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
2018.06.07.
후궁 간택은 어린 영애들의 시기와 질투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쉽게 넘어갔다. 그저 뒤로 미루기만 하려 했는데, 우리에게 큰 명분마저 주었다.
카일은 후궁 간택연을 파토친 뒤, 곧, 후궁 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회의를 열었다.
이유는 뭐, 혼례도 올리기 전에 후궁 후보들이 정비를 험담하고 시기를 하는데, 후궁은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후궁에게 지급되던 예산을 빈민 구제와 평민 교육에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황후파는 크게 반발했다. 귀족파는 속으로는 앓고 있으나 대외적으로는 내가 귀족파 수장의 조카로 되어있어 겉으로 화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발 통과해야 할 텐데..."
"매형을 믿으십시오. 아버지를 따르던 기사가문들도 찬성하고 나섰으니, 통과될 겁니다."
"응..."
그러고 보니 카일이 어제 후작님과 화해하지 않겠냐고 물었었다. 자신과 황제 폐하가 대화를 통해 푼 것처럼,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도대체가 이 남자는 나의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게 없어. 이 정도면 스토커 아니야?
"저기, 펠. 후작님이 언제 퇴궁하시는지 알아?"
"오늘은 점심시간이 지난 이후 일 겁니다."
"그러면, 혹시, 내가 만나봐도 될까?"
"물론입니다. 아버지가 기뻐하실 거예요."
* * *
햇빛에 반사되면 붉은 기가 살짝 도는 적금발에 에메랄드 빚 눈동자. 이미 40대 중반이 되었는데도 30대보다 단단한 체격.
나이를 먹었어도 여전히 살아있는 턱 선과 눈매는 그가 젊었을 때 알리페르만큼 대단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나를 숨 막히게 시선.
아직도 저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차가운 시선은 아니었다. 따뜻한 눈빛이었다. 너무나도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
그래서 숨이 막혔다. 왜, 이제서야...
"잘 지내셨습니까?"
"네."
"건강해 보이십니다."
"그런가요?"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간단한 대답 말고는 이어갈 말이 없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서로와 공유한 시간이 없었다.
함께 웃을 일도, 함께 나눌 추억도, 함께 울 일도 없는 남보다도 먼 사이.
그게 후작님과 나였다. 단지 피를 나누었을 뿐.
"후궁 문제는 곧 정리될 것입니다. 황태자 전하와 행복할 일만 있을 테니 염려 놓으십시오."
"후작님은... 제가 아르세이아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괜찮은가요?"
내 말에 후작님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역시, 아무리 그래도 정실 소생의 자녀의 자리를 뺏은 내가 탐탁지 않구나...
"아르세이아는 저의 장녀에게 주려던 이름입니다. 그러니 그 이름은 비 전하의 것이지요."
이번에는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심이신 걸까? 정말 나를 후작님의 장녀로 인정한다는 걸까?
"그리고 둘째는 이미 새 이름으로 불러주길 원합니다. 이제는 스타티나라고 부르면 됩니다.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고 싶답니다."
"스타티나... 예쁜 이름이네요. 스타티나의 소식을 듣고 계신 건가요?"
"남부 왕국에서 자유를 찾아 행복해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정리되면, 그때 비 전하를 만나겠다고 합니다."
국외로 도망쳤구나. 나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주고, 너는 혹시 힘들지 않니?
후작님은 아르세이아, 아니 스타티나가 나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떠났다는 것을 알고 계신 듯했다. 왜 말리지 않으셨을까?
"남부 왕국은 여자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서 재밌나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만난 것 같습니다."
"아르, 아니 스타티나가 그렇게 살아도 진짜 괜찮으세요?"
"훨씬 행복해하니까요. 자식들의 행복이 부모의 바람 아니겠습니까? 비 전하도 행복해 보이셔서 얼마나 기쁜지요."
말문이 막혔다. 내가 행복해하니까 기쁘다고?
왜요? 어째서요?
내가 기억하는 후작님의 모습은 언제나 한 발자국 뒤에 서 계신 모습이었다.
후작부인은 절대 후작님 앞에서 날 때리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내 몸의 흉터가 신기하게도 다 사라지는 체질이라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맞는 것을 모를 리는 없었다.
나는 후작님께 사랑받길 원하진 않았다. 단지, 후작부인을 우리 모녀로부터 떼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결국엔 어머니와 내가 이별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저를 원망하고 있지요?"
원망하고 있었다. 왜 어머니와 날 지켜주지 못했는지, 이럴 거면 날 왜 찾았는지, 어머니는 왜 버렸는지, 다 밉고 원망스러웠다.
"어머니를 찾아주세요."
원망의 말 대신 부탁을 드렸다. 내 어머니의 생사를,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게 더 중요했다.
나는 이렇게나 사랑받으며 편하게 사는데, 내 어머니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안 그래도 그 일로 프리케를 빌리러 왔습니다. 아멜리아가 있는 곳을 찾은 것 같습니다."
"정말요? 진짜예요?"
"네, 몬테 공작령의 한 수도원입니다."
"제발, 제발 어머니를 구해 주세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후작님은 망설이다가 손수건을 내미셨다.
"제게도 아멜리아는 소중한, 아니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꼭 구해낼 테니, 염려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서 왜 지켜주지 못한 거예요?"
드디어 원망의 말이 튀어나왔다.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서 어째서 생사도 알 수 없게 둔 거냐고!
내 말에 후작님도 무너지신 모양이었다. 나는 그분이 눈물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기나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후작님과 어머니는 서로 연인이셨다. 가신의 딸과 가문의 후계자라는 신분 차이가 있었으나 서로 혼인을 약속할 만큼 깊은 사이였다.
"아멜리아는 지금의 비 전하만큼이나 반짝이던 여인이었답니다."
어머니와 후작님의 사랑 이야기는 나와 카일의 이야기처럼 운명적이고 열렬했다. 선대 후작님의 반대도 설득하는데 성공했었다고 했다.
"그런데, 혼인을 두 달 앞두고 아멜리아가 사라졌었습니다."
선대 후작님이 끝내 인정하지 못하고 내 어머니를 숨긴 것이라고 생각하셨단다. 사라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석 달을 폐인처럼 어머니를 찾아다니던 아버지는 황실의 연회에 억지로 참여하셨다.
"연회고 뭐고 다 싫어서 구석에서 술만 마시던 제 눈앞에 아멜리아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한 휴게실에 들어간 저는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후작님이 마시던 술에는 미약이 타져있었고, 후작님은 결국 당시 몬테 공녀에게 실수를 하고 말았다.
"공녀를 임신시켰으니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전 억지로 아멜리아를 잊었습니다."
결국 후작님은 책임감으로 혼례를 치르셨다. 그러다가 우연히 우리 모녀를 발견한 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아셨다고 했다.
고귀하게 자랐어야 했던 나는 평민들 보다 못한 삶을 살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있었다.
후작부인은 그 사실을 알고 우리 모녀를 받아주겠다 하여 하늘 저택에서 지내게 했다.
"아멜리아와 비 전하가 사실상 감금생활을 한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우리 모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게 후작부인이 막은 것이었다. 사교계에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작은 저택 안에 가둬놓고는 우리 모녀에게 온갖 협박과 학대를 가했다.
후작님께서는 가정에 대한 도리를 지키기 위해 어머니를 더 이상 취하지 않았음에도 자격지심에 우릴 괴롭혔던 것이다.
"우연히 비 전하가 학대받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아멜리아가 제 아버지가 아닌, 알리페르의 어미의 협박으로 사라진 것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후작님을 차지하기 위해 몇 번이고 내 어머니를 죽이려 하고 외가를 몰래 압박했다고 했다.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꽁꽁 숨는 것을 택했다. 차마 나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혼자 나를 낳고 고생하며 사는 길을 택하셨다.
게다가 후작님과 미약을 이용해 속여서 관계를 가진 것도 다 현 몬테 공작과 후작부인의 계획이었다고...
"화재 사건 때까지도 그 내막을 몰랐던 저는 결국 아멜리아도 잃었습니다. 저는 못난 연인이었고 못난 아비였습니다. 그러니 비 전하께서 절 원망하셔도 이해합니다."
후작부인에게 사랑하는 연인을 뺏긴 후작님이었다. 결국 다시 어머니나 내가 크게 다치거나 위험해 질까 봐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프리케나 에이린을 보내 뒤에서 돕는 것이 후작님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후작부인이 내게도 했던 협박이었다. 내 어머니의 목숨을 담보로 나에게 온갖 것을 강요했었다.
후작님은 주기적으로 어머니의 생존 여부를 확인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후작님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아멜리아를 찾고 나면 수집해 둔 증거로 스타티나의 어미와 이혼을 하고, 그 죄를 물을 것입니다."
"동생들이... 상처 받을 거예요."
"두 아이들 다 동의했습니다. 스타티나는 저보다 일찍 제 어미의 죄를 알고 그녀를 경멸했습니다. 또, 알리페르는 정의로운 기사이기에 어미가 벌을 받는 것이 맞는 일이라 했습니다."
내 쌍둥이 동생들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 때문에 동생들이 상처받는 것을 감수한다는 것이 고마웠고 미안했다.
나는 그아이들에게 변변찮게 준 것이 없는데. 내 동생들은 나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내어주는구나...
그리고 후작님. 아직까지도 내 어머니를 사랑하시는지 말을 이어가실 때 아파하는 것이 보여서 안쓰러울 정도였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내가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계실 줄 알았는데.
"참 이거... 전하께서 지난번에 외출하셨을 때 한참을 보고 계셨다고 말씀해 주셔서..."
후작님은 오르골을 내미셨다. 내게 주지 못하고 한참이나 큰 손으로 잡고 계셨는지 오르골은 따뜻했다.
"제가 처음으로 선물을 드렸던 건데 기억하십니까?"
"네, 아직 가지고 있어요."
내가 간직하고 있다는 말에 후작님이 응접실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웃으셨다.
어머니가 왜 이분을 사랑했는지 알만큼 참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어릴 때 이걸 받고는 고장 날 때까지 돌리셨죠. 고장 나서 소리가 나지 않자 울상이셨는데... 제가 받아서 고쳐드리자 제게 고맙다며, 처음으로 뽀뽀를 해주셨습니다. 그때 그 모습 정말 예쁘셨는데, 그날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나는 기억나지 않아. 그런데 저렇게나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내 심장이 뭔가 간질거렸다.
그 시절의 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시는구나. 내 기억에서 지워진 부녀 사이의 추억이 있었어.
"저는 기억이 안 나요."
내 말에 조금 실망하신 모습이셨다.
"그러니까... 이제 자주 오셔서... 옛날이야기 많이 해주세요. 제가 잃어버린 추억을요, 아, 아, 버, 지."
내가 더듬거리며 내뱉은 마지막 말에 중년 기사님은 펑펑 우셨다. 지켜보는 내가 민망할 만큼...
"후작, 자네가 그렇게 울면 나의 비가 곤란해하지 않나. 이제 세이와 함께 할 즐거운 날도 많을 텐데."
"카일."
"죄송합니다. 못난 꼴을 보였군요."
아까 건네주신 손수건을 돌려드리자 금세 눈물을 훔치고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프리케를 당장 보내줄 테니까, 나의 비가 더 이상 울지 않게 잘 해결해줬으면 좋겠어. 남의 가정사라 직접 나서기는 힘들지만, 최대한 협조해 줄 테니."
카일이 아는 것에 대해 당황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후작님도 카일이 찾던게 나라는 것을 아시는 것 같았다.
카일이 찾아가서 보내달라 애원했다는 것도 스타티나가 아니라 나였구나. 후작님은 그것을 알고 날 황궁으로 보낸 것이고.
도대체 나의 황궁행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인 거야?
왠지, 내가 황태자비가 되는데 아주 큰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카일은 프리케 보낸다면서 왜 저렇게 좋아해? 사이 좋아진 것 같더니! 질투쟁이.
날 가장 아끼고 사랑해주는 두 남자 사이에 있자 내 심장이 벅차올랐다. 따뜻하고, 안온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번에는 꼭 성공할 겁니다. 대신, 제 소중한 큰 딸이 마음 아파하면 데리고 갈 거라는 거 잊지 마십시오."
"치사하게 그걸로 겁주는 거야? 그리고 세이가 안 따라 갈걸? 아, 아마도?"
"카일이 제게 잘 한다면 안 가겠죠. 잘못하면, 갈 곳이 친정 밖에 없으니까, 아버지를 따라갈 거예요."
후작님, 아니 아버지가 날 보며 웃는 게 조금은 편해졌다. 그 와중에 카일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것도 재밌고.
"물론 카일이 내게 잘못할 일 같은 것 없을 테니 염려 마세요, 아버지."
두 남자가 날 두고 함께 웃는 것이 좋았다.
카일을 만난 뒤로 사랑받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날 사랑해주는 것이 카일뿐 아니라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카일은 내게 하늘이 보내주신 구원의 빛이야.
카일의 얼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 날 보며 웃어주는 아버지의 눈빛을 보았다. 새끼 강아지를 핥아주는 부모견의 다정한 눈길.
괜히 민망해졌다. 오르골만 만지작 하게 될 만큼. 이 오르골, 침실에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둬야지.
"참, 세이. 처남이 세이가 만들어 준 손수건 받을 거라고 무지 설레하고 있던데. 내 거는? 네 첫 손수건은 내가 먼저 받아야 하는 것 아냐?"
"아직 제대로 도안도 못 잡았는데요?"
"두 분 전하. 죄송하지만, 원래 딸의 첫 손수건은 아버지들의 기쁨이고, 로망입니다."
어어...? 저기, 다들 이러시면 곤란한데요?
두 남자는 서로 경계를 하며 내게 손수건을 먼저 줄 것을 요구했다.
저기, 내가 수를 잘 놓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단체로들 덤비시면 어쩌라고.
그냥 만들지 말자. 아무도 안 줄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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