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83화 (83/126)

83화. 화재 사건의 진실.

2018.07.02.

7년 전의 화재가 인간이 저지른 불이라고?

나는 지금껏 당연히 나의 원망과 미움으로 일어난 사고라고 생각했다. 왜냐고? 어, 그거야 후작부인이 내게 늘 나 때문에 불이 났다고 했고, 내 주변엔 불길한 일이...

설마? 후작부인이 지금까지 내게 거짓말을 한 거야? 나는 그동안의 전적이 있어서 그것도 내 탓이라 믿었고?

완벽한 세뇌였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마녀라 불렸고, 내게 해를 끼쳤거나 내가 싫어했던 사람들은 괴이한 죽음을 맞이했었으니까. 그래서 당연히 그 원인모를 불을 내 탓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때 나는 분명 내 여동생을 질투하고 시기했었으니까. 내가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을 가지고 내게 들러붙던 그 아이가 귀찮았다. 날 괴롭히는 후작부인의 딸이라서 미웠다.

게다가 불은 스타티나가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부터 났는걸. 그래서 더 믿었는데.

"펠의 어미가 거짓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사실 스타티나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서 저지른 짓이더군요."

"네? 스타티나가요?"

아버지의 표정에 곤란함과 미안함이 스쳤다. 그 표정을 보니 알 것 같았다. 불을 낸 것은 스타티나구나?

"아버지, 저한테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바보같이 다들 내가 아니라 했는데, 스스로를 자책하고 나쁜 쪽으로만 생각한 건 저였는걸요? 제가 심지가 굳건하지 못하고 약한 탓이었어요."

나는 아버지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 위에 내 손을 겹치며 말씀드렸다. 그래, 정말 당시의 내가 너무 한심해서 죄책감을 안고 있었던 거야. 바보같이...

육체적인 학대와 정신적인 학대가 겹쳐져서 제대로 된 판단을 못 내렸었네. 조금만 더 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니까 제게 죄책감 같은 것, 이제 그만 가지세요. 우리 이제 행복할 날들만 기다리고 있는데 과거에 얽매이지 말아요."

"비 전하, 아니 내 딸 아르세이아.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다 황태자 전하 탓이지요?"

헤헤, 그건 맞는 것 같다. 내가 조금씩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이 카일이 후작부인을 막아준 뒤부터니까. 나를 지켜주는 존재가 항상 대기하고 있다는 것은 때로는 큰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뭐, 아버지가 사윗감 하나는 잘 골라서 제게 보내주셨지 뭐예요?"

"정말, 비 전하를 아무한테나 시집보내기 싫었습니다. 전하가 무릎까지 꿇으면서 애원하지만 않았어도 시집보내지 않았을 텐데요."

"어머! 카일이 무릎까지 꿇었다고요?"

우와, 대박. 내 남자 최고! 이러니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 잠깐 이야기가 새어나가서 카일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스타티나는 이미 도망쳐 버리고 없었지요. 어찌해야 고민하는데 전하가 절 몰래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더니 대뜸, 장녀를 시집보내라 했는데 왜 차녀를 보냈냐며 정색하더군요."

카일은 아버지에게 집안 사정을 다 알고 있다며 자신이 진짜 반려로 찜한 것은 나라는 것을 밝혔단다. 아버지는 카일이 왜 날 사랑한다는지 믿을 수가 없어서 차라리 벌을 받겠다며 날 내놓지 않겠다고 했단다.

처음에는 아버지께 거만하게 날 요구하던 카일은 결국에는 애걸복걸 했다고...

아이, 그 모습 봤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에는 제 앞에 무릎까지 꿇으며 비 전하를 달라고 했었죠. 그러면서 비 전하를 울리지 않겠다고, 지옥에서 꺼내서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며 그 맹세를 지키고 싶다 하셨습니다."

카일... 케이도 날 지옥에서 꺼내준다 했었는데. 카일과 케이의 공통점을 또 발견했다. 두근두근.

"제 앞에서 비 전하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맹세하셔서 눈물을 머금고 보냈는데, 보내길 잘했네요. 이렇게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셨으니까요"

아버지는 내 머리를 잠시 쓰다듬어 주셨다.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좀 더 아버지의 큰 손에 기대고 싶었다. 이래서 머리 쓰다듬어주면 알비가 좋아한 건가? 부비부비하고 싶어.

"헤헤... 카일이 제 곁에 온 뒤로 어머니도 찾고 좋은 일만 생겨서 좋아요. 아버지도 더 행복해질 거고, 우리 쌍둥이 동생들도 더 행복해지겠죠?"

나의 미소에 아버지도 인자하게 웃어주셨다. 잠시 따스한 이야기를 나눈 우리는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갔다.

"저 이제 나약하고 힘없이 굴던 세이렌이 아니에요. 그러니 그때의 진실을 듣는다고 속상해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을 거니까, 그때 일 이야기해주세요."

나의 의지를 엿본 아버지는 그날의 진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시작했다.

"그날이 아마 비 전하께서 두 번째 가출을 했다가 돌아온 다음 날이었을 겁니다."

그래, 케이와 헤어지고 얼마 안 되어서 였지. 돌아가자마자 쌍둥이들의 유모의 손에 이끌려 후작부인의 앞에 섰었다.

"그때, 아이들의 유모였던 여자 기억하십니까?"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여자가 후작부인의 수족이었다는 것은 알아요."

"유모가 펠의 어미를 대신해서 비 전하께 학대를 가했죠. 때리고, 꼬집고, 짓밟고."

아아. 듣고 보니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기억의 한구석에 묻어 두어서 잊어버렸는데.

완벽하지 않지만, 치켜뜬 눈에 팔자주름을 가진 힘이 센 여인이 날 자주 때린 것 같다. 후작부인이 채찍으로 때렸다면 그 여자는 그냥 맨손으로 뺨을 때렸던가? 아버지가 오시는 날에는 안 보이는 곳을 꼬집었었지.

"그 모습을 스타티나가 보고는 발끈해서 자신의 유모에게 따지고 들었답니다. 그런데 그 유모가 비 전하와 닮은 외모 때문에 실수로 스타티나를 때린 모양이더군요. 게다가 알리페르와 차별도 심심찮게 한 모양이었습니다."

아, 그 유모라던 여자 남녀 차별이 확실하긴 했지. 미래의 가주인 알리페르에게 아주 줄서기를 제대로 하는 모양새였다. 간식도 그랬고, 같이 장난치다 넘어져도 스타티나가 아닌 알리페르를 먼저 일으켜줬었어. 그래서 스타티나가 속상해하던 것이 기억나.

내가 알리페르와 거리를 둔 것도 그 여자 탓이었다. 내가 근처에 가기라도 하면 당장 후작부인에게 고해바쳤으니까.

아버지의 설명을 듣자 기억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스타티나는 그날 밤에 유모를 놀래 주려고 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모의 방 입구에서 폭죽을 터뜨리고 도망을 쳤다고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유모가 봤다고 했다. 공교롭게 그날 나와 스타티나는 아버지가 선물해준 똑같은 잠옷을 입고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가 자신을 괴롭힐 리가 없다고 생각한 유모는 당연히 내 짓이라 여긴듯 했다.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 동네북이었어. 알고는 있었지만 확인받는 것은 역시 씁쓸하네.

"하필 또 공교롭게 스타티나가 비 전하의 방으로 도망쳤지요."

"아, 그랬던 것 같네요. 저는 그때 또 도망칠 계획을 세우려고 잠시 방을 비웠고요."

그래, 그랬지. 나는 또 가출 계획을 세우느라 저택의 경비가 허술한 쪽의 방을 찾아다녔어.

"그럼, 그 유모가 절 죽이려고 불을 낸 건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등잔불에 쓰이는 기름이 비 전하의 옆방에 뿌려졌고, 비 전하가 방으로 돌아가 잠든 순간에 불이 났지요. 그때 스타티나는 비 전하의 방 옷장에 숨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옆방에서 난 불은 내 방 옷장 쪽으로 번졌다고 했다. 그때부터는 나도 기억이 났다. 그곳에서 당황하며 울던 스타티나를 내가 데리고 왔었다. 울면서 무섭다고 내게 안기던 그 아이를 보며 내가 화를 냈었다.

"너희들 나빠! 다시는 보기 싫어. 전부 너희 탓이잖아. 내가 싫다는데도 왜 사람들을 해치려는 거야?"

아, 기억의 일부가 더 살아났다. 누군가가 있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날 대신해서 복수해 주던 존재가. 뭐지?

"저기, 아버지. 그럼 그때 동생들의 유모는 불에 타 죽은 것이 아닌가요?"

"아니오. 맞습니다. 그 불이 난 방에서 타 죽었습니다. 아마도 기름이 드레스 자락에 묻은 탓에 불이 순식간에 옮아 붙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천벌이었군요."

"그렇지요."

스타티나가 왜 내게 죄책감을 가졌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장난으로 나는 1년이나 혼수상태였고, 내 어머니는 제 어미의 손에 끌려가 버렸으니까.

그리고 내 탓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의 어미에 의해 나는 망가져 갔었다

하아, 어째서 잘못을 저지른 단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이 이렇게 서로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참, 아이러니하네. 정작 그 사람은 뻔뻔하게 굴고 있는데!

심각하게 고민하는 나를 아버지는 조용히 기다려주셨다.

"제가 한 가장 큰 잘못은, 정작 날 아끼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거네요. 아버지도, 내 동생들도, 친구들도 다 제가 한 짓이 아니라 했었는데... 바보같이 귀를 막고 혼자서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갔어요."

"비 전하 잘못이 아닙니다. 그걸 부추긴 사람이 따로 있었지 않습니까."

"저요, 가끔 어머니가 절 버리는 꿈을 꿨어요. 어머니는 그 불길 속에서도 절 지키려 했는데... 나 때문에 어머니가 다쳤다고 믿었으니까."

후작부인의 말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어머니가 나와 떨어지게 된 것을 다행이라 여기진 않을까 하는 어두운 마음 때문에 만든 악몽이었다.

"이제 괜찮아요. 아닌 것 아는걸요. 어머니가 얼마나 절 사랑하는지 아니까, 이제 악몽 안 꿔요."

아버지가 어쩔 줄 몰라 하셔서 최대한 웃으면서 말씀드렸다.

"그것보다는 스타티나의 죄책감도 덜어주고 싶은데... 그 아이에게 연락한 방법이 없을까요? 편지라도 주고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황태자께서 전해 주실 겁니다."

응? 역시 스타티나를 보호하는 것도 카일이군. 그렇다면? 아버지는 진실을 아시려나?

"저기, 아버지. 스타티나가 도망 친 것도 카일이 시켜서 한 거예요?"

"그건 아닌 것으로 압니다. 이 제안을 한 것도 다 스타티나가 먼저인 것으로 압니다. 전하께서는 스타티나가 무사히 국외로 도망가고, 비 전하를 황궁으로 모셔가려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셨고요."

"그 아이는 도대체 어째서 내게는 입을 다물었대요?"

아버지는 그저 웃으면서 이제 정무를 보러 가신다며 먼저 일어나셨다.

치잇. 나만 몰랐어. 다들 나만 바보 만들고, 너무해.

나는 혼자 남아 내 소중한 여동생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후 완성한 편지를 읽어 보았다.

- 나의 사랑하는 동생 스타티나에게.

스타티나, 잘 지내고 있니? 나는 네 덕분에 너무 잘 지내고 있어.

그런데, 너! 어쩜 그렇게 깜찍하게 날 속인 거야? 내가 황궁에서 처음에 적응하느라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니?

어쩜 그렇게 다들 똘똘 뭉쳐서 날 속인 건지! 하지만 덕분에 지금은 누구보다 잘 지내고 있어.

특히나 아버지랑 해묵은 오해도 풀었어. 다 네 덕분이야.

그래서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어. 7년 전의 화재사고도 들었어. 음. 내가 한 짓이 아니더라? 나는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혼자 끙끙 앓고 있었어.

그런데 말이야. 그거 너도 잘못 한 것 없더라? 그 일은, 마음이 사악한 시녀가 저지른 어리석은 일이었어. 너도 나도 잘못한 일이 없으니까 우리 죄책감 갖지 말자.

네 동생도 너희 어머니 때문에 우리 모녀에게 마음의 빚이 많은 모양이야. 아버지도 내게 미안해하시는 일이 많고.

아니 비스가의 사람들은 다 자기 잘못도 아닌 일에 미안해하고, 자책하는 피가 흐르나 봐? 나를 포함해 다들 바보 같지 않아?

나는 네 덕분에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안전하게 머물 수 있게 되었고, 나와 피를 나눈 진짜 동생들을 얻었는걸.

나는 너희 남매를 원망하지 않아. 그러니까 내게 미안해 하지 말고, 네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어.

너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행복한 거 맞지? 얼른 소개해줘. 그리고 펠도 연인이 생겼어. 놀리러 와.

얼른 제국의 정세를 안정시켜서 당당하게 내 신분 밝히고 널 다시 제국으로 부를 거야. 황태자비의 하나뿐인 여동생으로 내 곁에서 함께 사교계를 지키자.

보고 싶어. 사랑하는 나의 동생.

너와 나는 하나의 이름으로 엮인 서로의 분신이야. 그래서 난 널 누구보다 사랑해.

너의 언니 아르세이아로부터.

P.S. 나, 네가 시킨 대로 카일도 확실히 꼬셔놨고, 사교계도 장악했어. 특히 콘스탄트 공녀를 제대로 눌러놨으니까 무용담 들으러 와.

P.S의 P.S. 그런데 네 연인. 제대로 된 남자지? 우리 카일보다 못하면 나는 허락하지 않겠어. 괜찮은 사람으로 데려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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