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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49화 (49/126)

50화. 꿈, 기억의 한 조각. (2)

2018.05.22.

케이랑 함께라면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사랑받고 살 수 있었다.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케이의 사랑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래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끔씩 케이가 내 이마나 입술에 뽀뽀를 해주면 간지럽고 부끄러웠지만, 그가 날 예뻐하고 좋아해서 그런 짓을 하는 것임을 알아서 언제 또 해주나 내심 기대도 많이 했다.

케이는 뽀뽀를 하고는 가끔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무 어려서 힘들다고. 얼른 크라고.

칫. 자기가 나보다 일찍 태어난 탓이었으면서. 그리고 뭐가 힘들다는 거야?

"케이, 헤헷. 나 네가 너무 좋아."

"크큭, 나도 네가 좋아. 얼른 커서 나한테 시집와라. 내가 너 안 울게 해줄게."

"진짜?"

"응. 맨날 웃게 해줄게, 진짜."

케이와 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둘이서도 잘 지냈다.

식수는 계곡물로 해결했고, 먹는 것은 우리가 직접 산을 돌아다니며 딴 과일을 먹었다.

하지만 과일만으로는 먹고 사는데 한계가 있었다. 나도, 그도 한창 자랄 때였으니까.

그래서 내가 깊은 숲에만 사는 과일과 약초를 따서 시장에다 팔아 필요한 것을 얻어 왔다. 약초는 비싼 상품이거든.

그 돈으로 케이의 새 옷도 사고, 가끔 빵이나 고기도 사서 나눠 먹었다.

케이는 누군가에게 여전히 목숨의 위협을 받을 수 있어 내가 시장에 다녀왔다. 물론 나도 하늘 저택 사람들의 추적을 피해야 했기에 자주는 못 내려갔다.

엄마가 걱정됐지만 무서운 사람이 찾아오는 저택에는 가고 싶지 않은걸.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시장에서 아버지의 아내라는 사람의 시녀들에게 걸리고 말았다. 붙잡힌 나는 하늘 저택의 창고에 가둬져 채찍으로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

"케이는 혼자 괜찮겠지?"

나는 내 몸보다 혼자 남아 있을 케이가 걱정됐다.

숲속 친구들이 케이를 괴롭히진 않겠지만, 혹시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또 찾아온 것이 아닐지. 특히나 날 찾겠다고 마을로 내려온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되었다.

이젠 케이가 다치면 나도 견디지 못할 거야.

매를 맞고 기절했던 그날 밤 어쩐 일인지 내 등에는 온갖 약들이 발라져 있었다.

이틀 뒤 아버지가 내 쌍둥이 동생들을 데리고 내려왔다. 에이린도 그때 즈음 내 놀이 시녀라며 왔었지.

"언니! 나 꽃 피우는 거 보여줘. 그리고 저 예쁜 새들 불러주면 안 돼?"

나와 닮았지만 좀 더 귀하게 자란 티가 나는 예쁜 여동생은 날 무서워하지 않고 쫓아왔다. 남자아이 쪽은 반걸음 즈음 떨어져서 날 관찰하고 있었지.

하지만 난 사랑을 듬뿍 받아 행복한 미소를 달고 사는 그 소녀가 미웠다.

내 이름도 뺏어간 그 아이가 좋을 리가 없잖아.

그 아이의 바람 따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이런 것은 케이에게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케이가 좋아할 건데. 케이가 보고 싶어.

내가 그 아이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고 입을 꼭 다물고 있자 아버지라는 사람이 말했다.

"동생이 부탁하는 건데 들어주지 그러니?"

아버지의 아내는 뒤에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나에게 재촉했다. 그것도 세상 누구보다 내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나를 향한 서로 다른 시선. 그 속에 서 있는 내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꽃망울을 터뜨리기 전의 아스타 꽃을 손에 살짝 쥐었다. 그리고 내가 간절히 바라자 꽃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우와, 언니 예뻐. 부러워. 나도 이런 능력 갖고 싶어."

알리페르도 말은 하지 않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보고 있었다.

곧 새가 내게 날아왔다. 하지만 새는 내 곁에서만 머물고 아르세이아의 곁에는 가지 않았다.

"내가 아닌 사람들은 무서워서 가기 싫대."

아르세이아는 크게 실망했고 나는 그날 밤 아무도 몰래 또 뺨을 맞아야 했다.

"나갈 거야."

아버지가 와서인지 창고가 아닌 3층 방에 갇힌 나는 다시 가출을 결심했다. 나를 예뻐해 주는 케이의 곁으로 갈 거야.

나를 소중하게 여겨 주는 사람 곁에 있을 거야.

모두가 잠든 밤 나는 커다란 올빼미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올빼미들은 나를 1층까지 안전히 내려갈 수 있게 그들의 날개를 빌려주었다.

당시에는 또래보다 작았던 나는 사뿐사뿐 그들을 밟고 땅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늑대의 등에 올라탄 나는 케이가 있던 동굴로 달렸다. 케이는 다행히 아직 거기에 있었다.

"케이!"

"세이!! 걱정했어. 괜찮아?"

내가 달려가자 그는 그의 품에 포근하게 나를 감싸 안아주었다.

케이는 나의 부어 있는 뺨에 깜짝 놀랐다. 그는 나를 꼭 껴안고 내 뺨을 어루만지며 내 눈물을 달래주었다.

내게 그는 이제 세상의 전부였다.

그리고 날 이해해 주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감히 나의 꼬마 요정에게 손을 대다니! 누구야?"

케이의 화난 얼굴에 내 마음이 사르륵 녹았다. 나를 대신해서 화를 내주는 사람의 존재가 이렇게 큰 위로가 되는구나.

나는 그제서야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오해와 아픔을 전부 이야기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내 신분도, 부모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는 이야기해 줄 수 없었지만 그렇게 아픔을 토해내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그것은 케이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너는, 절대로 불길하거나 저주받은 존재가 아니야, 세이."

케이가 내 정수리 쪽에 키스를 해줬다.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지금껏 받아왔던 아픔들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간질간질해.

나는 덥썩 그를 껴안아 버렸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기대서 엉엉 울었다. 케이는 곤란해하면서도 내 등을 토닥이며 우는 것을 받아줬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내게 나무를 깎아 만든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워줬다.

"세이, 네가 성인이 되면, 그때 내가 꼭 널 내 신부로 맞이하러 올게."

"어디 갈려고??"

"... 나는 내 꼬마 요정을 너무 사랑하게 됐거든. 그래서 내 꼬마 요정을 지켜주고 싶어.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내가 널 지킬 수 없으니까,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내 것을 찾으러 가려고."

"싫어. 케이, 가지 마."

케이의 얼굴에 서린 각오를 읽었다. 하지만 나는 떼를 쓸 수밖에 없었다. 보내 줘야 하는데, 보내 줄 수가 없었다.

"세이, 꼭, 내가 널 구하러 올게. 조금만 더 버텨. 응?"

"나 데리고 가."

"안 돼. 내가 가는 곳은 너무 위험해. 아직은 널 지킬 만큼 내가 강하지 않은걸."

"하지만... 하지만 케이."

"꼭 약속할게. 널, 지옥에서 구해내겠다고.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나도 힘을 키워서 널 어떤 방법으로든 지키겠다고."

내 가족사를 모두 말하면 떠나지 않을까? 학대받고 있다고 말하면 데리고 가 주지 않을까? 뭐라고 말해야 곁에 있어줄까?

하지만, 케이를 저주받은 내 곁에 두면 안 되니까 붙잡지 말아야 하는데...

내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자 그가 내 눈물에 키스했다. 그리고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겹쳤다가 놓았다.

"얼른 커 나의 꼬마 요정. 그리고 네 힘은 저주받은게 아니니까 숨기지 말고 마음껏 네 재능을 발휘해. 사람을 살리고, 돕기 위해 네 힘을 쓴다면 사람들이 나처럼 네 진가를 알아볼 거야. 내가 얼른 성장해서 널 구하는 왕자님이 될 테니까 나의 꼬마 요정님도 진짜 요정이 돼서 우리 만나자."

"황태자비 전하, 일어나셨어요?"

나를 부르는 에이린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뜨는데 왜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걸까?

"어머, 비 전하 무슨 꿈을 꾸셨길래?"

"에이린. 나 안아주면 안 돼?"

내 친구는 아무 말없이 날 꼭 끌어안아 줬다.

떨어져 나갔던 기억의 한 조각. 그것을 되찾았다. 약 2주간의 추억은 아직 군데군데 비어있었고, 케이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 암흑 상태였다.

"가슴에 상처라..."

상처가 아주 깊었고 치료도 늦었기에 쉽게 지워질 흉터가 아니었다.

그런데 프리케의 가슴에 큰 상처가 있었어. 오래돼서 기억이 흐릿하지만 비슷한 자리 같은데...

검은 머리에, 누군가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쫓기다 가슴에 큰 상처를 입은 사람.

게다가 프리케의 애칭이 케이랬지?

꿈속에서 얼굴이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설마, 진짜 프리케가 케이인건 아니겠지? 설마, 나한테 했던 첫 번째 맹세가 케이의 맹센가?

나 케이를 곁에 두고 다른 남자를 사랑해 버린 거야? 이제 내겐 카일이 더 소중하긴 한데...

으아아아아아! 프리케가 진짜 케이면 나 진짜 배신녀인거잖아. 걔는 계속 내 곁에서 날 지킨 건데...

아니, 자기 것을 찾고 온다 했는데 못 찾은 걸까? 프리케가 진짜 케이라면, 어쩌다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도 포기하고 비스 기사단에 머무른 걸까?

실패하고 좌절해서 그냥 여기 머무는 걸까? 그러고 보면 프리케가 죽어가는 걸 후작님이 구했댔는데...

에효. 자기가 케이가 아니냐 그런 거 마냥 농담인 줄 알았는데... 물어봐야 하나?

"비 전하, 좋은 아침, 아니 낮입니다."

"아, 안녕 프리케경. 무슨 일이야?"

늦잠을 제대로 잤구나. 벌써 해가 중천이네. 누가 봐도 게으르고 방탕한 황태자비로 보이겠어.

"오늘 비 전하의 호위 담당은 접니다."

"잊고 있었네. 너랑 펠이 이제 내 호위지?"

"잊었다뇨! 서운한데요? 부단장님과 격일로 근무하기로 했습니다."

흐으음. 쟤가 진짜 케이면, 무슨 생각일까?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날 보고 서운하진 않을까?

내가 성인이 되면 신부로 맞이하러 온다 해 놓고는 왜 그보다 일찍 나타났을까? 또 왜 성인식 이후에도 내게 청혼하지 않고 기다린 거야?

"저한테 할 말 있으십니까? 왜 그렇게 빤히 보십니까?"

"프리케. 너 나한테 더 숨기는 거 없어?"

"예?? 제 신분에 대한 거라면 흠흠. 대충 예상하신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루피넬리아의 마지막 왕자였죠."

그것도 있었구나. 얘 비밀이 많은 남자였어.

"막, 그렇게 쉽게 네 신분 말해도 되는 거야?"

"뭐, 황태자도 이미 눈치를 챈 것 같고, 딱히 큰 비밀도 아닌걸요. 그리고 왕자 신분 따위 버린 지 오랩니다."

"어? 진심이야? 네 신분을 찾겠다던가 그런 욕구는 없는 거야?"

케이는 분명 제 것을 찾고 돌아온댔는데. 얘가 아닌건가?

"없어요. 그저 비 전하 곁에서 전하만 지키면서 평생 살려고요."

"너, 케이 아냐?"

그냥 직설적으로 묻자!

"제가 케이이면 이제라도 저랑 황궁에서 나가실래요?"

"뭐?"

"아니잖아요. 제가 케이이든 아니든, 비 전하께서는 이제 황태자 전하만 보시니까. 이젠 제가 케이가 되어 드릴 필요가 없지요."

케이가 아니라는 뜻인 건가? 왜 씁쓸하게 웃기만 하는데? 그래. 반지.

나는 오르골 속에 숨겨놨던 불에 그을린 나무 반지를 꺼내왔다. 어린 시절 내 약지에 끼워졌던 반지는 이제 내 손에 맞지 않았다.

"이거!"

"나무를 깎아서 만들었네요."

알아보는 것 같기도 하고 못 알아보는 것 같기도 하고. 뭐지?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이 반지 기억 안 나?"

"이거 혹시 케이의? 귀엽네요. 비 전하의 어릴 때 손가락이 정말 작았나 봅니다."

저런 반응을 보면 아닌 것 같은데...

아니, 프리케의 말처럼 이제 와서 케이를 찾는 것은 무의미 한 것 아닐까? 내게는 카일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프리케가 케이라면 사과하고 싶었다.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내 곁에 있었던 케이를 알아보지 못한 점.

"비 전하, 저는 케이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책하는 표정으로, 제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프리케."

"비 전하의 케이는... 음, 이제 황태자 아닙니까? 비 전하를 지옥에서 구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주잖아요."

"응. 그건 맞아."

"그러니까요. 비 전하가 행복하다면 케이도 행복할 겁니다. 그러니 이제 케이는 찾지도, 그리워하지도 마세요."

프리케가 진짜 케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정말 나의 행복을 빌어주는 소중한 친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저기, 비 전하. 말씀 중 죄송한데, 황후께서 급히 태양궁으로 들라 하십니다."

어? 그 여자가 왜? 무섭게 왜 부르는데? 후궁 문제로 나한테 압박이라도 하려는 건가?

설마하니 습격의 배후는 나다하고 자백할리는 없을 거고.

"혹시 모르니까 일단 카일에게 전갈을 보내 둬."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조심하자. 설마 폐하도 계신데 태양궁 안에서 날 독살하거나 납치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뭐, 별일 있겠어?"

솔직히 무섭긴 한데. 하하하. 뭐, 후작 부인처럼 폭력을 쓰지만 안는다면, 최소한 지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프리케, 호위 부탁해도 되지?"

"물론이죠. 저는 비 전하의 수호 기사랍니다."

"고마워."

고마워. 항상. 그리고, 미안해. 네가 케이든 아니든, 이제 네 마음 받아주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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