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알비케라, 너는 누구니?
2018.06.20.
"으르릉!! 왈!!왈!!왈!!"
알비가 짖는 소리에 놀란 아나이스가 날아가 정령수의 나뭇가지에 앉았다. 아나이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까악 거리며 우리를 내려다봤다.
"알비, 갑자기 왜 그래??"
알비는 쉬지 않고 짖으며 경계했다. 한껏 예민해진 탓일까? 내가 아무리 달래도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만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데? 도대체가 뭐가 보여야 말이지. 에효.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의 시선이 알비 주변에 가있는 걸로 봐선, 아마도 정령왕들이 몰려와서 알비를 관찰하는 것 같았다.
그걸 본 알비가 이렇게 경계를 하는 것이겠지? 알비케라는 쉬지 않고 짖었고, 목소리가 금세 쉬어 버렸다.
"알비 괜찮아. 정령왕들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 응? 위험한 존재라고? 나쁘다니 무슨 말이야? 저들과 가까이하고 싶지 않으니까 비키라고?"
카일을 비롯한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와 알비를 쳐다봤다.
저, 저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나도 몰라! 무슨 소리야 도대체, 왜 정령왕이 위험하다는 건데?
"어...? 정령왕들은, 알비케라가 마음에 든다는데?"
카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알비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더 심하게 으르렁거렸다. 평소에 순한 알비케라는 털까지 세워가며 온몸으로 정령왕들을 거부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알비는 싫어 죽겠다는데 정령들은 왜 좋아하냐고! 뭐지? 알비가 정령왕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알비의 영혼이 온통 검은색인데 그 심연에 밝은 황금빛이 보인다고?"
점점 미궁에 빠져드는 기분인데? 영혼이 검은 것은 내 탓이려나? 내 나쁜 악몽과 기억들을 많이 가져간 탓일지도 몰랐다.
알비케라는 예전의 흰 사슴만큼이나 특별한 존재였다. 이렇게나 신비한 아이의 영혼이 나로 인해 검게 물든 거면 어쩌지?
"카일. 혹시 영혼이 검은색이라서 알비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존재가 갇혀있는 것도 같대. 특히 황금색이 마음에 걸린다는데?"
황금색. 정령의 여왕이 지닌 영혼의 색깔. 그것이 왜 알비케라에게서 나타나는 거지? 알비가 암컷이니까 여왕이 될 수도 있는데.
"정령의 여왕이 동물일 수도 있어요?"
"어? 아닐걸? 에이, 설마. 얘가 변신술을 부려서 정령의 여왕이 강아지로 변한 건가? ... 하하하! 나는 7년 동안 뭘 찾은 거지? 조사할수록 당연히 이능력을 가진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카일이 자괴감을 느끼는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토닥토닥. 삽질한 기분이셨겠어요.
"그, 그래 그렇지? 정령의 여왕은 인간이라는데? 운디네, 이 강아지의 영혼 밑에 깔린 영혼의 색이 정령의 여왕 것은 맞아?"
카일은 몇 번 더 정령들과 심각하게 대화를 나눴다. 결론은 알비를 아마도 정령의 여왕이 키웠거나 최소한 친한 사이였을 거라고.
나와 알비가 인연을 맺은지 이제 1년 반 정도 되었으니까, 그전에는 정령의 여왕과 알던 사이일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정령의 여왕이 정령왕들에게 화가 났다니까, 알비가 정령왕을 싫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알비, 진짜야?"
알비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듯이 고개를 홱 돌리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휴, 알비야, 너 아기도 아니고 나한테까지 대체 왜 이래?
카일이 정령의 여왕을 찾고 있으니까 알비에게 정보를 물어서 돕고 싶었다. 하지만 알비케라는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토라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여전히 기운도 없어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운디네에게 알비케라의 진단을 부탁하려고 했다. 하지만 알비가 너무 싫어해서 경기를 일으키려고 해서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순 없었다.
"카일, 안 되겠어요. 일단 나가요."
"응."
알비를 데리고 다시 결계를 통과했다. 아나이스도 떠나는 우리를 부지런히 쫓아왔다. 아나이스는 정령왕들 보고 자연계의 왕에게 존경의 뜻을 표하는데, 알비는 왜 이럴까 도대체.
알비. 혹시 내가 모르는 과거에 정령왕들과 좋지 않은 인연으로 만났니? 아니, 카일이 그냥 정령들 부를 때는 괜찮았는데 도대체 왜 이럴까?
황금색이 숨어있는 영혼이라...
"너무 걱정하지 마. 알비만의 사정이 있겠지."
"응. 그럴게요. 참, 펠, 정령왕들을 본 소감은 어때?"
다들 알비 때문에 심각해지는 분위기가 되어서 괜히 말을 돌렸다.
"멋졌습니다!! 어떻게 세상에 그런 존재가 사는 거죠? 아름답고 기품 있으면서, 압도적인 존재였어요. 나중에 꼭 다시 데려와 주세요 매형."
"어? 어, 그럴게."
펠, 푹 빠졌구나. 카일이 당황할 정도잖아. 어휴. 얘는 우리 부부의 능력에 너무 홀린 것 같아.
덕분에 미래의 비스 후작은 손쉽게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겠는걸? 아니 애쓸 필요도 없이, 이미 우리 편이네 뭐. 사실, 아버지는 귀족파들 몰래 이미 카일에게 충성맹세를 하셨다.
아무튼 펠, 정령왕을 만난 감상을 마음껏 이야기하고 싶었을 텐데 분위기상 참느라 고생했어. 내가 정령의 여왕이었으면 마음껏 구경시켜줬을 텐데, 아쉽다.
그런데 에이린, 너는 왜 펠의 눈과 초점도 못 마주치니? 이래서야, 관계에 진척이 있겠어? 내숭만 떨다간 남편 후보 놓친다?
나는 결국 사랑의 큐피드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에이린과 펠에게 아나이스를 돌려보내 달라 부탁해서 우리보다 먼저 보냈다. 동생아, 잘 꼬셔봐.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인데!!
한편 으르렁대던 내 강아지는 어느새 눈을 스르르 감고 자고 있었다.
"괜찮아?"
침묵을 깨고 카일이 물어왔다. 내 얼굴이 심각해 보였나?
"괜찮아야죠.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황후도, 후작부인도, 모두 죗값을 치르게 하려면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하잖아요. 곧 어머니도 만날 수 있을 거니까 괜찮아요."
"그거 물은 거 아닌데?"
"알비는... 괜찮을 거예요. 그치? 왜 정령왕들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답 없는 나의 강아지를 안아든 채로 우리는 후원을 산책했다. 알비는 온실을 벗어나자 조금씩 기운이 나는 듯했다.
고개도 들고, 귀도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알비의 속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기운을 차려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와 카일은 그런 알비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은 채 산책을 이어나갔다.
요즘 카일은 내게 황태자궁의 비밀 통로를 알려주고 있었다. 오늘도 그 비밀 통로 중 하나를 확인하기로 했다.
"황후는 황태자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만월궁의 비밀통로는 하나도 몰라."
"그런데 말이에요. 왜 그동안 알려주지 않고 있었어요?"
"어? 그게, 어, 저기, 예전에는 네가 언제든 날 버리고 비밀통로로 도망칠 것 같았다고나 할까? 그리고 요즘은 나쁜 일들이 잦아지니까 불안해서."
"흐응, 그랬구나. 날 못 믿었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역시 쩔쩔매는 카일의 모습은 귀여웠다. 큰일이야, 이러다 나 변태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이제는 날 온전히 믿는다는 뜻이니까 봐줄게요. 예전에는 뭐, 어쩔 수 없었으니까."
비밀통로들은 꼭 황궁 외부로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온실 안으로 이어지는 건 왜 만든 거예요?"
"밖으로 나가던 건데 길을 바꿨어. 황궁 밖보다 정령계가 안전할 수 있으니까."
"아하! 그런데 카일이 없을 때도 정령계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들어간 멤버들은 가능할 거야. 입구도 알고 친화력도 있으니까."
음. 그렇군. 다음에 테스트해봐야지.
알비는 비밀통로 입구에서부터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 이젠 황태자궁의 어지간한 곳은 다 자신의 영역이었다.
"기운을 차린 것 같네."
"그러게요. 나중에 알비 붙잡고 대화를 나눠봐야겠어요."
우리는 꼬리를 조금씩 들어올리기 시작하는 강아지의 뒤를 나란히 따라 걸었다. 나에게 알비는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내게 너무 소중한 알비가 아프지 않길...
다음날이 되었다. 오늘 귀족 회의에는 나도 참석해야 했다. 황후파에서 유피테르 백작의 죽음에 내 책임도 있다며 증언을 요구한 것이다.
"기가 막히네요."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하자고."
카일과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황후의 속셈이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나를 부도덕한 여인으로 만들 생각일 것이다.
후궁 간택을 주도했던 황후에게 앙심을 품고, 그녀의 시녀를 모함해 징계를 받게 만들었다.
곱게 키운 수양딸이 받은 모욕에 속이 상한 가정적인 아버지가 황태자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조사를 한 것일뿐, 습격에는 관계가 없었는데 억울하게 반역죄로 잡혀들어 갔다. 결국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자살을 했다는 뻔한 스토리.
아놔, 미혼영애들이 읽는 연애소설에도 이런 막장은 안 나오겠다. 쳇.
최종 목적은 나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깎아내리고 폐비를 시키려는 것이겠지. 그리고 내가 폐비가 되고 나면 황태자가 고른 여인에 문제가 있으니 귀족 회의를 통해서 뽑겠다고 할 것이다.
아마도, 그때는 콘스탄트 공녀를 내세울 것이다. 공녀를 후궁으로 내세울 순 없었겠지만 황태자비라면 적극적으로 나서겠지.
흥!! 다른 여자들한테도 못 주지만 콘스탄트 공녀는 더더욱 못 줘!! 내가 죽어서도 그딴 여자는 안 돼! 카일을 위해서도 제국을 위해서도 결사반대라고!
아무튼 나는 회의 시간에 맞춰 짙은 남색과 흰색이 들어간 단정한 드레스를 찾아 입었다. 머리도 최대한 단순한 올림머리를 하고 장신구는 제외했다.
뭐, 솔직히 그렇게 걱정은 안 되는 일이지만, 신중하고 신뢰 있는 이미지는 필수니까.
"생각할수록 열받네. 카일이랑 알콩달콩 잘 살려고 하는데 계속 자기들이 시비 걸어놓고 왜 내 탓하는 거야?"
"음, 정치하는 귀족들은 없는 꼬투리도 잡아서 이미지를 만들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과 명분을 만드는 거래요."
그니까 그걸 왜 날 이용해서 해야만 하는 건데? 앙?
"정치는 제국의 수많은 백성들을 걱정 없이 잘 살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토론해서 더 좋은 방법을 찾는 것이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야."
요즘 귀족들은 정신 상태가 썩었어. 물론 이해는 한다. 귀족들이란 제 영지민에게도 관심이 없는 족속들이었다.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와 권력, 사치만을 위하지.
물론 우리 아버지는 제외. 비스 영지는 세율은 높지 않지만 풍요로운 땅이라서 영지민들이 많이 이주해 오던 땅이었다.
불만 가득한 표정의 날 시녀들이 걱정스레 보고 있었다. 내 밑의 시녀들도 초조할 텐데 내가 이런 약한 모습 보여주면 안 돼.
이럴 때일수록 초긍정 모드로 가자. 솔직히 내 속은 초초초 부정적 사고와 불행으로 똘똘 뭉쳤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야지.
그러고 보면 새삼 윗사람은 힘든 일이야. 이래서 황제란 외로운 자린가? 아바마마를 보면 이해가 되긴 하지.
흐음, 카일한테 잘해주자. 곧 제일 고독하면서도 강한 척해야하는 사람이니까.
"뭐, 지들이 발악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진 않겠지만, 훗."
"그거 허세 같아 보여요."
에이린의 말에 유리아마저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윽! 들켰다. 완전 허세다 아무렴. 그렇다고 하지만 너희들 윗전이 허세 좀 떤다고 나한테 이러기냐? 황태자비는 이래도 된다고! 적당한 허세와 자신감이 필요한 존재란 말이야.
눈매를 좀 내려 그려서 한껏 불쌍한 척을 해 보았다. 나는 억울하게 모함을 듣는 가녀린 여인을 연기하긴 개뿔!
이래놓고 가서 천연덕스럽게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다 할 예정이었다. 이젠 어릴 때처럼 억울하게 할 말 못하고 참고 살지 않겠어!
이건 다 사랑의 힘이... 아니라 권력의 힘 인가?
출발하기 전 어제 상태가 나빴던 알비케라의 얼굴을 보러 잠시 들렀다. 자신이 언제 아팠냐는 듯이 꼬리를 흔들고 애교를 떠는 알비를 보자 마음이 놓였다.
"어제 왜 그랬어?"
"뀨우?"
모르는 척하다니, 나쁜 녀석. 얼마나 걱정했는데...
네 영혼이 검은색이든,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든, 나는 상관없어. 너와 나는 가족이고, 네가 나를 지켜준 것처럼 나도 널 끝까지 지킬 거니까.
내 마음속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알비는 내 손에 머리를 비비기 시작했다. 알았어, 걱정 안 할게. 나는 그런 알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출발해 볼까? 시녀들이 다 내게 응원의 눈빛을 보내줬다. 다들 걱정하지 마, 잘 싸우고 올 거니까.
회의장의 문 앞에 서자 시종이 내게 인사해왔다. 후우,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시종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밤하늘을 비추는 작은 별, 아르세이아 스텔라 데피니토르 황태자비께서 드십니다."
회의장의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이 문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소심하고 부정적이었던 소녀 세이렌이 아니야. 당당하고 할 말 다 하는 황태자비 아르세이아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