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70화 (70/126)

71화. 나쁜 소식 중에 반가운 소식.(1)

2018.06.18.

급히 지하감옥이 있는 곳으로 갔다. 원래 귀족이기에 좋은 시설에 감금해야 하지만 반역자에게 자비 따위는 사치라, 가장 더러운 감옥을 내어 주었다.

"세이, 너는 들어가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알리페르. 세이를 부탁하지."

카일은 날 두고 루카스와 지하로 내려가 버렸다.

혹시나 자살을 위장한 살수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괜히 불안해졌다. 그렇다고 카일이 당할 사람은 아니지만.

도대체 어째서 자살을 한 거지? 무엇을 덮으려고? 자신의 목숨과 바꿀 만큼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괜히 음침한 곳이네. 여기 기분이 별로야."

"누님이 오실만한 곳은 아닙니다."

내가 억지로 따라온 것이었다. 혹시 찾을만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으으으음. 여기 쥐나 바퀴벌레 등이 있는 것 아냐?"

"아무래도 있겠죠?"

혹시 수상한 사람이 있었냐고 물어볼까? 으,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걔들은 못 부르겠어. 내 이성이 그것만큼은 아직 허락하지 않았다.

"감옥을 드나든 사람은 없었나?"

"딸이라는 시녀만 한 번 왔었고, 그 외에는 없었습니다."

유피테르 영애가 황후의 지시를 전달한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걸리면 책임지고 자살을 할 작정이었던 걸까? 황후나 콘스탄트 공작이 자신의 목숨과 바꿀 만큼 그렇게 따르고 싶은 주인이야?

유피테르 백작이 충성을 보여야 할 대상은 이 제국이고, 황제 폐하지 황후나 공작이 아니었을 텐데...

안타깝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지하감옥이 있는 탑의 입구는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예전에도 이곳에서는 많은 죄인들이 죽어 나갔겠지?

악령이나 귀신을 믿진 않지만, 흐음. 괜히 따라왔나?

"누구냐?"

펠과 기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긴장감이 흘렀다. 황궁 안에서도 나를 노리는 간 큰 사람이 있는 걸까? 카일이 바로 뛰쳐나올 텐데.

"비 전하, 부단장님, 서운합니다. 고생하고 온 사람한테 칼이나 겨누고."

"프리케!!"

조금은 수척해진 모습의 프리케가 어둠을 뚫고 나왔다. 어디 다치진 않았니?

약 3주 만에 만나는 프리케는 여전히 서글서글한 모습이었고, 어디 다치거나 부러진 곳은 없어 보였다.

"또 습격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기다리셨을 텐데요."

"아니야, 괜찮아. 무사한 거지? 너도, 그리고 그분도..."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차마 어머니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프리케가 돌아왔다면, 어머니도 구했을 것이다.

괜찮으신 걸까? 살아계셨던 것은 맞지?

"많이 쇠약해지시긴 했으나 그분도 무사하십니다. 지금쯤 안전한 곳에서 단장님과 만나고 계실 겁니다. 조금 더 주변이 안정화되면 모시겠습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어머니를 만나고 싶었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는 함부로 나갈 수 없었다. 카일에게 부탁해야지. 때마침 카일이 루카스와 감옥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대단한 충성심이군."

"아니면 더 큰 약점을 잡고 있거나요, 이를테면 자식이라던가."

시녀 말인가? 그녀가 그의 약점이었을까?

카일은 올라오다가 프리케를 발견하고는 살짝 인상을 구겼다. 좀 친해진 것 같더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나 봐.

"여어, 프리케. 잘 다녀왔나?"

"예, 전하. 제가 없는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들었습니다만."

"그랬지. 참, 지하감옥에 그림자군 출신의 살수로 보이는 이가 있던데 한번 만나보겠나? 자네의 원한을 산 놈들도 있을지 모르잖나."

카일의 말에 프리케의 눈썹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죽여도 됩니까?"

"몇 안 남은 증인이니까 죽지 않을 정도로만 괴롭혀. 나중에 루피넬리아에 항의할 증거들이기도 하니까."

비릿하게 입가를 끌어올린 프리케는 지하감옥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린 프리케를 죽이려던 자들도 그림자군이었구나.

"세이, 괜찮아?"

"카일, 프리케가 구해냈대요."

"그래, 다행이네. 조금만 더 일찍 구해냈으면 보러 가기 쉬웠을텐데."

"안 되겠죠...?"

그래, 지금은 위험한 시기니까, 참아야지. 어쩔 수 없잖아. 그정도 이해도 못 하는 철없는 아이가 아니니까, 참자.

"많이 속상해? 최대한 빨리 만날 방법을 찾아 볼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응. 카일을 믿고 기다릴게요. 이미 오랜 시간 기다린 거니까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어요."

"처남. 대신 내일 후작에게 입궁하자마자 세이에게 들리라고 해."

"네 매형. 누님 너무 걱정 말고 기다리세요. 저는 괜찮으니 제 걱정도 말고요."

일단 구했다는 게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괜찮아. 그리고 카일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잖아.

알리페르에게는 고맙고, 또 미안했다.

"밑에 상황은 어때요?"

"낮에 콘스탄트 공작이 주장했던 그대로 유서를 썼어."

"나 때문에 딸이 징계 받아서 기분 나빴다고요?"

"어, 그것을 아주 원망을 철철 넘치게도 써 놨더라고. 가문을 모욕했느니 하면서."

아하, 안 봐도 뻔했다. 그걸 그렇게 이용해 먹다니. 그때 아바마마께 바로 고했어야 했다.

그때 최소한 황후가 시녀들에게 죄를 덮어씌우더라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왔어야 했어. 적에게 동정심 같은 것을 보이지 말았어야 했어.

궁중 암투에는 어설픈 동정이 내게 부메랑이 될 수도 있구나.

"여론 싸움을 벌이려나요? 내가 못된 황태자비라 죄 없는 시녀를 벌주고, 억울한 백작가의 수장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아마도? 그렇겠지?"

조금 헛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뭐든 확실하게 매듭을 짓고 공론화시켜야겠어요."

"응. 그래도 세이가 생각보다 마음이 강해서 다행이야. 마냥 여린 소녀라고 생각했었는데."

"남편이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나도 보통 사람의 멘탈로는 살 수가 없더라고요? 일단, 우리가 잘라내려던 것을 스스로 잘라 버렸으니, 상처를 곪게라도 만들어 줘야지 않아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서늘하게 웃어 보았다.

뭔가 분위기 있고, 무섭지 않을까? 아, 내가 말했지만 잔인한 여자인 것 같다. 이런 것마저 남편 닮아가다니!

"세이, 그런 건 나 안 닮아도 되는데."

하하하, 역시나. 카일도 눈치챘구나.

"보기 싫어요?"

"아니, 네가 카리스마까지 있으면 추종자들이 더 늘 것 같아서 싫어. 몰라서 그렇지 근위 기사 놈들이 널 얼마나 찬양하고 다니는데. 다 눈을 뽑아버릴 수도 없고."

아니 그 사람들이 날 찬양하는 건, 다른 이유거든요. 뭐, 정정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음. 질투쟁이 카일은 귀여우니까.

긴박한 상황들 속에서도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을 보면, 앞으로도 함께 잘해나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죠, 카일?

어머니한테 얼른 사위를 소개해주고 싶었다. 좋아해 주시겠지?

다음날 오전, 아버지가 급히 입궁하셨다.

"아버지!!"

"비 전하!"

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오셔서 꼬옥 껴안아 주셨다. 그리고 한참이나 말없이 우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일단 다독여 드렸다. 혹시 밤새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되어 손이 덜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후작, 세이가 긴장하고 있지 않나. 게다가 세이를 안을 수 있는 것은 이제 나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데?"

황태자라서 그런 걸 알지만 장인에게 참 못됐게 말하네. 저거, 혼내야겠어.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놀라셨지요?"

아버지는 멋쩍은 듯이 날 놓아주고는 작게 웃으셨다. 다행히 큰일은 아닌 것 같았다. 많이 늙으셨구나. 감정이 북받쳐 오르신 것을 보니...

"괜찮아요. 아버지는 괜찮으신 거예요? 혹시..."

"너무 기뻐서 그랬습니다. 어제 아멜리아를 봤는데, 여전히 비전하와 같은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두 모녀를 모두 찾아서 너무 기쁘고, 벅차올라서 그랬습니다. 제가 주책맞게 굴었네요."

여전히 어머니를 많이 사랑하고 그리워하셨구나. 눈에서 기쁨이 흠씬 묻어났다. 그렇게나 좋은가?

"원래 그리운 사람을 힘들게 만나면 행복한 거야. 예전에 내가 널 찾고 미친놈처럼 좋아했던 것처럼. 당연한 것 아니겠어?"

두 사람은 서로를 아주 잘 이해한 듯이 마주 보고 웃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힘겹게 찾은 동질감인가?

"어머니는 괜찮으신가요? 프리케가 많이 수척해지셨다던데."

"다행히 학대받거나 고통을 겪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수도원이라 성직자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외부와의 소통만 안 되었을 뿐 힘든 일은 거의 없었답니다."

"예전에 저랑 스타티나를 구하려다 입으셨던 화상은 어찌 되었던가요? 치료를 잘 받지 못한 것은 아니겠죠?"

내 말에 아버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쓰러움과 죄책감이 가득한 아버지의 입은 조심스레 열렸다.

"화상이 깊어서 흉터가 남았습니다."

"아, 어떡해. 날 얼마나 원망하셨을까."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자 두 남자는 서로 내 눈물을 닦아주려고 나섰다.

"세이, 울지 마. 내가 운디네를 불러서 치료해 볼게."

"울지 마십시오. 비 전하. 아멜리아가 속상해할 겁니다. 그리고 그때 일은 비 전하 탓이 아니니 죄책감 가지지 마십시오. 그리고, 흉터가 있는 와중에도 리아는 비 전하에게 주고 싶다며 레이스를 만들었답니다. 그걸 위해 열심히 움직이고 연습해서 자유롭게 손을 사용한답니다."

아버지는 내게 작은 꾸러미를 주셨다. 조심스레 매듭을 풀자 샤르륵 흘러내릴 듯한 부드러운 레이스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두개를 만들었는데 하나는 비 전하께, 다른 하나는 스타티나에게 주려고 열심히 만들었다고 합니다. 둘 다 자신에게는 사랑스러운 딸이라면서요."

"세이, 장모님이 정말 널 많이 그리워하고 사랑하나 봐."

"나 때문에 불이 난 거였는데 절 원망하지 않던가요?"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만 그 화재는 결코 비 전하의 탓이 아닙니다. 리아도 알고 있고요."

나는 내가 당시의 아르세이아, 그러니까 내 동생 스타티나를 미워해서 이유 없이 불이 났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후작부인이 늘 그렇게 말했고, 당시의 기억이 거의 없었으니까.

"어머니는 어디 계셔요?"

"전하께서 마련해 주신 안전한 거처에 있습니다"”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내가 생각해 둔 방법이 있어. 열흘 안에 황후파 일들을 정리하고 만나자."

카일이 내 손을 꽉 감싸며 말했다. 그런 우리를 보던 아버지께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계속 제 큰딸을 노리는 습격이 있어서 황궁으로 보낸 것을 살짝 후회할 뻔했습니다."

"장인어른. 그러시면 안 되지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뭐야, 이럴 때만 아버지께 존대하고!

"카일, 아버지께 평소에도 방금처럼 대해줄래요?"

"응? 아, 내가 어릴 때부터 워낙 편하게 지내서 습관이 됐어. 그래, 나의 세이를 낳아주신 분인데, 장인께도, 장모님께도 존대할게. 내 부모님 대하듯."

사실 황족이라, 장인, 장모라도 꼭 존대를 할 필요는 없었다. 후작부인은 그냥 귀부인 대접한다고 억지로 존대한 것이고.

그럼에도 내 부탁을 들어준다는 카일이었다. 사랑스러운 내 남자.

아버지도 그런 카일의 답에 웃으며 답하셨다.

"리아도 사위를 잘 얻었다 칭찬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나는 제국 제일의 신랑감이거든... 요."

"전하,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내게 보내라 했다는 이것저것을 더 챙겨주신 뒤 창공의 관으로 카일보다 먼저 이동하셨다.

어릴 때 내가 좋아했던 과일 푸딩과 귀리로 만든 과자였다. 정말 오랜만에 먹는 어머니의 요리에 다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울지 마, 세이. 네가 울면 장모님이 속상해하실 거야. 후작이, 아니 장인어른이 곧 지금의 부인과 혼인관계를 정리한다고 했으니까, 네 어머니도 지금껏 못 받은 대우를 받으실 수 있을 거야."

"응, 알겠어요. 그런데 카일. 늘 궁금했는데요. 당신은 어떻게 나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아요?"

"어? 그건 유능한 보좌관과 조력자들의 덕분이랄까?"

그 조력자들 명단을 좀 봐야 할 것 같은데?

"그 조력자에, 혹시 아버지와 펠, 에이린, 스타티나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뭐, 그렇지."

오호라, 에이린도 포함이라 이거지?? 처음부터 수상했어. 카일 편 아니냐니까 무조건 내 편이라더니!!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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