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내 용기의 근원은 당신입니다.
2018.06.16.
오후 늦게 기사들이 돌아왔다. 샅샅이 뒤져서 시종의 여동생이 납치되었다는 창고를 찾아 그녀를 구출했다.
시종은 감사 인사를 하며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것은 무엇이든 고하겠다고 했다. 벌도 달게 받겠다고 했다.
"유피테르 백작을 납치와, 반역 혐의로 구속한다. 그의 자택과 영지의 재산을 동결하고 압류할 것이며, 그 가족들의 지위는 재판 후에 결정될 것이다."
아쉽게도, 그러나 예상한 대로 콘스탄트 공작이나 황후와의 연결고리는 따로 나오지 않았다.
시종은 황후 폐하를 위해서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지만 유피테르 백작이 이를 부인했다. 이를 확인할 증거가 부족한 것이 아쉬웠다.
"일단은 다들 돌아가도록 하지. 유피테르 백작가의 단독 범행이길 기도하고 있겠어."
백작의 아내였던 황후의 여동생은 이미 사별했다고 들었다. 소피라는 시녀는 백작의 양녀였고, 소피를 비롯한 황후의 조카들은, 반역을 저지른 아비에 의해 귀족 지위를 박탈 당하겠지.
콘스탄트 공작은 소피가 나로 인해 징계를 받은 일로 앙심을 품은 백작의 단독범행으로 마무리 지을 심산인 듯했다.
고문을 받던 암살자들도 입을 맞춘 듯 그렇게 진술하고 있다 했다.
"아깝다.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하게 황후를 엮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황후의 수족을 하나라도 쳐낸 것만으로도 큰 성과지."
"누님. 마탑에서 그 흑마법사의 증언과 증거를 확보하고 나면 한 번에 쳐낼 수 있을 테니 기다리십시오."
대어를 잡고 싶었는데, 피라미들만 잡은 것 같아서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 쪽이 아직은 더 유리하니까. 괜찮을 거야.
황후를 좀 더 조심하고 경계하면 되겠지.
카일과 나는 해가 진 뒤 에이린과 펠을 데리고 분수대로 왔다. 낮에 이야기한 바비큐를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마법사는 아직도 못 깨어났다면서요? 말벌독이 독했나?"
"증언뿐 아니라 증거도 찾아와야 하니 시간이 제법 걸릴 거야."
질질 끌면 황후에게 기회가 주어질까 걱정됐지만, 일단은 지금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자.
"자, 이제 시작해도 돼?"
긴장으로 살짝 식은땀이 났다. 그런 날 다들 염려스럽게 쳐다봤다.
"힘들면 안 해도 돼. 억지로 참을 필요 없어."
"네, 비 전하. 황태자 전하의 말씀이 옳아요. 무리하지 마요. 비 전하가 고통받는 것 싫어요."
에이린, 고마워. 하지만 나 용기를 낼 거야. 앞으로 제국민들을 만날 일도 많을 거고, 밖에 놀러 가고 싶은 일도 많을 건데, 매번 비싼 마법등을 뿌릴 순 없잖아?
사치야 그거. 뭐 평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돈 아껴서 더 좋은 일에 써야지.
그리고... 나는 내 옆에서 내 손을 꽉 잡고 있어주는 내 남편을 봤다.
"카일이 곁에 있으니까 괜찮아. 내가 힘들어하고 정신을 잃으면 날 깨워줄 사람도 카일인걸."
카일이 그 말에 진한 미소를 지어줬다. 그래 저 미소가 내 곁에 있는 한 나는 용기가 바닥나지 않을 것이었다.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쌓아놓은 나무 장작으로 시선을 옮겼다. 옆에는 각종 고기와, 해물, 야채로 만든 꼬치들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저것을 먹기 위해서라도 힘 내야지! 아자!
내가 카일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카일이 조용히 살리맨더를 불렀다. 그러자 나무 장작에서 매캐한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냄새를 맡자마자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무 장작에 불이 활활 붙기 시작했다. 불꽃은 높은 곳까지 치솟아 흔들흔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치 그날처럼, 내 눈앞을 덮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아르세이아!"
어머니의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불속에서 멍하니 굳어있는 우리 이복자매를 부르는 내 어머니의 외침. 어머니는 우리 둘을 모두 끌어안으셨다.
그 순간 불이 붙은 나무 장식장이 넘어져 우리를 덮치려 했다. 장식장이 엄마를 덮치는 순간 나는 외쳤다.
"너희들 나빠!! 다신 꼴도 보기 싫어!"
누구를 향한 외침이었을까? 나는 왜 불이 난 것을 알았을 때 누군가를 이리도 원망했을까?
어머니는 우리를 구하려다가 결국 불붙은 장식장에 손이 깔렸다. 그래서 손에 큰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날, 활활 타오르던 불길에서 우리들을 구한 것은 누구였을까?
"세이!! 괜찮아?"
"카, 카일. 으응. 조금 무섭긴 한데... 차, 참을 만해요."
"운디네를 불러 줄게."
카일이 불러다 준 시원한 기운이 조금 뜨거워진 머리를 식혀줬다.
괜찮아. 나와 스타티나, 그리고 어머니를 덮치던 불길은 곁에 없어. 불이 나를 덮치려 하면 카일이 안전하게 날 구해줄 거야.
크게 심호흡을 했다. 계속 감기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초점을 맞춰 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불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 수 있게 하고, 밤을 밝히고, 겨울에 우릴 따뜻하게 지켜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해주는 좋은 친구였다.
"카일, 곁에 있는 거 맞죠?"
"응, 언제든 무서우면 바로 불 끌 테니까 말해."
"나 떨어요?"
"조금. 하지만 그때보다는 안 떨어. 많이 발전했어. 눈도 맞추고 있잖아. 잘하고 있어."
카일의 칭찬에 용기가 조금 더 생겼다. 후우,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새우구이! 닭꼬치! 얼른 만들어 먹어요. 그럼 덜 무서울 것 같아."
식욕은 공포를 이길 수 있다!
에이린과 펠이 우릴 위해 정성껏 꼬치구이를 모닥불에서 돌리기 시작했다. 오호? 요것들 봐라. 어디서 누나가 시퍼렇게 눈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꽁냥질이야?
서로 냄새가 밴다며 자리를 바꾸고 있는 두 남녀를 보니 귀여웠다.
냄비를 걸어 야채와 고기를 넣고 스튜도 끓이기 시작했다. 서로 국자로 저어주면서 쫑알대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제법 친해진 모양이었다.
제법 잘 어울리네. 선남선녀야. 우리보단 못하지만. 호호.
나는 날 지키고 있는 남자에게 기댔다. 카일의 온기가 눈앞의 뜨거운 불꽃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불도 견딜 수 있을 거야.
확실히 몸이 떨릴 때마다 카일의 손이 아득해 지려는 내 정신을 잡아 주었다.
날 지켜주는 카일의 손이 참 크고 든든했다. 그와 함께하며 동생의 연애질을 보는 이 시간들 참 행복하고 평화로웠다.
언제 또 사건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황궁 생활이지만, 이런 시간이 나쁘지 않네. 여기에 스타티나도 있으면 좋겠어.
어머니를 찾고 가족사가 정리되고, 황후까지 정리되면 아버지께 말해서 다 같이 이런 시간 보내자고 청해봐야지.
"카일, 다음엔 아버지랑 아바마마도 불러요."
"그럴까?"
스타티나는 아마 깜짝 놀랄 거야. 내가 불을 극복한 것을 보면 그 아이의 죄책감도 사라지겠지? 내가 불에 트라우마를 갖게 된 것이 언제나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으니까.
솔직히 그때 일이 다 기억나진 않아서 걔가 왜 내게 미안해하는지는 모르겠단 말이야. 내가 원망한 게 스타티나가 아닌 것은 확실한데.
사고의 원인을 알면, 카일이 없어도 불이 덜 무서워 질지도 몰라.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했다. 뜨겁게 익은 새우의 짭조름한 냄새를 맡자 조금 식욕이 돌면서 식은땀으로 식어버린 몸에 감각이 돌아오는 듯했다.
조금 한심하네. 먹을 것 앞에서 공포도 사그라들다니. 아니, 이건 카일 곁이라 공포가 억제되서 식욕이 도는 것임에 틀림 없었다.
"누님. 누님이 제일 좋아하는 새우부터 드세요. 스튜도 곧 끓을 거예요."
"세이, 뜨거워, 내가 껍질 까줄게. 이리 줘."
자상한 나의 남편은 이런 면도 좋았다. 카일은 운디네로 손을 보호한 뒤 새우 껍질을 까서 내 입에 쏙 넣어 줬다.
"으음! 맛있어!"
탱글탱글하면서도 짭조름한 이 맛은 나의 황궁 생활을 더 풍족하게 해줬다. 역시, 내가 이 맛에 황태자비를 한다니까!
"세이, 너 지금 새우 때문에 황태자비 되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지?"
"하하하. 카일이 까준 새우 때문에 잘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그건가? 에이린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우이씨, 뭐!
"펠, 너도 에이린을 위해서 새우를 까줘야지. 매형을 본받아야 한다고!"
"그럴까요? 저기 린?"
어머, 이제 애칭도 부르는 사이가 됐네? 펠이 사람들 앞에서 애칭을 부르자 에이린의 얼굴이 빨개졌다.
"자, 아 해요."
펠의 말에 에이린이 어쩔 줄 몰라했다. 어머, 쟤가 어디서 내숭이래! 부끄러운척하기는!!
자, 어서 받아먹어!! 나도 두고두고 놀릴 거라고!!
에이린은 결국 수줍은 새색시 표정으로 펠이 까준 새우를 받아먹었다. 그래놓고는 부끄럽다고 스튜를 국자로 퍽퍽 휘젓고 있었다.
내 스튜! 건더기가 적당히 남아 있어야 식감이 좋다고! 다 으깨지겠어!
"린, 같이해요."
펠은 에이린을 혼자 두지 않았다. 꿀이 떨어 질 것 같은 표정으로 에이린의 옆에 섰다.
우와, 내 동생도 사랑꾼이구나. 사랑받겠어. 호호호.
펠은 부끄러워하는 에이린을 살뜰히 챙겼다. 내 친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남자일 것 같았다.
둘 다 귀족이라서 저런 일이 서툴 텐데. 내가 불을 무서워하는 것을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릴 수 없어서 저 아이들이 직접 요리를 하는 것이었다.
조금 미안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야. 둘이서 저렇게 즐거워하니까, 더 잘 된 거겠지?
펠은 어느새 무거운 국자를 뺏어서 자신이 스튜를 젓고 있었다. 서로 간도 보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 이미 부부 같네. 호호.
"내 동생이 당신 닮아 가는 것 같아요."
"음, 좋은 현상이야."
둘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내가 내 비상금을 탈탈 털어서라도 둘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러줘야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우리보단 못하지만요."
내 말에 카일이 환하게 웃었다.
모닥불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조금 떨렸고 무서웠지만, 카일이 곁에 있어서 참고 끝까지 버틸 수 있었다.
카일이라는 존재가 내게 얼마나 큰 용기를 주는지 알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내가 직접 불을 켜고, 카일을 위해 요리할 수도 있을 거야. 힘내자.
우리는 그저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살벌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황궁이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아름답고 잔잔한 시간이었다.
나는 카일의 넓은 어깨에 기대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조물주가 누군지, 참 고마웠다. 이렇게 잘생긴 얼굴로 빚어 놓다니.
카일의 얼굴을 망치는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지 않겠어! 어? 그런데, 우리 남편 뺨에 상처가 사라지고 없네.
어제 분명 피도 많이 났는데. 하긴, 그때도 피의 양에 비해 상처가 깊지 않긴 했지. 그래도 딱지 정도는 앉을 줄 알았는데 깨끗하다?
참, 내 남편은 운디네를 부를 수 있었지. 그래서 상처 같은 게 없는 건가?
"카일. 당신, 예전에 죽을 뻔한 적 많았다고 했죠?"
"응 그런데 왜?"
"그런 사람치고는 온몸에 상처가 없어서요. 운디네가 오래된 상처들도 다 없애는 거예요?"
"글쎄, 내가 딱히 낫게 해달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정령왕들과 계약하고 나니까 점차 상처들이 사라지더라고? 아주 깊었던 상처도 없어졌어. 지워지지 않길 바랐던 상처도 있었는데."
나랑 비슷한 체질인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정령왕들이 치료해주는 모양이야. 계약하고 나서 없어졌다니까.
나도 후작부인이 때려서 만든 흉터도, 화상 자국도 다 없어졌는데. 나는 자연력들의 축복 때문인가?
"없어지지 않길 바란 상처가 뭐예요?"
내 질문에 카일이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응? 왜 말 못 하지?
"음, 형님이 돌아가셨을 때 얻었던 상처인데... 매우 깊은 상처였고 치료도 늦어져서 흉터가 깊었어."
아, 1황자님과 관련된 상처였구나. 카일은 그 상처를 보며 형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복수를 다짐하고 싶었나 봐.
"1황자님은 당신이 몸에 흉터보면서 죄책감 느끼길 원하지 않았을 거예요."
"뭐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그럼 뭐예요?라고 물을 시간은 없었다.
"전하! 급히 감옥으로 가셔야 하겠습니다!"
루카스 보좌관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는 다정한 펠과 에이린의 모습에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윽, 실연의 상처가 컸구나.
"무슨 일이야?"
"유피테르 백작이 자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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