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태양궁에 사는 악녀.
2018.05.24.
별일 있겠냐 하고 태양궁에 왔는데...
별일 있네. 우와, 황후님아. 그 차요. 이미 후작부인이 제게 써먹으려던 건데요?
날 무시하는 눈빛의 시녀가 프레젤리가 섞인 홍차를 따라주고는 물러났다.
우와, 너무하네. 여기저기, 어여쁜 앵무새들이 뻔히 지켜보고 있는데 나쁜 짓 하냐? 이 양심 없는 것들!
황후의 응접실에는 하얗고 예쁜 새집이 여러 개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흰색, 노란색, 초록색의 예쁜 앵무새들이 들어있었다.
안녕. 너희 주인의 시꺼먼 속마음과 다르게 너희는 정말 예쁘구나. 몇몇은 말 할 줄 아는 새 같기도 한데?
"황태자비, 먼 길 오느라 힘들었는데 목부터 축이거라."
마차로 천천히 달려서 길어야 30분인데, 먼 건가? 게다가 걸어온 것도 아니고, 제 다리는 가만히 있고 마차님이 날 실어다 날랐는데요?
"폐하, 이 차를 올린 시녀와 먼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어쭈? 눈 하나 깜박 안 하시네. 대단하십니다!! 내가 눈치챘으면 당황할 법도 한데. 모르쇠로 일관할 예정인가 봐.
"소피, 나오거라."
"예, 폐하. 황태자비 전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어느 가문 출신이지?"
"유피테르입니다."
유피테르면, 황후의 여동생이 시집 간 백작가였던가? 황후의 조카는 아닌 걸로 아는데, 그래도 충복이겠지?
"좋은 집안 출신이구나. 그런데, 그런 가문에서 황족의 몸에 해를 가하는 독초를 구별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나? 아니, 독초를 찻잎이라 가르쳤더냐?"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말이 끝나자 내 호위인 프리케가 그 시녀를 무릎 꿇렸다. 프리케 잘한다!
황후는 무슨 생각인지 그런 나와 내 호위를 아무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
나는 티스푼으로 찻주전자에 들어 있는 찻잎을 건져냈다. 홍차와 섞여 있는 찻잎들은 얼핏 보기에 모두 같은 잎처럼 보였다.
나는 그중 한 잎을 꺼내 들었다.
"폐하, 이 차를 언제부터 드셨는지요?"
"오늘 새로 들여온 차란다. 향이 좋아 네게도 나눠줄까 하여 불렀지."
엄마야, 이 여자 봐. 나를 노렸다고 자백하시는 건가요?
"큰일 날뻔했어요. 이 잎은 프레젤리라고, 장복하면 자궁이 크게 상하여 여인의 몸을 망가뜨리는 잎이에요. 어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 차를 올린 것인지..."
"내 눈에는 그냥 홍차 잎으로 보이는데?"
"향이 다릅니다. 맡아 보세요. 홍차 향이 아닌, 쟈스민향에 약한 민트 향이 섞인 냄새가 날 거예요."
내 말에 황후의 지근에 있던 시녀가 내가 내민 잎을 들고 향을 맡았다. 그리고 황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시도도 하기 전에 걸리셨는데 어쩌실 건가요? 황후 폐하?
"소피, 모시는 웃전의 건강을 살피는 것은 시녀의 첫 번째 의무이다. 이를 소홀히 했으니, 한 달간 냉방에서 근신하거라. 그리고 시녀장은 이 차를 진상한 것이 누군지 당장 조사를 시작하거라."
에이, 저건 너무 눈 가리고 아웅인데?
"차는 새로 가져오라 하지."
"차보다는 부르신 용건이 더 궁금합니다."
너 같으면 불안해서 마시겠어요? 황후가 주는 건 이제 입에 담지 않겠어.
"그래. 그렇다면 바로 말하지. 대귀족회의에서 어떤 안건이 올라와 있는 줄은 아느냐?"
알죠, 참 잘 알지요. 역시나 황후가 뒤에서 조작한 일이구나? 내 습격의 배후도 황후이려나?
"여러 가지가 있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부하실 일이 있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손주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은 알고 있겠지?"
"예, 폐하. 카일과 열심히 노력 중입니다."
어우 소름, 왜 씩 웃고 그러시나? 만만찮은 여자인 것은 알지만, 면전에서 저러니 부담스럽잖아.
그리고 예전에 당신 때문에 아이 낳기 싫다던 카일의 말은 싹 잊었나 봐?
"현재 황궁에 황위 계승권이 있는 자는 카일뿐이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 반년이 가까이 후사가 없어 어찌나 방계들 쪽에서 세를 키우려 하는지... 황권이 흔들릴까 걱정이구나."
거짓말. 적통이 아니면 황위 계승권이 없는 제국법 상, 카일을 대신 할 방계는 없다고. 황제 폐하의 동복 형제들은 폐하가 등극 하실 때 콘스탄트 가문에서 모두 축출했잖아.
게다가 남자 황족들은 볼라드 공작이 카일을 대신하여 비밀리에 포섭하여 대부분 카일에게 충성 서약을 맺고 카일을 지지하고 있었다.
"더 노력하여 올해 안에 회임토록 애쓰겠습니다."
"그러다 네가 회임을 못하면 너의 입지도 약해지지 않느냐? 그럴 바에는 후궁을 들여 그 후사를 네 양자로 들이는 것이 네게도 이롭지 않겠니?"
기왕이면 너희 가문의 영애를 후궁으로 들이라구요? 그리고 그녀가 회임하자마자 나나, 카일을 죽이려구요?
"아직 저는 젊지 않습니까? 저에 대해서는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내 거절에 그녀의 눈썹이 올라갔다. 엄마야, 좀 무섭네. 하지만, 나는 후작부인에게 단련된 몸이라고! 괜찮아!
"황실과 척을 진 귀족파의 딸인 네게 기회를 주는 것인데 알아듣지 못하는구나."
"어떤 기회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너와 나, 모두에게 이로운 결정을 하도록 내가 널 도우마."
뭐래? 당신에게 이로운 것은 카일에게 위험한 것이고, 그럼 내게는 해로운 것이거든요??
"네가 황태자를 설득하면 네가 후계자를 얻지 못하더라도 안락한 미래를 보장하마. 네 친정 어미와 외가도."
역시, 내 습격의 배후가 황후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답을 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만 보고 있었다.
오만해 보일 만큼 냉철한 눈빛. 그리고 그 속에 들어있는 사악한 미소. 나의 카일에게 큰 상처를 준 여자는 나를 이용해 카일에게 또 상처를 주려 했다.
그런데요, 황후 폐하. 후작부인과 몬테 공작가는 마음껏 하셔도 됩니다. 피식, 비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아 곤란해졌다.
"이미 폐하가 원하시는 대로 후궁 간택연이 열리게 되지 않았습니까?"
"며늘아, 태양궁에 왔으면 이 아비에게 먼저 들려야지."
엥? 폐하가 여기서 왜 나와요?
부자지간에 타이밍이 참. 묘하단 말이야.
뭐 황후의 답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뻔한 답이 예상되잖아? 자신의 가문이 추천하는 영애를 밀라거나, 또는 날 믿지 않고 거짓 정보를 넘기거나 였겠지. 어떤 답이었든 상관없었다.
아무튼 나랑 폐하는 종종 같이 차도 마시고,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카일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많이 해 주셔서 좋았다.
숨겨놨던 카일의 어린 시절 모습을 담은 화첩도 주셨지. 어찌나 귀여운지. 꺄아.
"아바마마, 곧 가려고 했어요. 황후 폐하께서 부르셔서 먼저 들렀어요."
내가 애교 있게 폐하께 말씀 올리자 황제께서 기분 좋게 껄껄거리셨다.
"황후, 우리 며느리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게요?"
"황태자의 후사에 대해 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군. 아가, 나 역시 그와 관련해 네게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같이 산책이라도 하겠느냐?"
황후의 표정에 못마땅함이 떠올랐다. 호오, 내 여기서 프레젤리 잎을 한 번 떠벌릴까?
내 시선이 찻잔으로 향하자 황후의 표정이 볼만했다. 황제 폐하의 등장은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나 보았다.
프레젤리차는 그저 협박용이었을지도 모르겠네. 모른 척 내가 먹었으면 땡큐고. 한 번 마신다고 자궁이 상하는 것은 아니니까.
"예, 아바마마. 같이 가요. 아바마마께는 언제든 시간을 내어드려야지요."
나는 최대한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황후를 향해 인사했다.
어차피 증거도 없고 불쌍한 시녀들의 죄로 돌릴 테니 모른척 해 줘야지. 시녀들이 무슨 죄야?
"폐하, 제게 주신 충고는 가슴 깊이 담아 두겠습니다."
두고두고 갚을게요.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그의 새 여자를 받아들이고, 또 그 여자의 아이를 빼앗으란 말을 하는지.
나는 꼭, 카일과 서로만 바라보며 백년해로 할 거야. 꼭. 나와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
나중에 단단히 다짐 받아야지. 절대 후궁은 안된다고, 황제가 돼서도 안 돼! 법 고치라 할 거야.
"황후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나 보구나. 내가 대신 사과하마."
"아바마마! 나라의 지존은 사과하는 것이 아라 배웠습니다. 그러지 마셔요."
"아니다. 내 아들에게 사과하지 못한 바람에 녀석과 내 사이가 이리 멀어지지 않았더냐. 잘못한 것이 있으면 상처가 곪기 전에 사과해야지."
카일에게도 그래주시면 좋을 텐데요. 내가 입 밖으로 내밀지 못한 말을 알아 들으신 건지 폐하께서는 허허하고 웃으셨다.
"녀석은 이제 내 말을 안 들으려고 해서 말이다."
"제가 대신 전해드릴까요?"
"직접 듣지 않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눈을 마주하고 서로가 마음속에 담아 둔 이야기들을 다시 나누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단다."
잘 아시면서 왜 그러셨어요?
"카일룸 녀석은 어릴 때부터 말썽꾸러기였는데. 널 만나고 나서 부쩍 성장했더구나. 다, 네 덕분이구나."
늘 듣는 칭찬인데도 부끄러워.
아바마마는 어린 시절의 카일을 이야기할 때면 늘 눈빛이 아련해지셨다. 그 시절이 많이 그리운 모양이었다.
전 황후 마마와 아바마마, 그리고 카일과 아주버님, 네 식구는 정말 행복했었다고 들었는데... 어쩌다 저리도 어긋났을까?
"그 작고 사랑스러웠던 꼬마가 징그러울 만큼 너무 커버렸어."
"그래서 이제 사랑스럽지 않으세요?"
"부모의 눈에는 언제나 제 자식은 작고 사랑스러운 꼬마란다."
뭐지? 심장이 저릿저릿 해졌다. 갑자기 후작님이 떠올랐다. 나도 후작님에게 그런 존재일까?
다들 내가 오해하고 있다고 그러던데, 정말 그런 걸까? 모든 부모는 다 자식을 사랑하는 게 맞을까?
꿈속에서 날, 사랑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던 후작님의 얼굴이 떠올라 심장이 조여왔다. 정말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참, 아가, 우리 손주는 언제 볼 수 있을까?"
"노, 노력하고 있어요. 빨리 보여드릴게요."
"허허허. 네가 딸을 낳으면 적통 황녀도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법을 바꿀 터이니 얼른 손주든 손녀든 보게 해다오. 널 닮으면 정말 어여쁠 거야."
아, 화끈거려. 진짜, 얼른 아이를 갖던가 해야지. 너무 기대하시는 표정이라서 부담이 확 몰려왔다.
이미 노력하고 있지만 더 노력해 보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아바마마.
"세이, 별일 없었어?"
카일이 초조한 얼굴로 갑자기 나타났다. 뛰어왔나? 머리가 엉망이 됐네.
아하! 혹시나 해서 실프 불러서 날아왔구나. 아유, 어쩜 이리도 마음에 쏙 들까.
"아바마마가 적당히 막아 주셔서 별일 없었어요."
"아,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이구나. 대귀족회의에서 귀족들을 휘어잡고 있다 들었다. 잘하고 있구나."
원래는 황제께서 하실 일을 카일이 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후계자 교육을 이유로 많은 것을 카일에게 시키고 있었다.
알고 보면, 본인이 귀찮아서는... 아니시겠지?? 하하.
"당연히 할 일 입니다."
흐음. 어색 열매들을 드셨나. 괜히 나까지 불편하잖아. 나보다 같이 한 세월도 길면서.
두 사람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아니, 왜 둘이 대화를 나누면서 날 쳐다보는 거죠?
좋아. 이 예쁜 내가 어색함을 없애드리죠!
"자, 두 분. 기왕 만났는데 같이 점심이나 드시러 가시죠? 저 배고파요. 너무너무."
두 남자에게 팔짱을 끼고 내가 배시시 웃어주자 어색하게 웃으면서 따라왔다.
아, 맞다. 태양궁 요리사들 요리 별론데. 쳇. 그래도 나의 남편과 시아버지의 화해를 위해 내 입을 희생해 주겠어. 나중에 카일이 황제 되면, 꼭, 황태자궁의 요리사들을 데리고 가야지.
내 양쪽의 남자들은 여전히 내게만 대답을 하고 있었다.갈 길이 멀구나, 멀어.
"아바마마, 카일은 어릴 때, 정말 땡땡이 많이 치고 다녔다면서요?"
"그랬지. 1황자 녀석은 성실하기 그지없었는데, 이 녀석은 같은 배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들 만큼 개구쟁이였어."
"세이, 왜 또! 말씀하지 마십시오, 폐하."
카일은 자신의 어린 시절 흑역사를 듣는 것을 싫어했다. 내가 자신의 멋진 모습만 알았으면 좋겠다나?
"장난꾸러기였지만 어릴 때도, 지금도 사랑스러운 아이지."
"그죠? 너무 사랑스러워서 다른 영애들이 노리는 것 같아서 저 속상해요."
"걱정 말거라. 내 며느리는 너뿐이니까. 그리고 카일룸이 한눈 팔면 내게 이르거라. 뭐. 어릴 때부터 하나에 꽂히면 온 마음을 쏟는 아이니 걱정은 안 해도 될거다."
황제 폐하의 말씀에 카일이 조금 얼굴이 붉어졌다. 아버지의 칭찬을 참 오랜만에 듣는 건가 봐.
좋아! 사돈 남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이 두 남자 화해시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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