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카일의 탄생연 - 연회의 주인공
2018.05.31.
내가 다시 귀족들 쪽으로 몸을 돌리자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호기심, 그리고 불신.
아마도 카일이 정령들을 이용해 쇼를 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나는 우아하게 손을 들어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 순간 홀의 모든 창문과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온갖 나비들이 날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비들아, 쉬어야 하는 시간인데 이렇게 불러서 미안해. 대신, 꿀을 가득 채운 꽃들이 있으니깐 봐줘.
나의 마음에 화답하는 나비들은 색색깔의 날개들끼리 정렬하듯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데피니토르 황가의 상징, 태양 무늬를 만들어 냈다.
"데피니토르의 봄날은 황제 폐하로부터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리고, 그 따사로운 빛이 황태자께 이어지길 바라는 제 마음이랍니다."
나비들의 아름다운 춤 사위에 연회장은 봄이 온 것 같았다. 향기로운 꽃향기와 그에 어울리는 나비들.
내 손길에 따라 나비들은 각자 자신들을 유혹하는 꽃 위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날개가 크고 예쁜 나비는 카일의 손에 내려앉았다.
영애들은 나비들을 홀린 눈으로 힐끔댔다. 그래도 곤충이라고 조금 무서운지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예전의 아르세이아가 떠올랐다.
걔는 이제 나비를 제 손에 막 올리는데.
카일 역시 신기하다는 눈으로 나비를 바라보다 아바마마의 마거리트 화분에 나비를 올려주었다.
"나의 비가 아끼는 생명들을 그대들을 위해 특별히 부른 것이니 부디 나비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길 바라. 나와 나의 비는 여기 들어온 나비들의 수를 다 안다고. 조심해."
카일, 역시 내 남편이야. 솔직히 예쁜 날개를 보고 탐내는 욕심 많은 귀족들이 있을까 봐 걱정 됐는데.
그런데 거짓말을 너무 눈도 깜짝 안 하고 하는 것 아닌가요? 나도 쟤들이 몇 마리인지 몰라요.
카일의 협박이 통했는지 다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비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비들이 다 내려앉을 무렵 다시 내 손이 올라갔다. 그리고 내 손을 향해 날아오는 크고 새하얀 새가 있었다. 그 새의 발에는 반짝이는 것이 매달려 있었다.
훗, 이건 카일에게도 말하지 않은 깜짝 쇼였다. 감동받아서 울기 없기.
"아나이스. 어서 오렴."
"까아악."
아나이스는 나와 카일에게 브로치를 하나씩 떨어뜨려주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한자리 잡고 있던 알비케라의 머리 위에 앉았다.
하핫. 둘 다 작은 보석 목걸이를 달아 놓아서 더 예쁘네. 아주, 황실견, 황실조 같은 느낌이 팍팍 나는 것이 돈 쓴 보람을 느끼게 했다.
아무튼 나는 내 손에 쥐어진 브로치를 들고 카일 앞에 섰다.
"생일 축하해요. 카일."
"이거, 선물이야?"
"네. 단 한 쌍 밖에 없는 커플 아이템이니까 잘 간직해요."
카일의 가슴 부근의 수가 놓인 자리에 브로치를 달아주고는 어깨도 털어주고 크라바트도 다시 살짝 각을 잡아주었다. 그러자 카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에이, 선물 처음 받아보는 사람처럼 왜 그래요?? 응? 아, 내가 선물해준 건 처음 맞구나.
돈 많은 황궁에서 살다 보니, 선물 같은 것을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살았다.
펠의 손수건 만들어 주기로 했는데, 카일 것도 만들어서 줘야지.
"이제, 선물 자주 해 줄게요. 당신이랑 커플로 다 만들어야지."
"진짜지?"
"네. 그러니까 이제 내 것도 달아줘요. 당신과 내가 하나라는 징표로."
아차차, 옆에 아바마마와 황후가 아직 있었는데. 또 잊고 마구 부끄러운 대화를 나눴네.
아바마마는 마냥 흐뭇해하시고, 황후는 못 볼 걸 본 사람마냥 썩어들어가는구나.
카일은 전혀 주변 사람을 의식하지 않은 채 내게 조심스레 브로치를 달아주었다. 소박해 보였던 그와 나는 단번에 연회장에서 가장 빛나는 주인공의 모습을 되찾았다.
훗. 역시 잘 골랐어. 나의 센스란.
"자, 이제 늙은 우리 부부는 물러날 테니 즐겁게 시간 보내시게."
황제 폐하가 훈훈한 미소를 짓고 뭐 씹은 얼굴처럼 표정관리를 못하시는 황후를 데리고 먼저 떠났고 연회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사실 연회가 시작되기 전 귀족들과 외국사절단의 인사를 받아야 했으나 우리는 과감히 생략했다. 진상품도 다 거절하고 차라리 현금으로 받아냈다.
복지 기관인 오로스타, 그리고 황태자와 황태자 비가 세울 교육기관, 보육기관의 후원금의 명목으로.
그래서인지 인사를 하며 로비를 계획했던 이들의 불만스러운 표정들도 조금씩 보였다.
하지만 카일의 냉소에 아무도 찍 소리도 못하는 듯했다. 후궁 문제로 그의 심기를 잔뜩 긁어놨으니 더 하겠지.
우리 남편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내가 그 표정을 몇 번 옆에서 봐서 알지. 덤비기 힘들 것이야.
"자 이제 연회를 즐겨볼까? 사랑하는 나의 비, 한 곡 추실까요?"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내게 춤을 청했다. 어찌나 반듯한지 각이 제대로였다. 황제를 제외하고는 나에게만 무릎 꿇어주는 남자. 나는 그런 그의 든든한 손을 맞잡았다.
연회의 주인공인 카일이 악단에게 눈짓을 하자 우리가 준비해 둔 곡이 시작되었다.
샤를뮤트의 왈츠 변주곡 2악장. 정령의 여왕의 맑고 잔잔한 피아노의 선율이 울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완벽한 선곡이었네."
"카일, 하지만 내가 아닌 것 알잖아요."
"그래도 내 눈에는 당신이 정령의 여왕보다 더 강인하고, 현명하고, 신비롭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걸."
나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홀어 있는데도 춤을 추며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우리는 이 장소에 단둘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 특히 카일을 탐내는 영애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으면 좋겠다. 카일이 내 주변의 여자들을 싫어하는 것처럼 나도 다른 여자가 그의 주변에 맴도는 것은 싫었다.
카일이 내가 자신만 바라봐 주길 바라는 것처럼 그에게도 나뿐이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려나?
큰일이야. 남편 닮아서 독점욕만 강해져가지고, 에구.
점점 빨라지는 변주에 나와 그의 스텝도 빨라졌다. 정령의 여왕이 겪었던 시련을 나타내는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턴을 연거푸 하고 나니 어지러웠다.
그 순간 내 허리를 단단히 잡고 나를 응시하는 노란 눈빛이 내 시야에 한가득 잡혔다. 그의 리드에 몸을 맡기고 남은 스텝을 밟고 허리를 살짝 젖히자 한 곡이 끝났다.
파트너와의 호흡이 중요한 어려운 변주곡이었는데 노력한 만큼 아름다운 선을 그려낸 것 같았다. 우리를 둘러싼 귀족들의 박수소리가 우렁찼다.
곧바로 차분하고 진득한 곡이 흘러나왔다. 플로어에는 이제 많은 선남선녀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금 숨이 찼지만 카일이 선택한 이 곡은 꼭 나랑 출 거라고 했었기에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남녀의 몸이 거의 붙어서 느릿하게 움직이는 춤이라 힘들진 않았다.
"카일, 나 잘했죠?"
"응. 합도 잘 맞고, 역시 우린 천생연분이야."
"푸훗."
정령왕의 계약자와 대자연과 교감하는 여인의 조합이라. 정말 천생연분인 거겠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의 품에 당당히 안겨 있는 지금이 너무 행복했다.
천천히 그의 품에 안겨 빙글빙글 돌며 다른 이들의 얼굴을 구경했다. 우릴 힐끗대는 영애들의 얼굴 때문에 내 어깨가 계속 치솟았다.
부럽죠? 이 남자가 제 남자예요. 나만 이 남자의 품에 안겨있을 수 있답니다.
"어머, 당신 후궁 후보들이 날 마구 노려보는데요?"
"세이를 보는 남자들 눈 말고, 저 여자들 눈을 먼저 뽑을까?"
이 남자가!! 무시무시한 말들을 눈도 깜박하지 않고 하다니. 진짜 가끔은 그가 왜 냉혈한, 차가운 황태자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흐음. 도대체가 이렇게 무시무시 한 남자를 정령들은 무슨 생각으로 계약해줬대요?"
"아마도 내가 널 만나 순한 양이 될 걸 예상한 게 아닐까?"
카일과 나는 한참이나 웃으면서 춤을 연거푸 네 곡이나 췄다.
"아, 힘들어."
"운디네!"
역시 만능이야. 우리 운디네님 최고! 땀도 식고 피로도 가셨다.
정령의 힘으로 날 보살피는 카일을 다들 경탄하며 바라보는지 시선들이 따가웠다.
우쭈쭈, 고마워요. 내 남편님.
우리는 잠시 보좌에 앉아 쉬었다. 그러자 이제야 우리에게 말을 걸 기회가 생긴 귀족들이 서서히 다가왔다.
우이씨, 우리 둘만 있게 내버려 둡시다!
"전하, 생신을 감축드립니다."
"콘스탄트 공작, 고맙소."
콘스탄트 공작은 자신의 아내와 딸을 데려왔다.
"제 아내와 딸 릴리아나입니다."
"제국을 비추는 두 번째로 높은 태양 황태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나는 안 보이는지 카일에게만 인사를 하는 모습에 카일의 눈썹 한쪽이 쑥 올라갔다. 카일은 공작부인과 공녀가 인사를 하며 허리를 숙인 모습에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우리 곁으로 다가왔던 귀족들이 오히려 당황한 것 같았다.
카일, 왜? 날 무시한 게 기분 나쁘긴 하지만.
점차 허리를 숙인 여인들이 식은땀을 흘리는 듯 조금씩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카일."
"나의 비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지난번 티타임 때도 공작부인이 나의 비에게 무례했다던데, 이번에도 곁에 있는 비를 없는 취급하는 이들을 봐주려고 하니 말이야."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냉정하고 살기 섞인 눈빛은 콘스탄트 공작 일가에게 내리꽂는 카일의 모습에 주변 귀족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카일, 카일에게 인사를 하고 제게 따로 인사를 하려고 했겠지요."
자자, 진정해요. 내가 간절한 눈빛을 보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과 영애는 고개를 들라."
"송구하옵니다."
그런데, 카일에게 나름 수모를 겪었으면서도 카일의 얼굴을 보는 공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어렸다.
뭐지 저 여자? 내 남편이 잘생겼긴 했다. 지나치게 잘 생겼지 암요. 그래도 망신을 당하고도 저리 좋아서 얼굴을 붉히다니 불쌍하잖아.
혹시, 자존심을 어디 사탕이랑 바꿔 먹기라도 했나? 하긴 그러니 선택 못 받고도 계속 들이대는 거겠지.
아니면, 학대받는 것을 즐기는... 취향인 건가?
"밤하늘을 비추는 작은 별, 황태자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했다. 알현을 따로 받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뒤로 많은 귀족들이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러니 콘스탄트가의 위세가 대단하더라도 물러나는 것이 맞았다.
"전하, 제 딸이 전하와 춤을 추는 것이 꿈이라는데 한 곡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내 탄생일에 왜 내가 그대의 딸의 꿈을 이루어 줘야 하지? 그리고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안 보이나?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물러나시게."
카일 잘한다. 나이스!
나이 많은 늙은 공작은 제 딸을 위해서 자존심을 굽혔다. 그건 높이 살만하지만... 좀, 많이 뻔뻔하고 무례하네.
"콘스탄트 공작,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우리 편이 되어 준 볼라드 공작이 뒤에서 외치자 콘스탄트 공작은 결국 물러 날 수밖에 없었다.
어머, 저 가족들 그런데 왜 날 노려보는데? 차마 카일에게는 화 못 내고 나한테 화내는 거구나?
원망을 약한 자에게 쏟는 사람들. 이런 자들이 과연, 백성들을 가르치고 보호하며 지켜나갈 귀족의 자격이 있는 걸까?
그들이 물러나자 귀족들이 차례로 축하 인사를 해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인사 미리 받을 것을. 연회 일찍 끝내기는 글러먹은 모양이었다.
"황태자 전하, 생신 감축드립니다."
어머, 몬테 공작도 데뷔를 앞둔 둘째 여식을 데리고 인사를 해왔다. 지난번에 나에게 협박을 해놓고 이제 자신을 도우라는 눈빛을 보내는 공작을 보니 코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조카가 돌아오진 않겠지만, 아르세이아와 제 딸이 처첩으로 지내야 하는 상황인 거 모르나? 자신의 여동생이랑 합의는 한 거야?
끝없는 욕심들이 자신들을 망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레티아와 오랜만에 만나시지요? 이 아이를 곁에 두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레티아를 잘 부탁드립니다. 황태자비 전하."
"세이? 새 시녀라도 들이려고?"
푸흐흡. 카일 최고!
"아니요. 지금의 시녀들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좋은 혼처가 필요하긴 할 텐데요."
황실의 시녀는 좋은 곳에 시집 가긴 하지.
"그래? 그래도 공작의 딸인데, 아무 집안에나 보낼 수는 없지. 최소 공작 이상은 되어야 할 거 아냐."
공작의 눈에 기대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 그거 아닐 건데요. 기대하지 말지.
"루피넬리아의 왕가 어떤가?"
거기 왕자들이 미친놈들인 거 다 알 텐데. 카일의 말에 몬테 공작의 미간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프리케는 절대 안 돼요. 카일!!
그런데 몬테 공작의 딸조차 카일을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하아, 제국의 영애들은 다들 카일 얼굴만 보면 영혼을 팔고 보냐. 기분 나빠.
한참이나 이런 일이 연속해서 벌어졌다. 인사한답시고 자신들의 딸을 소개하는 귀족들과, 그들에게 단호박을 던져주는 카일, 그리고 카일에게 넋을 잃은 영애들.
"세이, 우리 다시 춤 출래?"
"대기 하고 있는 귀족들부터 만나요. 나는 잠시 테라스 가서 쉴게요. 내가 있으니, 어여쁜 영애들이 눈치를 많이 보잖아요. 호. 호. 호."
"세, 세이?"
잘난 남편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었다.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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