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비밀스러운 우리의 시작. (2)
2018.05.28.
뒤돌아 볼 용기가 없는 나는 카일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묵묵히 말을 이었다.
"데피니토르의 황태자는 기적을 행하는 존재인데, 그 옆에 나 같은 불길한 존재가 있어도 되는 건지. 혹시라도 누군가가 날 알아보면 당신의 평판까지 떨어질 거예요. 게다가 나의 불행함이, 저주가 당신에게..."
갑자기 뒤에서 와락 나를 끌어안는 카일 때문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몸이 잘게 떨려왔다.
당신이 어째서 떠는 거예요?
당신이 외면할까 봐 무서운 쪽은 나인데. 왜 당신이 떨어요?
"아르세이아, 너는 괴물같은 게 아냐. 마녀도 아니고!! 내게 너는 기적인걸."
카일, 고마워요. 당신에게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에요.
"카일룸."
"그건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 일 거야. 네가 가진 능력으로, 남들이 모르는 약초를 사용해 백성들을 전염병에서 구했잖아. 구황식물들도 널리 알렸고. 또 이번 습격에서 기사들을 구한 것은 결국 너였잖아."
역시 알고 있었구나. 전부 다.
그런데도 왜 늘 똑같이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해 준 걸까?
내가 이상하지 않은 거야? 의심스럽지 않은 거야?
"카일, 왜, 왜, 말 안 했어요? 알고 있었으면서?"
"네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비밀은 지켜주고 싶었으니까. 네가 더 날 믿고, 사랑해주면 말해줄 거라고 생각해서 기다렸을 뿐이야."
아, 나의 소중한 카일. 어쩜, 어쩌면 이렇게 날 한결같이 사랑해 주는 걸까? 나의 모든 것을, 전부 다 아껴주는구나.
"그리고. 사실은 음. 더 일찍 알았어. 세이에게 그런 힘이 있었다는 것을."
언제지? 그가 눈치챌만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나? 아, 봄인가 보다.
"맞춰봐."
"봄에 장미정원에서!! 내가 장미들을 더 오래 보고 싶어서 힘을 썼었는데 그때에요? 음, 그리고 티파티 때 디저트용 생화에도 썼었는데!!"
"아아. 그런 일도 있었지. 정령들 때문인지 생명력을 남들보다 더 민감하게 느끼긴 해. 하지만 그때는 아니야."
그때가 아니라니! 그리고 생명력을 느낀다고??
갑자기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데뷔탕트 때, 내 머리에 꽂은 장미에 힘을 썼었다. 그때가 그가 있는 곳에서 처음으로 힘을 썼을 때였다.
그렇다면 카일은 내가 특별한 힘을 가진 것뿐 아니라 아르세이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도 있었다.
그는 분명 내 머리의 꽃에 관심을 가졌었고, 그때는 아르세이아가 등장하기 전이었으니.
내가 아르세이아가 아닌 것을 알 수도 있다. 그 가정에 내 몸이 다시 굳어졌다.
황족 모독에 반역죄였다. 진짜 황태자비의 생사를 모르는 이상 나는 그녀를 시해한 범인이 될지도 몰랐고, 그 죄를 피한다 해도 가족들과 함께 황태자를 속인 중 죄인이었다.
어쩌면 알리페르까지 얽힐 것이었다. 이제야 친해진 동생인데, 결국 내 저주받은 능력 때문에 그마저.
갑자기 그가 빠른 속도로 말을 해왔다.
"아주 오래 전이야. 5년도 더 된 일이지. 나는 내가 세이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네게 그런 힘이 있는 걸 알았어. 하지만 아쉽게도 세이는 그 일을 기억 못할 거야."
아르세이아에게 그런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카일이 비스 영지에 있던 나를 우연히 본 것일까? 아르세이아와 꼭 닮은 외모였으니까.
루카스와 카일이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눈앞에 두고도 헤매었다던 말.
혹시, 당신이 찾던 사람이 아르세이아가 아니었던 건가요?
그렇다면 어쩌면, 어쩌면 카일이 애초에 사랑했다는 사람은...
"나는 동물들과, 식물들과 어울려 지내던 요정 같던 네 아름다운 모습을 이미 봤었고, 그때부터 네게 푹 빠져있었어. 아직 네가 어려서 청혼할 수 없어서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야."
"카일."
"내 반려는 내가 고르고 싶었고 내가 반려로 삼고 싶었던 것은 평생을 다해도 너 하나야. 간택연은 널 찾기 위한 구실이었고."
카일이 처음부터 사랑했던 사람이 나였다는 사실을 확인받자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놨던 죄책감이 스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처음부터 동생의 남자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사랑하고 찾던 그만의 연인은 나였다.
그가 아르세이아에게 주려던 사랑을 가로챈 것은 아닐까, 그를 속이면서 받아온 사랑에 대한 불안감과 죄책감이 흐려지고 깨끗이 씻겨나갔다.
아르세이아에게 남아 있던 부채감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슬퍼서 우는 아픈 눈물이 아니었다. 행복해서도 울 수 있구나...
하지만 카일은 당황했다. 내 눈물이 나를 감싸고 있던 그의 손에 뚝뚝 떨어지자 급히 내 몸을 돌려세웠다.
"왜? 왜 그래 세이?"
"행복해서요. 당신에게 사랑받는 게 나라서, 당신이 날 사랑해준 게 너무 좋아서, 당신 곁에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어서 너무너무 행복해요. 나는 지금껏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당신이 이렇게나 넘치도록 사랑해주고 찾아준 게 너무 고마워서요. 흐윽, 그래서 행복한데, 그런데 계속 눈물이 나요."
"바보같이 왜 울어. 예쁜 얼굴 못생겨지게."
이씨, 마지막 말은 뭐야. 그래도 울 거야. 너무 좋아서 울 거라고!
정말로 그가 날 이전부터 알았다면, 우리가 바뀐 것도 알고 있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는 어째서 내 거짓말들을 모른척해줬던 걸까?
어느새 보름달이 태양궁의 높은 탑 위로 쏙 올라왔다. 밝은 빛이 내 마음속의 어둠을 거두어갔다.
그리고 나의 밝은 달은 나를 사랑의 빛으로 감싸 안았다. 그 빛은 나를 더 이상 어둠으로 물들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런데 진심이에요? 못생겨졌다는 거?"
"에이, 설마. 네가 거지꼴을 하고 미친 여자처럼 웃으면서 춤추고 다녀도 내 눈에는 너만 예뻐."
"그게 뭐야. 치이..."
나를 웃게 해주고, 지켜주고, 한없이 사랑해주는 사람.
"나 처음 봤을 때도 예뻤어요?"
"응, 네 뒤로 햇살이 후광처럼 비추는데, 네가 너무 반짝 거려서 눈이 부셨어."
카일은 내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지는 않았다. 기억도 못하는 일을 끄집어 냈다가 내가 아플까 봐 싫다고 했다.
아마도 카일은 내가 힘든 기억들을 지우며 살았다는 것도 아는 듯 했다. 나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어요? 다 안다고."
"너에 대해서 안다고 했으면 넌 겁먹고 도망갈 것 같았어. 나는 널 기억하고 계속 사랑했지만 넌 날 잊고 무서워했잖아. 게다가 의사가 지워진 기억을 급하게 살리는 것이 네게 정신적으로 위험할 수 있대서...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고 했거든. 다른 기억들 때문에 네가 못 견딜 수도 있댔어. 그래서 네가 온전히 날 믿고 사랑해 주길 기다렸어. 억지로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대신 기다리는 쪽을 선택한 거야."
카일은 내게 그 시절을 억지로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과거보다 지금의 우리가 더 중요하다는 그의 뜻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사실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의 비밀스러운 사랑의 시작은 잠시 카일의 마음속에 남겨 두기로 마음먹었다.
카일과 살면서 행복해서인지 조금씩 잊었던 기억의 일부 조각들이 되살아나고 있으니까, 카일과의 시작도 기억이 날 거야.
그땐 내가 먼저 그에게 아는 척해야지. 그때 꼭 우리의 추억을 나누자.
"사랑해줘서, 날 찾아줘서 고마워요 카일."
"더 일찍 찾으러 가지 못해서 미안해."
"으으응. 이렇게 이제라도 함께 할 수 있으니 괜찮아요. 진짜, 진짜 평생 우리 함께 해요. 나 당신을 위해서 당신에게 어울리는 황태자비가 될게요."
"이미 충분하답니다. 나의 비."
그가 내 이마와 눈, 코, 볼 곳곳에 잔 키스를 날렸다. 간지러움에 얼굴을 찡그렸으나 그는 웃으며 멈추지 않았다.
"세이, 사랑해. 너는 나의 유일한 빛이야."
"저도요, 카일. 당신이 나의 유일한 사랑이에요."
그의 눈빛이, 그의 마음이,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내려앉았다. 그의 입술에는 나에 대한 애정이 흘러넘쳐 날 설레게 했다.
첫 키스 때보다도 짜릿하고, 뜨겁고, 황홀한 숨결.
더 이상 남아 있는 죄책감도 그에게 숨겨야 할 비밀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입술은 멀어질 틈이 없었다.
아득해지는 숨결만큼, 몽롱해지고 뜨거워지는 몸은 카일을 향한 내 마음을 확인해줬다.
주변에는 아름다운 풀벌레들만 남아 고운 선율을 가을밤 하늘에 널리 퍼뜨려 주었다.
내 마음을 닮은 듯한 행복한 노래.
"세이, 나랑 잠깐 어디 가지 않을래?"
신뢰와 사랑이 듬뿍 담긴 키스를 끝내고 그 여운을 즐기는 사이 카일이 내게 권했다.
"어디요?"
"정령왕들. 보러 가자."
응? 아까 내가 한 고백들을 뭘로 들은 거야? 내 말을 허투루 들은 거야?
"나, 정령 못 보는데요."
"알아. 그런데 혹시나 해서."
일단 카일이 가자고 하니까, 따라가 보기로 했다. 설마 카일이 내게 해가 되는 짓을 하진 않을 거잖아?
"어? 여기는?"
"유리온실이야."
엥? 도대체 여기서 정령왕을 어디서 찾으라는 거죠?
나는 카일의 손에 이끌려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온실은 그렇게 크진 않았다. 다양한 봄꽃과 여름꽃들이 잘 자라고 있었다.
"예쁘다. 칫, 카일 너무한 거 아녜요? 이제야 데리고 오다니."
"미안, 원래 여기 너한테 청혼하려고 만들었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어머나, 진짜? 하긴, 나는 물론 아르세이아도 청혼서랑 꽃다발만 받았다 했었던 것 같다.
"나중에, 꼭 제대로 해줄게."
"응. 기다릴게요..."
꼭 해줘요. 알았죠?
우리는 온실의 더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 여긴 이제 끝인 것 같은데, 저기 나무 두 그루 사이로 가는 건가? 온실의 끝인 것 같은데? 응?
"어? 어? 어!"
결곈가?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넓은 곳이 갑자기 나오는데?
누구나 본적 있을 법한 넓은 들판과, 그 위의 작은 언덕.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검푸른 밤하늘.
그 하늘을 수놓는 반짝이는 별들. 아, 별이 아닌가? 보석인지, 유리알인지 모를 것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언덕 위에는 커다란 나무가 오색의 바위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반짝반짝 예쁘게 빛나는 색색의 빛무리들이 잎 주변에서 맴돌고 있었다.
절로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 그리우면서도 낯선 공간. 그리고 아련한 평온.
"헐, 내가 모르는 나무가 있다니!"
"정령수야. 정령왕들이 정령의 여왕을 위해 심은 나무."
아, 그런 게 있구나. 그래서 내가 무슨 나무인지 못 알아 봤구나. 어느 식물이든 알아본다 해놓고 자존심 무너질 뻔했어.
"이런 걸 왜 카일이 가지고 있어요?"
"정령왕들이 실수를 해서 자신들의 딸을 잃었대. 정령의 여왕이 화가 나서 그들과 인연을 끊었다나?"
무슨 큰 잘못을 했길래? 흐음, 누군지 그 정령의 여왕, 아주 대담하구나.
"그래서 내가 그녀를 찾아주는 조건으로 정령왕들과 계약을 맺은 거야. 내가 그녀와 만난 흔적이 있다고 날 찾아왔거든."
아, 그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계약 맺어 준 거였구나.
"나는, 네가 정령의 여왕이지 않을까 싶었어."
"하지만, 나는 정령을 못 보는걸요."
"여긴, 정령계의 일부야. 이곳에 네가 들어올 수 있었다는 건, 너도 정령왕이나 여왕과 친화력이 있다는 뜻이야."
그런가?
"아직 아무것도 안 보여? 정령왕들은 잔뜩 기대하고 몰려왔는데."
"네? 아직... 아무것도."
"정령의 여왕은 영혼의 색이 황금빛인데, 너는... 네 빛은 잘 모르겠대. 정령은 영혼의 색으로 사람을 구별하거든."
아, 그렇구나. 나는, 알아보지도 못할 빛인 거야? 시무룩. 황금색도 아닌데, 정령의 여왕일 리가 없잖아.
"혹시, 정령수에 네 축복을 보내줄 수 있어? 여왕을 잃은 나무는 정령석으로 겨우 버티고 있다는데."
그러고 보니 나무에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살려주고 싶어. 얘도 식물이니까 할 수 있겠지?
"정령의 여왕만이 이 나무의 꽃을 피울 수 있나 봐."
아, 부담스러워졌어. 나 할 수 있을까? 에잇 밑져야 본전이지.
"해볼게요."
나는 집중했다. 나의 간절한 바람을 담아서 이 아름다운 나무에 꽃이 피길. 아, 모인다. 따스하고 싱싱한 대지의 생명력.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
내 뺨과 다리를 스쳐 지나간 따사로운 기운은 나무를 향해 몰려갔다. 그리고 곧 대지가 빌려준 생명력들은 허무하게도 흩어져 버렸다.
히잉. 역시 난 못 하는구나.
"실망하지 마. 괜찮아 세이."
"정령의 여왕은 아닌가 보네요."
"그렇다고 네 힘이 불길한 것은 아니라니까 속상해하지 마."
"정령들이 그래요?"
"응. 순수한 자연력이 맞대. 여왕의 힘과 비슷하긴 한데, 뭔가 부족하지만 아주 순수하대."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됐다.
"자, 이제 더 늦기 전에 우리들의 집으로 돌아갈까? 세이가 오늘 고백한 기념으로 제대로 즐겨야지."
"뭐예요? 아직 그런 짓 하긴 이르거든요?"
하여간에 밝히기는!
"응? 난 작게 우리끼리 샴페인으로 파티 하자는 건데? 흐응, 나의 비, 무슨 생각한 거야? 응큼해졌어."
우이씨. 망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내가 불길한 존재가 아니라니까. 정말, 다행이다.
정령의 여왕이 아니라도 괜찮아. 카일이 곁에 있으니까.
이젠 영원히 함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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