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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75화 (75/126)

76화. 그립고 그리운 사람. (1)

2018.06.22.

며칠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콘스탄트 공작은 약속한 대로 낙향했다. 드미트리 후작을 비롯한 귀족들은 취조를 받으며 감금되어 있었다.

황후 역시 황제 폐하께 근신을 명받아 당분간 외부인과의 접견을 금지 당했다. 그리고 다수의 황후쪽 시녀들이 쫓겨났다고 했다.

기왕 잡혀있는 김에 귀족들의 저택을 수색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래?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없다지만, 아주 그냥 제대로 커다란 덩어리들이 줄줄이 나왔다.

카일과 루카스는 나이스를 외치면서 그들의 죄를 조목조목 밝히기 시작했다. 황후파는 기가 죽어 숨기 바빠졌고, 귀족파는 은근히 좋아하면서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곧, 그들의 재판까지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이 정리되리라. 그 뒤에는 황후의 진짜 죄도 밝혀야지.

"너무 평화로워서 찝찝해."

"심심하신 거겠죠."

음.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기도 해. 황궁에 온 뒤로 한 번도 조용한 적 없었는데...

요 며칠 할 일이 없었다. 아카데미 일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식물도감도 내 몫은 다 수정해서 보냈다.

공부도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라 예법 이런 것들이 다 빠져서 여유롭다 못해 지겨운 일상이었다.

"손수건 수 놓기는 포기하신 거예요?"

"나는 나에게 재능 없는 일은 과감히 포기하기로 했어."

나중에 어머니를 만나면 그때 배워보자. 나는 아무리 해도 재능이 없어!! 사실 몇 번 시도해 봤다. 그리고 좌절했다.

내 손가락이 너무 불쌍했다. 죄 없는 손수건은 또 어쩌란 말인가? 빠른 포기가 때로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주기도 한다고.

"펠의 손수건은 네가 만들어. 누나보다는 연인이 만들어 주는 손수건이 좋잖아?"

내 말에 에이린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나이스, 드디어 놀렸다. 부끄럽지? 응? 내가 너 때문에 부끄러웠던 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고!!

"너는 손재주도 있으니까 펠이 감동받을 거야."

내가 싱긋 웃어주자 에이린도 배시시 웃었다. 행복해 보였다. 나뿐 아니라 내 친구도 행복해졌다.

뭐, 여긴 아직 후작부인이라는 높은 산이 있긴 했다.

아버지는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아버지는 에이린을 좋게 보셔서 적극적으로 밀어 주실 예정이었다. 무엇보다 본인이 힘든 사랑을 하셔서 자식들만큼은 원하는 짝과 맺어주시겠다 말씀하셨다.

"그런데 탄생연 취소된 것 아깝지 않아요?"

"뭐, 진짜 내 생일도 아닌데."

습격사건과 반역죄로 어수선한 황궁 분위기에 탄생연이 취소됐다. 어차피, 스타티나의 생일이었기에 나는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 신분을 드러 낼 수 없으니까, 대외적으로는 어쩔 수 없지.

카일한테 이미 생일 선물로 티아라도 받았는걸. 그걸로 나는 괜찮았다.

그것도 내 진짜 생일에 맞춘 장미 무늬 티아라였잖아.

"그것보다는 네 연인의 생일 선물 준비나 열심히 하지?"

아싸! 또 놀리기 성공!! 연인이란 말 들을 때마다 빨갛게 상기되는 에이린의 표정이란!!

네가 이 맛에 지금껏 날 놀렸구나!

스타티나의 생일은 알리페르의 생일이기도 했다. 그날 무슨 선물을 해줄지 나는 이미 결정했다. 처음으로 알리페르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었다. 그 아이가 좋아해야 할 텐데.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제 연인의 선물은 저 혼자 힘으로 준비할 거거든요?"

헤에, 에이린의 저런 표정 처음이야. 사랑에 빠진 여자는 진짜 아름다운 미소를 가지게 되는구나.

나도 그렇겠지?? 그렇다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미소일 거야. 하핫!

앗! 어서 와요. 내 미소의 원천!

"카일!"

"세이이이이! 나 힘들었어!"

저기요? 아랫사람들 앞에서는 체통 좀!!

에이린은 익숙한 듯이 그저 미소를 지으며 나가 줬다. 하하, 그래도 쟤가 이제 썩은 표정은 안 짓네.

"왜요? 누가 또 우리 카일을 괴롭혔어요?"

"요즘 다들 알아서 기어서 힘들지 않아. 단지 세이를 못 본 지 2시간이 넘어서 힘들었어!"

자, 어째서 나는 이런 카일의 모습이 익숙해지지 않는 거죠? 으아아아!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야!!

"세이, 지금 나 부끄럽다고 생각했지?"

"알면 자제 좀 해요."

"쳇, 애교는 이제 통하지 않는 건가?"

그건 아닌데, 좀, 징그럽긴 하죠? 나는 차마 징그럽다는 말은 내뱉지 못했다. 분명 상처받을 거야.

"그런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좋은 소식 전하러 왔지."

내가 기다리는 소식이면, 어머니를 만나는 것? 아니면...? 황후가 갑자기 급사...는 아니고 황궁 밖으로 쫓겨나기라도 할 예정인 걸까?

"이제, 이 데피니토르의 역사에는 후궁이 없습니다!"

순간 카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게 있었다. 후궁이 없다고? 아직 별궁에 아바마마의 후궁은 있는데?

아! 후궁 철폐!! 와 진짜? 이제는 아무 걱정 없이 카일과 나만 서로 아끼고 살 수 있는 거야?? 정말로?

"카일! 고마워요.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잘난 남편 때문에 긴장하고, 경계하고 그러고 살 필요가 이제 없어."

아, 저 자신감! 하지만 인정. 우리 남편은 세상에서 제일 잘난 것 맞아! 헤헤헤.

그 잘난 남편을 이제 당당하게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

"잘난 우리 남편, 이리 와요. 내가 진짜, 이 남자 못 만났으면 어쩔뻔했어?"

"우리는 무조건 만나게 되어있었어. 서로의 운명이니까."

카일은 자신의 넓은 품에 날 가둬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내 온몸을 울렸다. 묘한 떨림이었다. 이제는 진짜 온전히, 완벽하게 나만의 남자가 됐다는 기쁨 때문일까?

그의 목소리에 새삼스럽게 심장이 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카일. 일은 끝났어요?"

"거의 다 했어. 보고받을 것도 끝냈고, 급한 결재도 마무리했고."

"그럼 이제 나랑 시간 보내도 되는 거죠?"

나는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은밀하게 훑어내렸다. 윽, 실크 셔츠 너머로 전해지는 이 탄탄한 가슴! 이 아리따운 굴곡!! 이거 이제 법적으로도 다 내 거야!

나의 손길에 카일의 목에서 야릇한 침음이 흘러나왔다.

"나 자극한 거 후회할 텐데?"

"내가 유혹할 때 피해 가면 당신이 더 후회할걸요?"

나의 도발에 카일의 얼굴에 유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유혹은 내가 하는데 왜 당신이 더 매혹적인 건데?

침 나오겠어, 그만 홀려요!!

그래, 그냥 우리 참지 맙시다. 아직 해가 덜졌으면 어때? 카일과 내가 진짜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 * *

어느새 해는 지고 저녁이 되었다. 우리는 이른 시간부터 했던 운동으로 인한 체력 손실을 보충하고 있었다.

"아음, 맛있어. 매번 고마워, 소들아."

"자, 더 먹어."

카일이 내 입에 스테이크를 더 밀어 넣어 주었다. 사실, 카일은 대식가여서 처음부터 나보다 큰 덩어리를 받았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다 먹고 또 달라고 했다.

"돼지가 될 거야."

"우리 밤마다 운동 많이 해서 괜찮아. 아니, 요즘은 밤낮 가리지 않으니까, 더 먹어야 해."

화르륵, 디저트를 나르던 시종이 순간 움찔하는 것을 봤다. 제발 카일 그런 이야기는 우리끼리 있을 때만 하라고요!

눈치 없는 내 남편은 그저 좋다고 싱글거렸다.

"참, 세이. 네 탄생연은 취소됐지만 선물은 받아야지 않겠어?"

"에이린한테도 말했지만, 내 진짜 생일도 아닌걸요. 신경 쓰지 말아요."

"우리는 이 데피니토르의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커플이거든? 지켜보는 눈이 많다고."

하긴, 그 난리를 쳐서 후궁 간택 취소하고, 심지어 후궁 철폐까지 했는데 넘어가면 이상하겠지? 하지만, 이 남자가 선물한다 나서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 자제를 미리미리 시켜야 해!

"저기 카일? 내가 평생 평민처럼 살았던 거 알죠?"

내 말에 카일의 얼굴에 우울함과 안쓰러움이 떠올랐다. 당신 슬프라고 하는 말 아닌데, 끙.

"그래서 지금 이렇게 따뜻한 밥을 내가 불 피울 걱정 없이 삼시 세끼 챙겨 먹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게다가 간식까지 챙겨주잖아요."

솔직히 나는 먹는 것만으로도 사치를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불도 마음껏 피울 수 없었던 나는 시장에서 산 딱딱한 빵을 먹었으니까.

아주 가끔 본가에 가야 할 일이 있을 때면 고기가 듬뿍 들어간 수프를 눈치보며 얻어 먹기도 했지만...

주식은 늘 목장 관리인들이 나눠준 멀겋게 식은 수프와 딱딱한 빵이 대부분이었다. 과일은 황실보다도 신선하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렴, 그러니 지금 내 입은 호강하고 있다.

"나는 너한테 최고의 것만 해주고 싶어."

"해주고 있잖아요. 드레스도 매달 정기적으로 사들이는 양이 얼만데요, 보석과 장신구들도 마찬가지고요."

품위 유지비라는 것이 써도 써도 끝이 없더라. 하지만 솔직히 내가 피 땀 흘려 번 돈이 아니라 제국민들의 피땀이라 마음껏 쓰기 불편했다.

다들 더 사도 된다는데 나는 차마 쓸 수 없었다.

나를 미워했지만, 자기 자식들은 끔찍이 사랑한 마을 주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은 굶어도 자식들은 살리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인걸.

시찰 나갔을 때 봤던 평민들의 삶은, 내가 어렸을 때보다 나아진 것이 없었으니까. 황제 폐하나 카일이 정치를 잘못해서가 아니었다.

언제나 가장 밑바닥의 사람들은 고달픔의 차이가 있을 뿐, 늘 비슷하게 힘들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행복하게 사는 이들도 있겠지만.

"당신이 사주는 것도 있고, 진상품도 많잖아요."

사실 진상품은 다 현금화 시켜 아카데미와 보육원 후원금으로 쓰고 있었다. 뇌물로 바친 거나 다름 없는 거라서, 내가 쓰기 싫었다.

사실 이미 나의 손이 덜덜 떨릴 만큼 호화로우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었다. 충분했다.

"나는 네게 뭐든지 최고만 해주고 싶은데."

"사치스러운 황태자비는 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날 빈민들을 위한 자선 행사를 계획하고 있는데, 당신이 막 사치해버리면 내 이미지는요?"

내가 강경하게 밀어붙이자 결국 카일은 꼬리를 말고 말았다. 그러나 연신 툴툴거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철없기는!! 어휴, 나는 남편을 얻은 것인가, 투정쟁이 꼬마신랑을 얻은 것인가!!

나는 다시 한 번 단단히 카일에게 다짐을 받았다. 선물한답시고 절대로 사치하지 말라고, 하면 정말로 화낼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어째 쉽게 포기할 것 같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입이 떡 벌어지는 일이 시작되었다. 공식적으로 황태자비의 생일이라 알려진 시기로부터 이틀 전부터였다.

"허억, 저게 다 뭐야??"

만월궁으로 짐마차가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략 잡아도 10대? 거기에 이 짐들을 들고 나르는 사람들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아쭈구리, 결국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이거지??

백성들이 날 얼마나 이중인격이라 생각하겠어? 겉으로는 자애롭게 빈민 구제 정책을 펼치는 검소한 사람인척해놓고 뒤에서 저런 사치품들이나 끌어모으고!!

내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눈치챈 유리아와 에이린이 말을 걸어왔다.

"비 전하, 황족이니까 이 정도는 선물로 받아도 사람들이 뭐라 안 해요."

"지금껏 검소하셨잖아요. 황후폐하가 자기 생일날 사들인 물건들에 비하면 약해요."

다들 이 정도 사치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카일 편을 들려고 하는 것은 아닌듯했다. 진심으로 별것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

솔직히 이들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귀족이라면, 황족이라면... 아니다. 이렇게 넘어가면 안 돼!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나는 물건들을 살펴보지도 않고 카일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 갔다.

"카일! 이게 다 뭐예요? 내가 적당히 하라고 했죠? 내 말 듣지 않을 거예요?"

나는 집무실로 들어가자마자 카일에게 마구 따지기 시작했다. 그런 나의 모습에 카일은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그런데 왜 눈치를 보는 거죠? 아, 손님들이 계셨네.

나란히 앉은 남녀 중 남자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나를 돌아보며 인자하고 포근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뒤돌아보는 여인은... 그녀의 얼굴을 본 나는 굳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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