어휘 선택인 것 같아.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수도원이나 신전에라도 다녀와야 하나?"
"신성력이라는 것은 치유력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상한 취급받지 않으면 다행이죠."
아, 그 아주 세속적인 종교? 절대 안 가. 우리 어머니에게 무슨 짓을 했는데!!
"그래, 괜히 세이에게 이상한 소문이 돌면 안 되니까... 그럼, 흠..."
"정령의 여왕 대신 딸은 어떻습니까?"
"호오, 그거 괜찮은 아이디어네, 프리케."
프리케의 의견에 테일러는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카일도 썩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령들이 허락해 줄까?
"살리맨더도 동의했어. 자연의 힘을 쓸 줄 알고, 자신들도 포기한 생명을 끝까지 되돌렸잖아. 정령의 여왕으로도 손색없지만, 정령수를 살리진 못했으니까, 자신들의 딸로 인정하겠다는데? 거기다가 알비케라도 데리고 있잖아."
아, 그래. 알비가 정령의 여왕과 관계됐지? 내가 그래서 여왕이 쓸 수 있는 힘을 쓰게 된 건가? 으아아! 어렵다.
그래도 정령의 딸이라니까, 카일과 뭔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나쁘지 않네. 알비는 정령이랑 얽히면 싫어하겠지만.
뒤에서 으르렁대는 알비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일단은 지금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우리가 머물던 레스토랑 사람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테고, 근처 민가 사람들도 있으니까 설명해야지.
독수리랑 도마뱀이 내가 가는 곳으로 따라왔다. 응? 얘들 데리고 가서 키워야 하나? 저기 도마뱀아, 너는 뭘 먹고 사니...? 도마뱀을 애완동물로 키우는 사람이 있으려나, 하하하.
일단 둘은 기사들이 따로 챙기기로 했다. 찝찝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부탁해요.
내가 흑마법사가 만든 괴수를 정화시켜 원래 모습으로 되돌렸다는 설명을 남기고 우리는 조용히 황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마 이 소문은 널리 널리 퍼지리라.
우리의 보좌관이 내 이미지 관리를 아주 철저히 하시기에 이런 좋은 건수를 놓칠 리가 없었다. 연애 빼고 모든 것을 잘하는 우리 보좌관님!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카일에게 기대어 쉬고 있었다. 기력이 빠졌으니 회복해야 한다면서 자신의 무릎에 날 눕혀놓았다.
흠, 내 남자는 올려다봐도 굴욕이 없네. 최고야. 헤헷. 아, 저기 점만 없었어도 더 완벽한데!
알비는 건너편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카일, 아직 정령이 소환되어 있어요?"
"아니 돌아갔어. 왜?"
알비가 불만스러운 표정이길래요.
"이번 괴수가 흑마법사의 키메라가 변형돼서 만들어진 거라고 했잖아요. 혹시 그렇지 않은 괴수들도 있었나 해서요."
"어, 있었지. 그리고 그런 경우는 대부분 약했어."
혹시 이번처럼 살릴 수 있던 것은 아닐까?
아니, 그것보다 정령의 여왕이라는 여자! 그 여자가 있었으면 불쌍한 동물들을 다 살릴 수 있었을 것 아냐. 쳇, 정령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고귀한 생명을 버리면 안 되는 거지!!
"저기, 카일, 그러면..."
카일이 위험해서 안된다고 할 것 같긴 하지만...
"다음에도 괴수가 생기면 따라가고 싶은 거지? 솔직히 위험할까 봐 싫지만, 괴수들을 살릴 수 있는데 죽이면 네가 슬퍼할 거니까... 알았어. 같이 가."
"카일!!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당신 밖에 없어요."
마차 안이라서 다행이었다. 나는 카일의 목에 팔을 걸고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를 날렸다.
쪽쪽쪽쪽!
"하핫, 간지러워 세이."
"어쩜, 내가 이런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니. 나, 당신 너무 좋아요. 진짜 사랑해."
"나도."
카일이 내 허리를 잡고 자신의 허벅지 위에 제대로 앉혔다. 그리고 내 뒷머리를 받쳐 들더니 서서히 내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기다란 그의 속눈썹이 내 뺨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간지러움이 입술에 닿았다.
길게 빨려 들어가는 숨결이 달콤했다. 처음 하는 키스도 아닌데 어째서 매번 숨이 차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을까?
간질간질 더듬어 오는 그의 입술에 응하다 보면 아득해져만 갔다. 나를 원하는 그의 마음만큼이나 간절한 그의 입술은 늘 뜨겁고, 부드러워.
"카일, 사랑해요."
입술을 붙인 채로 나누는 대화. 나의 말이 그의 입술을 타고 서로에게 잔잔한 떨림을 전했다.
"제가 더 사랑합니다만."
그의 나른한 목소리는 언제나 나의 조금 남아있던 조신한 가면을 던져버리게 만들었다. 결국은 또 내가 그의 몸에 밀착하여 그를 더듬게 만들어 버렸다.
마차 안은 점점 우리들의 열기로 가득 차 버렸다. 키스만으로도...
"큼큼, 도착했습니다."
화르륵. 이미 뜨거워진 몸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어째서 또 잊은 거냐. 오늘 소드마스터 두명이 호위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어떡해!
"꺄악."
"다들 해산, 나는 급해서 먼저 가지."
내가 카일의 가슴을 콩콩 때렸지만, 카일은 그런 내 손길을 무시하고 날 안아든 채 날듯이 만월궁으로 뛰어들어갔다.
만월궁의 시중인들은 언제나 그랬지라는 표정으로 당황하지 않았다.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구나.
참, 마차 안에 우리 알비, 누가 좀 챙겨줘요. 이미 삐쳐 있는데!! 다행히 프리케가 안아드는 뒷모습이 얼핏 보인 것 같았다.
미안해, 내 새끼. 엄마, 아빠가 욕망에 너무 충실하다 보니 못난 꼴을 계속 보이는구나.
이미 늦은 오후에 돌아왔는데, 저녁때가 지나서야 카일에게서 풀려났다. 나는 녹초가 되어 겨우 따뜻한 스튜를 먹으며 쉬었다.
내 남편은 참 대단한 체력이야. 낮에 나랑 외출해서 밀린 일도 많은 데, 나랑 노닥거리느라 시간 보낸 만큼 못한 일을 해야 한다고 보좌관에게 끌려갔다.
불쌍한 남자. 쉬는 날도 없이 혹사당하는 구나. 하긴, 그러니 맨날 땡땡이를 치고 싶은 것이겠지.
스튜로 배를 채운 뒤 알비케라의 방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강아지님께서는 단단히 삐쳐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알비, 마음 풀어. 응?"
그런데 네가 삐친 이유는 내가 정령들의 딸로 인정 받아서니? 아니면 진한 애정행각을 벌이느라 널 모른 척 한 탓이니?
내가 계속해서 배와 턱을 간지럽히자 결국 진 쪽은 알비였다. 후훗, 네가 어딜 만지면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다.
"알비, 정령왕들이 싫은 이유를 말해 줄 수 없겠어?"
내 말에 알비는 시무룩해졌다.
"끼잉."
무서운 존재들이라고, 천벌이라는 이름하에 무고한 생명을 죽였다고 이야기했다. 자연을 지키기 위해, 여왕을 위해서 사람에게, 생명들에게 해를 가했다고 했다. 여왕은 분명히 반대를 했음에도 일어난 일들에 크게 실망했다고.
하긴 아까 살리맨더를 보니 그렇긴 했다. 사람과는 다른 가치판단을 했겠지? 정령의 여왕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질린 걸까?
"너는 정령의 여왕이 누군지 아는 거야?"
그 질문에 알비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비의 입장을 이해해주기로 했다. 카일이 정령의 여왕을 찾고 있지만, 그녀가 싫다면 만나지 않는 게 맞겠지.
내가 정령들의 딸로 지내면서, 정령들을 좀 더 변화시키면 그녀의 마음도 풀리지 않을까? 그럼 그녀도 나타나겠지.
내 의사를 알비에게 전하자 알비가 제 머리를 내 손에 비벼왔다.
"알비, 꼭 정령왕들을 자애롭고 인자한 존재로 바꿔볼게. 인간들과 생각이 달라 힘들 수도 있겠지만."
알비가 나를 핥기 시작했다. 간지러움에 꺄르륵 웃어주자 알비도 미소 짓는 것이 느껴졌다. 알비, 너무 걱정하지마. 그리고 날 믿어, 알았지?
알비를 달래주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카일이 오길 기다렸다. 그런 나에게 모일라가 쓰디쓴 차를 가져왔다.
흐잉, 이거 진짜 맛없어서 싫은데. 내가 혹시나 해서 우리기 전에 약초의 성분을 확인했었는데 분명 여인의 자궁에 좋은 것들이었다. 그럼 뭐 해, 맛은 없고 효과도 없는데.
진짜 카일이랑 나랑 금슬이 너무 좋아서 아기가 아직인 걸까, 시무룩해졌다.
"비 전하, 드시기 싫어도 마셔야죠."
"효과가 없으니까 그러지."
"늦게 아이가 들어서는 경우도 많아요. 언제 아기씨가 찾아올지 모르는데 미리미리 몸을 보호해 두셔야 합니다. 자, 한 번에 꿀꺽하세요."
우리 어머니의 무서운 버전이 있다면 지금의 모일라 일 것이다. 표정이 너무 단호해. 마시지 않으면 혼날 것 같아.
"꿀꺽. 으, 진짜 쓰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맛없는 것만 골라 만든 거야?"
설마 그 문제의 황궁의는 아니겠지? 역시 진작에 잘랐어야 했는데, 쳇.
"자, 비 전하가 좋아하는 연유 맛 사탕이에요."
나는 모일라가 입에 넣어준 사탕을 오물 거리며 미뤄뒀던 질문을 시작했다.
"있잖아, 모일라는 어릴 때부터 카일을 모셨지?"
"네, 1황자님에 이어서 제가 유모로 지냈죠. 왜 또 어린 시절 이야기가 듣고 싶으세요?"
"아니, 7년 전에 카일이 실종됐을 때 이야기를 듣고 싶어."
내 말에 모일라의 낯빛이 흐려졌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자식같이 돌봐왔던 1황자의 죽음과 카일의 실종. 그녀에게는 크나큰 아픔이었으리라.
"카일이... 돌아왔을 때 혹시 자신을 구해준 은인, 그런 이야기 안 했어?"
"전하께서는 돌아온 뒤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으셨어요. 그 사이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어쩌다 정령과 계약을 했는지, 단 하나도요."
아, 우리 남편. 1황자님 때문에 많이 힘들었구나. 말을 하는 모일라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리고 듣는 나도 편치 않았다.
그 시기의 카일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고 했다. 냉혈한이라는 별명이 이 시기에 나올 정도였다니 알만했다.
형의 죽음의 배후를 찾기 위해, 그리고 형을 대신하여 황태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곳을 쳐다볼 여유 같은 것이 없었겠지.
잔인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는데, 솔직히 지금의 그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내 남편 진짜 착하고 다정한데, 얼마나 괴롭혔으면 저러냐 싶고, 내가 다 속상했다.
"그래서, 비 전하가 오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전하께서 폐하께 자신의 비만큼은 스스로 고르겠다고 하실 때, 사실 결혼하기 싫어서 요령 피우는 거라 생각했어요."
"그럴 만도 하지."
"그런데 갑자기 시집오신 비 전하가 가출해 버리고, 전하께서 진짜 황태자비가 올테니 준비하라고 제게만 이야기하시는데 정말...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요."
아하하. 역시 모일라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구나. 괜히 내가 속인 것만 같아서 양심이 콕콕 찔렸다. 막, 혼도 내고 그랬는데.
"어찌나 영민하고 똑 부러지는지, 정말 비 전하가 오셔서 좋았어요. 게다가 황태자 전하가 다시 웃기 시작해서 너무, 흑..."
아, 모일라, 울지 마요. 카일룸, 이 나쁜 남자, 자신을 사랑한 사람의 마음속을 너무 많이 속썩였어!! 뭐, 나도 할 말은 없지만. 아니, 나는 더 했지.
"모일라, 이러면 내가 질문을 할 수가 없잖아. 나 카일의 과거사를 캐야 하는데."
"어머, 우리 전하에게 다른 연인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건 제가 보장해요."
아아, 그건 나도 알고, 그 과거 말고 다른 과거를 알아야겠어. 하하.
"응. 그건 나도 믿고 있어. 그것보다 그 7년 전에 실종됐다가 돌아왔을 때, 가슴에 큰 흉터 같은 것 없었어?"
"글쎄요. 그런 것이 있었다면 알았겠지만 시종장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서요."
흠, 나랑 헤어지고 바로 돌아 간 것은 아닐 테니, 뭐 흉터는 없어질 수 있었다고 치자. 작아지거나 흐려져서 주목받지 못했을 수도 있어.
"그럼, 카일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이진 않았어?"
"네? 전하는 한 번도 검은 머리였던 적이 없으셨어요. 늘 푸른색이셨는 걸요."
"머리 뿌리는 푸른데, 끝은 검은색이거나, 아니 검은 털 한올이라도 못 봤어? 검은색이었던 때가 전혀 없었냐고!!"
"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어요. 황실 남자 중에서 검은 머릿결을 가지신 분은 1황자님 밖에 없었는걸요?"
에? 아주버님이? 아닌데? 내가 예전에 황후폐하 무덤에서 본 초상화에서는... 고동색이었는데?
"그, 내가 아는 사실이랑은 다른데?"
"어릴 때 초상화 보신 거죠? 짙은 고동색이셨는데 청소년기를 지내시면서 점점 더 짙어지더니 거의 검게 보였어요. 두 분 황자님의 모후께서 칠흑 같은 흑발이셨거든요."
혼돈이 오기 시작했다. 뭐지, 뭐지?? 그래, 나 그러고 보니 아주버님 존함도 제대로 몰랐어. 설마, 응?
"아, 그러고 보니 아주버님 존함이..."
황실 예법서랑 귀족 계보도는 읽고 외웠는데, 아무도!! 황실 족보를 안 줬어!!! 나는 내 남편 이름도 사실, 입궁할 때 돼서야 알았다고!!
늘 나는 아주버님이라 부르고, 다들 1황자라 불러서... 몰랐다. 돌아가신 분의 이름은 귀족 계보도의 황족란에 없었어!!
"어머, 제정신 좀 봐. 그분께는 드렸었는데, 잊어버리고 족보를 안 챙겨 드렸네요. 1황자님의 존함은 케이엘로 헬리오스 데피니토르랍니다."
뭐라고!! 설마?
"그분 애칭이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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