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84화 (84/126)

84화. 스스로 이겨낸 과거의 망령.

2018.07.03.

며칠 후 사교계는 다시 발칵 뒤집어졌다. 후작부인이 자해를 한 것이었다.

후작부인은 아버지에 의해서 모든 짐과, 그녀의 시녀들과 함께 친정인 몬테가로 쫓겨난 상황이었다.

일기장과 비스가의 사용인들의 증언, 거기에 자식인 알리페르의 증언 등으로 이미 후작부인의 만행은 만천하에 드러났었다. 모두가 비스 후작 부부의 이혼은 당연하다는 여론이었고, 아버지가 그녀를 쫓아낸 것은 세상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일이었다.

"후우, 동정여론이 필요했나 보네."

나의 냉정한 말에 사정을 모르는 일부 시녀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나 방금 완전 패륜아가 된 건가? 얼른 내 친모가 아닌 것을 밝히고 싶다.

"얼마나 다치셨다고?"

"목을 매셨는데 다행히 매듭이 무게를 못 이기고 풀려서 떨어지셨답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대요."

"대신 비 전하의 아버님을 뵙고 싶다고 계속 울부짖으신대요."

후작 부인은 정말 내 아버지를 사랑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끝까지 집착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거겠지.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일방적인 감정은 과연 사랑일까, 그저 집착에 불과할까?

후작부인이 정말 아버지를 믿었다면, 부정을 저질러서 한 결혼이었대도, 이런 결말로 끝나진 않았을 텐데...

아버지의 성정상 나를 자식으로 인정하고 지원하는 것으로 끝내셨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처음부터 싫은 티를 내며 만남을 갖지 못하게 하지. 그게 정실 부인의 특권아닌가?

어째서 우리 모녀에게 겉으로는 친절한 척 굴었을까?

괴로운 척 했으면 아버지께서 책임감 때문이라도 우리 모녀와의 인연을 이어가지 않았을 텐데... 왜 받아주는 척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후작부인에게 동정이 갔다.

이기적인 사랑. 자신의 만족을 위한 사랑. 그래서 솔직해지지 못한 걸까? 그런 게 무슨 사랑이야. 싫으면 싫다고, 좋으면 좋다고 해야지.

잘 보이려고 솔직하지 못하게 행동한 것이 그녀에겐 더 독이 된 것이었다. 그것은 처음의 과오에서 비롯된 일일 것이다.

"너무 심려치 마세요.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분 걱정 안 해, 펠이 걱정인 거지."

프리케가 알리페르의 소식을 대신 전해주고 있었다. 미친 듯이 훈련만 한다고 했다.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고 싶어서겠지만, 혹시나 혹사하는 것일까 걱정되었다. 몸이 지치면 잡생각이 떨어질까 싶어서 그러는 것이겠지.

"빨리 소드마스터가 되어 마나를 다루고 싶답니다. 그래야 정령 소환할 거라던데요."

... 잘못 짚었나?? 끙. 내 동생들 이상한 점들이 하나씩 있어.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

아무튼... 자해를 하신 나의 가짜 어머니를 위해 병문안을 나서야 했다. 황후파의 수족들이 잘려나갔다고는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총출동했다.

"흐으으음. 이래서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구경 못하겠어요."

"널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카일의 말에 테일러경과 프리케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프리케는 이해하는데 테일러경은 왜?

"비 전하의 머리카락 한올이라도 상하면 저는 목숨을 내놔야 합니다. 전하께서 화내실 것을 생각하면 죽는 것이 나아요."

아, 네. 제 몸 간수 잘해서 꼭 테일러경의 목숨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알비도 데리고 나왔다. 알비케라는 연신 마차 밖을 기웃대며 꼬리를 흔들었다.

"알비 좋아?"

"멍멍!"

"우리 후작부인 문병 갔다가 맛있는 식당에 다 같이 가기로 했어. 호수가 옆이라는데 알비도 산책하자."

"멍!"

기분이 좋아져서 다행이었다. 알비는 얼마 전 정령왕을 만났던 사실을 잊은 듯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그때는 그렇게나 아파 보이더니. 다행이야.

사실 보여주기식 문병이라 빨리 끝날 거라 생각하고 오랜만의 외출을 즐기고 싶었다. 소드마스터도 셋이나 있고, 황태자 근위대의 정예 기사들도 보이게 안 보이게 곳곳에서 호위를 서고 있었으니까. 믿고 놀기로 한 거지.

데이트다! 오랜만의 야외 데이트야!

아직 그때 그 마법사는 상태가 안 좋다고 했다. 그림자 군에서 가장 외부 활동을 많이 하는 이들이 생포되고 죽은 것으로 알려져 당분간 제국에 덤비는 일은 없을 것이라 프리케가 말해줬다.

아마 두 번째 습격은 첫 번째가 실패한 탓에 보상 차원에서 나선 것이라나? 복수도 할 겸?

어쨌든 마법사를 얼른 깨워 1황자님에 대한 진상을 밝혀야 하는데... 벌독의 영향인지 트라우마에 입을 열지 않으려 한다고. 마법진을 그릴까 봐 손을 풀어 주지 못하는 상황이라 좀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했다.

그 마탑주라는 인간, 능력이 별로네. 진실의 물약 이런 것 못 만들어? 쳇.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몬테 공작가였다. 비록 잘못을 저지른 어미지만 외면하는 것은 너무 매정하기에, 그리고 동정여론이 더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왔다.

딸까지 버렸다면 얼마나 비참해 보이겠어? 이미 친딸이 버리긴 했지만.

"오셨습니까?"

몬테 공작 내외가 우리를 맞이하러 나왔다. 공작가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그리고 공작 내외의 적의는 평소보다 선명하고 분명하게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지 못하는구나.

착하게 살긴 글러먹은 집안이야. 나한테 사과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도가 지나친 모습에 나를 호위하는 세 남자들의 기세도 사나워졌다.

"어머니는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범한 말투로 질문을 하자 공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나도 내 입으로 그 여자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 역겹거든요? 하지만 지켜보는 이가 많으니 서로 양보하죠?

공작은 집사를 시켜 우리를 별채로 안내했다. 현재 후작부인은 별채에서 머물고 있다고 했다.

황태자 일행을 공작이 아닌 집사가 안내하는 것은 무례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편했다.

대신 공작이 불손한 움직임을 보이질 않는지는 기사들이 감시할 것이었다.

이미 공작저는 황태자 근위 기사들로 철저하게 봉쇄된 상태였다. 살벌한 광경 탓에 사용인들이 움찔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황태자비가 외유를 갈 때마다 큰일을 겪었으니 어쩌겠어? 내가 다치면 내 남자가 화를 내고, 제국이 위태해질 테니 불편해도 참아요. 금방 갈 겁니다.

"두 분 전하. 여깁니다."

화려한, 그러나 침묵만이 감도는 별채는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후작부인의 원한이라도 서렸나 봐.

"세이, 같이 들어가자."

"카일, 혼자 들어갈게요."

오기 전부터 생각했다. 지난 화재의 원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니 그녀의 세뇌로 내가 착각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결심했다.

내 마음속의 무거운 짐들을 벗기 위해서는 스스로 싸워내야 해. 반드시 그녀의 그림자에서 벗어 날 거야. 내 힘으로 싸워 이겨야 다신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야.

"날 믿고 맡겨줘요. 무슨 일 있으면 부를게요. 너무 멀리 가지만 마요."

내 의지에 카일은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카일의 볼에 짧게 키스를 했다.

집사가 있어서 속시원히 말할 순 없었다. 하지만 부탁하지 않아도 세 남자는 후작부인이 내게 해를 끼치려 하는지 감시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 음침한 방안에는 후작부인의 시녀와 하녀들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봐야 동정이고 뭐고 사라질 텐데.

물건들이 마구 날아다니고 채찍으로 찢긴 흔적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일단 하녀와 시녀들을 모두 내보냈다.

"아르세이아! 내 딸아! 돌아온 거니?"

아, 제정신이 아니구나. 내가 스타티나인척해야 할까? 망설이는 사이 후작부인이 성큼성큼 걸어서 내게 다가왔다.

"네가 없는 사이 그 하찮은 년이 네 행세를 하며 네 자리를 뺏고 있지 않겠어?"

마치 진짜 내 친모라도 된 것처럼 다정하게 내 손을 잡아오는 후작부인의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갑자기 내 손에 가해진 악력에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

"이 어미가 그년에게서 비스가의 장녀 자리도, 황태자비 자리도 네게 뺏어 주었는데! 흐으윽, 너는 어째서 날 이렇게 궁지로 몬 거야? 응? 네 실수도 다 그년 탓으로 만들어 줬는데!"

점점 횡설수설하며 무너지는 후작부인의 모습에 마음이 이상해졌다. 분노나 증오 같은 것이 생기지도 않았다.

단지 나는 이렇게나 무력한 사람에게 그동안 휘둘렸구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건, 결국 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이잖아.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도 끝까지 당신 편들어 주지 않는다고 투정 부리는 거야?"

내 쌍둥이 동생들이 불쌍해졌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낳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아이들을 낳았다.

"우리 어머니는 당신 딸과 날 살리기 위해 희생까지 했는데! 당신이 끝까지 이기적으로 군 탓에 당신 딸이 배신한 거잖아!"

내 말을 듣던 후작부인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그리고 몸을 내게 들이밀며 양팔을 꽉 잡았다.

"너, 아르세이아가 아니구나. 그년이야. 천박한 년, 저주받은 년!"

"지금의 모습을 보시죠, 누가 더 천박한지? 아니, 처음부터 연인 있는 남자를 약으로 유혹하고 협박한 당신이 더 천박한 것 아닌가요?"

"네가 황태자를 믿고 설치나 본데, 네 정체를 밝혀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저 말 나올 줄 알았어. 피식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직 카일이 내 정체를 모를 거라 생각했나 봐?

"그래서 말하면 도망친 당신 딸도, 당신도, 그 일을 알고 있던 당신 오빠도 화를 면치 못할 텐데?"

"네년이 내 딸을 죽이고 그 자리를 뺏었다고 하면 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후작부인을 밀쳐내자 그녀가 밀려 넘어졌다.

"그 말을 누가 믿을까? 당신이 학대해 왔던 사생아가 지금껏 당신 딸을 대신해서 현명하고 자애롭게 제국민을 보살펴 왔는데? 그런 내 말을 믿을까, 지금껏 추악한 모습을 숨기고 산 당신과 당신 오라비의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해?"

나는 신랄하게 그들을 비난해 주었다. 그동안 쌓인 울분을 토해내야 했다.

"내가 가짜인 것이 들통나더라도, 황실은 날 지켜. 이미 도덕적으로 추락한 당신들이 아니라."

후작부인은 멍하니 나를 올려다봤다. 주저앉은 초라한 그녀에게 나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날려주고 싶었다.

"당신은 남편에게도, 자식들에게도 버림받은 거야. 내 동생들이 당신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내 외침에 후작부인은 미친 여자처럼 근처에 있던 채찍을 들고 달려들었다. 정신 나간 사람이라서인지 채찍질은 정확하지 않았다.

무섭지 않았다. 이젠 저런 여자가 무섭지 않아. 오히려 가련해 보여.

나는 그녀의 손에서 채찍을 뺏어들었다. 그리고 손잡이의 양쪽을 힘껏 잡아 부러뜨렸다. 나, 생각보다 힘이 셌구나!

"카일, 보고 싶어."

조각을 버린 뒤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 작은 웅얼거림에 방문이 뻥 소리가 나면서 열렸다. 그러자 눈부신 후광과 함께 나의 황태자님의 얼굴이 비쳤다.

햇살과 함께하니까 더 잘생겼네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걸어갔다.

나만 설 수 있는 곳, 카일의 옆자리.

"카일, 어쩌죠? 어머니께서 많이 아프신가 봐요."

"정신적인 충격이 컸나 보군. 치료를 위해 수도원에라도 보낼까?"

우리의 말을 듣고 있던 집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나오자마자 굳게 닫힌 방문 너머에는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히스테릭한 후작부인의 비명소리는 누가 들어도 미친 여자의 것이었다.

"어머, 몬테 영지에 수도원이 하나 있다던데, 거긴 최근에 화재로 엉망이 됐대요. 아, 거기가 어머니의 스캔들과 관련된 곳이던가요?"

나는 최대한 눈빛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집사가 내 정체를 알 수도 있으니 또 연기를 해야지. 내 눈치 빠른 남편은 합을 잘 맞춰줬다.

"거기로 보내면 장모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 거야. 다른 곳을 찾아봐. 요양 시설도 많아."

"저, 저희 가문에서 마님을 잘 모실 테니 염려 마십시오."

집사가 당혹스러운 마음에 급히 끼어들었다. 그러자 카일은 서늘한 미소에 살기를 살짝 띄운 뒤 답했다.

"그래? 몬테가에서 전담하겠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미쳐버린 장모가 밖을 돌아다니며 황태자비의 평판을 깎지 않도록 잘 단속해야 할 것이야. 기왕이면 별채를 폐쇄한다던가...?"

"예, 예. 가주님께 보고하고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책임 지리라 믿고 맡기지."

그렇게 못하면 죽이겠다는 얼굴로 참, 단정한 말투로 이야기하네요.

우리는 집사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로 돌아왔다. 몬테 공작은 몸이 좋지 않다며 끝내 나오지 않았다.

저택을 걷는 내내 침울한 척하는 표정연기는 필수였다. 그래서 마차에 오르자마자 커튼을 내리고 표정을 풀었다.

후아, 일단 오늘 볼 일은 끝났네. 이제 다 후련하게 끝냈으니까, 홀가분하게 놀테다! 얼굴에 만족감이 넘쳤다.

"꺄아, 이제 데이트 시간이다!"

그런 나를 맞은편에서 웃으며 봐주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내가 마음의 짐을 떨쳐 낸 것을 대견하게 봐주는 남자.

"카일, 나 오늘 용기 있게 잘했다고 칭찬해줘요. 요기 입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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