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64화 (64/126)

65화. 수확제가 열리는 밤에.(1)

2018.06.11.

수확제는 오전부터 열리고 있었다. 이미 농사지은 곡식들은 추수가 거의 끝난 시기였다.

오후에 참가한 카일과 내가 할 일은 사다리에 올라 나무에서 사과를 따고, 가을 농사를 지을 땅에 파종을 하는 것이었다.

평민들의 대부분이 누구나 하는 간단한 일이었다.

"카일, 사과는 꼭지까지 따야죠. 그래야 금방 시들지 않는다고요."

"어머, 카일, 그렇게 깊게 땅을 파고 씨앗을 심으면 싹이 제대로 못나요.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얕게 심으면 새들이 다 주워 먹어요!"

나의 잔소리에 카일은 움찔움찔했다. 뭐, 곱게 자란 황태자께서 어쩌다 한 번씩 참석하는 수확제에서 해본 농사일이니, 못하는 게 당연한 거지.

나야 어릴 때부터 자연과 놀면서 자라서 아는 거고.

어쩐지 카일보다 잘하니까, 어깨가 치솟는 기분이었다. 우리를 돕던 농민 부부들도 날 보고 최고라며 손가락을 올려줬다. 호호호.

으쓱으쓱, 농민들이 날 보는 눈이 달라진 것 같았다. 처음에는 황족이라 두려워는 했다. 하지만 농사일만큼은 잘 모를 거라 생각하고 무시하는 기색이 강했다.

이제는 내가 이야기하는 것들을 들어 줄 준비가 된 듯했다.

"자, 그러니까 다들 논, 밭에 휴지기를 줄 때는 그저 땅을 쉬게 하고 끝이었지?"

"그럼요 비 전하. 그게 최선이니까요."

"휴지기 동안 땅에 거름기를 채우기 위해서 퇴비나 거름을 뿌렸고?"

"당연한 것 아닙니까?"

뭐, 아직 날 무시하는 듯한 말투도 있지만, 이 정도면 양호하지. 자, 잘 들어 주세요. 힘만 세고 고집있게 생긴 아저씨.

"혹시 간작을 지을 생각은 안 해본 건가?"

"사이짓기 말입니까? 이랑과 이랑사이에 시기가 겹치지 않는 식물을 심는 것 말하는 것 맞습니까?"

"그러면 땅이 더 기름기 쫙 빠지는 것 아닙니까? 영주 착취가 심한 땅에서나 하는 거 같은데요?"

그렇지. 대부분의 경우에는 말이죠. 작물 선택을 잘하셔야죠.

"농사짓는 것을 쉬기 힘든 땅에는 까치콩, 완두콩 등을 간작해 보게. 뿌리에 혹 같은 덩어리가 생기지? 걔가 대지와 하늘에 퍼져있는 자연의 축복을 저장하여 식물들에게 영양가를 제공하지."

"어머, 비 전하. 그러고 보니 콩을 심었던 땅은 다음 해 강우량이 적었는데도 소출이 많이 줄지 않았네요."

"그렇지?"

내게 툴툴거리던 남자의 아내가 살갑게 이야기하자 힘센 아저씨도 솔깃하는 모양이었다. 저 아저씨도 우리 카일 닮아서 애처가인가 봐.

"그리고, 휴지기가 필요한 땅에는 라이조비움을 심도록 하게. 그 아이야말로 주변의 자연력을 땅으로 돌려주는 축복받은 식물이거든. 심고 나서 식물의 뿌리와 줄기 모두 갈아엎고 물을 뿌려 삭히면 돼."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농민들 중에서는 여전히 불신하는 표정도 있었다. 뭐, 못 믿으면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당장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내년 봄이 되어서 내 말을 따른 자들은 알게 될 거야.

대신 나는 축복을 담아, 가을에 파종할 씨앗들을 발아시켜 주었다.

"미리 발아시켜서 심으면 더 잘 자라는 작물이니, 봄에 수확이 좋으면 내년 가을에는 미리 발아시켜 보길 바라."

아, 그런데 대부분 나보다 나이 많아서인지 반말하기 불편해. 타고난 귀족들은 그렇지 않던데, 황족이나 되어가지고 왜 이러나 몰라.

그래서 대신 시종일관 웃어주었고, 그들의 말을 경청해 주며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내 설명이 끝나고 나는 농민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체크했다.

"세이, 네가 저들을 존경해 주어서인지 다들 엄청 감동받았나 봐."

"에엑, 한 일도 별로 없는데요?"

"그들의 일을 존중해주고 호감을 표현해 줬잖아. 하급 계층의 사람들은 그런 일에도 충분히 마음을 열게 되어있거든."

나는 그저 나도 밑바닥에서 살았었으니까, 내가 힘들 때 누군가가 들어주길 바랐었기에 들어 준 것뿐이었다.

"세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완벽한 황태자비 감이야."

카일의 칭찬은 늘 날 뿌듯하게 만들었다. 내가 세상에 필요한, 도움이 되는 사람임을 느끼게 해줘서 좋아.

카일을 보고 배시시 웃어버리자 그가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렇게 웃어버리면 사람들 앞에서 키스하고 싶어진다고. 날 인내의 황태자로 만들진 말아줘. 뭐, 나야 사람들 앞에서 딥 키스해도 좋지만."

꼭 잘 나가다가 점수를 깎아먹어요!

우리는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공식적인 수확제 일정을 마쳤다.

소의 임대였다. 지난번 황무지를 보며 가난한 평민들이 농사를 포기한 두 번째 이유를 해결해 주기로 한 것이다. 황실 소유의 황무지를 경작하는 자들에 한해 황소를 임대해주기로 했다.

자신이 먹고 살 곡식도 없는데 겨울에 소를 지키고 키워나갈 수 있는 평민들은 많이 없었다. 건초도 땅이 있어야 풍족하게 확보하니까.

땅을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에게만 대여해주기로 했고, 부유한 평민이나 귀족들이 그 땅에 손댈 수 없도록 철저한 감사도 하기로 했다.

"반응들이 좋군요."

"유능한 보좌관이 정책을 보완해 줘서 인가 봐요."

"감사합니다. 비 전하."

얼핏 들리는 나에 대한 칭찬들이 내 기분을 우쭐하게 만들어 줬다.

예쁘다, 아름답다 이런 것 말고, 황태자와 어울린다, 자애로운 황태자비이다, 황태자뿐 아니라 황태자 비도 기적이다. 이런 말들이 좋았다.

내 옆에 듬직하게 서 있는 이 남자 곁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자신감? 자부심? 이런 것들이 생겼다.

"카일, 이제 해지면 축제가 벌어지는 거죠?"

"응, 우리도 즐길까?"

"놀 수... 있어요?"

황후가 뒤에서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평민들 사이에서 즐기다가 또 습격이라도 하면 큰 소란이 일 것이었다.

나야 카일이 지켜주겠지만, 이 농민들은 무슨 죄야. 휩쓸리게 할 수 없었다.

"걱정 마, 이미 다 대비했으니까."

"카일!! 진짜! 내 속마음 좀 그만 읽어요."

"네 속이 다 보이는데 어떡해? 그냥 보고만 있어도 네가 기쁜지, 슬픈지 다 보인다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불편할 수도 있지만 고마운 일이니까, 그만큼 날 지켜보고 아껴준다는 뜻이잖아.

그래도 이거, 좋은 것 맞아?

손해 보는 것 같단 말이야. 나도 카일의 속마음을 읽고 싶다고!!!

윽!! 음흉한 생각밖에 못 읽겠어!!

"카일, 내 입술 그만 봐요! 아직 주변에 사람들 많아요."

"세이! 너도 이제 내 마음을 읽는 거야? 감동이야!"

"당신이 변태적인 생각하는 건 눈에 뻔히 보이거든요. 그니까 그만 보라고!!"

우리는 평소처럼 대화하고 노는 데, 어째서 루카스 보좌관은 저렇게 처연하고 외로워 보일까?

"저기, 루카스님, 요즘 많이 외로워요?"

"제 주변에 커플들이 늘어서 힘드네요. 관심 있던 여인도 다른 남자를 선택하고, 저도 문관 때려치우고 검이나 쓸까 봅니다. 다들 기사들에게만 관심을 보이고..."

"네가 이제 와서 검을 잡아봤자 걔들 못 이겨. 검술만 잘해서가 아니라 얼굴이랑 몸이며 어느 하나 쉽게 못 뒤집을 텐데?"

카일의 묵직한 한방에 루카스는 침울해졌다. 우와, 카일 잔인하다. 어쩜 저리도 친구에게 잔인한 말을 쏟아붓는 거야?

"카일, 적당히 해요. 루카스님, 세상에는 기사가 아닌 지적인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들도 있어요."

그 말에 루카스의 얼굴이 살짝 풀리다가 나의 추가된 한마디에 다시 울상이 되었다.

"단지, 당신 주변에 없을 뿐이죠."

"제 주변에 없으니 못 만날 수도 있겠네요."

토닥토닥. 아직 안 태어났을 수도 있겠죠. 차마 이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기도는 해드릴게요. 꼭 만나길!!

"세이, 루카스 걱정은 그만하고 축제를 즐기자."

"그래요. 가요, 카일."

카일과 처음으로 궁 밖을 나왔을 때 봤던 넓은 광장은 오늘 축제의 장이 되어 있었다.

다들 마법등을 훤히 밝힌 거리에서 둥글게 모여 빙글빙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은 활기가 넘쳐 흘렀다. 물론, 카일은 이번 행사에도 나를 위해 마법등을 지원해서 불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을 수 없었다.

조금 미안하네. 원래는 중앙에 운치 있게 모닥불을 피워놓고 돌면서 춤추는 것일 텐데.

"세이, 평민들의 춤인데 잘 추네?"

"물론이죠. 아주 어릴 땐 몇 번 춰봤으니까요."

그런데 희한하네. 원래 이춤은 돌면서 파트너를 바꿔야 하는데, 어째서 계속... 말을 말자.

긍정적으로 생각해, 카일은 날 밀착 호위하는 거야. 하. 하. 하. 그 누구에게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이 철저한 호위 정신!

누구 남편인지 참, 어휴.

우리가 노는 곳 한쪽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올라왔다. 역시나 내가 불을 보는 것을 무서워하니까 벽돌로 화덕을 쌓아 안 보이게 굽고 있었다.

킁킁, 돼진가? 사슴인가?

"카일,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배고파?"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파요!! 밥 주세요!!

수확제에는 황실이 포상으로 내린 여러 동물들을 구워서 서로 나눠 먹는다고 했다. 평민들과 농민들은 자기들의 텃밭에서 가져온 채소들과 곡식으로 스튜를 끓이고.

"살코기랑 기름기 많은 부위는 평민들에게 고루 나눠줘요. 우리는 돼지 귀나 코, 아님 앞다리살이면 충분해요."

사실, 양이 적고, 많이들 안 찾지만 특별한 부위였다. 아주 쫀득하고 씹는 질감이 독특해서, 황궁에서는 먹을 일 없는 부위인 귀랑 코!!

별미니까 카일 먹여야지. 헤헷.

"어머, 황태자비께서 드실 줄 아시네요. 그 부위가 먹을 건 없어도 의외로 쫄깃하고 맛있어요."

뜨, 뜨끔. 나의 사심이 들킨 건가?

"하지만 살이 거의 없어서 고귀하신 분들이 드시기엔 격이 떨어지는데... 저희에게 살코기를 양보하시느라 그러시는 거라면 안 그러셔도 됩니다."

"괜찮으니 걱정 말고 소스를 많이 주면 되네. 민가의 소스들은 어떤 맛인지 기대되거든."

뻔뻔해지는 건 역시 카일을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겠지?

"세이, 평민들에게 고기 많이 먹이려는 거야? 돼지 귀라니 먹을 수 있어?"

"뭐, 앞다리살도 있고요."

카일에게는 진실을 알려줘도 되겠지.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옹알거려줬다.

"귀랑 코가 알고 보면 더 맛있어요."

미심쩍어 하던 카일은 한 점 먹어보고 수긍했다.

"오오오! 세이, 진짜 쫄깃해. 젤리도 이렇게까지는 쫄깃하지 않은데!"

"내가 알기로는 젤리 만드는 젤라틴도 돼지에서 얻을걸요?"

내 말에 카일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맛있게 먹었다. 쫀득쫀득한 식감에 달콤 짭짤한 소스는 우리 입맛에도 나쁘지 않았다.

뭐, 사실 내가 반년 정도 고급진 음식을 먹어서 그렇지, 원래는 이런 평민 입맛이잖아? 이 그리운 고향의 맛!

이 소스는 가지고 가서 황태자궁의 요리사들에게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그런데 의외네. 카일도 잘 먹을 줄은 몰랐어. 하긴 평생 고급만 먹다 보면 색다른 맛이 그리울 법도 하지. 아니면 원래 저렴한 입맛이거나.

"전하, 비 전하. 이 술도 드셔보세요. 저희가 직접 담근 술이랍니다."

노란색의 거품이 보글 올라오는 술이었다. 보리를 발아시켜 담근 술이라고?

술은 가끔 만찬 때나 먹는 와인과, 지난번 연회 때 마신 샴페인 밖에 몰랐다.

이건, 음, 샴페인처럼 톡톡 쏘네. 느끼한 돼지 맛을 잡아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아앗!! 카일!!"

"맛을 봤으면 그만. 술도 약하면서."

"약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기억이 안 나나 봐? 나한테 반... 읍!"

사람들도 있는데 이러기냐!! 저 입을 막는 수밖에!

윽, 뭐 하는 짓이야? 손바닥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질겁해서 손 뗐지만 이 정도는!! 으으윽! 농밀하게 막 그렇게!!

결국 얼굴이 화끈해져서 손을 떼고 말았다.

"적당히 해요!!"

"빨리 돌아갈까? 세이 얼굴 완전히 빨개졌는데... 으윽!"

내가 손을 쫘악 펴서 그의 등짝을 후려치자 다들 잠깐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저 우리가 알콩달콩 노는 것으로 보였나 봐. 이런, 민망해.

"이제 하이라이트인 불꽃놀이가 시작되겠네."

"아... 잊고 있었어."

불꽃놀이. 괘, 괜찮을까? 내가 생각하는 그런 활활 타는 불은 아니라지만 조금 무서웠다.

게다가 황후궁의 앵무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곁에 있을 거니까 무서워하지 마."

"손 꽉 잡아 줘야 해요."

"뒤에서 꼭 껴안아 줄게."

"흐음. 당신 그걸 노리고 있었어."

"아니라고 못하겠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카일이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 견뎌보고 안 되겠으면 카일 가슴에 얼굴을 파묻자.

광장 중앙에는 큰 수레에는 여러 모양의 둥근 통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장치를 설치하는 동안 안전선을 그려놓고 그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름 황족이라 대접받아 잘 보이는 자리였다.

안 그래도 되는데...

"이제 시작이군."

카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큰 소음과 함께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터진 것은 불꽃만이 아니었다.

"우와아아!"

"으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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