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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82화 (82/126)

82화. 황태자비의 필수 덕목은 연기.(2)

2018.06.29.

"당장 황태자비 전하를 만나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비켜라. 들어갈 것이다. 어미가 딸을 만난다는데 감히 막는 것이냐?"

날카로운 여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궁 앞에 울려 퍼졌다. 아하, 후작부인이구나.

왜 왔는지 이유는 뻔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궁인들의 주인도 아니면서 내 사람들을 막 대하는 것이 영 거슬렸다. 심지어 내 친모도 아니잖아.

카일 역시 기분이 아주 나빠 보였다. 카일은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후작부인이 평소 날 학대한 것도 알겠지? 조금씩 살기가 삐져나오는 것을 참는 듯했다.

"무슨 일이냐?"

와우, 우리 남편 목소리에서 눈폭풍이 쏟아진다 해도 놀라지 않겠어. 정말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자 입구를 지키던 기사들과 시종장, 그리고 모일라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물론 후작부인도 눈치라는 것이 있는지 움찔하며 패악질을 부리던 것을 멈췄다. 대신 씩씩거리며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내 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엄마얏 우리 카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간이 부으셨나? 진짜 이혼당하기 싫은가 봐...

"비 전하!"

그 순간 프리케와 테일러경이 검집채로 검을 들어 올린 뒤 서로 교차해 후작부인을 막았다.

"무슨 짓이냐?"

후작부인은 온몸으로 불쾌함을 표시했다. 검집을 손으로 밀며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치다가 기사들의 완력에 의해 뒤로 밀려났다.

"후작 부인은 당장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에게 예를 갖추시오."

테일러경이 근엄하게 외쳤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후작부인은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무릎을 구부리며 허리를 숙였다.

"창공을 비추는 두 번째 태양과 밤하늘을 비추는 작은 별께 인사 올립니다."

나한테 허리 숙이기 진짜 싫을 텐데. 그냥 황태자에게 인사하면서 덤으로 인사했다고 생각하시든가요.

나를 향한 조금은 고까운 눈빛에 당황하지 않고 응시해 줬다. 자, 이럴 때 외쳐야죠.

뭐? 어쩌라고?

내가 당당하게 쳐다보자 그녀의 눈빛이 조금 사나워졌다. 결국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카일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일은 다른 손으로 내 손을 덮고 토닥토닥해 주었다. 내가 곁에 있다고, 지켜주겠다고, 다시는 그런 악몽을 꾸게 하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이 들리는 듯했다.

"후작부인, 도대체 무슨 용건이 있길래 이리도 소란인 건가?"

"전하, 어찌하여 어미가 자식을 만나지 못하게 막으십니까? 천륜을 끊어내려 하는 것입니까?"

진실을 알고 있는 우리 쪽 사람들은 다들 속으로 비웃고 있을 것이다. 우리 사이에 끊을 천륜 같은 게 어디 있다고.

카일은 지금까지 내가 후작부인을 만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지시를 내렸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후작부인을 만나고 내가 기절했던 일 때문이겠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나의 비가 바빠서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것을 왜 내 탓을 하나?"

흠, 그러고 보니 귀부인들에게 예의상 하던 존댓말도 이제 안 하네?

뻔뻔하게 자신이 막은 적 없다는 황태자의 말에 후작부인의 미간이 좁혀질 뻔했다. 하지만 늘 두르고 사는 철가면을 다시 씌운 듯 금세 표정에 평정을 되찾았다.

"허면, 오늘은 비 전하와 제가 둘이서 대화를 나눌 수 있겠군요. 매우 한가하여 산책도 다녀오신듯 하니까요."

"글쎄? 지금 이혼에 대한 절차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아는데... 이런 시점에서 비와 사적인 만남을 갖는 것은 나의 비에 대한 평판에 이로울 것이 없어서 말이지."

카일이 특유의 비꼬는 말투로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당연하게도 후작부인의 얼굴은 차게 굳었다. 예의 바르게 자신을 대해줬던 카일이 이렇게나 냉소적으로 자신을 대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모양이었다.

이 제국의 황태자비는 황태자에게 너무 큰 사랑을 받아서 후궁 제도 마저 없애게 만들지 않았나. 그런 황태자비의 친모인 자신에게 어째서라는 표정이었다.

과연 후작부인은 카일이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일까?

내가 가짜라고 폭로할까? 나의 과거를 들먹이며 나의 평판을 마구 깎아내리려 하겠지? 내가 스타티나를 헤쳤다고 모함할지도 모르겠네.

"어머니, 전하의 말씀이 옳아요. 지금은 어느 때보다 자중, 또 자중하셔야 하는데 이렇게 소란을 피우시다니요. 아버지께서 아시면 더 진노하실 겁니다."

할 말은 하자. 그녀가 쥐고 있는 내 약점은 그녀의 약점이기도 했다. 그녀가 내 신분을 폭로하면 우리도 황족을 기만한 그녀의 죄를 물으면 되었다.

나야 카일이 처음부터 사랑한 상대니까, 밝혀지면 망신은 당하겠지만 카일에게 버림받을 일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거 카일이 저지른 짓이라 나는 죄가 없다고!

"네가, 감히!!"

내가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황후보다 더한 철가면을 쓴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드디어 그 가면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 참참참! 보좌관이 오늘 비스 후작으로부터 사기결혼에 대한 증거를 제출받았다고 했는데, 알고 있겠지? 젊은 시절 일기라고 들었는데?"

카일의 말에 후작부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일기? 무슨 일기지? 슬쩍 물어봐도 되겠지?

"카일 무슨 소리예요?"

"아, 세이. 참, 민망하기 그지없는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서 말이야. 필적 감정도 끝났다는데, 어린 공녀가 할 짓이 아니었더라고? 그대의 외삼촌도 연루된 것 같던데? 다른 귀족들에 대한 범죄도 기록되어 있다더군. 소노르 자작가라던가?"

나는 후작부인 앞에서 놀란 것처럼 움찔해줬다. 황궁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배우고 늘어난 것이라고는 연기인 것인가!

후작부인은 더 놀란 듯 했다. 정말 일기장이 아주 큰 증거가 맞았나 보았다. 지금까지 유지하던 가면이 산산조각이 나서 사시나무 떨듯이 떠는구나.

"그, 그런 말, 말도 안 되는!! 무슨 말씀이신가요?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오해하신 겁니다. 착오가 있었, 아니 조작된 증거예요."

후작부인이 말더듬는 모습 처음 봤다. 진짜 많이 당황했구나. 이러면 안 되는데 어째서 이렇게 통쾌할까?

조금 웃음이 나려고 해서 참느라 심각한 척 입을 깨물었다. 아마도 나와 후작부인의 진짜 관계를 모르는 기사들이나 시중들 눈에는 내가 속상해서 이러는 줄 알겠지?

그렇다면 눈물을 조금 쥐어짜서 글썽여야 하나?

입술을 더 세게 깨물자 눈물이 핑 돌았다. 딱 울 것 같은 얼굴! 다들 나를 안쓰럽게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애롭고 마음 착한 황태자비의 악독한 친모에 대한 적의 가득한 눈빛이 후작부인에게 쏟아졌다.

"여기서 이러고 우릴 붙잡고 있느니, 그대의 오라비와 대책을 논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오늘 단 한 번도 장모라고 불러주지 않는 카일의 시종일관 서늘한 태도에 질린 후작부인이 드디어 떠났다.

"휴우. 갔네."

"널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데."

나보다 날 괴롭힌 사람에게 더한 분노를 느껴주는 진짜 내 편이 곁에 있구나. 나는 혼자 계속 웅얼거리며 대신 화내주는 카일의 볼에 쪽 뽀뽀를 해줬다.

"카일, 정말 고마워요. 늘, 무조건 내 편에 서줘서."

시중인들은 슬금슬금 우리에게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프리케는 질린다는 표정이었고, 테일러는 그저 흐뭇한 얼굴이었다.

아, 또 사람들이 많은 것을 잊고 내가 애정행각을 벌였구나.

"세이를 위해서라면 전설 속의 드래곤도 잡아 바칠 수 있는데, 벌레 하나 쫓아내는 일 즈음이야."

어깨를 으쓱하는 카일의 모습이 마냥 허세로만 보이진 않았다. 뭐, 아주 약간의 허세는 있겠지만 이 정도는 애교지 뭐. 늘 든든한 나의 보호막, 방호벽.

"자, 이제 방에 가서 쉬자. 앞으로도 피곤할 일이 많아. 내일은 몬테 공작이 나타날지도 모르고."

"쉬는 거 맞아요?"

내가 미심쩍다는 듯이 물어보자 카일은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로 화답했다.

"어? 뭐, 약간의 운동 뒤에 쉬는 거지."

그렇지 뭐. 우리 변태 남편이 그냥 쉴리가 없지. 내가 크큭 웃자 카일도 웃었다.

아버지 일은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후작부인이 집안에서 쫓겨나고 나면 나에 대한 영향력도 줄어들 거야. 불명예스러운 일로 쫓겨난 황태자비의 친모를 황실에서 환영하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말고 하루하루를 즐기며 살자. 당장 오늘 밤도 카일을 즐겨야지. 호호호.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교계에 소문으로만 돌던 비스 후작부인의 스캔들은 증거와 함께 진실이 되었다.

게다가 후작에게 미약을 먹여 억지로 관계를 가지고 임신을 해서 혼인을 강요했다는 것이 아주 크게 알려졌다. 이 일에 현 몬테 공작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쳐서 비스 기사단을 장악하려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뒤늦게 후작에게 사생아와 연인을 찾았고, 이를 질투한 후작부인이 저택에 불을 질렀다는 소문도 돌았다. 흠, 진짜 후작부인의 짓이었을까?

흠, 이제 내 이야기도 서서히 알려지는구나.

비스 후작가에 서녀가 있다는 사실은 철저히 숨겨져 왔다. 모두들 사생아의 존재에 크게 놀랐다고 했다. 아니, 그 서녀가 실제로는 적녀로 사랑받고 자랐어야 하는 후작의 진짜 장녀라는 사실에 동정론이 돈다고 했다.

"후작가 남매들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은 없어?"

우리 남동생님은 평생 반듯하게 살아서 걱정이 없는데, 여동생님이 어릴 때 종종 사고를 치고 다녔기에 말이지.

"귀족들 사이에는 몇몇이 죄인의 딸이 황태자비로 있는 게 맞는가 하는 말이 돈대요."

에이, 그런 말 누가 하는지 딱 봐도 알겠네.

"그거 콘스탄트 공녀가 내고 다니는 소문이지?"

"뭐. 그렇죠? 귀족파는 눈치 보고 있고, 황후파는 기회라고 물어뜯고 있죠. 비 전하한테 당한 것이 있으니... 하지만 콘스탄트 공작이 지방으로 가 있어서인지 구심점이 없어 큰 여론은 못 되고 있어요."

"게다가 비 전하께서 쌓아 오신 업적이 있지 않습니까? 평민들 위주로 우리 비 전하 불쌍하다는 여론이 강해요. 그런 악독한 여자에게서 어떻게 이런 착한 천사가 나타날 수... 어머 죄송해요."

시녀들 중 내 정체를 아는 것은 에이린, 유리아, 모일라 정도였다. 카일과 나의 최측근에게만 알렸지. 그래서 나에 대해 모르는 시녀들은 후작부인을 욕하고는 당황하고는 했다.

"괜찮아. 그분이 큰 잘못을 지은 것이 사실인데 뭐. 악독하다 보다 더한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그니까 나 대신 욕 많이 해줘. 최측근들과 있을 때가 아니면 나는 친모로 되어있는 후작부인에 대한 욕을 못 하거든. 대리만족을 위해 부탁해.

나는 진심으로 욕해줘서 고맙다고 웃은 건데 다들 날 짠하게 보았다. 하하, 부담스러워.

오후에는 아버지가 찾아오셨다. 나는 이참에 궁금한 것들을 다 물어 보기로 했다. 일단 안부 인사부터 해야지.

"힘들지 않으세요?"

"자식들이 전부 이렇게 든든히 지지해주고 응원해 줘서 괜찮습니다."

"펠은 어때요? 힘들까 봐 일부러 휴가 줘서 기사 아카데미에 보내놨는데."

"황궁에서 아멜리아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까? 그 뒤에 비 전하도 위로해주고 해서인지 덤덤하게 잘 버팁니다."

그래도 자신을 낳아 준 친모가 욕을 먹는다는데 좋을 리가 없잖아. 죄책감과 자괴감도 심해 보였는데... 정의를 수호하는 기사라서 더 괴로웠을 것이다.

아버지가 제출한 일기장에는 우리도 몰랐던 그녀의 악행이 더 많았다. 공녀로 태어나 당연하다고 여기며 누린 것들. 그리고 갖고 싶은 것을 가지기 위해 저지른 수많은 일들.

나도 처음부터 콧대 높은 귀족 대우를 받고 살았다면 그리되었을까? 아니야... 그런 여자를 친모로 둔 내 쌍둥이 동생은 그렇지 않잖아.

나를 학대하는 자신들의 친모를 보고 동참한 것이 아니라 반대하고 저항한 아이들. 그건 아마도 정의롭고, 올곧게 살던 우리들의 아버지 때문이겠지?

"그 일기장은 어떻게 얻으신 거예요?"

"스타티나의 공입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친모를 용서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 계기가 그 일기장이었죠."

아버지는 씁쓸하게 웃으셨다. 스타티나가 몬테공작가에 놀러 갔다가 친모가 쓰던 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러다 비밀공간에서 이 일기장을 찾아냈다고.

어마어마한 일들에 대한 자백서나 다름없이 일기에 기록한 것이 의문이었는데 답이 나왔다. 공녀로 살던 시절 가졌던 자신만의 비밀공간.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자만했던 것이다.

제 친딸에게 들켜 경멸을 받게 될지도 모르고...

"스타티나에게 또 감사할 일이 생겼네요."

"덕분에 일주일 안에 해결될 것 같습니다."

"제 어머니의 존재는 언제 밝히실 거예요?"

"이혼 허가증이 발부되고 법적, 물리적 절차가 모두 끝난 뒤로 생존을 밝힐 생각입니다."

후작부인으로서는 뒤통수를 또 제대로 가격 당하게 되겠네. 그때는 어찌 나오려나?

"그리고 궁금한 게 있어요, 아버지."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7년 전 화재요... 다들 제 탓이 아니라고 하던데, 혹시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내 질문에 아버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째서?

역시 내 탓이 맞는 거죠? 괜히 제 편들어 주시려고 아닌척하신 거구나.

"그 화재는... 방화였습니다. 미지의 존재도 아닌 인간이 저지른 불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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