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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53화 (53/126)

54화. 카일의 탄생연 - 연회의 시작

2018.05.29.

드디어 카일의 생일이 되었다.

"카일. 생일 축하해요!"

카일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내 눈앞에 앉아 있었다.

"계속 그럴 거예요?"

"생일날 새벽에 껴안지도 못하게 하고. 뽀뽀도 못하게 하고."

"당신이 계속 몸에 흔적을 남기려 드니깐 그렇죠. 흔적은 매번 지워주지도 않고! 홀터넥이긴 하지만 쇄골이랑 다 드러내는데 사람들 앞에서 민망하게 어떡하라고요! 게다가 뽀뽀하는 척하고 이상한 짓 한 게 하루 이틀이어야지!"

얼마나 열심히 관리받았는데!!!

카일은 원치 않았던 사흘간의 밤샘 금욕에 뿔이 났다. 생일선물로 차라리 탄생연 하루 동안 둘이서 방에만 갇혀있자면서 온갖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려댔다.

"그만 화 풀어요. 대신 나는 내일 영식들의 데뷔탕트에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연회 끝나고 내일 아침까지 으음, 마음껏 하게 해줄게요."

"오늘이 생일인데."

"으!! 알았어요 점심때까지! 연회도 짧게 끝내고 와요!"

"헤에. 좋아 그러자!"

하여간에 누가 변태 황태자 아니랄까 봐!!! 그래도, 뭐, 저런 모습이 참 좋았다. 맹목적으로 나만 바라보고 나만 탐해주는 모습이.

"단, 당신이 오늘 하는 것 봐서요."

오늘은 대귀족회의가 끝나고 열리는 첫 공식 연회였다. 여러 귀족세력들이 이번 회의를 두고 여러 가지 말이 나올 것이었다.

특히, 후궁 간택 문제.

황후파는 애초에 후궁 문제를 꺼냈을 때부터 데뷔탕트를 후궁 간택연으로 열 생각이었다. 황후는 미리 염두에 두고 데뷔탕트를 준비해 놓았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져주는 척 이것을 수락했었다.

카일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오늘도 많은 어린 영애들이 아름답게 치장을 하고 오겠지.

"모레 데뷔탕트가 또 간택연으로 바뀌어서, 데뷔를 앞둔 영애들까지 부모들과 함께 카일의 눈도장 받고 싶어서 줄줄이 올 거잖아요.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고 있을게요."

"그건, 걱정 마. 아니, 볼라드 공작부인에게 내 과거를 물어봐. 날 아주 신뢰하게 될 거야."

흐음, 과거사라. 좋아 꼭 물어봐야지.

"자, 그럼 사랑하는 남편님? 이제 저는 아리따운 여인으로 변신할 준비를 해야 하니, 이만 볼일 보러 가시죠?"

"기대하고 있을게. 나중에 봐."

훗. 여자의 변신, 기대해 주세요.

으윽, 변신에는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해. 어제부터 이미 많이 굶었는데. 배고파서 나 춤추다 쓰러지면 다 너희들 탓이야!

"비 전하, 당분이 떨어지면 곤란하니까, 사탕만 몇 개 드세요."

"내가, 꼭, 사교계의 꽃이 되어, 이런, 굶어야 예뻐지는 유행 따위 다 없애버릴 거야!"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러려면, 일단 오늘의 꽃답게 더 타이트하게 가죠!"

"흐읍!"

잘못된 관행들 없애고 싶어. 흐아앙.

아침부터 욕조에 담가서 숨 죽은 피클로 만들더니, 이젠 내 허리가 없어지겠어. 크허헉! 살려줘!!

연회 끝나면 두고 봐!

"에이린, 오늘 요리사들, 야근..."

"걱정 마세요. 다들 비 전하가 걱정돼서 퇴근 안 할 거래요."

흑, 고마워요. 요리사들. 금 국자라도 내려야겠어.

"자, 이제 머리를 예쁘게 만들어 봅시다."

이것만도 한 시간이던가. 그냥 생머리로 갑시다. 청순, 발랄, 어때요?

나의 바람은 가뿐히 무시되었고, 숯으로 달궈진 각종 미용도구들로 내 머리는 지지고 볶였다. 무사한 거니 내 머리털들?

"입술은, 황태자께서 좋아하는 이 붉은 와인색 연지는, 흐음. 너무 튈 거예요. 그렇죠?"

화악. 내 첫날밤에 유리아가 발라준 그 연지는... 바르는 족족, 카일에 의해서 지워지곤 했다.

"절대 안 돼! 좀 더 연한 것으로 하자."

"그럼 이 살구 연지는 어때요?"

"어, 좋아, 안 튀네. 딱이야."

입술은 색을 죽였지만 나머지는 화려하게 치장했다. 금가루도 뿌리고, 눈썹도 올리고, 머리는 구불불하게 말린 것을 화려한 무늬를 그려가며 올려놓았다.

머리 장식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올림머리만으로도 왕관을 쓴 것 같으니, 흐음.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데?

카일에게 줄 생일 선물을 더 돋보이게 해야 하니까 장식은 최소화했다.

그래도 카일이 좋아하겠지? 나 예쁜 모습 보면 입이 안 다물어질 거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예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설레는 일이었어.

"비 전하,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내가 변신하는 거 절대 안 보여줄 거라고 했더니 앞에서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에구, 착해라.

자, 이제 나가요. 내 남편님.

짠! 시녀들이 문을 천천히 열어주기 시작했다.

카일은 얼마나 멋지게 변해 있을까? 두근두근 기대돼.

문이 반쯤 열린 틈 사이로 카일의 모습이 점점 드러났다. 헉. 내 심장!

카일은 내가 준비한 옷에 주름 하나 만들지 않고 반듯하게 서있었다. 그의 넓고 단단한 어깨는 언제나처럼 반듯해서 기대고 싶었다. 어쩜, 저렇게 옷발이 잘 받니?

또, 늘 자유롭게 휘날리던 청남색 머리를 포마드로 예쁘게 넘겨 매끄러운 이마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 예뻐. 만지고 싶다.

산뜻하게 미소지는 내 남편의 모습에 새삼 반할 것 같은, 이 기분.

아, 침 나오겠어. 뭐야, 난 하루 종일이고, 저 남자는 잠깐 꾸민 건데, 저렇게나 빛나다니.

역시, 신은 차별하고 있는 게 맞아. 어쩜저리 잘생겼지? 하아, 다행이다. 카일은 내 꺼니까.

"세이, 하아, 너,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네?"

나 뭐 부족해? 별로야? 안 이뻐?

"네 예쁜 모습을 쳐다보는 남자들 눈을 내가 다 뽑아버릴 것 같으니까, 그냥 가지 말자고 우리."

"풉. 카일. 나야말로 당신한테 눈독 들이는 여자들을 마구 할퀴고 싶을 지경이거든요? 쓸데없이 잘생겨 가지고는!!"

어? 우리 주변에 있던 시녀들과 시종들의 얼굴이 썩어가는 것 같은 착각은 뭐죠?

하하, 여러분 미안해요. 우리가 이런 유치한 한 쌍의 바... 아니, 원앙인 줄 몰랐네요.

"세이, 잠시만."

이제 출발하려고 하는데 그가 불러 세웠다. 그러더니 시종에게 까딱 손짓을 보냈다.

"뭐예요?"

당신 생일인데 왜 내가 선물 받아요? 시종은 금장이 박힌 상자를 벨벳 쿠션에 받쳐 들고 왔다.

"머리가 허전하잖아. 사실 네 생일에 주려고 준비했던 거지만."

내 생일? 난 5월이 생일이었고, 아르세이아는 11월이었다. 어디에 맞추려고 했다는 거지?

"네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맞춰뒀었어."

장미 덩쿨 모양의 백금으로 만든 티아라. 루비와 토파즈로 만든 작은 장미 장식들이 곳곳에 달려있는 티아라는 봄의 전령 같았다.

"카일. 예뻐요. 너무."

"주문할 때부터 네게 딱일 것 같았어. 더 일찍 씌워주고 싶었는데. 미안."

"아뇨. 지금도 충분해요."

"내가 씌워줄게. 내게 단 하나뿐인 반려를 위한 거니까."

나는 그의 앞에서 살짝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그가 내 머리 위에 티아라를 올려주는 순간. 나는 진짜 그의 황태자비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국의 여인은, 결혼식 때 남편에게 티아라를 선물 받았다. 황족이 아닌 여자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티아라가 웨딩 티아라였다. 그것을 나는, 이제서야 받았다.

아르세이아가 국혼 때 머리에 썼던 황태자비의 보관과는 다른, 그 어떤 왕관보다 소중한 나만의 티아라.

"나, 울리려고 준 거죠?"

"울면 안 돼. 웃게 해주려고 만든 건데."

"오늘 선물은 내가 준비하는 건데, 내가 더 큰 선물 받았잖아요."

"네 선물 기대하고 있어 안 그래도."

너무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어서 더 가슴이 시큰 거렸다. 이씨, 선물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지?

시녀들이 달라붙어 티아라를 단단하게 고정시켜주는 동안 살짝 울음을 삼켰다.

진짜, 너무해. 이렇게 감동 주는 게 어딨어? 반칙이잖아. 나중에 나 받은 만큼 다 돌려주려면 평생이 걸려도 모자랄 것 같아.

"자, 이제 가실까요? 단 하나뿐인 나의 비?"

"네, 나만의 황태자 전하."

시녀들도 오늘 연회를 즐기라고 당부해 뒀었다. 특히나 내 측근으로 고생하는 에이린과 유리아에게는 내 보석함을 열어 예쁜 것들을 잔뜩 선물해 줬다.

유리아는 제 오빠와 같이 참석하는 듯했다. 그리고 에이린은!!

"어? 펠! 무슨 일로 온 거야?"

"누님,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오늘은 제가 유베르 영애에게 파트너를 청해서요. 제가 모시고 가도 되지요?"

"어? 응. 그래. 그렇게 해도 돼."

헐, 얘들 언제부터 이런 사이였어? 우와, 그나저나, 후작부인이 우리 에이린 괴롭히는 건 아니겠지?

"프리케가 홀에서 언제나 두 분 전하를 지켜보며 호위를 게을리하지 않을 테니 안전은 걱정 마십시오."

"홀에 내가 함께 있는 한 그놈은 할 일이 없을 거야. 테일러도 신경 쓸 거고."

"물론이지요. 저도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남녀가 항상 같이 있지는 않으니 잠시의 소홀함도 없게 하겠습니다."

카일은 조금 못마땅한 듯했으나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했다. 프리케가 그렇게나 싫은가?

그냥 내게는 친구일 뿐인데.

"그럼 연회를 즐기십시오. 저희 먼저 가보겠습니다."

알리페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걸어가는 에이린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쟤 나한테 테일러경이 좋다 그러지 않았나?

그거 연막이었어? 어? 어쩐지 배신감이 팍팍 들었다. 아니야, 나의 제일 소중한 친구와 남동생이니까, 축복해줘야지.

어쩐지 오늘 에이린도 치장에 힘을 쓴다 싶더니, 펠의 파트너라서 였구나.

후작부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지만. 흠. 에이린네 가문은 내가 지켜줘야겠다.

"카일, 유베르 자작가요."

"걱정 마, 그대의 소중한 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내 보호를 받고 있으니까."

응? 어째서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다 아는 거죠? 진짜 독심술이라도 하는 건가? 앞으로 생각도 조심해야 하는 거야? 우와, 무서워.

"응? 왜 그래 세이?"

갑자기 카일이 당황한 듯 날 보며 쩔쩔맸다. 왜? 내 표정이 그렇게나 이상했나?

"내가 무슨 부탁하려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야, 세이의 얼굴에는 세이의 생각이 다 드러나거든."

"어, 오늘 루카스님이 나한테 부채로 표정 가리지 말랬는데, 그럼 큰일이잖아요."

루카스는 내가 표정을 숨기고 연기하는데 자질이 있다며 사교계를 휘어잡는데 더 효과적일 거라며 권했었다.

내가 돌발 상황에서도 동요를 안 하는 편이라나? 특히 황후랑 상대할 때 내 모습을 전해 듣고는 마구 칭찬을 했더랬지. 그래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건 걱정 마. 내가 네 속마음을 눈치채는 건 널 너무 사랑해서 네 눈썹 하나, 눈 깜박임 하나에 네가 어떤 말을 했고, 어떤 반응을 했는지 기억하기 때문이거든."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만큼 날 항상 바라 봐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소리구나. 그래 사랑하면 그 사람의 작은 한숨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거니까.

예전에 내 동생을 사랑한다면서 내가 바뀐 걸 모른다고 속으로 욕했었는데. 내가 잘못했네.

내가 자신이 사랑하던 진짜 연인임을 알아보고 그렇게나 열심히 내게 애정표현 한 것이었는데.

큰일이야. 이 남자가 너무 좋아서. 미치겠다.

"세이, 지금 나 너무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화악. 이런 것까지 읽어내고 이러냐!

"틀렸는데요?"

"어? 그럴 리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미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씨익, 웃어주는 그의 미소가 오늘따라 더 빛이 났다. 안 그래도 멋들어지게 차려입어놓고는 저렇게 웃음 어쩌자는 거야. 날 죽일 셈인가?

엑! 왜 갑자기 유혹적인 표정 짓고 그래요? 저 표정은, 엉큼한 꿍꿍이가 있을 때인데?

"그럼 우리 뽀뽀 한 번만 하고 가자."

"미쳤어! 화장 번져요. 연회 끝나기 전까진 꿈도 꾸지 마요."

연회가 열리는 홀로 이동하는 마차에는 우리 부부와 황제 폐하 부부가 함께였다.

연회의 주인공은 늘 마지막에 입장한다. 카일이 주인공이기에 우리가 마지막에 입장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황제 폐하를 먼저 입장시킬 순 없잖아?

그래서 동시 입장하기로 의전 순서를 정했었다.

"아가, 오늘 두 사람이 너무 잘 어울리는구나."

"그러게요. 그런데 황태자비는 안목을 더 키워야겠구나. 주인공들이 이리 수수해서야."

우리를 두고 황제 내외의 평은 극과 극이었다. 쳇, 두고 보라지.

사실, 겉보기에는 수수하긴 했다. 카일과 맞춘 브로치를 돋보이게 하려고 최대한 장식은 자제했으니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황후가 건드리니까 기분이 나빴다. 우리 카일에게 어릴 때 상처 준 것도 모자라 지난번에는 내게 후궁을 권하질 않나.

"황태자. 오늘 화려한 나비들을 잘 관찰해두게. 모레 데뷔탕트에 오는 나비도 있으니까."

하! 이 아줌마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어머 폐하, 오늘 가장 화려하고 예쁜 나비가 카일에게 날아가 앉을 예정인데 어찌 아셨어요?"

흥이다. 알아듣지도 못했겠지만.

일부러 해맑게 웃으며 황후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지요?

호호호호. 그 나비가 나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아가, 네가 카일에게 줄 선물 준비는 잘 되었느냐?"

"물론이에요. 아바마마, 꼭 끝까지 보고 가셔야 해요."

"오냐, 내 예쁜 며늘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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