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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81화 (81/126)

81화. 황태자비의 필수 덕목은 연기.(1)

2018.06.29.

아버지는 정확히 사흘 후, 이혼을 신청하는 서류를 황실에 제출했다. 그리고 후작부인, 몬테공작가를 상대로 싸우기 시작하셨다.

당연하게도 사교계는 난리가 났다.

"비 전하, 괜찮으세요?"

사정을 모르는 볼라드 공작부인이 티타임을 가지다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현재 후작부인의 친딸로 모두가 알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황태자비의 친모가 예전에 치정 사건에 휘말려 죄 없는 귀족 영애를 협박하고, 위협하여 남자를 빼앗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남편이 성실하게 혼인 생활을 유지했음에도, 그 영애를 감금, 학대했다.

게다가 남편을 상대로 사기 결혼까지 했음이 알려져서 사교계에는 많은 말들이 돌았다.

뭐, 우리 엄마도 아니고, 후작 부인이 씹히고 물어 뜯겨도 무슨 상관이람?

내 신분은 조금 여유롭게, 황후도 완벽하게 처리하고, 후작부인과 몬테 공작도 완전히 처리되고 나서 밝히기로 했다.

나에 대해서 누구도 트집 잡을 수 없을 때, 그때가 오긴 하겠지?

그러니 일단 조금 슬픈 척 연기를 해야 하나?

"그분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이 워낙 크니까요. 황태자비란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평등해야 하는 자리인걸요. 그런데 내가 어찌 그분을 감싸겠나요?"

손수건을 꺼내들어 눈가를 닦았다.

크흐! 이 청순가련, 불쌍한 여인인척하기! 그래, 루카스 보좌관이 말했던 것이 이제야 이해가 되네. 난 연기를 잘했어. 특히 사교계에서!

"이렇게 맑고 착하신 분을 낳아놓고, 어찌 그러셨는지... 힘내세요, 비 전하."

볼라드 공작부인은 사교계에서 영향력이 크니까, 내 상황을 잘 설명해 주겠지.

솔직하게 말해 줄 수 없어서 조금 미안하긴 했다. 친하고 정칙적인 신뢰를 나누는 사이였다. 그렇지만 나의 모든 치부와 비밀을 아직은 공유할 수 없었다.

그게 조금 양심을 콕콕 찔렀다.

"내 걱정은 정말로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이런 일로 내가 타격 입을 일은 없어요. 걱정 같은 것은 개미 눈물 만큼도 안 해도 돼요."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했지만 볼라드 공작부인의 근심은 덜어지는 것 같지 않았다.

"그보다는 아카데미 후원회장 맡아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어서 오늘 부른 거예요. 헬레니아, 받아요."

나는 작게 포장된 상자를 시녀들에게 받아서 건네주었다.

"뭐예요?"

"흰 눈이 일 년 내내 녹지 않는 고산지대에서 자란다는 마카라는 뿌리 식물이에요. 뿌리째 갈아서 건조한 다음 꿀이랑 여러 가지 약재를 섞어서 만든 환이랍니다."

볼라드 공작부인은 이런 것을 왜 주냐는 눈빛이었다. 나는 흠흠 목을 가다듬은 다음에 그녀의 귀에 속삭여줬다.

"우리 카일이 부럽다면서요? 남녀 모두에게 좋은 거예요."

후훗, 이런 것을 먹는다고 우리 남편을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감사해요. 호호호."

일단 그녀와 나는 후원회를 겸한 연회를 준비하기로 했다. 원래 초겨울에 열기로 한 연회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혼 문제로 조금 당겨서 가을의 끝자락에 연회를 열기로 했다.

"초청 명단에 콘스탄트가를 넣어야 할까요?"

"흐음, 가주가 영지로 내려가긴 했지만, 공작부인과 공녀, 공자는 남아 있잖아요. 게다가 아무리 가주가 실각했다고는 하지만 전통 있는 제1공작가니까 예의상 보내야죠."

진짜 온다면 아주 뻔뻔한 사람들이 되겠지. 그런데 공작부인은 몰라도 공녀는 어쩐지 올 것 같단 말이지.

내가 카일을 노리는 다른 여자들은 다 넘길 수 있는데 말이야. 절대 이 여자는 봐주기가 싫다고!

또 망신 당하러 올 건 아니겠지? 어쩌겠어, 내 남편이 아주 잘나서 생긴 일이니 참아야지. 오면 그냥 내가 제대로 짓밟아 주지 뭐.

"볼라드 공작저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네요. 아주 설레요."

"호호호, 잘 가꿔둔 정원이 있는데 여름에 다시 와 주세요. 비 전하라면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희귀한 식물들도 많아요. 대신 복잡한 미로 정원은 상록수로만 만들어서 재미있을 거예요."

"미로요?"

"호호, 미로 정원 곳곳에 은밀하게 만든 가제보도 있어요. 문도 있고 커튼도 겹겹이라 연인들에게 아주 좋은 장소랍니다."

호오, 좋은데? 카일이랑 거기서데이트 해야지.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뻔했다. 좋아하는 티 내면 안 되는데!

나는 현재 친모가 이혼 소송에 휘말려 마음이 복잡한 황태자비이다! 세뇌를 하며 입꼬리를 내렸다.

"참, 저희 루시엘라는 일 잘하고 있나요?"

"아직 졸업 전이라 로열 아카데미 일과 번갈아 하느라 힘이 들 거예요. 그럼에도 성실하게 자신이 맡은 바를 충실히 하고 있답니다. 실무는 루카스 보좌관과 하고 있을 거예요."

"페르데우스 소백작님의 인품은 어때요?"

응? 그런 거 왜 묻죠? 조카를 괴롭힐까 걱정되는 걸까? 하긴, 연회장에서 카일을 데려갈 때마다 깐깐한 표정을 지으며 고지식함을 뽐냈지.

"조금 고지식하긴 하지만 지혜도 많이 갖고 있고, 여러모로 우리 쪽에는 유능한 보좌관이죠."

"아니, 그런 쪽 말고 남자로 어떤가 해서요. 사귀는 영애는 없어요? 그 정도 능력과 재능, 그리고 차기 황제의 총애를 받는 보좌관이니 출세도 보장됐잖아요. 여자 문제가 복잡하거나 하진 않죠? 좋아하는 이상형은요?"

응? 설마, 저런 것을 묻는 이유가 그거야?

"우리 보좌관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염문설도 없이 우직하게 일만 했어요. 어찌나 사람이 성실한지, 얼핏 보면 일 중독자 같죠."

내 설명에 볼라드 부인의 안색이 나빠졌다. 여기서 나쁜 인상을 심어 주면 안 돼! 카일이 그러는데 요즘 루카스가 노총각 히스테리로 괴롭힌다고 했어!

얼른 이 남자 짝을 지어줘야 우리 커플을 덜 방해할 거야. 게다가 가끔 보이는 그 짠한 표정. 얼마나 불쌍한데, 잘 대답하자!

"하지만 속은 정말 다정다감한 사람이랍니다. 연인이 생기면 누구보다 잘해주려고 준비 중이에요. 볼라드 공작이나 우리 카일보다야 못하겠지만, 로맨티스트의 자질을 다분히 갖췄어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자신의 하나뿐인 인연을 위해 순결을 지키는 남자랍니다."

사실 여자가 없어서 강제로 지키고 있는 순결이지만, 뭐 그렇고 그런 거지.

일단 혼인 시장에 내놓으려면 잘 포장해야 하는 법이었다. 같은 것도 잘 포장해야 팔리는 법이었다.

다행히 내 답이 흡족스러웠는지 볼라드 부인이 살짝 미소 지었다.

"저희 큰언니가 정말 아끼는 막내딸이었거든요. 그래서 하고 싶다니까 아카데미에서 공부도 시키고, 안 되면 남부 왕국으로 유학 보내서 일하게 해주려고 했죠."

젊은 공작부인에게 나이 많은 조카라고 생각했는데 큰언니의 딸이 었구나.

"언니가 불행히도 올봄에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루시엘라의 꿈을 접을 위기에 처했었어요. 형부가 졸업하면 바로 혼인을 시키려고 했는데, 비 전하 때문에 꿈을 다시 펼칠 수 있게 된 거랍니다."

볼라드 공작부인의 눈에 조카인 루시엘라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좋은 짝을 이어주고 싶은데, 그분은 일하는 여성을 싫어할까요?"

응? 그건 나도 모르는데? 시녀인 에이린을 좋아했었으니까 일하는 여자를 좋게 보는 것 아닐까?

"아마도, 싫어하진 않을 거예요."

정말 아마도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왜 자신감이 없지?

"그럼 비 전하, 둘 사이에 중매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에, 저 그런 것 할 줄 몰라요."

"그냥 자연스럽게 호감을 쌓게만 해주세요. 그럼 나중에 제가 눈치껏 혼담을 넣어 볼게요."

일단 알겠다고 고개는 끄덕였는데. 원래 중매는 잘돼야 본전 아닌가? 잘못 서면 욕먹는다던데!

아니야, 일단 루카스 보좌관이 외로워하니까 한 번 슬쩍 말은 던져봐야지.

볼라드 공작부인과 후원 파티에 초대할 귀족들의 명단을 완성하고 파티의 전반적인 방향을 잡은 뒤 헤어졌다.

"으아아아, 찌뿌둥해. 귀부인들의 꼿꼿한 자세는 정말 어려워."

"힘들어도 참으셔야죠. 이제 쉬실 거죠?"

"응? 아니, 카일 보러 갈래."

루카스 보좌관에 대해서 의논해야지. 그래, 이건 핑계다. 보고 싶어서 가는 거라고!

사실 황후파의 수족이 잘렸다지만, 아직은 견제할 일도, 수습할 일도 많았다. 그래서 내 남편 얼굴 보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카일이 가끔씩 황태자를 때려치우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해해. 평민들 만큼 육체적인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진짜 힘들 것 같아. 분명 카일은 지금 즈음이면, 성질을 부리고 있겠지?"

"그러고 계실 것 같아요."

나랑 만날 시간을 뺏은 귀족들에게 온갖 나쁜 짓은 다하고 있을지도 몰라. 남편이 갑질하고, 아랫사람들 괴롭히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남편 기운을 북돋아주자.

아니나 다를까, 카일은 귀족파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황태자비를 생각해서 이혼은 막아야 하지 않냐며 시비를 걸고 있었다.

저기요 귀족님들? 날 생각한다면 당장 이혼 시켜야 되거든요?

"카일?"

"오, 나의 비. 마음도 심란할 텐데 어찌 나를 찾으러 온 것이오?"

으, 제발! 저런 괴상한 말투 쓰지 말라고!! 올리브유에 생버터 녹여서 먹는 기분이라고요!

"비 전하, 괜찮으십니까?"

"보십시오. 전하. 저 심약하신 황태자비 전하의 얼굴에 드리운 수심이 얼마나 깊습니까?"

뭐래? 당신들 때문에 표정이 썩어들어가고 있거늘.

일단 남편을 탈출 시켜주자.

"카일, 흑..."

아, 오늘은 하루 종일 눈물 연기구나.

나는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레이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척했다. 이미 충분히 단련된 눈물 연기에 귀족들은 속는 듯했다.

자, 그럼 우리는 이만 헤어집시다.

"오 나의 비, 괜찮은 것이오? 다들 속 시끄럽게 굴지 말고 물러들 가시오."

귀족들은 카일의 엄포에 줄지어 나갔다. 내가 눈물을 보였고, 날 아끼는 카일이 자신들의 주장을 들어 주리란 믿음을 갖고 나갔겠지.

믿음은 개뿔. 그들이 나가자마자 손수건을 걷어들고 카일을 구박했다.

"제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느끼한 말투 자제해요. 내가 도저히 연기에 집중을 못 하겠잖아."

"왜? 널 애지중지하는 것 같이 보이지 않아?"

"누가 그런 아저씨 말투로 이야기하는 게 애지중지로 보인대요? 느끼해서 미칠 것 같아."

내가 팔을 비벼대며 경악하자 카일이 조금 삐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내 속에는 가학성이 숨어 있어. 저렇게 뽀로통한 표정이나 안절부절 하는 것을 보면 즐겁단 말이지.

"당신 보고 싶어서 왔는데, 늙은 귀족들 뿌리치지도 못하고 있고. 도대체 우리 데이트는 언제 해요?"

단순하신 내 남편님은 보고 싶어서 왔단 말에 고새 얼굴이 헤 풀렸다. 이 맛에 남편을 조련하는 것인가.

"이제 볼일 끝났으면 산책해요. 나 할말 많아요."

나는 카일의 근육질 팔에 살짝 팔짱을 걸었다. 그러자 카일은 언제나처럼 듬직하게 사진의 팔을 내어주며 날 에스코트했다.

친밀한 자세로 딱 그에게 붙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줬다. 그런 우리의 뒤를 오늘의 내 호위인 프리케와 테일러가 멀찌감치 떨어져 따라왔다.

"루카스님 이상형이 뭔지 모르는 거예요?"

"글쎄, 잘 모르겠어. 여자면 다 좋은 것 아닐까?"

"흠, 루시엘라를 좋은 남자에게 소개해야 할 텐데 말이죠."

"좋은 남자라면 어떤 사람?"

"그녀의 일을 존중하고 지지해 줄 사람이요."

"루카스는 내조 잘해주는 여자를 좋아할걸?"

아, 그런 것인가? 당사자에게 확인해 봐야겠지만, 루시엘라는 안 될 수도 있겠다. 카일이 단번에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저기, 비 전하? 실례가 안 된다면, 플로랄 영애를 제게 소개해 주시면 안 됩니까?"

"에? 네?"

테일러경이 이렇게 여자문제에 적극적일 줄 몰랐네. 흐음, 볼라드 부인에게 기사도 괜찮은지 물어봐야겠다.

"일단 루시엘라의 의향을 확인해 볼게요. 그런데, 일하는 여자 괜찮아요?"

"저도 호위일 하면 집을 자주 비울텐데 심심하게 저택에 갇혀 지내는 것보다 낫겠죠. 게다가 그녀라면 비 전하의 측근이라 근무지가 가까우니 더 좋지요."

아, 이 남자, 진보적인 사상이 있네. 좋아. 솔직히 보좌관보다는 우리 기사단장이 나은 것 같아.

우리는 나름 즐겁게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산책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테일러경이 루시엘라의 짝으로 마음에 들었다. 볼라드 부인에게 편지를 써야겠어. 루시엘라에게 호감을 가진 남자가 있는데 먼저 소개해도 되냐고. 헤헷.

"프리케도 장가가야 하는데."

"전 됐습니다."

"자네, 내 동생을 받아달라니까. 나는 나보다 약한 놈에게 우리 유리아를 시집보낼 수 없어. 부탁하네."

호오? 괜찮은 조합인데? 테일러경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여요!

"루카스는 당분간은 계속 혼자겠군."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카일이 한마디 무심히 던졌다. 음, 조금 찔리지만 모른 척해야겠어.

도란도란, 티격태격 다 함께 산책을 끝내고 만월궁 입구로 돌아갔다. 그런데 입구에 가까이 갈수록 시끄러운 소음이 들렸다.

"무슨 일이지? 카일? 테일러경? 프리케?"

소드마스터인 셋은 이 소음의 정체를 알고 잔뜩 인상을 구긴 상태였다.

"저희가 앞장설 테니 비 전하께서는 전하와 뒤로 물러서시지요."

프리케와 테일러는 우리 부부의 앞으로 나섰다. 두 기사는 형형한 눈빛을 쏘아대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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