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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54화 (54/126)

55화. 카일의 탄생연 - 카일을 위한 선물

2018.05.29.

"황제 폐하,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와 비 전하 드십니다."

황제 내외께서 먼저 앞장서서 걸으셨다. 중년의 신사가 되어버린 황제 폐하는 여전히 황제로서의 위엄과 품위를 유지하고 계셨다.

저런 분이 내 앞에만 서면 왜 대형견이 되시는 걸까? 부자지간의 핏줄의 힘인가?

흐뭇하게 아바마마의 모습을 관찰하며 걸어가는데 내 주변으로 온갖 시선이 닿아 날 따끔따끔하게 만들었다.

볼라드 공작부인처럼 우리 부부를 흐뭇한 시선으로 보는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호감 어린 시선보다는 아무래도 적의어린 시샘이 피부에 더 빨리 닿는 법이었다.

"우와, 카일, 나, 모든 미혼 영애들의 적인 가 봐요."

"응? 널 노리는 시커먼 늑대들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짜증 나게."

카일은 주변을 돌아보며 계속 으르렁거렸다. 아니, 주인 지키는 강아지도 아니고, 적당히 하시죠?

암만 봐도 다들 카일만 보는 것 같은데? 같은 시선도 서로 다르게 느끼는구나.

우리가 노골적으로 귓속말을 나누며 웃고 지나가자 적의가 점차 짙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럴 때 더 느긋하게 웃으며 주변을 돌아봐줘야, 사교계에서 빛이 나는 법.

나는 카일의 의지되는 손을 더 꽉 쥐며 찬찬히 주변을 훑어보았다.

적의의 뒷바탕에는 전부 시기와 질투가 담겨 있었다. 고귀한 황태자의 옆자리. 애초에 자신들의 것인 적이 없었는데 왜 자신들의 것 마냥 저리들 노려보는지.

미안하지만, 아니지, 미안할게 뭐 있어? 이 자리는 카일이 날 처음 봤을 때부터 내꺼라고 찜해준 자리랍니다.

우와, 그런데 저 콘스탄트 공녀. 오늘 의상이 장난이 아니었다. 뭘 입든 자유지만, 저건, 그냥... 카일이 절대 못 보게 막아야지.

아, 그리고 저건 음. 경멸, 멸시, 증오. 늘 받아왔기에 많이 무뎌졌다고 생각했지만 심장을 살짝 조여오는 고통이 느껴졌다.

비스 후작부인과 몬테 공작 내외.

알리페르도, 프리케도 연회장 안에 있었다. 날 지켜줄 거니까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조금 무서웠다.

"세이, 긴장하지 마. 괜찮아. 내가 곁에 있잖아."

봄날의 햇빛보다도 따스한 눈길로 날 지켜봐 주는 카일 덕분에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내 곁에는 카일이 있잖아. 그리고, 당당해져도 돼. 나는 이 데피니토르의 단 하나뿐인 황태자, 카일룸이 사랑하는 고귀한 황태자비야.

카일을 위해서라도 당당해질 거야.

허리를 세우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우아한 한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거야. 힘들면 내 손을 잡아주는 카일에게 잠시 의지해도 돼.

나는 그의 반려이고, 그는 나의 반쪽이니까.

홀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차분했다. 아니 언뜻 보기에는 초라했다. 아마 다들 국혼 후 첫 연회를 준비한 나를 속으로 비웃고 있으리라.

특히 황후의 입꼬리에 걸린 비소가 참 인상적이었다.

"겨우 이 정도 밖에 못했니?"

말하지 않고 있는데, 어째서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뭐, 인정.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태양과 별무늬 태피스트리와 마법등을 제외하면 별 장식이 없긴 했다.

아주, 근검절약한 것처럼 보이겠네.

화려한 꽃 장식도 작은 화분들로 대체했다. 그것도 활짝 핀 것도 아니니, 그렇게 비웃으셔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다들 어떤 표정으로 바뀔지 기대되네요. 호호.

황족을 위해 마련된 단상 위 보좌에 우리가 착석하자 귀족들의 시선이 모두 쏠렸다.

오늘 연회의 축사는 황제 폐하로부터 시작 될 예정이었다. 내가 폐하께 부탁드린 일이었다.

"다들 내 아들 카일룸 헬리오스 데피니토르의 생일을 축하하러 와 주어 고맙다. 다들 알다시피 내 아들은 이 제국 역사상 4대 정령왕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의 황태자이지."

황제 폐하는 카일을 다정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가셨다. 대부분 카일의 업적을 칭찬하는 말이었다.

카일은, 호호. 그게 많이 부끄럽고 어색했나 보았다. 눈동자가 갈 길을 잃었네. 하긴, 면전에서 욕 듣는 것도 민망하지만, 칭찬 듣는 것도 민망하지.

이제야 내 심정 이해하겠죠? 내가 듣는대서 내 칭찬하고 그러면 나 많이 부끄럽다고요.

아, 눈 마주쳤다. 빙긋. 눈길이 부딪히자 마주 웃어오는 게 참 이쁘네. 그가 날 보고 웃으니까 연회장에 우리 밖에 없는 것 같아서 좋았다.

어디선가 어린 영애들의 탄식 소리가 들린 것도 같고. 아닌가?

카일룸이 웃는 게 좀 예뻐야지. 아유, 저 속눈썹 팔랑이는 것 봐. 여자들이 홀리지 않고 버티겠어?

내가 다시 고개를 돌려 눈동자를 굴리며 사람들을 관찰하는 사이 아바마마의 축사는 끝없이 달려갔다.

알고 보니 아바마마는 절대 과묵하지 않은 분이었다. 우리 카일 칭찬할 구석이 많은 건 이해하지만... 하하하하.

다들 좀 지루해진 것 같은데, 황제 폐하 앞이라 말을 잘 듣고 있는 척했다.

그래도 이제 겨우 끝나가네. 다들 고생했어요.

이제 제일 중요한 말이 나올 차례였다.

"그래서 성군이 될 자질이 큰 황태자에게 제국의 운영을 맡기고자 한다."

연회장에서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적지 않은 동요가 생겼다. 특히나 황후와 콘스탄트 공작의 얼굴이 썩어가는 게 보였다.

당연히 우리 부부는 태연하고도 여유 넘치는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왜냐고? 지난번에 황후가 불렀을 때 황제 폐하와 우리 부부가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눴거든.

그러면서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카일과 폐하의 화해를 도왔다.

내가 그럴 입장은 아니지만, 서로 오해하고 등돌린 부자가 안타까워서 열심히 중간에서 말을 붙이고, 애교를 부리고, 쇼를 했었지.

결국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과오를 사죄했다.

"나는 너도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샤를이라도 살리고 지키려니, 그 어미를 벌할 수가 없었어."

아바마마는 큰 아들을 잃고, 둘째 아들마저 잃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남은 아들이라도 지켜야겠다고 판단하셨단다.

"미안하구나, 아들아. 뒤늦게라도 바로 잡았어야 하는데."

하나 남은 아들이라 생각한 3황자를 위해 콘스탄트가의 위상을 너무 높여 버렸다.

그 결과 카일이 돌아온 뒤에도 황후를 처단하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이 아비를 용서해다오."

황제는 함부로 사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 황제 폐하의 진심 어린 사과는 카일의 마음에 다행히 닿았다.

"용서라니요. 저야말로 옹졸한 마음에 샤를의 죽음을 막지 않았습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어느 한 손가락도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는 법인데..."

"괜찮다, 카일. 그 아이는 이미 병색이 깊었어. 가망이 없었다. 네 잘못이 아니란다."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해하기. 그렇게 두 사람은 해묵은 오해를 풀었다.

그래서 황제 폐하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아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현하려 하셨다.

"오늘부터 제국의 모든 행정업무는 황태자에게 일임하니, 모든 귀족들은 황태자를 따르라."

"황명을 받들어 저의 모든 능력을 제국의 번영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아바마마."

1황자가 죽고 7년이 지난 후에야 들려주는 아바마마란 말에 황제 폐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카일의 눈에도 회환이 담겼다.

지켜보는 내 마음이 저릿했다. 카일이 지녔던 마음의 빚도 하나하나 벗어나겠지. 다행이야.

황제 폐하는 행정부를 통솔할 수 있는 인장 반지를 새로이 만들어 내어주었다. 군권은 아직 폐하의 손에 있지만, 카일은 이제 서서히 황제가 되기 위한 기틀을 다져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염원이었던 1황자, 아주버님의 죽음의 배후도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황후 폐하의 얼굴을 보았다. 조금은 파랗게 질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표정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그리고 날 노려보는 그녀의 눈빛이 서슬 퍼렜다. 쉽게 무너지지 않겠다는 의지. 조금 불길했다.

"태양의 광명이 온 제국에 내려지길."

"황제 폐하 만세, 황태자 전하 만세."

볼라드 공작의 선창에 홀에 모인 모든 대신들과 귀족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카일의 25살 생일에, 아바마마는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과 화해의 손길을 내려주셨다.

나는 이런 두 부자와, 내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후작님은 후작부인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보고 계셨다.

아니, 나를 보고 계셨다.

후작님도 폐하처럼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 있던 것은 아닐까? 나를 도와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지도 몰라.

빠른 시일 내로 후작님과 대화를 해보자.

"나, 카일룸 헬리오스 데피니토르는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제국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대륙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부유한 국가를 이룰 것이다."

카일의 담담하고도 힘 있는 선언은 연회장을 빈틈없이 매워나갔다. 기대에 찬 얼굴들과 두려움과 불신의 얼굴이 섞여 있었다.

새삼 카일의 위치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반려인 나의 위치도...

"나의 단 하나뿐인 반려인 아르세이아가 나의 생일을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는 군. 어디에서도 구경하지 못할 장관이니 다 함께 즐기길 바라."

카일은 새삼 매혹적인 미소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옆모습이었는데도 몇몇 영애들이 앓는 소리가 들려서 웃음이 났다.

나는 산뜻한 마음으로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손짓을 하자 시종 하나가 작은 마거리트 화분을 가져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화분을 내 손에 올려놓았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였다.

"오늘 같이 축복받아야 하는 날, 연회장이 초라해 실망했나요?"

내 질문에 다들 대답은 못하고 귀족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아, 권력의 힘이란. 황태자비인 나에게 누구도 내게 시비를 못 걸었... 아니, 저 여자가!

"황태자비 전하가 여는 첫 연회라 기대를 하긴 했습니다."

콘스탄트 영애가 피식 비웃으며 들릴 듯 말 듯 답했다. 그러자 그녀의 추종자들로 보이는 영애들이 따라서 웃었다. 하필, 근처에 있고 그러냐?

내 옆에 서 있는 카일에게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카일 제발 참아요. 무시해.

"그래요. 그 기대에 이제 부흥하도록 하죠."

나는 최대한 온화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미소 지어줬다. 그리고, 온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루카스가 카일로부터 내 힘을 전해 들은 뒤 전격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얼마 안 남은 기간 동안 연회의 장식을 다 바꿔버리느라 어찌나 고생했던지...

게다가 연습도 여러 번 해야 했다. 한 번도 이렇게 넓은 장소에서 동시에 해 본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밤마다 카일에게 시달리느라 피곤했는데... 연습하느라 내가 고생이 많았지. 그 결과가 이제 결실을 맺을 차례였다.

"어머, 무슨 향기죠?"

"저기, 저 화분 좀 봐요."

"꽃이 피어나고 있어! 신기해라!!"

연회장에 장식되었던 화분들의 꽃이 일제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누구도 꽃망울이 터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웅크리고 있던 작은 꽃봉오리들이 부풀어 오르더니 한 겹, 한 겹 펼쳐지는 모습은 신비롭고 성스러움 그 자체였다.

게다가 하나같이 진한 향을 가진 꽃들이었다. 달콤하고 진한 마거리트, 체리 향이 나는 체리세이지, 바다 건너 동방에서 구해 왔다던 고혹적인 국화.

여러 종류의 향기들이 꽃의 개화와 함께 피어올랐다. 꽃이 피어나는 모습만큼이나 향기에 매료된 사람들의 표정.

뿌듯하네. 내 힘으로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 수 있었어.

카일도 흐뭇하게 웃으며 내 허리를 살짝 감싸 안았다.

"아바마마, 대지와 자연의 축복이 담긴 꽃이에요. 아바마마의 건강을 기원했답니다. 제 사랑하는 남편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감사해요."

이제는 활짝 피어 새하얗게 덮인 마거리트 화분을 드리자 폐하는 너무나도 벅차오르는 얼굴을 하셨다. 어쩜 저리도 자신의 아들처럼 귀여우실까?

"내 아들뿐 아니라, 내 유일한 며느리도 기적을 가지고 있었구나."

아바마마가 좋아해 주시니 저도 기뻐요.

"내 며느리는 너 하나 밖에 없단다."

폐하의 단언에 영애들의 얼굴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특히 콘스탄트 공녀. 아오, 속 시원해.

"아직, 끝난 게 아니니 좀 더 지켜봐 주세요."

그럼. 이게 끝이면 서운하지. 카일이 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고. 그러니 쇼는 계속되어야 했다.

이봐요. 귀족님들. 이거 어딜 가든 돈 주고도 못 볼 귀한 장면이니 집중해서 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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