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78화 (78/126)

78화. 그립고 그리운 사람. (3)

2018.06.26.

"어머니, 이것 좀 드셔보세요."

나는 최고의 식단으로 저녁 만찬을 준비했다. 이 자리에는 카일과 아버지도 함께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권유했고, 어머니는 내가 건네주는 것을 받아먹어주셨다.

그런 나를 섭섭한 눈으로 쳐다보는 남자들이 있었다.

"카일, 카일은 나한테 많이 받아먹었잖아요. 자, 아버지 드세요."

아버지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내가 덜어주는 것을 받아 드셨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타박하셨다.

"사위 앞에서 주책이에요."

"나는 소중한 큰 딸을 제대로 보듬어 보지도 못하고 황태자께 뺏겼다고. 리아, 그대가 오기 전에 전하가 얼마나 날 자주 놀렸나 모를 것이오."

아버지는 내가 알던 조금은 근엄하신 기사의 모습을 벗어던지셨다. 애초에 냉랭하고 차가운 분은 아니셨지만, 음... 다른 사람인 거 아니지?

아버지는 매일 회의가 끝나고 내가 카일에게 잘 해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이 상하셨다고 했다.

하여간에 저 인간이 화근이야!

내가 찌릿 째려보자 고기 써는 척 접시만 바라보는 모습에 어머니가 기분 좋게 웃으셨다.

"세이, 네 남편은 후작님보다 더 사랑꾼이구나?"

"아버지도 그러셨어요?"

후작부인과는 의무적인 부부셨기에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걸로 알았다.

"그럼, 얼마나 로맨틱한 분이셨는데? 신분차를 극복하기 위해 네 할아버지와 싸우던 모습은 정말 멋졌단다. 그러고 보면 전하께서도 우리 세이를 위해 고생 많이 하셨네요."

"아닙니다, 장모님. 사실 저희가 함께 하기까지 장인어른과 처제가 고생을 많이 했지요."

스타티나의 이야기에 어머니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지셨다. 후작부인이 걱정돼서 일까?

"스타티나는 잘 지낸대요. 카일이 보호하고 있댔어요."

"널, 참 많이 좋아했지, 그 아이는."

"스타티나의 쌍둥이인 알리페르도 절 많이 좋아하고 존중해 줘요."

"그런 아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지도 모르겠구나."

잠시 만찬장에 침묵이 흘렀다. 스타티나, 알리페르. 둘 다 자신들의 어머니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피를 나눈 부모인데, 진심으로 괜찮을 리가 없잖아. 자신들의 신분이나 평판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들에게 세상의 빛을 보게 해준 이에게 닥칠 불행이 아닌가...

"다, 내가 어리석었던 탓이야. 그러니 리아, 당신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소."

"그래요, 어머니. 둘은 괜찮다고 했어요."

"내가 그때 숨어버리지 않았다면 세이도, 당신도, 그 아이들도 불행하지 않았을 텐데요."

어머니도 나름의 죄책감에 시달리고 계셨다. 피해자이면서, 가장 고통받은 삶을 사셨으면서... 같은 부모이기에 남의 자식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시는구나.

"장모님. 장모님이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세이도 장모님도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허니 죄책감은 밀어 넣어두셔도 됩니다."

카일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도 그런 카일의 말에 동의하면서 어머니의 손을 꼭 잡으셨다.

"이혼으로 끝내려고 준비 중이니 걱정 마오. 프리케가 그 간악한 사제와 펠의 어미가 결탁한 증거를 수집해 왔소. 그리고, 나를 속여서 미약을 먹인 일도 오래된 일이지만 증인을 확보해 뒀다오. 당신과 당신의 가문을 핍박한 일도 이미 증거가 확보되어 있고."

아버지는 이혼으로 끝을 내고 싶어 하셨다. 어쨌든 아끼는 다른 자식들의 친모이니까 죄를 이유로 망신을 주거나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은 없다고 했었다.

"법적인 죄를 묻지 않고 얌전히 이혼만 하게 할 테니 나머지 아이들에게 너무 큰, 마음의 짐은 갖지 않았으면 좋겠오."

아버지는 어머니를 다독여 주셨다. 그 눈빛이 카일이 날 격려해줄 때를 닮았다. 어머, 그러고 보니 두 분도 죽고 못 사는 연인이셨는데, 흐으음.

"그런데 아버지, 오늘 어머니 저한테 양보해도 되는 거예요?"

내가 장난스럽게 물어보자 두 분의 얼굴이 빨개지셨다. 헤에에에, 뭐지 나까지 흐뭇해지는 이 기분은?

"크흠, 비 전하도 참, 이 아비를 놀리니 좋습니까?"

"아버지도 카일 못지않은 로맨티스트라면서요. 제 남편은 분명 지금 속으로 오늘 밤 독수공방할 생각에 괴로워할 걸요?"

"안 그래도 그래서 그냥 장인어른이랑 밤이나 샐까 싶어. 장인도 오늘은 황궁에서 머무시죠?"

"그럴까요?"

두 사람 다 집착남이 아닐까 싶었다. 저 무서운 남자들!! 우리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라니!!

결국 두 남자는 알리페르까지 끌어들여 셋이서 술 마시며 체스도 두고 그러기로 했단다. 아니, 멀쩡한 펠은 왜 끌어들이냐고!!

남자들이 사라지고 내 방에는 어머니와 나만 남았다. 에이린, 유리아, 모일라 세 명만이 우리를 시중들어 주었다. 오랜만에 어릴 때처럼 어머니와 함께 목욕도 했다.

"어릴 때는 어머니랑 자주 목욕도 했는데, 헤헷, 어색해요."

"그러게, 우리 딸 가슴이 절벽일 때까지만 기억했는데, 언제 이렇게 여인으로 자랐니?"

목욕을 끝내고 우리는 향긋한 차를 마시며 잠시 쉬고 있었다.

"사윗감으로 카일이, 음, 괜찮은 것 같아요?"

참고로 아마 밖에서 이 대화 듣고 있을 거예요.

"흐음, 얼굴이 너무 잘생기셨더라. 그리 잘생겼으면 꼬이는 여자들도 많겠지? 너희 아버지도 젊을 때 그리도 여자들을 홀려댔는데 말이야."

우와! 대박! 정말 제가 힘들었다니까요? 그래도 남편 편들어줘야지. 듣고 있을 텐데 삐치면 곤란해.

"젊은 영애들이 헐벗고 달려들곤 했대요."

"어머? 정말? 저런."

"그럴 때마다 여자들 내치면서 마음속에 정해둔 반려가 있다면서 몸에 손도 못 대게 했다네요. 결국 이번에 후궁 제도까지 없애줬는걸요?"

어머니는 카일의 그런 모습에 대해 듣고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네 아버지께 대충은 들었어. 널 오랫동안이나 기다려 왔다며? 로맨틱한 사위더라."

나는 어머니께 한참이나 카일이 내게 해준 모든 것들을 이야기해드렸다. 날 염두에 두고 만든 티아라도 이야기하니 좋아하셨다.

"우리 딸, 아니 이제 비 전하. 행복한 거죠?"

"어머니, 높임말 쓰지 마세요. 전 아직 어머니, 아니 엄마한테 투정 부릴 것도, 애교 부리고 싶은 것도 많은데... 그렇게 말 높이며 말하면 멀어지는 느낌이란 말이에요."

나는 양껏 투정 부렸다. 무려 7년이나 못 부린 딸의 투정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내 모습을 미소 지으며 쳐다봐 주었다.

"아직, 아기네, 우리 세이."

"엄마 앞에서는 평생 아기이고 싶어요. 막 힘든 일 있으면 투덜대고, 성질도 내고, 같이 쇼핑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러고 싶었단 말이에요"

내가 계속 투덜대자 어머니는 나를 꼭 안아 주셨다. 카일의 넓은 품보다 좁은데도 더 넓게 느껴지는 품이었다. 훨씬 편하고 마음이 놓이는 그런 냄새도 났다.

엄마 품에서 고개를 부비부비 하는 애교는 딸이 가진 특권이지!

한참이나 어리광을 부리던 나는 에이린에게 부탁해서 수틀을 가져왔다.

"마님, 비 전하가 다 잘하시는데 유일하게 수놓는 솜씨만 발전이 없어요. 어찌나 계속 자신의 손만 찌르시는지!"

야!!! 에이린! 너 이러기야?

"어머니, 얘 알리페르와 사귀어요."

난데없는 폭로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엄마랑, 딸이랑, 딸의 친구랑... 이렇게 셋이서 수다를 떠는 것이 이렇게도 재밌는 일이었구나. 남들에게는 일상이었을 일을 황태자비가 되고서야 할 수 있었다.

"두 분 전하가 어찌나 붙어있는지 막 사람들 보는 데서 뽀뽀도 하고 난리에요."

"야!!!"

나는 에이린의 입을 막으러 뛰어다니고, 에이린은 도망을 다녔다. 내 방에는 웃음꽃이 떠날 줄 몰랐다.

"유베르 영애가 우리 아르세이아를 지금껏 잘 보살펴 주었군요. 좋은 친구를 뒀네요, 우리 딸이."

"정말로 에이린은 좋은 친구예요, 어머니. 어둠 속에서 날 건져준 둘도 없는 친구가 에이린이죠."

나와 어머니의 칭찬에 알리페르 일로 놀렸을 때보다 에이린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에이린은 우리를 위해 침실 정리를 마무리하고 빠져나갔다.

"후작님께 들었는데, 네가 악몽을 많이 꾼다고 하더구나. 괜찮겠니?"

"화재 사건 이후로 심했는데 지금은 카일 덕분에 괜찮아요. 그 이전에는 알비케라라고 강아지랑 자면 악몽을 막을 수 있었어요."

"황태자께서는 네게 정말 많은 행복을 주셨구나."

나는 빙긋이 웃었다. 정말로 카일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날 지켜주는 울타리도 되어주고, 나의 든든한 지지대도 되어 준 남자였다.

내가 더 이상 저주받은 존재라 자책하지 않게 용기도 주었다. 또 내 주변 사람들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둘러볼 수 있게 했다.

거기다가 맛난 것도 매일 먹여주고, 좋은 옷에, 안락한 침대에, 내 애완견조차 최고의 대우를 누리고, 용돈도 많이 줬다. 얼굴도 잘생겨, 성격도 저만하면 나쁘지 않아, 밤일도...

크흠. 이것까진 어머니께 차마 말 못 하겠지만, 어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흠이 있다면 여자들이 너무 많이 노리는 것과, 시어머니 자리였다. 여자문제는 후궁 철폐 주장이 통과됐고, 시어머니도 뭐, 곧 처리되지 않을까?

내가 끊임없이 남편을 칭찬하자 어머니의 얼굴에도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카일 때문에 너무 행복해요. 이렇게 어머니도 다시 만나게 되고, 다 꿈일까 봐 무서울 만큼요."

"우리 딸이 행복하다니까, 엄마도 행복해. 이제 원이 없구나."

"아버지랑 다시 합치셔야죠! 아버지가 제 앞에서 엉엉 울면서 어머니를 얼마나 그리워 하셨는데요!"

내 말에 어머니는 의외라는 듯이 눈이 동그래지셨다. 하긴, 겉보기에는 아버지가 무뚝뚝하시긴 하지.

"도대체, 내가 그렇게 약한 모습 보이고 살지 말랬는데, 아직도 그러셔?"

에엑? 그, 그렇구나. 지금껏 내가 본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어. 하긴, 그렇겠지.

어머니와 나는 한 이불을 덮고 밤새 수다를 떨었다. 내일 좀 피곤하면 어때? 지금 어머니께 해줄 말이 산더미였다.

황태자비 대역으로 들어와서 카일과 사랑에 빠진 일들. 친구들 이야기. 황제 폐하 이야기. 아버지 이야기. 7년간 나누지 못한 이야기는 마르지 않고 이어졌다.

어머니는 자신을 구해 준 청년에 대해서 궁금해하셨다. 나는 프리케에 대해 알려드렸고, 어머니는 묘한 웃음을 지으셨다.

"왜, 왜요?"

"우리 딸, 여러 남자 울린 건 아니지?"

"네?"

여러 남자는 아니고... 프리케 하나만 울린 것 같아요. 나는 케이에 대해서도 어머니께 다 말씀드렸다.

"검은 머리도 그렇고, 가슴에 흉터도 그렇고 프리케가 케이 같은데 본인은 아니래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것 같은데..."

"글쎄, 엄마는 다른 사람이 케이 같은데? 네 주변에 있는 것은 맞는 것 같고."

"네? 하지만 내 주변에는 프리케 말고는 검은 머리가 없는걸요."

"후훗, 글쎄? 잘 생각해 봐."

내 주변에 케이만큼 날 예뻐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은 우리 남편뿐인데. 그런데 남편은 머리카락 색이 다르잖아.

가슴의 흉터도 없고. 아, 그건 카일이 정령왕과 계약하고 나서 없어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카일은 예전에 내가 꿈결에 케이 이야기 꺼냈을 때 누구냐면서 나한테 따졌는걸? 한 번은 의자도 부셔먹었었지.

... 내가 기억 못 하는 카일과의 첫 만남이 케이인 건가? 으아아아악! 모르겠어.

어머니는 고민에 빠진 날 보고 짓궂게 웃고만 계셨다. 히잉. 누군지 아시면 알려주시지 너무해.

"네가 찾고 기억해내야지 더 좋아할 거야."

어머니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카일이 케이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면 나 첫사랑과 이루어진 거잖아.

아, 두근거려. 그냥 대놓고 물어볼까? 아니야, 뒤를 캐서 증거를 들이밀까? 아니면 어쩌지? 아닌데 괜히 말 꺼내면 케이가 은인이 아니라 첫사랑이었냐고 막 삐칠 것 같은데...

과거에도 남자는 자기 하나여야만 한다고 했잖아. 으...

내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어머니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셨다.

"우리 세이, 어쩜 이렇게 귀엽게 자랐니?"

"어머니가 귀엽게 낳아주셨잖아요. 엄마 닮아서 그래요."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부비부비 했다. 좋았다. 엄마 냄새, 엄마의 따뜻한 품. 카일과는 다른 안온함.

"이제 우리 헤어지지 말아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행복하게 지내요."

"그래, 꼭 그러자."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