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비밀스러운 우리의 시작. (1)
2018.05.26.
카일과 황제 폐하와 어색하지만 알찬 점심을 끝내고 나는 황실 서고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제는 내 문제를 고민할 때가 되었다.
루카스는 내가 낸 보고서를 보더니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대신 더 구체적인 계획서를 내라고 해서 서고로 왔다.
하아, 내가 황궁에 처음 왔을 때 공부할 수 있다고 좋아했던가?
공부는 처음 배울 때나 즐겁지, 배움이 깊어질수록 어려워! 그나마 다행인 게, 난 학자가 아니라 황태자 비라는 것이다.
적당히만 배우자.
그런데 잘생긴 내 호위들은 황궁의 시녀들에게 큰 기쁨이 된 듯했다.
아, 시끄러.
내가 펠이나 프리케랑 다니면 시녀들이고 하녀들이고 꺅꺅 거리며 몰려왔다.
이것들이 할 일도 없어? 왜들 그렇게 내게 필요한 거 없냐고 묻냐고.
집중할 수가 없잖아!!
"참, 오늘도 테일러경이랑 대련해?"
"네. 같이 훈련하자고 하네요."
"언제 하기로 했어?"
"오늘 귀족회의가 끝나고 나서요. 그도 그때야 황태자의 호위 업무가 끝난답니다."
"그래. 기왕이면 프리케가 이겨. 그리고 나 이제 집중하고 싶으니까 밖에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줘. 부탁할게."
이젠 아무도 안 오겠지. 프리케를 보고 싶음 다들 밖에서 봐.
나는 서고에서 찾고 싶은 자료들을 모았다.
우선 평민 구역에서 놀고 있는 황실 소유의 땅에 대한 것이었다. 어쨌든 주인이 황실인데 어찌하여 그렇게 방치된 것인지 궁금했다.
"흐음. 그랬구나."
땅이 애초에 황무지라 돌이 많았다.
평민들은 돌을 골라내기 힘들어 부분적으로만 땅을 이용했고, 자신들의 부식거리를 키우는 용도로만 썼다.
황실 입장에서는 애초에 세금을 받을 가치가 없는 땅이라 제국민들 누구나 사용해도 좋다고 공표했단다.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다.
"땅도 휴식기가 필요한데 당장 먹고살기 힘든 평민들은 계속 땅의 영양을 빼가기만 하고 다시 채우질 못했구나. 자신들의 땅이고 세금을 내야 했으면 땅을 더 소중히 다뤘을 텐데..."
이쪽은 쉽게 해결 되겠네. 일단 근거라는 게 필요하니까 참고 문헌을 제시해야지. 그럼 되겠지?
그냥 내 능력을 밝히면 이런 귀찮은 일은 안 해도 되는데...
문득 지난번에 그가 식물도감에서 내가 필요했던 부분을 찾아 도와줬던 기억이났다.
왜 내가 그런 것을 아는지 묻지 않았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날 도왔었는데. 혹시 나에 대해서 알고 한 행동일까?
으음. 조금 닭살이 올라오는 것 같은 기분은 뭐지?
아니야, 알았다면 벌써 물어봤을 텐데... 내가 먼저 말해주길 기다리는 걸까?
하아아아아아.
차라리 내가 정령의 여왕이라면 좋겠다.
정령의 여왕은 정령왕들 만큼 경외를 받는 존재니까, 카일 옆에 당당히 설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나는 정령의 힘을 빌리기는커녕 정령을 보지도 못했다.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미련이 남았다.
특이 체질일 수도 있지... 않지. 하아. 정령의 여왕이 정령과 친화력이 빵점이라는 게 말이 돼?
충동적으로 정령의 여왕과 관련된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 서도 된다는 근거만이라도 찾아야 해.
어여쁜 소녀가 정령들의 왕과 함께 아름다운 자연을 가꾼 이야기. 그래서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고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이야기.
"정령의 여왕이 가진 힘은 자연을 보다 풍요롭게 하고 자연을 조화롭게 하는 일이었다라."
내 입꼬리가 절로 쳐졌다. 나랑은 다르잖아. 쳇. 너무해.
나는 그저 식물, 동물과 교감하고 생명력을 조금 보태주는 것뿐인 걸... 이런 힘으로 사람들을 위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까?
자존감이 확 죽어버렸다.
에이씨!! 괜히 봤어. 기분만 잡쳤잖아.
속상한 마음으로 식물도감을 펼쳤다. 처음에는 집중이 잘 안됐는데 속독하던 습관이 있어서인지 어느 순간 읽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훗, 역시 습관이란 무서운 거야.
"응? 근데 이거 최신판이 아닌가? 어째서 틀린 정보가 많은 거야?"
비슷하게 생겼지만 독초인 것을 약초라 소개하고, 생육조건이 잘못된 것까지 있었다.
뭐야, 이거 이 책 개판이잖아. 미안 알비, 널 비하하려던 것은 아니야.
"으으으음. 이거 바로잡아야 하는 거 아닐까?"
나는 급히 종이를 꺼내 잘못된 곳들을 찾아 체크하기 시작했다.
할 일도 많은데, 이게 더... 재밌어.
고쳐야지. 아, 온갖 번뇌가 날아가는구나. 헤엣, 알고 보면 학자가 됐어도 나 성공했을 듯? 뿌듯한데?
"비 전하,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프리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이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카일."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고 힘들어도 그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만을 바라봐 주는 올곧은 눈빛.
"뭐 했어?"
"아... 그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고 있었구나. 책의 오류를 잡고 있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음... 보통의 귀족 영애들은 꽃꽂이를 위해서가 아니면 식물의 이름도 잘 모르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가 책과 내가 쓴 메모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신중하게 내 메모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세이?"
"저기, 그러니까..."
"혹시 국립 아카데미의 식물학 교수 소개해줄까?"
"네?"
의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설명하려던 변명들이 머릿속에서 싹 자취를 감춰 버렸다.
"지, 진짜요?"
"응. 이거 책이 잘못된 거지? 세이가 교수들에게 잘 알려 줘야겠네."
"어, 그, 근거 없는 믿음은 뭐예요?"
"어?? 그러니까 그게..."
응? 당신이 왜 당황하는데? 뭐야? 뭔데?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비친 당혹스러움에 더 혼란스러워졌다.
카일은 내가 식물에 대해 지식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 왜 모른 척 한 건데? 도대체 왜?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 거야?
"저기 그니까 왜 저, 저번에 오로스타키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 보고, 심지어 책보다 자세히 알았잖아. 그래서 세이가 식물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지. 지식도 많고. 아니야?"
아, 그런 거구나.
"완벽하지는 않아요. 내가 틀렸을 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이 나에 대해 고백할 기회일까?
"아냐, 나의 세이가 틀렸을 리 없지."
태양이 동쪽에서 뜨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그의 눈빛에는 한치의 의심도 섞여있지 않았다.
"곱게 자란 귀족 영애가, 화원의 꽃도 아닌 야생의 들풀들에 대해 어떻게 아는지 왜 묻지 않아요?"
"응? 아 맞다. 그렇구나."
카일은 혼자서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갑자기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흐익, 갑자기 왜 이래요?
그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아니 기대하는 눈빛으로 날 들여다 봤다.
잘생긴 얼굴로 그런 표정 지으면, 으윽, 내 심장 터질 것 같잖아요. 아이, 진짜, 카일은 내 심장에 해로워. 치명적이야.
"세이가 말해준다면 듣고 싶어. 세이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아는 건지, 또 내가 모르는 그대에 대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닌지, 세이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흐읍, 순간 숨이 막혀왔다.
그가 지금의 나를 사랑하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의 사랑의 시작은 아르세이아였다.
그런데 이제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할 기회가 생겼잖아. 기대되고 가슴 벅차.
그런 한편 외면받을까 봐 무서워. 어릴 때 친했다고 생각한 이웃에게도 그런 취급당했는걸.
옆집에 살던 한스네는 제법 친했다. 그럼에도 내가 메뚜기떼를 쫓아내는 모습을 보고 괴물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심지어 마을에서 우리를 쫓아내려고 한 사람들 무리의 첫 번째에 있었다.
카일은... 그러지 않겠지? 않을 거야.
조심스레 그의 눈을 보았다. 조금 울컥하리만큼 날 신뢰하는, 날 사랑하는 눈빛.
"저기. 카일. 우리 일단 후원에 갈래요?"
"세이와 함께 하는 산책은 언제나 좋아."
카일이 잡아주는 손은 언제나 든든해.
내가 매달리고 싶은 유일한 동아줄. 카일은 끝까지 날 놓치지 않고 잡아 줄까?
"세이, 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야?"
"누구 남편인지 잘생겨서요."
"크큭, 세이, 몇 달 전만 해도 내 얼굴도 안 보고, 내가 너 예쁘다 그러면 징그럽다고 고개 돌리고 그랬었는데."
"그러게요. 내가 누군가를 너무 닮아가네요. 그래서 변했나 봐요."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닮는다 그러니까요.
후원을 밝히는 마법등이 예쁘게 반짝거렸다. 아직 초저녁인데다가 마법등의 밝은 빛에 가려 별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캄캄하게만 보이는 밤하늘이 나 같아서 서글펐다. 언제나 불행을 안고 사는 나의 인생은 지금껏 저 밤하늘처럼 어둡기만 했다.
"오늘은 달이 좀 늦게 뜨네?"
카일이 태양궁을 향해 손을 가리켰다. 달은 곧 떠오르려는지 탑 주변에 후광을 만들고 있었다.
저 달빛이 떠오르면 말하자. 할 수 있어 세이렌. 카일은 날 절대 외면하지 않을 거야.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나는 왜, 아직도 겁쟁이일까? 무섭고 힘들면 피하는 거 그만둬야 하는데.
"카일. 당신이 봄에 장미를 꽃 피웠던 것 기억해요?"
"어. 당연하지, 그때 내가 우리 세이를 울렸었잖아."
"당신은 그때 정령들의 도움을 받았었죠?"
"응. 운디네와 놈의 도움을 받았지."
나는 시든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런 나를 따라 카일도 꽃 앞에 앉았다.
"카일, 나는요. 어릴 때부터 식물들이 동물이나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았어요.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도, 처음 보는 식물이라도요."
목소리가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나의 어깨를 카일이 감싸 안았다.
"게다가 나는 정령을 부를 수도, 볼 수도 없는데 정령들이 하는 일을 할 수 있어요."
나는 시들기 시작한 꽃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했다.
그러자 시들어가며 쪼그라들던 꽃 잎은 비 온 뒤 막 피어난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천천히 되감긴 꽃은 선선한 가을바람에 자신의 향기를 실어 보냈다.
"아!"
카일의 감탄사가 들렸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도 나를 따라 일어나며 날 뒤에서 날 감쌌다. 나는 차마 그의 얼굴을 보지 못 했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것뿐 아니라 제 바람을 들어주죠."
내가 가만히 서서 내 손을 가까운 곳의 나무에 가져가자 나뭇가지가 내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가지들이 내 손을 감싸 안았다. 내 손은 긴장감으로 살짝 떨렸다.
"이게 끝이 아니에요."
내 의지에 따라 손에서 나뭇가지들은 떠나갔다. 그리고 나무 주변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호오오오"
"부엉"
퍼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엉이와 올빼미들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목장에서 키우던 아이들이 울타리를 넘어 내게 왔다.
"그리고, 동물들은 제 의지와 제 명령에 복종해요."
나는 언제 밀었는지 흔적이 사라지고 새털로 보송해진 양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내 손은 긴장으로 손끝부터 차갑게 굳어만 갔다.
카일은 지금 무슨 표정일까?
"어릴 때 날 괴롭히던 사람들이 괴이한 죽음을 맞이한 적도 있었어요. 얼어죽기도 하고, 불에 타 죽기도 했고, 번개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어요. 다 내가 미워한 사람들이었구요."
이말을 내뱉는 순간은 정말 숨이 막히려했다. 내가 한짓도 아니었는데 일어났던 일들. 날 괴물이라 손가락질 받게 만든 일이었다.
"게다가 온갖 맹수들이 절 따라다녔어요. 밤마다 야생동물들이 모여들고, 저희 집 주변만 메뚜기떼의 습격을 피하고 그런 일들이 이어져서, 다들 절 괴물이나 마녀라고 불렀어요. 저주받은 힘이라고 카일이 봐도 그런가요? 내가 카일의 곁에 있어도 되는 건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아르세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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