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56화 (56/126)

57화. 카일의 탄생연 - 도장 찍을래!

2018.06.02.

카일이 아닌 프리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테라스로 가고 있었다.

"비 전하, 지금 질투하시는 거죠?"

윽, 뜨끔. 이거, 카일이 듣고 있겠지?

"어머, 프리케경두 참. 내 남편이 워낙에 잘나서 여인들이 날아드는 걸 어쩌겠어? 여인들이 불쌍해서 잠깐 피해주는 거야."

"푸흐흐. 전하께서는 계속 비 전하쪽만 보시는데요? 그러지 말고 마음 푸시죠. 전하가 저렇게 애절한 눈빛이신데."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툴툴대며 시원한 샴페인 한 잔을 집어 들고 한 번에 들이켰다.

"아, 시원하네."

시원한 샴페인이 목을 넘어가자 답답한 게 날아가는 것도 같았다. 한 잔만 더 마시자. 술이 이렇게 단 거였어?

"아르세이아, 내 딸아."

이런. 하필... 후작 부인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아까 카일에게 제대로 까인 몬테 공작과 함께.

망했다. 황후가 가고 나니 후작부인이 오는구나.

"비 전하."

"어머니. 외숙, 외숙모님 오랜만입니다."

이 타이밍에 몬테 공작 부부까지 오다니. 최악이었다. 그들의 눈은 어느 귀족들처럼 사랑하는 딸과 조카를 바라보는 다정한 눈빛을 연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너머의 증오와 경멸이 보였다.

그런 그들의 눈빛에 어린 시절의 학대가 떠오르려고 했다. 공포가 올라 오려 했지만 샴페인의 기운이 올라와서일까? 버틸 수 있었다.

"아르세이아, 잠시 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싫은데!! 절대 싫어. 왜 부르는 거야? 게다가 어디서 다정한 척이야?

몬테 공작의 딸을 후궁으로 밀기 위한 청탁일까? 아니면, 제 딸이 가지지 않은 힘을 쓴 것을 혼내기 위해서일까?

펠이 미리 거짓말로 다, 카일의 힘을 내가 한 일로 속이는 쇼라고 말해 준다 했었는데...

"네, 그럼 잠시 제 휴게실로 가시지요."

거부하고 싶었지만 친정 식구들과의 만남을 거부하면 모두가 이상하게 볼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휴게실로 가자고 했다.

무거운 발이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것을 한 걸음 내디뎠다. 아니야, 여기서 물러서면 안 돼.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해.

이들에게 휘둘리는 황태자비가 되지 않으려면.

점차 얼굴에 뜨거운 기운이 살짝 오르는 게 용기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래서 술을 마시는 거군요!

"누님, 어머니. 같이 가시지요."

오, 나의 구세주. 사랑하는 동생님!

"펠! 내가 비 전하께 직접 드릴 말씀이 있어서 가는 것이니 너는 빠지거라."

"저와 프리케가 공식적으로 비 전하의 호위라서요. 황태자께서 아니 계실 때는 제가 지켜야 하는 호위 대상이십니다."

알리페르가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든든하게 곁을 지켰다. 프리케도 내 곁에 든든하게 서 있었다.

예전 같으면 몸도 머리도 굳어서 어쩔 줄 몰라 했을 텐데, 동생과 친구가 지켜주자 그때만큼 무섭진 않았다.

카일은 아직 제게 딸을 데리고 인사하러 온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 완전 찍혔어.

두 사람이 내 호위라는 것이 이리도 든든할 줄 몰랐다. 이들이 곁에 있으면 후작부인이나 공작 부부가 날 해코지하지 못하리라.

"친정 식구들의 모임이면 나도 빠질 수 없지."

"아버지."

펠이 반갑게 부르자 비스 후작까지 곁에 왔다. 마음이 이상하게 울렁였다.

최근 폐하의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인지, 펠의 적극적인 후작님에 대한 변론 때문인지 조금은 달라 보이긴 했다.

나에게 무심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아까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서 울컥할 것만 같았다.

"으음. 너무 친정식구들끼리 모여있으면 보기 좋지 않으니 내일 따로 알현 신청을 하지요."

후작부인이 결국 한 발 물러났다.

"오오, 장모님. 죄송하지만 내일은 나의 비가 저와 하루 종일 선약이 있어서요. 알현은 불가할 것 같습니다."

어느새 곁에 온 카일까지 나서서 막아섰다. 카일의 얼굴에는 능글맞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대부분의 귀부인들에게 존대를 해주는 카일의 눈은, 입과 달리 서늘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계속 영애들 사이에 있었으면 삐질랬는데, 봐줘야지.

그나저나 약속은 분명 점심때까지 였는데, 졸지에 하루 종일 카일과 단둘이 있게 생겼다. 뭐 나쁘진 않지만. 아니 좋은가?

"그럼 모레 오전 중은 어떤가요?"

"아, 그날은 중요한 회의가 잡혀있습니다. 교육기관 건립 계획 때문에 아카데미의 교수들과 건축가 등 중요 인사들과 두 분 전하의 만남이 있어서요. 황제 폐하가 관심 갖고 계신 일이라 보고도 해야 해서 곤란하군요."

루카스마저 막아섰다.

그런데, 응? 모레 오전에 나 회의 있었어? 모르는 스케줄이 아주 많네?

"아 참. 그날 오후에는 황제 폐하께서 비 전하와 산책과 다과를 하고 싶다고 아까 나가시면서 먼저 청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날 저녁에는 후궁 간택연 겸 데뷔탕트가 있고요. 그날 이후에도 황태자비 전하의 일정이 빽빽한데, 봅시다. 당분간 틈이 전혀 없군요."

"이, 이런."

몬테 공작과 후작부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하든 새로운 스케줄을 읊어 댈 것 같은 보좌관의 깐깐한 얼굴에 말문이 막힌듯했다.

"비는 시간은 다 나와 선약될 예정인지라 말이지. 나도 바쁜 비와 시간 보내기가 힘들어서 말이야. 공작, 워낙에 바빠서 사교모임도 안 보내는데, 친정식구들과 사적인 모임까지 뺏어서 좀 미안하군. 장모님, 미안하지만 나의 비와 만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세이, 배고프지 않아? 잠깐 뭐라도 먹자. 이리 와."

뭐, 뭐지 이 남자들? 다들 단체로 왜 이래? 왜 내 일정이 갑자기 막 바뀌고 그러는 건데? 응? 저기요??

내가 카일을 올려다보자 그가 나만 알 수 있을 만큼 잠깐 눈을 찡긋했다.

뭐 비스 후작 부인과 몬테 공작 내외를 피하는 게 더 중요하잖아. 연기는 합이 중요하지. 아무렴.

"어머니, 외숙, 외숙모님. 죄송하게 되었네요. 급한 일이면 서신을 남겨주세요.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확인해 준다고 했지 들어주겠다고는 안 했다. 내 대답에 몬테가의 얼굴들에 불만이 어리는 것이 보였으나 내 뒤에 있는 든든한 남자들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리라.

나는 카일의 에스코트를 받아 그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나를 보고 미소 짓는 비스 후작이 보였다. 나는 아직 그가 불편했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카일과 테라스로 나갔다.

"카일, 고마워요."

"응?"

"당신이 시킨 일이죠? 몬테 공작이랑, 후작 부인에게서 저를 떼어 놓으려고..."

"뭐... 그런 셈이지."

다들 합심해서 후작부인이 날 괴롭힐까 봐 난리들이었구나. 루카스도 나에 대한 것을 다 아는 거겠지?

"흐으으음. 그런데 어여쁜 영애들은 어쩌고 나한테 온 거예요?"

"역시 화난 거지?"

"화났다기보다는 너무 잘난 남편 탓에 힘드네요. 앞으로도 정치적인 문제나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여자들과 카일을 나눠야 하는 상황이 또 생길지도 모르겠죠?"

말하다 보니 한숨이 나왔다. 짜증 났다. 왜 하필 카일은 황태자일까?? 차라리 좀 평범한 상인이거나, 나 같은 사생아였음 이런 불편한 상황 안 겪었을 텐데...

"아얏!"

카일이 내 이마를 툭 때렸다. 왜?라는 눈으로 카일을 올려다보니까 카일이 조금 화난 표정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다른 여인들을 내 주변에 둘 생각이 없어."

"알아요. 그냥, 당신이 황태자이고, 미래의 황제인 이상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라서 싫어요."

샴페인 두 잔 일 뿐인데, 술기운이 살짝 오르는지 솔직한 마음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생각보다 나 많이 속상했어. 짜증 나. 이 상황 싫어.

이번 일을 편하게 넘기고, 뒷말이 안 나오게 하려고 간택연을 받아들이라고 했던 건데... 싫다. 정말.

"그냥, 평범한 남자였으면 이런 일 없이 서로만 보고 사랑했을 거잖아. 짜증 나, 내 남편을 딴 여자들이 막 홀린 듯이 쳐다보고, 당신 옆자리 탐내고, 유혹하려고 헐벗고 나오고 이런 거 다 싫어. 카일은 왜 잘생겨가지고, 좀 못생긴 황태자였음 저 정도는 아닐 거 아냐."

"푸흐흐흐흐흐, 세이, 취한 거야? 샴페인 두 잔 밖에 안 마셨잖아."

"언제 본 거야? 우이씨 웃지 마, 나 짜증 났으니까."

기분 나쁜데, 왜 웃어? 씨이, 이 와중에 왜 잘생겼는데? 오늘 머리까지 넘기고 나와서는!! 더 잘생겨졌잖아.

안 되겠어. 도장 찍어 놔야지.

"쪼오옥! 이거 나가서 지우지 마."

예쁘게 찍혔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진한 색으로 바르고 올 걸 그랬어.

"응. 알았어. 안 지울게. 약속해. 그런데 이걸로는 도장이 너무 약하지 않아?"

"흡!"

카일이 내 입술을 덮치기 시작했다. 술기운 때문인가? 시작하자마자 온몸이 뜨거웠다.

카일은 평소보다 살살, 내 아랫입술을 살살 달래가며 훑었다. 나의 심통 난 마음이 풀리길 바라는 듯이 부드럽게 나를 감싸는 그의 뜨거운 입술이 싫지 않았다.

내가 조금씩 맘이 풀려 그에게 응하기 시작하자 카일은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간지러움을 태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살살 긁어대는 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웃음의 틈을 파고든 카일의 키스는 점점 농밀해져 갔다.

내가 마셨던 샴페인의 향이 그의 입으로 옮겨 갈 때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고 서로의 입을 탐하고 탐했다.

밖에서는 무도회를 즐기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악단의 음악소리가 잔잔하게 퍼져만 갔다.

하지만 우리의 귀에는 서로의 심장소리와 달 뜬 숨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몸이 달궈져서 사고를 칠 것만 같았지만 차가운 가을바람이 다행히 이성을 붙들어 주었다. 여긴 테라스다. 정신 차려!

"이제 마음 좀 풀렸어? 술은 깼고?"

"깼어요."

으앙, 부끄러워. 서늘한 가을바람이 테라스에 닿아서 벌써 술은 깼다. 애초에 샴페인에 심하게 취했을 리가 없지. 그렇지.

그러자 그에게 반말하며 투정 부린 사실이 아름답게 머리에서 춤을 췄다. 저기 내 남편 뺨에 남긴 저것은 무엇이냐?

미쳤구나, 세이야. 너 미쳤어, 미쳤어.

술 마시면 사람들이 객기 부리는 이유가 다 있었어. 쓸데없이 용감해져서 그런 거야. 술은 나쁜 거였어!

"세이, 내가 황제가 되면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후궁 제도 폐지야. 아바마마랑도 이야기했어."

"진짜요…?"

"응, 이번 후궁 간택 문제 넘기고 나서, 볼라드 공작이랑 합심해서 추진할 거야."

이런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투정 부렸어. 그것도 카일이 여자들한테 먼저 눈길 준 것도 아닌데...

카일의 상냥한 눈길이 내 머리에 닿는 듯했다. 머리가 뜨끈뜨끈 달아오르는 듯했다.

아씨. 두고두고 이불 뒤집어쓰고 발차기 연습할 테다.

"세이, 그런데 나한테 계속 반말하지 않을래? 네가 반말하는 거 너무 좋아. 귀엽고 깨물어 주고 싶었어."

"절대 다신 안 해요."

왜 시무룩하고 그러는데?

카일은 정말로 뺨에 내가 남긴 키스마크를 달고 나가버렸다. 절대 안 된다고 말렸는데!!

오늘 당직인 모일라가 내 치장을 고쳐주러 테라스로 들어온 사이 도망가 버렸다.

"모일라. 카일이!!"

"내버려 두세요. 비 전하의 것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으신 모양인데."

밖에서 젊은 귀족들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당당한 카일의 외침도.

"내가 황태자비의 것이라는 증거로 찍은 도장이야. 지우라고 하지 말게."

"전하, 신혼이신 것 너무 티 내시는 것 아닙니까? 영애들이 서운해하겠습니다."

"다른 영애들이 무슨 상관인가? 내 여인은 나의 비뿐이고, 그녀 외에는 내 몸에 도장을 남길 수 없다고."

"매형, 존경합니다."

알리페르까지 왜 그러고 있는 거야? 펠, 거기 끼지 마.

피식, 헛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못 말려.

"자, 다시 나가셔도 됩니다."

내가 카일과 시간차를 두고 나가자 다들 알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그래. 부부끼리 진한 키스했어요. 왜요?라고 당당히 고개 들어야 하는데!!

이런. 저 팔불출 때문에 이 무슨 망신이야!! 어찌해야 하냐고??

카일은 자연스럽게 남자 귀족 무리에 휩싸였고, 나는 볼라드 공작부인의 손에 이끌려 한무리의 귀부인들과 영애들에게 둘러싸였다.

"아까, 정말 비 전하께서 꽃을 피우신 거예요?"

"헬레니아. 맞아요. 내 힘이랍니다. 또 보여줄까요?"

나는 근처의 화분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새로운 꽃 송이가 만들어졌다.

엣헴! 신기하죠? 이 힘이 이젠 저주받은 힘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나비들은 카일의 힘을 빌렸어요."

이건 사기다. 나비도 당연히 내가 했다. 단지 다른 곳에 이용할 필요가 있어서 이 힘은 숨기기로 했었다.

"지난 티타임 때 선보였던 꽃 케이크들의 꽃도 비 전하께서 축복을 내리신 건가요?"

"헬레니아는 눈썰미가 매의 그것보다 좋네요."

"어머. 어쩐지 꽃이 살아있는 것처럼 싱싱했어요. 꽃이 그렇게 상큼한 식재료였는지 그때 처음 알았답니다."

그녀는 내가 카일에게 얼마나 사랑받는지 궁금해했다. 내 티아라를 보며, 카일이 나를 생각하며 맞췄나 보다며 나보다도 좋아했다.

어? 그러고 보니? 그가 이 디자인의 티아라를 만든 것도 내가 식물들과 교감하는 것을 알고 미리 맞춘 거였구나. 처음부터 날 사랑했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니 새삼 기분이 좋아졌다. 으쓱!

부인들과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졌다. 이 정도로 부인들과 잘 지내면, 사교계를 휘어잡는 것도 가능하겠지? 불청객만 나타나지 않으면...

아, 젠장.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거죠?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