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66화 (66/126)

67화. 또 다른 습격자.

2018.06.13.

"카, 카, 카일."

숨이 턱하니 막혀왔다. 마차를 향해 오는 불덩이는 나의 이성과 사고를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운디네! 놈!"

나를 따뜻한 온기로 감싸 안은 카일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아득해지려는 내 정신을 붙잡아주는 카일의 목소리였다.

"세이, 괜찮아. 걱정하지 마."

"카, 카일, 다, 다들 괜찮아요? 펠은?"

"무사해. 걱정 마. 그런데 내가 마차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은데 혼자 있을 수 있겠어?"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카일이 있어야만 이 불이 무섭지 않은걸. 아마 카일이 정령의 보호를 걸어 뒀겠지만, 혼자 마차에 남는 것은 싫었다.

카일과 있으면 나와 카일만은 무사하겠지. 대신 밖에 있는 평범한 기사들은? 테일러는 카일보다는 못하지만 소드마스터라 했으니까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내 동생이나 다른 기사들, 시종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야.

나는... 남들의 보호만 받는 황태자비가 아니야.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황태자비가 되어야 해.

나는 용기를 내서 카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염려하지 말라는 듯 내 이마에 짧게 키스하고는 마차 밖으로 날듯이 나가 버렸다.

"누님. 염려 마세요. 매형이 이번에 소환한 정령은 중급 이상인지 외형부터가 달라요. 평소에 부르던 정령은 빛무리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크기부터 남다르네요."

"마법사 말고는 다른 습격자는 없어?"

"검사로 보이는 이가 두, 세명 있는데 테일러경과 근위 기사들이 제압 중입니다."

카일은 진짜 괜찮을까? 평소보다 강한 정령이라고 해도, 상대는 마법사인데...

"매형은 소드마스터이기도 합니다. 저라면 흑마법사의 상대가 안되지만 매형에게는 쉬운 상대입니다."

문제는 그 자를 생포해야 한다는 거잖아. 죽여도 되는 쪽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공격하겠지만, 카일은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서 참아야 했다.

게다가 카일은 눈앞에 자신의 원수가 있는데, 그 분노를 눈 감아야 하잖아.

우리 카일, 얼마나 괴로울까? 얼마나 힘들까?

카일이 불렀다는 중급 정령의 모습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카일과 마법사의 모습이 식별될 만큼 주변이 밝은 것은 정령의 영향이 아닐까 싶었다.

카일은 검까지 들고 마법사와 대치 중이었다. 죽여도 됐다면 벌써 끝났을지도 모르는데.

카일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저 자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었다.

"마법사가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은 주문이 필요하지?"

마법사가 뭐라 말을 마칠 때마다 얼음 조각이 만들어졌다. 다행히 얼음 조각은 카일의 주변에서 다 녹아버렸다.

살리맨더라도 부른 걸까?

"네, 영창이라고 주문을 완벽하게 부르거나 마법진을 그려내야 합니다."

그럼, 저 입을 다물게 하면 카일에게 도움이 되질 않을까?

이번에는 우리 쪽을 향해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왔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카일이 어떻게든 막아냈나 보았다.

그 사이 카일의 얼굴에 살짝 긁힌 자국이 있었다. 우릴 구해내느라 다른 공격을 막지 못했나 보았다.

안 돼! 카일이 다치지 않도록 도와야 해.

나는 차분히 주변을 살폈다. 예전에 카일과 바깥나들이를 했을 때 갔던 강가에서 멀지 않았다. 숲의 옆길, 마을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밤에 동원할 수 있는 동물들은 많지 않아. 맹수나 새들은 무의미한 희생만 치를 텐데...

낮에 다니는 아이들 중 깨울만한 게 없을까? 보면 경악할만한 외향. 공격도 할 수 있고 기왕이면 날개도 있어야 해.

순간 떠오른 족속은 있었지만 걔들을 보내면 나의 정신건강을 너무도 해칠 것 같았다.

다른 것 찾아보자. 있을 거야. 조건에 맞는 동물이...

숲! 아, 저기 숲속 나무 위에 말벌집!!! 마법사보다 조금 앞쪽에 있는 나무 꼭대기에 걸린 말벌집이 보였다.

"펠, 혹시 활로 저기 저 나무의 말벌집 떨어트려줄 수 있어?"

벌들을 깨우는데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조금 멀긴 하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펠은 다른 기사에게서 활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신중하게 화살을 시위에 걸고 힘껏 잡아당겼다.

잘은 모르지만 멋진 자세인 것 같았다.

곧 화살은 빠른 속도로 목표점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펠의 미간이 살짝 모이는 것이 조금 모자란 듯도 싶었다.

"이 상황에서도 매형은 누님의 목소리를 듣고 절 도와주셨네요."

화살의 부족한 힘에 정령력을 보태어져 정확하게 화살이 날아간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카일. 내가 곧 도와줄게요.

말벌집은 바닥으로 내팽개쳐지며 절반 이상 부서져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붕붕거리는 울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완전 성이 났구나!!

"카일, 말벌떼를 불렀어요. 혹시나 모르니까 바람으로 보호해요."

분명 내 상태를 귀 기울여 듣고 있을 테니까! 이번에도 내 말이 전혀 졌을 거라 믿었다.

다른 기사들은 펠의 지시에 따라 벌집보다 뒤로 물러났다.

"저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너희의 소중한 휴식을 방해했어. 공격해. 특히 입을 못 열게 만들어."

미안, 거짓말해서. 화난 너희를 달랠 방법이 그것뿐이네.

"다른 사람들은 너희를 지키려고 했으니까 절대 공격하면 안 돼!"

다행히도 곤충들 역시 내 말을 잘 따라주었다. 붕붕거리며 일제히 날아 오른 말벌들은 그 길로 흑마법사를 향해 돌진했다.

"뭐, 뭐야!"

카일과의 싸움에 집중하던 흑마법사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말벌떼를 보고 당황했다. 그는 카일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었던 얼음 화살들을 말벌에게 쏘아 보냈다.

하지만 화살의 수보다 말벌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으…!"

내가 저질렀지만, 끔찍했다. 말벌들은 마법사의 얼굴을 향해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점점 부어가던 마법사는 불덩어리를 쏘아 벌들을 태워 죽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을 벌릴 때마다 입속으로 쏟아지는 벌떼 때문에 괴로워 보였다.

카일은 벌떼의 공격에 휘말리지 않도록 살짝 뒤로 물러난 뒤 우리를 엄호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워낙 마구잡이로 마법을 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법사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지난 습격 때처럼 식물들에게 그의 움직임을 막아달라 요청했다.

"어? 이런."

"누님! 이번 것은 정말 대단한대요?"

"마침 나무가 곁에 있었을 뿐이야."

어휴, 얼핏 보면 나무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잖아. 몬스터 같아.

나뭇가지가 마법사의 허리를 감싸 안아버렸다.

펠은 그 광경을 아주 신난 듯이 보고 있었다. 이미 카일이 부른 정령들 구경에 즐거워 보였는데.

비록 상황은 이렇지만 네가 좋다니 나도 좋아. 많이 구경해.

사실 펠, 테일러, 카일이 이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은 걱정되지 않았지만, 다른 기사들은 혹시나 이상하게 생각할까 살짝 걱정은 됐다.

마법사는 살짝 패닉에 빠진 듯 사방으로 마법을 쏘아댔다. 카일은 사방으로 쏟아져 나오는 마법이 우리 쪽이나 민가 쪽으로 날아가지 않게 막아내느라 다시 바빠졌다.

말벌들이 반 이상 죽어 나갔을 때가 되어서 마법사의 움직임도 둔해졌다.

말벌은 꿀벌과 달리 여러 번 공격을 할 수 있어서 마법사의 얼굴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저 정도면 강한 말벌 독에 죽지 않았나 모르겠네.

생포했어야 하는데 실수 한 것 아닐까? 마법사가 치료 주문도 간간이 쓰는 것 같긴 했는데...

"테일러! 마법사가 기절했다. 말벌들도 물러났으니 마나 구속 발찌 가져와."

카일의 외침이 퍼졌다. 마법사와 같이 우리를 습격했던 검사들도 이미 제압당한 상태였다.

카일이 기절이라고 말했으니 죽진 않은 거겠지? 서서히 죽진 않겠지?

"카일, 당신 뺨이..."

수습을 끝내고 마차로 돌아오는 카일의 모습에 눈물이 났다. 뺨에 긁혀서 피가 흐른 자국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세이 괜찮아. 정말 작은 상처일 뿐이야."

카일은 날 달래기 바빴다. 급히 마차에서 뛰어내려서 카일의 뺨을 살폈다.

피는 어느새 굳었고 뺨에는 붉은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얼른 손수건이랑 깨끗한 물, 그리고 약을 가져와!"

흉 지면 어떡해!! 속상했다.

"헤에에에에, 좋다. 세이가 치료해주는 것. 기분 좋아."

뭐야, 조금 전까지 카리스마를 뿜으며 싸워대던 황태자는 어디 가고 헥헥거리는 강아지가 한 마리 나타난 거야?

이런 분위기에서 할 소리냐?

"오랜만이네, 이 느낌."

"뭐라는 거예요?"

"아냐 아냐."

나는 깨끗한 물로 카일의 뺨을 닦아내고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깊진 않은지 그저 붉게 부푼 흔적만이 남았다.

"피가 난 것에 비해 상처가 안 깊어요."

"응,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조심스레 약을 발라주었다. 그래도 많이 놀랐었는지 손이 덜덜 떨렸다.

"많이 놀랐지?"

"어느 정도는 언제든 공격받을 수 있다고 예상했는데... 당신이 다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불덩어리들 보다 그게 더 무섭고..."

내 목소리가 나도 놀랄 만큼 떨렸다.

"고맙네, 불보다도 내가 다치는 게 더 무섭다니."

"당연한 거잖아요. 내 전부인 당신이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르는데!!"

"응. 그래서 세이가 나 구해준 거잖아. 말벌은 정말 나도 생각 못했어. 세이의 활약이 진짜 대단했어. 그치 처남?"

"네, 누님이 점점 자신의 힘을 잘 활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 둘이서 내 찬양을 하기 시작했다. 마법사에게 마나 구속 발찌라는 것과 쇠사슬을 채운 테일러까지 합세해서 찬양을 해대는데... 아휴. 그만 쫌!!!!

"카일, 그런데 소동이 일어나서 어느 정도는 소문이 나겠지만... 마법사를 생포한 것은 숨기는 게 어때요?"

"황후 쪽에서 손을 쓸 것 같아?"

"네. 그 황후가 일이 뒤틀렸는데 저자를 그냥 둘 것 같진 않거든요."

"비 전하의 의견이 일리 있습니다."

카일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분명 습격이 실패했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며, 생포된 것도 이미 소식이 전해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미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텐데?"

"죽이거나, 도망치게 하면 되죠."

"흠, 일단 마탑에 연락해야겠군. 테일러."

"여기 있습니다."

응? 독특하게 생긴 작은 손거울이었다. 남자들이 이런 것 왜 가지고 다녀? 내게 줄 선물이야?

"마탑주. 잘 지냈나?"

"아니! 카일룸 전하 아니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탑주 당신과 나의 공통의 적을 찾아서 말이야. 의논할게 있는데, 당장 이리로 오겠나?"

카일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거울에서 빛이 나더니 지팡이를 든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

"이 더러운 자식!! 어딨습니까? 이 마법사의 수치!"

으아아아. 뭐야. 어디서 나타난 거야?? 너무 놀라 내 심장이 벌렁벌렁하는 사이, 마탑주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남자는 긴 하얀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흑마법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퍽퍽! 흑마법사를 지팡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우와, 이미 아주 불쌍한 꼴로 찌그러져 있던 흑마법사는 매질로 더 퉁퉁 붓기 시작했다.

"저기, 카일?"

"마탑주가 나만큼이나 맺힌 게 많아서 말이야."

썩은 미소도 찬란하신 내 남편님은 속이 시원해 보였다. 나 때문에 자기도 때리러 가고 싶은데 참고 있구나.

마탑주는 실컷 자신의 욕망을 푼 뒤, 우리에게 돌아왔다.

"어쩌실 작정입니까?"

"이케인, 당연히 녀석의 배후부터 파악해야지. 생사여탈권은 마탑에 줄 터이니, 마음껏 괴롭혀. 단, 철저하게 고문해서 지난번 사건까지 모든 배후들을 다 파악해야 해."

카일은 씹어 삼켜도 모자란다는 표정으로 기절한 흑마법사의 얼굴을 노려봤다. 마탑주는 카일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이놈은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은 걸로 했으면 좋겠는데 방법이 없겠나?"

"죽은 사람으로요? 흐음. 얼마 안에 처리해야 하죠?"

"1시간 이내?"

"흐으음. 그런데 이놈 얼굴은 왜 이렇게 됐습니까? 지독하네요."

뜨, 뜨끔. 내 짓이라고 말해야 하나?

"자연의 천벌을 받았지. 말벌떼에 쏘였어."

"호오, 좋습니다. 가능할 것 같네요. 잠시 다녀오지요."

마탑주 이케인은 즐거운 얼굴로 사라졌다. 우와아! 마탑주 정도면 저런 일이 가능하구나. 신기해. 텔레포트? 그런 건가?

"마법사들은 다들 저 정도 실력이에요?"

"마탑주니까."

"그래도, 어…"

꿀꺽. 저런 마법사가 많으면 위험할 것 같은데... 황궁 안으로 텔레포트하고 그러면 어쩌지?

"마법사들은 마나의 금기로 다른 이를 해치는 마법은 쓸 수 없어. 마법을 배우려면 그 맹세의 의식부터 치러야 한다고 몇 백 년 전의 현자라 불리던 마탑주가 정했대. 어기면 강력한 저주가 있다는 것 같던데?"

응? 그런데 저놈은 뭐야? 우리한테 불덩어리, 얼음 화살 온갖 것을 다 쏴댔잖아.

"마탑에서 어찌 관리했길래 저런 미친놈이 설치고 다닌 거예요?"

"죄송합니다. 비 전하. 저놈이 거둬준 은혜를 모른척하고 마법서를 훔쳐서 달아났거든요."

"흐이이익!"

갑자기 돌아온 흰색 로브의 아저씨 때문에 뒤로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카일 덕분에 그런 꼴사나운 장면은 면했지만.

"나의 비를 놀래지 말았으면 해, 이케인."

"아, 죄송합니다. 아무튼 마법의 위대함을 알게 된 저 미친놈이 그 뒤로 자신을 흑마법사라 칭하며 금기시된 온갖 나쁜 짓을 다하고 다녀서 저희도 곤란하던 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인사는 나의 비에게 하도록. 나의 비가 잡은 것이나 다름없거든."

마탑주는 나를 묘하다는 눈으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뭐, 뭔데요? 갑자기 마탑주가 내 손을 잡으며 감동스럽다는 눈빛을 쏘아대며 느끼한 목소리를 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이렇게나 강하시다니 영광스럽군요."

부, 부담스러워!! 다행히 카일이 바로 마탑주의 손을 쳐내어 주었다.

아, 버터를 통째로 삼킨 느낌이었어.

"흑심 품지 마."

"전하의 사랑과 질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걱정마십시오."

"그나저나 이놈은 어떻게 할 거야?"

마탑주 아저씨는 나이에 맞지 않게 아주 개구진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윙크했다.

윽, 내눈!! 못 볼 것을 봤어.

"오랜만에 쇼를 해보겠군요. 기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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