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79화 (79/126)

79화. 알리페르의 아픔.(1)

2018.06.27.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바로 직행한 곳은 만월궁의 주방이었다.

"저기, 요리사님들? 내가 오늘 아침은 직접 만들어서 손님 대접을 하고 싶은데..."

사실 귀족 여인이, 아니 그것도 황족이 직접 요리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카일의 도시락이야 어쩌다 한 번이었고, 내조하는 일이었으니까 괜찮았지만.

"귀하신 황태자비께서 이런 하찮은 일을 하시다니요."

"요리가 왜 하찮은 일이지? 누군가의 건강을 지키고, 소중한 사람을 대접하는 뜻깊은 일인데!"

아무렴, 내 입을 호강하게 하고, 날 웃음 짓게 하는 것이 요리이거늘! 천상의 세계로 초대하는 이 요리들을 어찌 하찮다고 할 수 있겠어??

내 말에 안절부절못하던 요리사들은 눈이 초롱초롱 맑아졌다. 그러면서 서로 요리를 도와주겠다고 달려왔다. 하하하.

이미 내가 내린 상들로 치장한 나의 충실한 요리사들이었는데, 더 심한 추종자로 만들고 있구나.

"아침 식사로는 가벼운 샐러드와 오믈렛이 좋습니다."

"거기에 베이컨이나 야채도 구워서 먹으면 든든합니다."

"고기 파이는 어떠세요?"

"토스트도 맛있습니다. 달걀물과 우유에 적신 빵을 달달하게 구워드셔보세요."

으아아아. 정신없어. 나는 시끄러운 와중에 신중하게 고민을 해서 식단을 정했다.

오믈렛과 연어 샐러드, 그리고 그릴에 구운 소시지와 포도 주스.

흐음, 나쁘지 않은 조합이야.

불에 대한 공포도 많이 사라져서 이제 무섭지 않... 을 리가 없지만 긴장돼. 나는 조심스레 달걀물을 팬에 둘렀다. 살살 휘저어가면서 예쁘게 말아냈다.

역시, 나는 자수 빼고 다 잘하는 것 같아!!

소시지도 칼집을 낼 차례였다. 요리사들이 다칠까 봐 칼을 주지 않으려 해서 난감했다. 결국 작은 스테이크 용으로 칼집을 내야 했다.

쳇, 내가 무슨 팔다리에 힘 없는 가녀린 영애도 아닌데, 여길 가나 저길 가나 다 과보호인 거야?

샐러드도 예쁘게 만들어 냈고, 디저트는 요리사들에게 부탁했다. 테이블에 예쁘게 차려지는 동안 나는 옷을 갈아입고 어머니를 깨웠다.

시녀들과 함께 어머니를 가볍게 단장시킨 뒤, 만찬장으로 내려갔다.

내가 사랑하는 세 남자들도 이미 와 있었다. 나와 어머니가 환히 웃으며 들어가자 세 남자도 미소를 보내 주었다. 그런데 알리페르는 긴장해서 어색한 미소였다.

"알리페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르세이아에게 들었어요. 후작님 못지않은 기사도를 가진 멋진 기사라면서요? 게다가 세이에게도 따뜻하게 대해주고요."

어머니의 칭찬에 알리페르는 잠시 얼굴을 붉혔다. 그러더니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제 어머니가 드린 상처와 고통, 저라도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어머니는 급히 알리페르의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셨다. 나도 너무 놀라 펠의 팔을 잡았다.

고개를 숙인 알리페르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도 아니면서,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펠은 우리 모녀의 죄인을 자청했다.

"펠, 네가 한 잘못도 아닌데 이러지 마."

내가 울상이 되어 이야기하자 카일도 거들었다.

"처남, 아침식사를 앞두고 이러면 누구도 편치 못해."

이 인간이 자기 집안일 아니라고 그런 식으로 말하냐!!

"자네의 누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요리가 식는다고!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자네도 포함인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이건 마음에 드네.

"도련님, 일어나세요. 도련님은 내게 잘못한 게 없는데 어째서 사과를 하는 건가요?"

펠은 조금 흐느끼는 듯했다.

자신의 어머니의 만행에 질려서 가출해 버린 스타티나, 그리고 그의 쌍둥이 동생. 괜찮다고 말해 왔지만 얼마나 괴로웠을까…?

"펠, 나는... 우리 모녀 때문에 너랑 스타티나가 불행해지거나 슬퍼진다면... 네 어머니를 용서할 수도 있어. 물론 그분이 먼저 사과를 해 줄 경우겠지만."

"아닙니다. 누님, 절대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자식인 저를 미워하셔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바보같이! 내가 사랑하는 남동생을 미워할 리가 없잖아."

"내 딸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저도 미워하지 않아요. 도련님."

펠의 숙인 고개가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스스로를 저주받은 존재라고 학대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펠의 심정도 그렇지 않을까? 자신들이 태어남으로 우리 모녀가 박해받았다고 생각하겠지?

"펠, 나 너랑 사랑하는 사람들 위해서 아침을 준비했단 말이야. 아버지랑 카일은 먹어봤거든? 얼른 먹고 맛있는지 평가해줘."

"누님..."

고개를 살짝 든 펠의 눈이 빨개져 있었다. 나는 그런 동생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이마에 키스를 해줬다.

"얼른 일어나. 누나가 해준 밥 먹어야지?"

내가 빙그레 웃어주자 펠의 녹색 눈도 살짝 휘어졌다. 낑낑대며 펠을 일으키는데 카일이 살짝 인상 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 왜? 가족 간에 화목을 도모한다는데 왜 그런 표정이에요?

우리는 만찬장으로 들어가서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뭐, 코스요리는 아니었으니까, 준비한 요리는 개인 접시에 보기 좋게 담아져서 앞에 차려졌다.

에궁, 우리 요리사들, 요리가 식지 않도록 잘 보관해주셨네. 최고야! 나의 추종자들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든단 말이야.

"솜씨는 없지만 준비해 봤어요. 아침이라 부담 없는 요리들로 준비했는데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내 말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훌쩍 큰 딸의 요리를 맛있게 드셔주셨다. 헤헤, 좋구나. 이렇게 요리해서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일이 좋을지 몰랐어.

카일에게 몇 번 도시락을 만들어 줄 때와는 또 다른 뿌듯함이었다.

"카일, 맛없어요? 왜 깨작대요?"

"아직 나도 오늘 모닝키스를 못 받았는데, 처남이 먼저 받았잖아."

저기, 내 손에 나이프가 쥐어져 있는데, 던져도 되나요?!

하아아, 어머니 앞에서 좀 듬직한 모습으로 있으면 안 되겠니? 내가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잖아!!

내가 찌릿하고 째려보자 카일은 급히 포크를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에 어머니는 웃음을 애써 참는 듯했다.

다행히 펠은 우리의 이런 모습에 평소의 미소를 되찾았다.

"누님과 매형의 일상이니 이해하십시오. 저기, 그, 어머니."

"펠!"

"도련님."

어머니라는 소리에 다들 놀라 펠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어머니는 손으로 입을 막을 만큼 울컥하신 모양이었다.

"사랑하는 누님의 어머니이시자, 제가 존경하는 제 아버지의 진짜 반려가 되실 분이지 않습니까."

조금은 조심스럽게 말하는 알리페르였다.

"고마워, 펠, 너무너무."

"감사해요, 도련님."

"장모님, 앞으로 진짜 아들이 될 녀석에게 도련님이 뭡니까? 그냥 이름을 불러줘야 처남도 마음이 편하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장인어른."

"지당하십니다. 리아, 전하의 말씀이 맞아, 펠도 이제 곧 당신 아들이 될 테니까 이름을 불러."

펠도 얼른 그래 달라는 눈빛으로 자신의 녹안을 반짝 거렸다. 가끔 보면 펠도 어린아이 같아. 훗

"아, 알리페르. 고맙구나."

"네, 어머니. 더 편해지시면 애칭으로도 불러주십시오."

아침 식사 시간은 훌륭한 내 요리만큼, 행복하고 즐겁게 끝냈다.

여기에 스타티나도 함께 했으면 좋을 텐데, 조금 아쉽네. 아버지랑 카일에게 스타티나가 얼른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해야지.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나는 어머니에게 열심히 수를 배웠다.

그리고 좌절했다. 내 손은 어째서!!!!

과연 나는 오매불망 손수건을 기다리는 네 명의 남자들에게 손수건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인가!! 망했어.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 같아.

"세이, 혈육에게는 뭔가를 가르치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어미가 이제야 깨달았구나. 하아."

"어머니, 힝."

어머니마저 포기하셨다. 으아아앙. 내 손가락은 왜 이 모양이니. 먹을 때와 만들 때 말고는 쓸모가 없다니!!

골무가 없었다면 온통 바늘자국으로 가득 채워졌을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잔뜩 기대하던 남편, 동생, 아버지, 시아버지를 볼 낯이 없구나.

시간은 어느덧 흘러 어머니가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오늘도 내 선물로 준비된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어머니는 상인들의 행렬에 섞여 돌아갈 것이다.

아버지가 붙여준 비밀 호위에, 카일까지 호위를 더 붙여주었다. 안전하게 돌아가겠지만, 보내기 싫어.

며칠만 더 계시면 안 될까? 7년 만에 만났는데 너무 빨리 헤어지는 거잖아. 가지 마세요. 안 가면 안 돼요?

나의 투정 어린 눈빛을 읽은 카일이 내 등을 도닥여 줬다. 어머니도 나를 꼭 껴안아 줬다.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비 전하. 의젓하게 기다리셔야 해요. 아셨지요?"

"곧, 이혼 절차에 들어갈 것이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네,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은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셨다. 그리고 나를 한 번 더 안고 볼에 뽀뽀를 해준 뒤 떠나셨다.

"누님, 괜찮으십니까?"

"응. 이제 우리 남매 모두 힘든 일이 이어질지도 몰라. 잘 견디자. 남매니까, 가족이니까 함께. 알았지?"

"네, 누님."

부모님을 돌려보내고 나는 카일, 알리페르, 에이린과 오랜만에 산책을 했다.

내일은 내 쌍둥이 동생들의 생일이었다.

하지만 황태자비의 탄생연이 취소되었기에 알리페르도 떠들썩한 생일파티는 못하게 되었다. 그게 미안했다. 탄생연이 열렸으면 같이 축하받았을 건데...

뭐, 생일파티는 우리끼리 신나게 하면 되는 거지!! 그래서 알리페르를 남긴 것이다.

물론, 생일파티니까 서프라이즈로 해야지. 만찬장에 케이크와 각종 장식들을 준비해 뒀다. 알리페르가 좋아하겠지?

"에이린, 나 숄 좀 갖다 줘. 추워."

가족인 나보다는 연인이 서프라이즈 해주는 쪽이 좋으니까. 자, 에이린 얼른 가서 초에 불붙이고 준비하고 있어.

"린, 저도 같이 가죠."

이 눈치없는 녀석이! 넌 못가, 가면 안 되거든?

"처남, 오늘 세이의 호위는 자네 아닌가? 나 잠깐 급한 볼일이 있으니 세이 곁을 지키고 있지?"

역시 내 남편. 이 정도면 쟤가 눈치채지는 못 했겠지? 좋아 남편 최고다! 알리페르는 당연히 나의 호위를 충실하게 섰다.

"스타티나도 내일이 생일인데, 잘 지내고 있겠지?"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그렇다고 합니다. 너무 잘 지내서 탈이라던데요?"

"무슨 사고 친 것 아니지?"

"빨리 제국의 문제들 해결하랍니다. 자기 결혼식 해야 한다고 했대요."

어? 어? 진짜? 어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더니 그런 거였어?

"제국의 남자인가 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너랑 에이린이랑 합동결혼식 어때? 쌍둥이니까."

내 말에 알리페르는 인상을 구겼다. 왜? 내가 실수했니?

"쌍둥이라서 생일파티도 늘 함께했는데 결혼식까지요? 싫습니다. 지겨워요. 떨어져서 살고 싶어요. 이란성인데도 한 세트로 묶는 것 지긋지긋해요."

그렇구나. 쌍둥이들에게는 그런 고충이 있구나. 몰랐어. 나는 늘 함께할 친구 같은 동기가 있어서 마냥 좋을 줄 알았지.

"흠, 내가 배려를 못했네. 그럼 네 결혼식은 황태자비의 시녀와 황태자비의 호위의 결혼식이 될 테니까 내가 준비할게. 둘이 첫날밤 보낼 방도 내가 꾸며야지."

내 말에 알리페르의 얼굴이 아주 붉어졌다. 어머어머, 얘 보게? 이 정도에 얼굴이 빨개지고 그러니? 호호.

"고맙습니다, 누님."

자,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에이린은 왜 돌아올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알리페르, 추운데 이만 돌아가자. 배도 고파."

"네, 그러지요."

"에이린한테 무슨 일 있는 걸까? 가다가 넘어지기라도 한 거 아냐?"

내가 슬 던진 말에 알리페르의 얼굴이 살짝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조금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만월궁의 입구에서 카일까지 합류한 우리는 사라진 에이린을 찾기로 했다.

"비 전하께서 배고프실까 봐 식사 준비한다고 만창장으로 가는 듯했어요. 그런데 발을 살짝 절던데요?"

유리아도 연기 잘하는구나. 작전대로 말 잘하네! 알리페르는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동생님 그리도 걱정돼요?

"펠, 얼른 내려가봐, 카일 있으니까 내 호위는 걱정하지 말고."

내 허락에 알리페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듯이 뛰어갔다. 우리도 그런 펠을 바짝 쫓아갔다.

아, 신나! 깜짝 놀라겠지? 좋아했으면 좋겠다. 프리케도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자, 다 같이 서프라이즈!

"생일 축하해요, 펠."

"축하합니다. 부단장님!"

"내 동생, 축하해!"

"처남, 축하해."

펠은 초가 꽂혀있는 케이크를 보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런 그의 입꼬리가 움찔움찔 떨리기 시작했다.

웃음이 나오지? 행복하지? 어라? 펠! 왜 울어?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