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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74화 (74/126)

75화. 내가 그를 정말 죽음으로 몰았을까? (2)

2018.06.21.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공작?"

"물론입니다. 황태자비께서도 잘못이 인정되면, 후궁 제도 철폐를 취소하고 후궁을 받아들이시지요."

그건 내가 선택할 문제는 아닌데? 그래도 좋아 받아들이지 뭐. 어차피 그쪽이 질 거니까요.

"좋아. 그리하지."

그러자 볼라드 공작이 일어났다. 그는 우리에게 두 사람의 약속에 대한 문서를 받아 서명까지 시켰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몰래 볼라드 공작과 주고받았다.

"두 분의 말씀은 이곳 연회장의 귀족들이 증인이 되어 이행을 감시하겠습니다."

"그리하시오."

서기관이 만든 서류에 나와 공작은 나란히 서명을 했다. 공작은 서명하면서 짙은 미소를 남겼다. 벌써 승리감에 취하시면 아니 되지요.

"증명을 위해 황후 폐하의 처소라도 뒤지시겠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까지 있겠나?"

나는 여유 있게 웃어주었다. 순하게 그린 눈꼬리가 열일하네. 호호. 맹해 보이지? 그거 노린 건데.

공작은 약간 아쉬운 모양이었다. 기왕이면 황후 처소를 뒤져주길 바랐겠지. 그래야 황후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우려는 황태자비로 만들 수 있을 텐데.

공작이 뭐라 더 말하려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우아하고 절제감 있게 손을 들어 손뼉을 쳤다.

그러자 시종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등장한 것은 황제 폐하의 최측근이자 충실한 시종장인 피데스 남작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콘스탄트 공작과 그의 추종자들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가득찼다.

카일과 나는 마주 보고 미소 지을 뿐이었다.

"시종장, 여긴 어쩐 일이오?"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으로 황태자비 전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드리러 왔습니다."

그의 말에 공작과 황후파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황태자에게 행정권을 넘겨주신 뒤 단 한 번도 일선에 나선 적이 없던 분이셨다. 더군다나 예전부터 황후가 저지르는 일은 어지간하면 모른척하고 넘어가 주시던 분이셨으니...

이제 와서 참견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나 봐? 그날 내가 황제 폐하를 만난 뒤에 아무 일도 없었긴 했지. 솔직히 나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끝까지 아무 말씀도 안 드렸고 아바마마도 묻지 않으셨으니까.

하긴, 그래도 황위에서 30년 가까이 교활한 귀족들과 싸우며 지내신 분이었다. 내 앞에서만 대형견이셨을 뿐이었다. 그분은 이 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지존이니까 당연한 것이었다.

아들이랑 똑같이 모르는 게 없으셔... 응? 설마 내 정체도 아시는 건 아니겠지?? 하하.

"그날, 황제 폐하와 황태자 내외께서는 함께 점심을 드셨지요. 그때 만찬장으로 가기 전에 은밀히 저에게 일을 시키셨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회의장에는 웅성거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피데스 시종장은 그런 분위기와 관계없이 차분했다. 여러모로 신뢰가 가는 외모와 행동들이었다.

"아바마마께서요? 무슨 일이었죠, 시종장?"

철저하게 콘스탄트 공작만 빼고 다 존대해 주기로 했다. 황제의 시종장은 존경받아야 하는 자리였다. 연세도 있으시고, 정말 신사다움의 표상이랄까?

아바마마의 측근에게 예를 다해야지 아무렴. 게다가 나의 구세주이신데!

나의 말투에 아바마마를 닮은 인자한 미소를 잠시 보낸 시종장은 유리 병을 꺼냈다.

"폐하의 명으로 그날 황후궁에서 나오는 폐기물들을 모두 확인하였습니다. 그중에 병째 버려지던 내용물을 확인했습니다."

물증. 빼도 박도 못 할 증거에 콘스탄트 공작은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이 그때 올린 차라는 것을 어찌 확신하나? 시종장!?"

"이것을 버리라는 명을 받은 하녀가 바로 폐하 앞에서 증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이 차를 직접 우린 향을 맡으셨지요."

이미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대박! 우리 황제 폐하는 아주 치밀한 분이셨다. 그날 나와 황후의 표정과 마시지 않은 차를 보고 예상을 하셨단다.

그래서 증거를 확보하셨지. 황후의 성정을 아는 황제께서는 이를 악용할 가능성을 정확히 예측했다. 그리고는 이렇게나 철저하게 증언과 증거를 확보해 두셨다네요.

효도할게요, 아바마마. 오래 사셔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보통의 홍차와 다른 이 차의 향을 기억하셨습니다. 비 전하께서 드시지 않은 그 차였지요."

솔직히 아주 미세한 향인데요. 그걸 구별하시다니! 가능한 거야? 공작이 믿을까?

"그, 그게 말이 되나? 게다가 프레젤리의 향은 미세하다고 들었소."

아니나 다를까 반박하시네요. 하긴, 동대륙의 차는 향이 아주 강해서 다른 향을 죽이기 적합했다.

"폐하가 차에 있어서 어지간하지 않은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폐하께서 구별하신 것은 프레젤리만이 아닙니다. 동방에서 가져온 흑차의 향을 맡으신 겁니다. 하지만, 저 시녀가 내어 온 것은 다링산이지요. 즉, 저 시녀가 거짓을 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남작의 말에 유피테르 영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나 보았다. 그러게 공부 좀 하지 그랬니?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려면 이것을 내어가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런 지시를 내렸지?"

유피테르 영애는 말없이 콘스탄트 공작을 쳐다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그러자 공작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팡파르라도 울려야 하나? 낙향을 축하드립니다. 짝짝짝.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결론이 났군. 한 가지만 더 확인하면 되겠어. 죄인들을 끌고 와라."

카일의 근엄한 명령에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겹의 쇠사슬로 포박된 네 명의 남자들이 끌려왔다.

그중 한 명은 만월궁의 시종, 하나는 분꽃 놀이 담당자, 나머지 둘은 암살자들이었다.

그들의 등장에 황후파의 얼굴에 낭패감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엮이는 순간 반역죄였다. 입을 꾹 다문 황후파의 얼굴을 보니 속이 시원했다. 입을 다무니까 얼마나 조용하고 좋아?

그들은 이제 자신들은 얽혀들어가지 않겠다는 듯 눈동자들을 굴리기 시작했다. 허참, 의리 없네.

"먼저 시종 카이커스, 네게 황태자비의 약점을 알아오라고 시킨 자가 누구인지 대답하라."

"유, 유피테르 백작이었습니다."

카일은 그자에게 다른 배후는 없는지 캐물었다. 시종은 자신이 정보를 주고 떠난 뒤 콘스탄트 공작이 방문하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물론 공작은 펄쩍 뛰며 그 일과는 관계없다며 우겼다.

솔직히 뻔히 거짓말인 것이 보였지만 어쩌겠어? 증인이 될 백작이 죽었으니. 이것으로는 엮을 수 없을 터였다.

"유피테르 영애는 황태자비의 몸을 상하게 하는 차를 올렸다. 그 아비는 황태자비의 약점을 캐는 반역을 저질렀다. 그것도 죄 없는 이를 인질 삼아 저지른 일이었다. 그리고 죽음으로 자신의 죄를 황태자비에게 덮어씌우려 했다. 이에 이의 있는가?"

황후파가 쥐 죽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 볼라드 공작의 중립 세력들이 카일의 말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미 죽은 자이지만 반역의 죄를 가문에 묻기로 했다.

"너는 불꽃놀이용 화약을 폭탄으로 바꾸었다. 누구에게 지시를 받은 것이냐?"

"잘 모르는 자입니다. 그저 보다 화려한 불꽃이라 황태자비께서 좋아할 거라고 들었습니다. 단지, 그분이 잘 보이게 돌려놓으라고만 했습니다."

두 번째는 화염 폭탄을 내게 쏘려던 기술자였다. 알고 보니 그 폭탄은 흑마법사가 마법의 힘을 섞어 만든 아티팩트였다.

그런데 꼴이... 붕대로 칭칭 감아 둔 것이 아직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착하게 살아야지. 저렇게 천벌받지 않으려면 나쁜 짓 하면 안 돼.

"네 집에서 발견된 금화다. 이런 큰 금액의 돈을 받아 놓고 시치미 떼는 것인가?"

제 딴에는 꽁꽁 숨겨 놨던 돈을 기사들이 아주 탈탈 털어 왔다. 금화의 발견으로 황태자 부부 청부 살해 미수가 되어 버렸네? 어쩌나?

"그것이!!"

"감히 거짓말까지 하는 것이냐!!"

카일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회의장 전체에 퍼졌다. 가끔 서늘한 모습도 많이 봤는데, 오늘처럼 화난 모습은 처음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날 직접 위협한 자에게 화가 제일 많이 난 듯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카일이 무엇인가 들어 올리자 귀족들 사이에서 수근 거림이 들려왔다. 평범해 보이는 문양인데, 저거 언제 봤더라...? 아, 황궁 처음 와서 봤던 귀족 계보도!

저 백합과 독사가 그려진 무늬는 드미트리 후작?

아이고, 루비 광산이나 뺏으려고 했는데 멸문을 당하시겠네요. 어쩌나?

"모! 모함입니다!!"

후작이 일어나서 크게 외쳤다. 그는 자신의 세력들을 돌아보며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철저히 외면을 당했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의리가 없네, 의리가.

"테일러, 이 인장이 새겨진 편지를 어디서 발견했나?"

"죄인의 집, 침대 밑 나무판자 아래에 있었습니다."

카일은 드미트리 후작을 잠시 노려보았다. 그리고 냉소를 보냈다. 진실을 꿰뚫는 듯한 눈빛.

"죄인은 말하라, 이것의 출처를! 진실을 말하면 참작해 주겠다."

"처음에 제게 접선을 한 자가 흘리고 간 물건입니다."

자포자기한듯한 말투였다. 죄를 조금이라도 깎아 보려는 노력이겠지.

"테일러! 드미트리 후작을 체포하고, 그 식솔, 가신들의 이동을 금하고 죄인과 대면시켜 그 자가 누구인지 밝혀내라."

"존명!"

드미트리 후작은 곧바로 기사들에 의해 끌려나갔다. 질질 끌려나가는 모습에 황후파 귀족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줄을 잘못 섰구나 하는 후회와 낭패감.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자 내 입에서 비릿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디에 줄을 설지 고르기 전에, 어느 쪽이 옳은지를 따졌어야지. 이제 와서 권력의 단물을 다 빨아먹고 다시 어디로 옮길지 재는 거야?

마차를 습격했던 암살자들은 자신들이 루피넬리아의 그림자군 출신임을 인정했다. 그들은 흑마법사가 예전 1황자의 암살범임을 증언했다.

그자들의 말을 듣던 카일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카일..."

카일은 내게 고개를 잠시 끄덕한 뒤 귀족들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이들의 상관인 흑마법사는 이미 죽음으로 내 형님을 죽인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이들을 사주한 자가 아직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1황자와 흑마법사 이야기에 눈빛이 흔들리던 콘스탄트 공작이었다. 하지만 흑마법사가 죽었다는 소식에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역시... 당신들이었구나?

"나는 7년 전 사건을 재조사할 것이다. 이번만큼은 명명백백히 진실을 밝힐 예정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 죗값을 목숨으로 받을 것이다."

카일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눈으로 콘스탄트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콘스탄트 공작은 그런 카일의 시선을 태연한 척 받아쳤다.

"공작."

"네, 전하."

"그대는 황태자비와 약속한 일이 있으니, 사흘 안에 이 황도를 벗어나, 당장 영지로 떠나도록."

콘스탄트 공작이 이를 악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상태로 나와 카일을 노려보았다. 쯔쯧, 그 아버지의 그 딸인가? 지금은 넙죽 엎드려서 빌어야 할 타이밍인데, 이 무슨!!

회의는 결국 우리의 승리로 깔끔하게 끝났다. 연루자로 의심되는 이들은 근위 기사단의 취조를 받게 되었다.

황후는 어설픈 시도는 결국 자신의 수족들을 자르는 것으로 끝났다. 그녀의 세력은 이제 서서히 무너져 내릴 것이다.

카일과 나는 만월궁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표정이 왜 그래?"

카일은 내가 말없이 창밖만 보자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어왔다.

"으음, 찝찝해서요."

"뭐가?"

"황후가 이렇게 허술한 여자인가 싶어서 그래요. 3황자가 죽은 이후에도 권력을 유지하던 여자인데..."

응? 왜 웃고 그래요?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데!!

"네가 워낙 뛰어난 황태자비라서 모든 암투를 지혜롭게 해결한 탓이야."

이럴 때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이쁘다고 한다는 말을 쓰는 걸까? 아니 콩깍지가 쓰였다가 더 적절한가?

"내가 한 일이 뭐 있다고..."

"황제 폐하를 움직였잖아. 알다시피 지금껏 황후파와 싸울 생각 없으셨던 분이셔."

흐음. 그건 그래. 제국 서열 1,2위가 다 내 손아귀 위에 있지. 호호호.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제국을 말아 먹을 수도 있을 거야.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콘스탄트 공작이 낙향한다 해도, 쉽게 세력이 무너지진 않을 거야. 황후도 다시 움직이겠지. 감시를 철저히 해야 해."

"그래요, 허술했던 만큼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했을 거예요."

흐음, 그런데 감시라. 이거 진짜 하기 싫은데,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있긴 하단 말이야.

"저기, 카일. 황후가 직접 접촉하는 사람들은 감시 가능할 것 같아요."

"어떻게?"

으으으으. 이거 진짜 써먹기 싫은데...

"일단 귀족 계보도에 있는 초상화가 필요해요. 오래된 건물에는 눈에 띄지 않는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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