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80화 (80/126)

80화. 알리페르의 아픔(2)

2018.06.28.

"알리페르! 왜 그래?"

다들 안절부절 알리페르를 쳐다봤다. 뭐지? 서프라이즈 파티가 처음이니? 아니면 뭐 서운한 것 있어? 한창 감수성 예민할 열아홉살인가?

"죄송합니다. 오늘 누님의 친모를 뵙고 나서 제 탄생에 대해 자괴감을 느꼈었나 봅니다."

다행히 빠르게 감정을 수습한 알리페르는 우리에게 사죄했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내 어머니가 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직접 대면하고 더 큰 죄책감을 느끼겠지. 우리가 아무리 괜찮다고 했지만 마음속의 상처가 바로 봉합됐을 리 없었다.

어째서 부모대의 잘못으로 자식까지 고통을 받아야 할까? 후작부인은 어째서 이렇게 자신의 자녀들까지 아프게 만들었을까?

"나는 너로 인해 내가 가족의 소중함을, 혈육에 대한 믿음을 알게 됐는걸. 너와 스타티나가 태어나 주어서 그래서 나는 너무 고맙고, 행복해. 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남동생이야, 펠. 그리고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의 사랑하는 연인이고."

내 말에 펠은 촛불이 켜진 케이크를 들고 어쩔 줄 모르는 에이린을 올려다봤다. 에이린은 속상한 마음에 약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렇네요. 못난 꼴 보여서 미안합니다, 린. 당신을 위해서라도 제가 더 단단히 중심을 잡고 있어야 했는데, 바보 같았네요."

"아니에요. 펠이 이러는 거 저는 충분히 이해해요. 비 전하는 예전에 더한 삽질도 했지만 곁에서 지켰는데요 뭘."

응? 에이린, 그건 좀 내 욕 같다? 하지만 부정을 못하겠어, 크흑. 내가 더 삽질을 많이 하고 매번 땅속에 스스로를 파묻으려 하긴 했지.

긴 세월 동안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저주받았다고 자책하고 암흑 속에 날 가뒀었으니까. 변명할 거리가 없네. 쳇.

하지만 그래서 지금 알리페르에게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줄 수 있는 용기와 위로가 뭔지 알았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내 친구의 연인이라서 고맙고, 내 동생으로 태어나 줘서 더 고마워. 사랑해, 소중한 내 동생 알리페르. 생일 축하해."

사랑해라는 말에 카일의 얼굴에는 살짝의 불만이, 프리케의 얼굴에는 부러움이 떠오른 것을 확인했다. 이 인간들이 정말!

내 말에 알리페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자신의 연인이 내미는 케이크를 향해 후, 바람을 일으켰다.

코를 살짝 쏘는 알싸한 촛불향이 번지자 우리는 열렬히 박수를 쳐줬다. 그리고 프리케는 하극상을 일으켰다.

"축하합니다, 부단장님!"

케이크를 뒤집어쓴 알리페르는 수하의 장난에 화내지 않고 웃음으로 화답했다. 뭐, 약간의 반격은 덤이었다.

아름답게 제 얼굴에 묻은 케이크의 크림을 프리케에게 발라주었다. 옆에서 그 꼴을 보며 껄껄대던 카일의 얼굴에도 크림은 날아왔다. 결국 난장판이 되었다. 하아...

"유치해 이 남자들."

"그러게요, 하아. 내 남자가 저리도 눈물 많은 개구쟁이인지 꿈에도 몰랐네요."

에이린과 나는 절레절레 박자를 맞춰 고개를 저었다. 어휴, 저것들을 진짜!!

이제 식사용 나이프가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가면 전쟁이 시작되겠어. 말리자. 에효.

"자, 다들 이제 그만! 이제 생일파티를 제대로 시작하죠. 카일? 정리해요, 얼른."

내 목소리에 세 남자의 유치한 싸움은 겨우 멈췄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꼴을 보며 마구 웃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자신들의 바보스러운 꼴을 눈치챘구나, 쯧쯧.

카일이 운디네를 불러 더러워진 모습을 정리했다. 그리고 우리는 즐거운 만찬을 시작했다.

"펠, 너 오늘 운 거 스타티나가 알면 무지 놀리지 않을까?"

"크크, 그 아가씨 성격이라면 부단장님을 두고두고 놀릴 것 같은데요?"

"그, 그렇겠죠?"

에이린이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고는 날 노려봤다. 어쩌라고? 네 연인이기 이전에 내 동생이라서 놀리는 거... 미안, 그만할게.

"자, 요리사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요리야. 내가 만들 줄 아는 요리는 만찬용이 아니라서. 대신 디저트는 내가 아침에 만들어 둔 거야."

펠이 조금 서운해해서 다급하게 외쳤다. 우리는 약간의 샴페인을 축하주로 해서 즐겁게 먹고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에이린, 프리케와 작은 생일파티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파티가 더 즐겁고 좋았다.

혈육의 정이라는 거, 이렇게나 깊고 진한 것이었어. 너무 늦게 알아 버린 것이 아쉬울 만큼.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샴페인은 마구 마셔도 될 것 같아.

"세이, 샴페인 그만 마셔."

"매형, 도수도 낮은 술인데 마음 껏 마시게 하시죠?"

내가 뾰루퉁한 표정을 짓자 알리페르가 내 편을 들어줬다. 남매는 용감했다! 황태자한테 반항하자!

"그러게, 이 맛있는 것을 자기만 먹으려고 하고. 수확제 때도 농민들이 만들어준 맥주라는 술도 못 먹게 했어."

"처남, 자네 누이는 샴페인 두 잔에도 취해."

"좀 취하면 어때요? 기분 좋은 날인데."

내가 억지를 부리자 카일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계속 째려보자 어쩔 수 없이 카일이 양보했다.

"황태자께서는 비 전하가 취한 모습을 혼자서 보고 싶어서죠?"

프리케의 말에 내가 뭔 소리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러자 프리케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때, 탄생연때 테라스에서 보였던 비 전하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어한다는 소리입니다."

아, 쟤 소드마스터였지? 테라스에서 내가 카일한테 반말과 투정의 콤보로 흑역사를 쌓은 것을 다 듣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그때 그러고 키스도 했는데!

"야! 너 입다물어!"

"전하, 전하의 반려께서 이미 취하신듯 한데요?"

이씨! 저게!

결국 나는 수확제에 이어 오늘도 술을 빼앗기고 말았다. 쳇, 언제나 애 취급이야! 나쁜 카일.

남편이 서열 1위라는 것은 여러모로 피곤했다. 내 의지와, 내 의사는 그의 단호함으로 차단된다니까.

"자, 이제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선물 증정식을 해야지."

카일의 말에 알리페르를 제외한 우리는 눈을 반짝였다.

먼저 프리케는 단검을 선물했다. 날이 잘 버려진 것 같아 보이는 것이 꽤 좋아 보였다. 보석 세공도 섬세하고, 비싸 보이는데?

"프리케경, 이 검은 혹시 루피넬리아 왕가의 보물 아닌가?"

"보물까진 아니고, 어쨌든 선왕이 제게 준 선물이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꽤 이쁨 받는 손자였거든요."

응? 그런 것이면 프리케의 신분을 증명하는 물건 아냐? 막 줘도 되는 거야?

"그리 귀한 것을 내게 줘도 되는 것인가? 게다가 자네의 신분을 되찾을 때 필요한 것 아닌가?"

"할아버지께 받은 물건은 그것만이 아니라서요. 그리고, 혹시나 제가 없을 때 비 전하를 잘 지키라고 드리는 겁니다."

"프리케, 어디 가?"

내가 깜짝 놀라 묻자 프리케는 조금 쓸쓸하게 웃었다. 무슨 일이지?

"제가 매일 호위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말끝을 살짝 흐리는 것이 영 수상한데? 뭐, 언젠가는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은 했다. 게다가 그 나라의 국민들이 고통 받는다니까, 프리케가 왕이 되면 좋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프리케는 무력도 강했지만, 나 같은 별 볼 일 없는 사생아를 친구로 삼은 인정 많은 사람이니까.

불쌍한 사람을 향한 측은지심, 그것은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배웠다. 프리케는 그런 면에서 현재 북부 왕국의 왕자들 보다 훌륭한 왕재였으니까...

언젠가는 보내줘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 순간이 빨리 오려나 보았다.

"자, 이번에는 내 차례군. 처남, 받아. 황실 수석 대장장이가 1년이나 담금질하고 연마해서 만든 검이야."

카일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검을 꺼냈다. 저런 것을 도대체 어떻게 한 손으로 번쩍 드는 거지? 아까 시종들 세명이서 낑낑대며 나르는 것 봤는데.

"무게가 제법 나가거든. 이 검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면, 그땐 처남도 소드마스터가 되어있지 않을까 싶어."

알리페르는 기사로의 긍지를 갖고 사는 청녕답게 크게 감동받은 눈치였다. 아버지를 뛰어넘는 기사가 된다는 꿈과 희망은 젊은 내 동생에게 살아갈 목표가 되겠지.

친모 때문에 생긴 자괴감 같은 것은 잊었으면 좋겠어. 내일은 축복받아야 하는 네 생일이잖아.

"자, 그럼 이번에는 내 차례야."

에이린이 선물을 꺼내려는 것을 막고 내가 먼저 이야기했다. 에이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항의하려 했지만 사뿐히 무시했다.

"아나이스!"

내 부름에 흰 까마귀가 날아왔다. 조금 성의 없이 선물하는 느낌이 들려나? 실제로 투자한 돈은, 이 아이의 먹이밖에 없었으니까, 크흠.

"아나이스가 똑똑한 새인 것 알지? 원래도 사람 말을 거의 다 알아들었는데 내가 훈련도 열심히 시켰어. 전령새로도 손색이 없을 거야. 예전처럼 전투에 참여할 수도 있을 것이고."

기사들에게 이 새는 진짜 어마 무시한 전운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새가 되어 있었다. 그런 새라면 미래의 비스 기사단장이자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될 알리페르에게 어울릴 거야.

"너, 사실 동물, 식물들 키우는 것 좋아하는 거지?"

단지 후작부인이 질색해서 참고 살았던 것이었다. 이제 제 어미의 품에서 벗어나서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해. 우리 펠, 그래도 돼. 알았지?

"나랑 이어진 이 작은 생명이 너랑도 깊은 인연이 되어서 우리 남매의 우애가 계속 연결됐으면 좋겠어. 너와 나는 피가 반만 이어졌지만 누구보다 가까운 남매잖아."

내 말에 알리페르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손을 내밀었다.

"아나이스, 잘 부탁한다."

"까악!"

펠의 손에 내려앉은 하얀 까마귀는 제 새 주인의 냄새를 킁킁 맡더니 머리를 비볐다. 역시 아나이스도 펠을 좋아하는 것이 맞았구나.

펠이 조금은 아픔을 잊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완전히 떨쳐 낸 것이길 바라.

"자, 이제 후식을 후다닥 먹고 우리는 자리를 피해주자고요. 생일파티의 마지막은 연인끼리 보내야죠."

에이린, 네가 알리페르를 위한 마지막 선물이야. 그러니 둘이서 오붓한 시간 오래오래 보내.

흐음, 이틀 연속 알리페르가 외박하면 후작 부인이 난리 치려나? 난 몰라. 알아서들 밤새 성을 쌓든, 영혼의 교감만 나누든 알아서 해.

우리는 진짜 빛의 속도로 후식을 먹어치운 뒤 만창장을 빠져나갔다. 프리케는 테일러경이랑 볼일이 있다며 먼저 가 버렸다.

미뤄왔던 대련이라도 즐겁게 하나 봐.

나와 카일은 손을 꼭 잡은 채 후원을 산책하기로 했다.

"어제 아버지랑 펠이랑 뭐했어요?"

"밤새 국정에 대한 토론을 했는데?:

"네? 뭐예요 그게?"

남자들끼리 할 일이 많이 없었겠지만, 이게 뭐야, 진짜. 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남자 셋이서 하하 호호하며 수다 떠는 것도 웃기잖아. 후작이 이혼 신청을 하면, 사교계도 발칵 뒤집어질 거고, 특히나 몬테 공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서."

흠, 그건 그랬다. 후작부인이 아버지께 반한 것은 외모였다지만 그것을 부추긴 것은 공작이라 했다. 귀족 가문들 중에서 가장 든든하고 충실한 기사단을 가진 것이 비스 가문이었다.

여동생을 부추겨서 겨우 얻었던 비스가였는데 그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악할지도 모르겠네.

불똥이 내게 튀지 않으면 다행이지. 느낌에 아버지가 황실에 이혼 허가서를 요청하는 순간 우르르 찾아오진 않을까?

"일단 알현 요청이 있으면 나랑 함께 만나야 해, 알겠지?"

"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가 널 언제나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카일은 날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뭔가 찌르르 마음을 울렸다.

어제 어머니와 나눴던 케이에 대한 대화가 떠올랐다. 내 주변에 있을 거라고, 프리케는 아닐 거라는 말.

"언제부터 날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너는 내가 지켜야 할 요정이었어."

갑자기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정말로 카일이 케이이면 좋겠어. 그런데 섣불리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니면 혹시나 다른 남자를 추억하는 나 때문에 속상해 할까 봐. 카일이 케이이면 좋겠지만, 아니라고 해서 내가 카일에게 실망하거나 하진 않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카일의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지도 몰라. 다른 남자의 흔적을 자신에게서 찾는다면 얼마나 마음 상하겠어.

그러니 증거를 찾고, 기억을 찾자. 케이에 대한 기억이 많이 떠올랐지만 아직 얼굴이나 다른 정보는 기억하지 못했잖아.

카일이 케이라는 확실한 증거나 기억을 찾으면, 그때는 카일을 놀라게 해 줘야지.

"왜 이렇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실까?"

"하룻밤 못 봤다고 그리워서요."

"흐음, 그럼 오늘 밤은 자지 말고 밤새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까요?"

"얼굴만 보겠다면 환영이죠."

"아, 실수. 난 그러면 말라죽을지도 몰라."

진지한 그의 표정에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귀여운 그의 입술을 훔치며 낯 뜨거운 요구를 했다.

"그럼 얼굴도 보면서, 당신이 좋아하는 일도 당장 해야겠네요. 내 남편 말라죽음 내 손해니까."

그의 품에 안겨서 또 3층 침실 창문까지 날아가면서 잠시 하늘을 봤다.

평화로운 밤하늘의 한 쪽은 구름이 조금 끼어있었다.

내 마음을 쏙 빼닮았어. 아마 아버지의 이혼문제로 복잡해질 일들 때문이겠지.

그래도 날 이렇게 단단히 안고 있는 남자와 함께라면 잠깐의 먹구름 정도는 금방 걷힐 거야.

"절대로 안 재우고 괴롭힐 거야."

비록 약간 변태 기질은 있지만, 뭐, 능력 있는 남편이니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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