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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73화 (73/126)

74화. 내가 그를 정말 죽음으로 몰았을까? (1)

2018.06.21.

"밤하늘을 비추는 작은 별, 황태자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앉으세요들."

일단은 존대로 시작해 드리죠. 나는 카일의 옆자리에 마련된 상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카일이 희미하게 미소 지어줬다. 에구구, 내 남편 미간에 주름 살짝 잡힌 것 보게! 이 귀족들이 도대체 내 남편을 얼마나 들볶은 거야? 감히! 죽을라고!!

내 자리에 앉아서 앞을 돌아보았다. 3대 공작가와 5대 후작가,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몬테 공작과 볼라드 공작 사이에 앉아있었다. 아직은 귀족파의 의견과 함께 하는 척하고 있지만 든든한 내 편이었다.

콘스탄트 공작의 바로 옆에는 드미트리 후작이 있었다. 후궁 간택에서 까인 집안이었지? 아주 그냥 둘이서 날 잡아먹을 듯 노려보네.

어휴 무서워라. 그럴 줄 알았지?

"비도 왔으니 이어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콘스탄트 공작?"

"네, 전하. 유피테르 백작의 유서에는 구구절절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저희 3대 공작이 필적 감정사를 각각 동원한 결과 그 유서가 백작의 친필임을 확인했습니다."

"유서에 적힌 내용은 본 비도 확인했으니, 본론만 이야기하죠, 공작."

내가 콘스탄트 공작의 말을 딱 끊어 주자 공작의 못생긴 콧수염이 순간 비뚜름히 올라갔다. 우와, 진짜 얼굴에서 못됨이 묻어 나오네!

어린 나에게 지적받은 것이 아주 자존심 상했나 보았다.

사실 나도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건방지게 구는 거 익숙하진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익숙해져야겠지. 그게 황태자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일이니까.

"그러지요, 비 전하. 비 전하께서 황후 마마의 시녀인 소피 유피테르 영애에게 모욕 준일을 기억하십니까?"

"모욕이라, 황후 폐하를 잘못 모시고 있는 시녀를 꾸중한 일을 모욕이라고 부르나요? 처음 듣는 제국어 활용법이군요."

내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콘스탄트 공작은 그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내게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입술이 살짝 씰룩인 것이 내 말이 많이 못마땅한 가보았다.

"황후 폐하를 어떻게 잘못 모셨던가요?"

"여인들의 몸에 치명적일 수 있는 프레젤리가 섞여있는 차를 본 비와 황후께 올렸습니다. 이는, 자칫 반역으로도 엮일 수 있는 것을 실수로 여기고 꾸짖은 것을 모욕이라고 말하다니 어이가 없군요."

나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을 했다. 그런데 어째서 공작은 저리도 태평할까? 오히려 내가 나를 해하려 했다는 명분으로 그들을 협박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 텐데...

조심해야겠어.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아.

잠시 카일을 쳐다보았다. 카일은 나를 돌아보며 차분한 눈빛을 보여줬다.

걱정 말라고, 내가 네 곁에서 지키고 있다고 말해주는 눈빛. 카일의 노란 눈 뒤편에 자리 잡은 무한한 신뢰에 조금 불안했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것이 프레젤리 차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내가 식물에게 축복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알아도 식물들에 대해 뭐든 안다는 것은 아직 모르나 봐?

흐음, 어디까지 이야기 한다?

"프레젤리는 홍차와 거의 같은 잎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향이 달라 구분할 수 있습니다만."

"그날 우렸다는 찻잎을 가져오너라."

공작의 명에 황후의 시녀가 쟁반에 찻잎을 담아 가져왔다. 유피테르 영애. 그녀는 찻잎을 나르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 아버지의 죽음에 내게 원한을 품은 것이 틀림없었다. 내게 망신을 당하고 징계도 먹었으니 더 내가 싫겠지.

그런데 말입니다. 네가 날 해하려고 프레젤리를 올린 것은 잊었나 봐? 내가 그때 황제 폐하 오셨을 때 고자질했으면 넌 벌써 형장의 이슬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은혜를 모르는구나. 적에게 다시는 동정심 따위 갖지 않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했다.

나는 그녀가 가져온 찻잎을 관찰했다.

하! 예상은 했지만 헛웃음이 나왔다. 문제의 차를 아직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아니 있어도 내놓지는 않았겠지만, 이것은 좀 그렇다?

질 좋은 남쪽 다링산 홍차 잎이네. 그날 가져온 것은 동대륙의 흑차에 가까운 홍차였는데. 잎 모양의 돌출부위부터 다르잖아.

"공작, 이것은 그날 내어온 차가 아니지 않나? 지금 날 희롱하려는 건가? 산지부터 다른 홍차 잎을 가지고 오다니."

나는 지금껏 했던 존대를 엎고, 그에게 하대를 했다. 그러자 그가 불쾌함을 잔뜩 가지고 내게 항의했다.

"비 전하, 본인은 제국의 3대 공작 중 대표나 다름없..."

"3대 공작이 지엄한 황족보다 높은 자리는 아니지 않나? 게다가 거짓 증거로 날 기만하고 욕보이려는데 내가 왜 그대를 존중해야 하지?"

"공작, 당연히 나의 비가 자네보다 높은 신분이다. 지금껏 원로로써 대접해 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겐가?"

카일의 지원사격에 공작은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찍소리도 못하네. 쌤통이다!

"좋습니다. 아무튼, 비 전하. 이 차가 그날 올려진 차가 아니란 말입니까?"

"그렇소. 우선 그날 마신 차는 동쪽에서 올라온 찻잎이었고, 지금 가져온 차는 남쪽 차가 아니오?"

내가 이것을 한 번에 알아낼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나 보았다. 이 차를 가져온 시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제대로 비쳤다.

공작은 시녀를 슬쩍 보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유피테르 영애는 표정을 고쳐냈다.

"게다가 내가 마신 차에는 분명 프레젤리가 있었고, 그 향을 다른 시녀가 확인까지 했소. 도대체 그날 마신 것이 이차라고 누가 그러던가?"

"제가 올린 차를 확인해주신 것은 황후 폐하이십니다."

하, 진짜 유치하고 치사한 방법으로 나오셨군. 가장 높은 지위의 사람의 말일수록 그 말의 신뢰가 높아지는 것은 신분제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후폐하께서 제게 그날의 상황을 진술하는 서찰을 주셨습니다. 황후폐하의 직인이 찍혀 있으니 두 분께서 확인해 주시지요."

황후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민 진술서였다.

증인은 모두 황후 쪽 시녀. 내 쪽은 프리케뿐이었다. 무리수일 수도 있지만 과감하게 선수를 쳤구나. 이렇게 되면 쪽수에서 밀려. 증인은 어차피 말싸움이 될 뿐이야. 특히나 서로의 측근들이기에 끝없는 논쟁이 이어지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의 찻잎이 없다면... 조금 불리하네? 쳇. 증거가 제일인데.

일단 카일과 나는 진술서라는 것을 읽어보았다.

시녀 유피테르 영애는 그날 진상 받은 차를 내어 놓았다. 그런데 내가 도착하기 전에 황후와 티타임을 할 때 재스민과 민트로 블렌딩하여 차를 마셨단다. 그 주전자를 황후가 워낙에 좋아해 자주 사용했는데, 깜박 있고 그 주전자를 세척하지 않고 홍차를 우렸다나?

푸후흡! 아니 이건 뭐, 시녀가 능력 없는 것을 자랑하는 거야? 주전자를 세척하는 것을 잊었어? 말이 돼?

그래서 홍차에 그 향이 베인 것인데, 내가 여인에게 해로운 독차를 우렸다면서 그녀를 혼을 냈단다. 그 와중에 내가 유피테르 가문을 욕보였다고.

나중에 황후가 진상조사를 했는데, 프레젤리 잎은 들어 있지 않았다고. 그리고 프레젤리 잎은 민가에서 피임약으로도 쓰이는 것인데, 황태자비가 독초라 오인했다고 쓰여있었다.

흐음, 프레젤리의 독성이 크게 알려진 바가 없긴 했지.

결국 진상을 안 황후가 유피테르 영애의 징계를 철회해 주고 백작을 달랬으나, 백작은 가문이 받은 모욕에 자괴감과 수치를 심하게 느꼈다고 했다.

"내가 오해를 했다? 그래, 이 속에 프레젤리 잎이 없었다 해도, 시녀가 제 할 일을 제대로 못한 것을 지적한 것이 잘못인가?"

"오인하여 과하게 모욕을 주고 징계를 받게 했다 되어있지 않습니까?"

콘스탄트 공작의 말에 황후파가 동조하는 소리로 회의장이 가득 찼다.

귀족파는 내 편을 드느라 반박을 하고 있었으나 그 수장인 몬테 공작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속이 뻔하네. 큰일 겪어봐야 내가 자신들의 손을 잡으리라 생각하나 봐? 피식,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꿈 깨시죠.

아, 시끄러. 다들 그 입들 좀 다물어요.

볼라드 공작의 세력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유 있는 침묵. 아직 온전히 우리 세력임을 드러내고 지지하지는 않기로 했다. 여전히 중립 세력임을 표방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도와주겠지.

"아, 프레젤리가 독초가 아니라고? 그래, 그럼 공작, 자네 딸에게 그 차를 장복시켜 보겠나?"

나는 그윽한 말투로 공작에게 권했다.

"무슨 소리입니까? 미혼의 아이에게 피임차를 마시게 하라니요!!"

공작이 발끈하여 외치자 내 옆에 있던 카일이 비소를 날리며 외쳤다.

"피임 외에는 다른 영향이 없다며? 그러니 아직 시집가지 않아 임신 계획이 없는 자네 딸이 먹어도 되질 않나? 사랑하는 고모님인 황후 폐하의 진술을 증명하는 것이 지금껏 그분의 애정을 받은 공녀가 할 보답이라 생각하는데?"

역시 내 남편.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서늘하고 낮게 조근조근 내뱉는 말에 공작은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

지난번 연회 때 공녀의 행실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진하게 원액만 추출해서 들이부어 주고 싶다만!!

"카일, 그래요. 미혼의 처녀에게 피임차를 먹이라고 하는 것은 심하긴 하네요. 내가 공작에게 사과하죠. 미안하네 공작, 자네 딸을 욕보이려던 것은 아닐세."

나는 공작에게 최대한 비열하게 웃어주었다. 눈 가늘게 뜨고 입꼬리는 한쪽만 올리고 낮게 말해주자 공작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거울로 봤어도 참 재수 없는 여자라고 느껴질 것 같네. 호호.

카일에게 자신의 딸과 춤을 춰달라 부탁했던 공작이었다. 자존심을 꺾고 부탁할 만큼 부성애는 있는 남자였다.

흐음. 딸 모욕했다고 열 받아서 마구 날뛰진 않겠지?

"대신 우선 프레젤리가 진짜 여인에게 독이 되는지 확인하도록 하지."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회의장의 문이 열렸다. 어서 와요, 내 추종자님! 좋은 타이밍입니다.

누가 봐도 연구만 하고 살 것 같은 학자 분위기의 남자가 들어왔다. 잔뜩 어깨를 웅크린 채 들어온 남자는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로열 아카데미의 생물학 교수 플로란스라고 합니다."

교수는 약간 주눅이 들어있었다. 로열 아카데미 교수라 단승 작위를 받긴 했으나 이런 대귀족들이 모여있는 곳은 처음일 것이다.

쫄지 마요. 당신의 든든한 뒷배가 여기 있으니까요. 오늘 잘 해내면 후원금을 두 배로 줘야겠어!

"플로란스 교수, 프레젤리 잎에 대해 아는 것을 모두 말하세요."

내 존대에 눈앞의 늙은 공작의 표정이 또 일그러졌다. 그러게 왜 시비를 거셨나 몰라.

나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존대할 예의를 갖춘 사람이라고요!

"프레젤리는 일반적으로 정령 운디네의 미움을 받은 식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속성이 아주 냉하죠."

내 추종자 교수님은 다행히 프레젤리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셨다. 그런데 설명이 좀 지루하네. 하품을 할 수도 없고...

"... 그래서 평민들이 피임약으로 이용을 하다가 자궁을 완전히 망가뜨려 여인으로서의 힘을 완전히 잃게 만듭니다. 다시는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하지 않는 여인이나 마시는 차죠. 한 달만 마셔도 약한 여인에게는 해가 된다는 보고가 사흘 전 발표된 의학 논문에도 있습니다."

최신 정보의 중요성! 정보가 좀 느리시네요. 제국 제일의 공작가의 수장께서 어찌 그럴까, 호호.

"그런데, 저보다는 황태자비 전하께서 식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 부끄럽습니다. 기적의 황태자비께서는 어떤 식물이든지 보고 효능을 구별해 내실 수 있는데 말이죠. 제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하하하."

허참. 내 추종자님. 나에 대한 찬양 잘하시네. 후원금 두둑하게 보내드리죠.

교수가 떠나고 난 뒤 나는 콘스탄트 공작을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프레젤리의 해악은 이제 아시겠지요?"

"네. 그런데 그날 그 차가 정말 올려졌는지는 어찌 증명하실 겁니까?"

우와, 그걸 왜 내가 증명해야 하나?

"그 차가 올라오지 않았다면, 유피테르 가문이 모욕 받을 일도, 그로 인해 백작이 자살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허니, 그 차가 올라왔음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비 전하께서는 응당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아놔, 억울하네. 황족의 신상과 약점을 캐다가 걸려서 자살한 것을 왜 내가 책임져? 말도 안 되는 시비였지만 우리는 아직 그 부분을 걸고 넘어가지 않았다.

증거가 완전히 은폐되었다 믿는 저 자신감. 참 부럽네. 그런데, 믿어도 될까요?

"그래, 좋아. 정말로 그 차가 올라왔다는 것을 증명하면, 그대는 내게 이런 모욕을 준 것을 어찌 보상할 것인가?"

"영지로 돌아가 중앙정치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호오, 딱 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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