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수확제가 열리는 밤에. (2)
2018.06.12.
청명한 가을밤 하늘 아래, 넓은 광장에서는 별빛이 하늘로 쏘아 올려졌다.
불꽃이 터지는 소리는 벼락 소리 보다 컸고 시끄러웠다. 큰 화약은 아니었지만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흐음. 천둥소리 무서워하는 우리 남편, 이 소리는 괜찮은가? 더 크고 무서운데...
다행히 날 끌어안고 있는 카일의 팔은 흔들림이나 떨림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마음 놓고 불꽃을 바라봤다.
매캐한 화약 냄새와 함께 광장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수레에는 이 불꽃들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일꾼이 두 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아주 열심히 일하는데 다른 한 명은 움직임이 굼떴다.
저사람들은 이 냄새 맡고도 괜찮은가? 숨 막힐 것 같은데?
화약 연기 사이로 작지만 색색깔의 불꽃이 튀어 올라 사방으로 퍼지는 모습은 예뻤다. 별이 쏟아지는 것 같았으니까.
처음 보는 불꽃이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불꽃이 예뻐서일까? 아니면 카일이 안아줘서일까?
사람들은 화려한 불꽃이 쏟아지는 모습에 함성을 질렀다.
"우와!!"
"멋지다!!"
"으아아악!"
뭐지? 중간에 이상한 불협화음이 들렸는데?
"카일? 이상한 소리 못 들었어요?"
"글쎄?"
응? 나도 들었는데 당신이 안 들릴 리가 없지 않아요? 뭘 숨기는 거죠?
표정 봐, 왜 날 못 보는데? 고개를 젖히고 그를 쳐다봤는데 아무리 봐도 저건 숨길 때 표정이었다.
흠! 이제 나도 카일 한정 독심술을 할 수 있다고!!
"그런데 무섭지 않아?"
"활활 타는 모습이 아니라서 괜찮아요. 게다가 카일이 안아주고 있어서 더 큰 불꽃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게 말 안 할 때는 이유가 있으니까. 이해하자.
그렇지만 불길한 잔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서 불안했다. 괘, 괜찮은 거 맞지?
소리가 나는 곳은 수레 쪽 같았다. 그런데 화약이 담긴 수레 쪽 상황은 연기 때문에 안 보여서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내가 수레 쪽을 기웃하는 느껴졌는지 카일이 차분한 음성으로 날 말렸다.
"조금만 기다리면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으니까 참아줘. 나의 세이는 지금 이 순간을 즐겨."
카일의 말과 함께 조금 독특한 불꽃이 터졌다. 좀 더 높은 곳으로 쏘아 올려진 불꽃은 가장 크고, 요란하고, 화려한 불꽃무늬를 만들었다.
응? 뭔가 다른데?
뭔가가 폭발한 느낌? 마법사들이 개발했다던 폭탄? 그런 것치고는 무늬가 예쁘기도 하고?
폭발도 타오르는 불이잖아. 그런데 내가 안 무서워하다니!! 신기한데?
저, 무늬! 전설 속의 불사조? 그거 아냐?
그런데, 바비큐 타임도 끝났는데 어디서 고소한 타는 냄새가 나기도 하고 킁킁.
불꽃놀이도 끝났는지 박수소리만 광장에 가득했다.
"당장 내 눈앞으로 끌고 와. 실프."
카일의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랐다. 갑자기 시꺼멓게 그을린 사람이 바람과 함께 우리 눈앞에 떨어진 것이다.
오오! 나 이제 실프의 바람을 제대로 느낀 건가? 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
곳곳에서 놀란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사람이 날라와도 놀랄 판에, 숯처럼 까맣게 탄 사람이라니! 놀라지 않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죽었어? 왜 꼼짝도 안 하지?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인지 순식간에 주변에 적막이 찾아왔다.
다행히 검은 물체는 숨을 토해냈다. 여전히 기절한 듯 꼼짝없이 엎드린 남자에게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거 우리 남편이 이런 거야? 카일이 죄 없는 남자를 이렇게 막 다룰 리 없고, 뭐지?
"카일?"
설명을 좀 해보세요. 너만 알고 있지 말고!
"테일러! 알리페르!"
"예, 전하!"
응? 알리페르도 와 있었니? 하긴 내 호위니까 따라와야 했지. 그런데 하루 종일 보이질 않더라니.
두 남자는 어느새 우리 앞에서 부복하고 카일의 명을 받았다.
"이 암살범과 접촉한 자는 없었나?”"
"지시 받은 뒤, 은밀히 따라다녔으나 없었습니다."
"불꽃을 제작하는 장인들을 은밀히 데리고 와서 점검시켰는데, 마지막 것은 제국의 물건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호라, 카일이 미리 낌새를 채고 은밀히 일을 다 진행시켰구나. 기왕이면 내게도 귀띔해주지. 치사하게.
"마지막 불꽃이 터지는 동안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 이는?”"
"한, 두 명 이상행동을 보인 이들이 있었으나 검문 결과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예상과 다르게 혼란이 일어나지 않아 조용히 숨어 버린 것 같습니다. 폭탄은 누님을 노린 것일까요?"
어? 날 노렸다고? 카일이 아니라 나?
카일은 신중한 표정으로 나와 숯덩이를 번갈아 보았다. 냉정한 표정 아래에 깔린 분노는 상당한 것인지 눈에 이채가 어릴 정도였다.
"운디네, 딱 정신 차릴 만큼만 치료해줘."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일이 일어났는지 쓰러진 남자의 얼굴에 조금 생기가 돋았다. 바짝 말랐던 입술은 조금 물기가 돋아났고, 화상으로 떨리던 몸짓이 잦아들었다.
"누구의 사주인지 지금이라도 배후를 밝히면 목숨은 살려주지."
"모, 모, 릅, 니다. 그저, 화, 화려, 한 부, 불꽃, 쿨럭, 이라고... 황, 황,태자비,께, 큰, 선물, 크윽."
남자는 아직도 고통이 심한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황후의 앵무새가 했던 말.
불꽃, 가장 화려한 순간. 카일은 그 말을 듣고 눈치채서 대비를 한 것이었다.
든든한 내 남편.
"세이가 불꽃을 무서워하는 것을 아는 자는 친정에서 귀환할 때 수행했던 기사단과 시중인들 뿐이다. 혹시나 그들 중 정보를 유출한 자가 있나 취조해."
"예, 전하!"
카일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내가 얽힌 문제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부 배신자가 또 나온 탓일까?
1황자님을 잃은 것은 내부 배신자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뽑은 사람들 중에 배신자가 있다면 카일의 상심이 클 것이었다.
제발, 차라리,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정보를 유출한 것이길...
카일은 계속해서 남자를 심문했지만 남자에게서 얻을만한 단서는 부족했다.
"그 불꽃, 아니 폭탄을 우리를 향해 돌려놨으면서 모른다고? 웃기는군."
"일단, 압송하죠."
"그래야겠지. 내일 당장 귀족들을 불러 모아야겠어.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노린 사고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견을 나눠봐야겠군. 이번만큼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해."
카일의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조금은 무서울 만큼 진지하고 단호한 각오가 느껴졌다.
수확제의 마지막은 암살 미수 사건으로 끝이 났다.
일단 모여 있던 평민들은 황태자의 놀라운 무력에 놀란 듯했다. 하긴, 사람이 막 날아가고, 숯이 된 자가 살아나고 그랬으니 신기하기도 했겠어.
상황을 설명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수색과 탐문이 이어졌다. 낯선 이나 거동 이상자에 대한 제보를 받는다고 했다.
어수선한 분위기로 끝나서 속상했다. 나의 첫 수확제였는데.
그래도 안면을 익힌 사람들이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이야기하며 위로를 해줬다. 그 위로가 큰 힘이 되었다.
"세이, 괜찮아?"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카일은 너무나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질문을 했다. 나는 계획도 몰랐고, 카일이 지켜줘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나는 놀라서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뺨에 내 손을 올렸다. 그의 뺨으로 내 온기가 전해지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난 괜찮아요. 당신이야말로 진정해요. 나보다 카일이 더 놀란 것 같아."
내 말에 카일이 자신의 손을 내 손 위에 겹쳤다.
"미리 예상하고 대비하고 있었는데도 심장이 내려앉고 싸늘히 식어버리는 것 같았어. 날 노리는 건 괜찮은데, 계속해서 널 노리는 것이 내 탓 같아서 미안해."
"카일은 늘, 항상 결국 날 지켜내고 있잖아요. 당신 곁에 서기 위해서니까 버틸 수 있어요. 아니 더 강해지고 단단해져서 당신한테 걱정 안 끼치고 싶어."
후작 부인으로부터도 날 지켜줬던 사람이면서 왜 약해지고 그래요. 내 악몽을 지워준 사람이...
내 말에도 카일은 진정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애교를 떨어 줘야 하나?
"쪽, 날 구한 왕자님이 이렇게 풀이 죽어있으면 어째요? 구해준 공주한테 내가 이렇게 멋있는 남자다 하고 자랑해야지. 재미없게!"
아쭈 그래도 안 웃어? 내 볼이 자연스럽게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절대 귀여워 보이려고 한 게 아니었다.
"치이이이! 내가 뽀뽀도 해줬는데 계속 인상 쓰면 세이 똑땅한데!"
으아아악, 마지막은 실수였다. 내가 무슨 짓을?? 이건 나의 흑역사야. 에이린이 곁에 없어서 다행이야!!
"푸흐흐흐흐흡!"
그래, 그렇게라도 웃어, 남편. 아내의 흑역사를 즐겨요.
"세이, 역시 너는 나의 피로회복제야."
그제서야 풀리는 얼굴을 보고 안심이 되었다.
나에게 누구보다 든든한 울타리면서 나 때문에 누구보다 약해지는 남자.
한 번씩 드는 생각이지만, 우리가 그냥 평범한 제국민이었다면 이런 힘든 일은 겪지 않고, 서로 아픔 없이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참, 카일. 마지막이 폭탄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황후의 앵무새. 앵무새가 하는 말을 듣고 예상했었어. 미리 감시자들도 붙여 놨으니까, 황후의 움직임과 함께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다고나 할까?"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구나. 나는 연관 지을 생각 못했는데... 나도 카일의 이런 모습 본받아야지.
"그런데 그 남자의 폭탄은 어떻게 막았어요?"
내 말에 카일이 대답을 살짝 망설였다. 오호라, 당신이 뭔가 일을 저질렀구나.
남자가 까맣게 그을린 것도 역시 카일 짓이구나?
"미리 살리맨더랑 실프를 불러서 폭탄에 잠복시켰어. 폭탄 방향을 우리를 향하게 돌려놓는 놈에게 폭발을 감당하게 하라고 했지."
"별일 아닌데 왜 내 눈치를 봐요? 잘한 짓인데?"
"네가 나더러 잔인하다고 무서워할까 봐."
자신의 이미지가 나빠질까 걱정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늘 느끼지만 의외의 상황에서 귀여움을 뽑아내는 내 남편이야.
"예전에도 한 말 같은데, 할 수 있다면, 나라면 더 크게 복수할 거예요. 당신이 잔인한 게 아니라니까요."
난 말이죠. 우리 어머니가 후작부인의 손에 인질로 잡혀 있지 않았다면 이미 그녀를 죽도록 증오해서 죽여버렸을 거예요.
예전처럼 기이한 죽음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맹수들을 불러다가 물어뜯게 했을지도 몰라요.
실행을 못했을 뿐이죠. 더 이상 괴물이 되지 않게 참았으니까.
뭐, 그래서 지금까지 버텨내고 당신을 만날 수 있었으니 다행이죠?
이 긴 이야기를 카일에게 할 순 없었다. 나 자신의 추악한 모습이라서... 대신 카일을 격려하기 위해 환하게 웃었다.
"불꽃놀이 시작하고 나서 꼭 껴안고 있어준 것, 혹시나 내게 누가 공격할까 봐 걱정돼서 였구나."
"응. 내가 떨어지는 틈을 노릴 것 같아서."
"아이, 이쁜 내 남편."
쪽쪽쪽! 내가 뽀뽀를 마구 해주는 순간, 누군가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부부끼리 알콩달콩 하게 데이트한다는데 방해하는 게?
아, 펠이구나. 우리 동생 그리 눈치 없는 녀석이 아닌데?
"두 분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미행하는 자가 있는데요?"
"황궁까지 얼마나 남았지?"
"10분도 안 남았습니다."
"당장 잡지. 실프, 놈!"
카일은 미행이 붙었다는 쪽으로 정령들을 보냈다.
참 끈질 긴 녀석들이었다. 근위 기사와 정령왕을 소환하는 소드마스터가 모여 있는대도 이렇게나 끝까지 쫓아오다니.
"어? 실프? 놈? 역소환인가!!"
카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급격히 어두워진 카일의 입에서 신음소리처럼 쥐어짜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소환이라면 정령들이 정령계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카일은 평소에 강한 정령들은 부르지 않는다고 했다. 충분히 그것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강한 정령은 아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강한 정령사가 불러낸 정령들을 돌려보냈다니 범상치 않은 사람이 있나 보았다.
설마, 우리 카일보다 강한 사람이 있나?
"그놈이, 제국으로 왔나 보군."
카일의 주변 기운이 무섭게 변했다. 내가 느낄 수 있을 만큼의 분노와 살기, 그리고 긴장감이 그의 주변을 감쌌다.
"카일?"
으드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마차 안에 퍼졌다.
"형님을 죽인 마법사야. 어떻게 제국으로 넘어온 거지?"
카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창문 너머로 커다란 불덩어리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정확히 카일과 내가 타고 있는 마차를 향해 떨어지는 불덩어리.
나는 공포에 질려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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