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68화 (68/126)

69화. 그물을 쳐야 고기를 잡지.(2)

2018.06.15.

"진실을 고하면 용서해주려 했거늘!!"

나의 노성에 시종은 몸이 얼어붙은 듯했다. 나와 펠이 눈을 맞췄다. 마법등을 비춘 상태에서 펠이 서신을 꺼내들었다.

종이는 별이라도 된 듯 스스로 빛을 뿜어댔다. 스파이를 잡아내는 상황만 아니었어도 참 예쁘고 낭만적인 편지지였다.

흠. 이거 예쁘긴 하니, 오랜만에 카일에게 이걸로 편지나 써줘야겠다. 좋아하겠지? 나도 모르게 카일을 보며 웃어주자 카일도 좋아죽겠다는 표정을 보냈다.

그렇게도 내가 좋아요?? 우쭈쭈. 사람들만 없었어도 놀겠지만. 일단, 일부터 하자.

펠은 열심히 봉투를 털었다. 그다음은 편지지를 털어댔다. 자, 그러면 꽃가루가 별 가루처럼 후드득 떨어질 것 같죠?

"안됐지만 이 꽃가루는 말이야, 접착력이 있어서 어디든 잘 들러붙거든? 가루처럼 흘러내릴 일이 없어."

꽃가루가 흘러내렸다는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나 버리자 시종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협박을 받았습니다! 제 여동생이 인질로 잡혀있어요. 무엇이든 두 분 전하의 약점을 알아오라 했습니다. 제발 여동생을 구해주십시오!"

"누가 그런 말을 했지?"

"유피테르 백작입니다."

"저런 미친놈의 말을 믿습니까?"

유피테르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작 자신이 미친 것처럼 발광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곱게 마법등을 그에게 비추어주었다.

"풉, 이봐 백작. 당신의 손이 그렇게나 반짝이는데 말이 되는 핑계를 대지 그래? 당신 앞에 놓인 그 종이가 시종이 전해준 메모인가?"

내가 양껏 비웃어주자 유피테르 공작이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나도 안 무섭네요. 죄인 주제에.

펠이 그 메모를 뺏어다 카일에게 전해주었다.

"이봐, 백작. 증거는 바로 은폐해야지. 어쩜 이렇게 내용이 내가 개봉도 안한 서신의 내용과 같나?"

카일이 비릿하게 웃어주며 백작에게 살기를 풀었다. 아직 공작들의 담력을 배우지 못한 백작은 카일의 살기에 살짝 주저앉았다.

쯧쯧. 나는 콘스탄트 공작을 돌아봤다. 사람을 쓰려면 좀 괜찮은 이를 들이지.

무덤덤해 보이는 공작을 보니, 뻔했다. 꼬리를 깔끔하게 잘라내겠구나.

"근위대! 유피테르 백작을 포박하라! 그리고 내 명령이 있기 전까지 이 회의장의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귀족들의 보좌관과 시종들도 마찬가지며, 창공의 관에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폐쇄한다. 그리고 유피테르 백작가의 사저와 시종 안토니오의 집을 수색해서 증거를 찾아오도록!"

카일의 선언에 중도파와 아버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들이 불만을 표하며 항의했다.

유피테르 백작만 구금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었다. 왜 자신들까지 죄인 취급이냐 이거였다.

이봐요들!! 황태자비의 아버지인 비스 후작도 아무 말 없이 갇혀있거든?

"황태자인 나와 황태자비의 신상에 관한 문제이다. 실제로 습격이 있었고 그 신상정보를 사사로이 유출한 시종과 그를 취한 귀족이 있었거늘!!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있을 것이다. 관련자들도 모두 색출해야 한다. 이에 반하는 자들은 반역에 준하는 죄로 취급할 것이니 그리 알도록!"

우리 남편, 귀족들에게 하는 것 보니까 진짜 멋지네. 황제감이야 아무렴.

카일의 엄포에 귀족들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카일과 나, 그리고 펠은 창공의 관 밖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콘스탄트 공작의 표정을 보니, 꼬리를 잡긴 힘들 것 같던데요? 이걸로 황후까지 엮어들어가긴 힘들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에도 그랬어. 마법사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을 테니 천천히 목줄을 쪼아야지. 이번에는 황후의 손 하나를 쳐내는데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어디에 황후의 끄나풀이 있을지 몰라 마법사를 빼돌리는 것은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대부분은 마탑주의 도움이었다. 말벌에 쏘여 얼굴이 퉁퉁 부은 것을 이용했다.

마탑 지부 중 하나가 무연고 시신의 장례절차를 맡고 있다 했다.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장례라나?

왠지 불법 실험을 하고 있을 것 같지만, 과거 현자의 구속으로 마법사들이 나쁜 짓을 하지는 않는다니 믿어야지 뭐.

아무튼 거기서 마법사와 머리색과 체격이 비슷한 시신을 가져와서는 얼굴을 퉁퉁 붓게 만들었다. 알아보지 못하게.

옷을 갈아입히고 약간의 환영 마법진을 로브에 새겼다고 했다.

부상을 입은 것으로 치부되어 황궁의 지하감옥에 갇혔던 마법사는 다음날 오전 벌독으로 인한 쇼크사 처리되었다. 반역자의 시신이기에 황궁 성문밖에 걸렸다.

아마도 그를 사주한 자들이나 그가 속했다던 그림자군들이 와서 멀리서 확인을 했겠지.

"귀족들은 어쩔 거예요?"

"일단 겁만 주지 뭐."

어제 붙잡힌 나머지 습격자들에 대한 고문도 시작되었다고 했다.

제발 황후가 엮여들어가면 좋겠는데, 쉽진 않겠지?

"카일. 그런데 아까 회의장에서 귀족들한테 호통친 모습이요."

"어? 좀 무서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온통 기어올라서 물어뜯을 기세거든. 늘."

에이, 난 그런 모습 이제 전혀 무섭지 않은데. 이 남자는 내가 어떤 모습에 새삼 반하는지 모른다니까.

"아뇨, 정말 멋졌어요. 일하는 내 남자의 모습. 진짜, 너무 카리스마 넘치던걸요? 우리 아버지도 그런 당신 모습 보고 흐뭇해했어요."

"훗. 내가 카리스마가 좀 넘쳐흐르지."

내 칭찬에 우쭐해하는 모습은 왜 이리 귀엽냐고! 아이 깨물어 주고 싶다.

"펠, 에이린한테 저녁은 아무래도 여기서 먹을 것 같으니까 요리사들에게 간단한 것들 준비해 달라고 전해줄래? 가서 너도 에이린이랑 시간 좀 보내고 오고."

펠은 내 말에 작게 웃으며 천천히 다녀오겠다며 떠났다. 내 동생이 눈치 있는 아이라서 다행이야.

호위 기사에게 시킬 심부름이 아닌데 말이야.

아무래도 가족이 곁에서 지켜보는 대서 카일이랑 애정행각하는 것은 부끄럽단 말이지.

"처남도 갔고, 지시도 다 내렸으니까 결말이 나는 것을 구경하는 동안 우리는 미뤄왔던 둘만의 데이트나 하러 갈까요?"

"어머, 이 황태자님 또, 땡땡이에요? 중요한 일을 앞두고?"

"황태자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황태자비와 금슬 좋게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이랍니다."

카일의 말에 까르륵 웃음이 났다. 역시 카일이었다. 어제 일로 혹시나 내가 또 힘들어 하진 않을까 걱정돼서 이러는 거겠지?

본인이 더 힘들 거면서, 늘, 내가 먼저인 남자.

이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나?

"카일. 오늘 밤에요."

"응? 왜? 뭐 하고 싶은 자세 있어?"

이 변태가 뭐라는 거야! 얼굴이 빨개졌다. 아 진짜!!

"우리, 분수대 앞에서 모닥불... 피워보지 않을래요?"

"모닥불?"

"응. 어제 당신이 있어서 인지 폭탄 터질 때 불꽃도, 마법사가 쏘던 불덩어리도 참을 수 있었거든요."

게다가 당신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마법사가 언제 불덩어리를 쏠지도 모르는데 그쪽을 쳐다볼 수 있었다.

"당신과 함께라면, 음, 무서운 것도 참고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 용기 내어 보려고요."

카일이 갑자기 내 머리카락을 막 헤집기 시작했다. 간지러우면서 살짝 소름 돋는 것도 같은 기분 좋은 느낌.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매번 당신한테 의지할 수는 없잖아요. 스스로 견뎌낼 수 있게 연습할 거예요."

"나한테 의지해도 돼. 너는 그럴 자격 있어."

치이, 당신한테 혹시나 짐이 될까 봐 그러는 건데. 바보!! 내가 불 무서워한다는 것을 적들에게 들켜서 더 노력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네가 하고 싶다니까 하자. 기왕이면 네가 좋아하는 요리를 곁들이자고. 고기나 해산물을 꼬치에 꿰어서 모닥불에 구워 먹는 거야. 어때?"

헤에에에 좋으다! 역시 내 남편! 엄지 백 개 드릴게요. 꺄아.

카일이 이런 남자라서 좋았다. 결국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은 꼭 하게 해주고, 더 좋은 제시까지 해주잖아. 내 취향도 알고 있고.

카일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내 기분만큼 손이 휙휙 올라갔다. 카일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심각한 일 앞두고 이렇게 신나도 되나? 뭐, 적들의 수족 자르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니 신나도 되는 거지 뭐.

"하긴, 그러고 보니까 당신한테 도시락 해준다고 주방에 갔을 때요. 요리사들이 스테이크 굽는 불을 살짝 봤는데도 괜찮았어요. 왜지?"

"당연히 나한테 요리해주는 거라서 괜찮았겠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용기가 난 거야!"

저 근거 없는 자신감도 좋았다. 근거 없는 것이 아닌가? 카일이 내 용기와 변화의 근원이긴 하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이렇게 변화 시킬 수 있는 남자가 또 있을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멋진 카일이 내 남자예요. 막 자랑하고 싶네. 누구 없나?

"이런. 불청객이군."

"황태자, 황태자비. 귀족들을 구금하다니 이 무슨 황망한 일이냐!"

"밤하늘을 밝히는 별, 황후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아니, 아무리 자랑할 사람이 없었다지만, 이 무슨!! 하필 이 여자가 나타나냐고.

"아직 이 황궁에는 쥐새끼가 많은가 보군."

우와. 내 남편. 막 면전에다 대고 그렇게 막말해도 됩니다!! 아무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도대체가.

창공의 관은 폐쇄 조치 되었고,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은지 30분도 되지 않았다.

황후는 카일의 말에 눈썹이 아주 크게 꿈틀 거렸다.

"황태자! 내게 하는 말인가?"

"설마요. 행정부의 전권을 가진 소자의 명을 거역하고 여기저기 상황을 전파하고 다닌 궁인에게 하는 말이지요. 그 쥐새끼를 황제 대리인 저의 명에 불복한 죄로 감옥에 처넣을까 합니다."

내 남편은 나를 제외한 사람들의 성질을 긁는 법을 확실히 알고 있는 듯했다.

이 말싸움 누가 이길까? 흥미진진해지고 있어!

"내 시녀가 아비인 유피테르 백작을 보러 왔다가 들어가지 못함을 알고 내게 고한 것뿐이다. 이런 일을 가지고 경박하게 말하는구나 황태자!"

"어머, 폐하, 그 시녀는 지난번에 징계를 받은 시녀 아닌가요? 아직 한 달은 안 된 것 같은데,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용서를 하셨나 보네요. 황후께 프레젤리 차를 올린 자는 색출하셨는지요?"

남편을 거드는 것은 아내 된 도리! 황후의 가면이 점차 깨지는 과정을 구경하는 재미도 나쁘지 않았다.

아직 본격적인 게임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초조해하실까?

"무슨 말이냐? 아무튼 구금을 당장 풀 거라. 귀족들의 반발이 커지면 네게도 좋지 않은 일 아니냐?"

"저와 제 비를 해치려는 자들을 색출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지요. 저희는 이 제국의 미래이지 않습니까?"

자신의 수족이 잘리는 것을 그리도 막고 싶은 건가? 아니면 이미 죽었다는 마법사와 자신을 엮을까 겁이 나는 걸까?

카일은 마법사를 잡았다 아쉽게 포로가 죽은 사실을 밝히며 1황자님의 죽음의 배후도 재수사를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초조해진 것일까?

자식을 잃고, 카일과 싸워가며 지금까지 세력을 잃지 않고 버텨온 그녀가 조금은 존경스럽기도 했다. 살아남기 위해, 권력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 왔겠지.

그녀의 눈에는 카일이 제 자식의 모든 것을 뺏은 원수일 것이다.

그런 카일의 손에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점점 조급해 하는 것이 보였다.

좀 더 주의 깊게 경계해야겠어. 구석에 몰리면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까.

"걱정 마십시오. 곧, 유피테르 백작의 집에서 증거를 찾아올 것이고, 배후가 없음이 확인되면 다들 풀어줄 것입니다."

카일의 말에 황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뒤돌아섰다. 돌아서는 그녀의 입술에 분노가 어려있었다. 그녀는 결국 찬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갔다.

"아무래도 엮이지 않을 자신은 있나 보네요. 쉽게 포기하는 것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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