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꿈, 기억의 한 조각. (1)
2018.05.21.
자, 이제 둘만 남았으니, 우리 남편 혼 좀 나 볼까요?
"세이, 화났어?"
"솔직히, 아까 프리케 죽이거나 다치게 만들려던 것 아니에요?"
"아니야!! 진짜로 아닙니다! 아직 소드마스터가 된지 얼마 안 된 것 같더라고. 널 지키는 호위로 쓰려면 더 가르쳐야 할 것 같아서..."
"흐으음. 진짜요?"
"응."
피, 또 꼬리만 강아지처럼 구는 거야? 귀여워라. 머리 쓰다듬어 줄까?
"카일, 다신 위험한 짓 절대로 하지 마요. 진검대련이라니! 그리고 프리케는 친구일 뿐이에요. 나한테 남자는 카일밖에 없다는데 왜 질투하고 그래요?"
내가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머리를 비벼대자 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참, 이 정도 스킨십에 반응하고 그러냐.
"알았어. 그런데 저기, 세이. 화도 풀렸으면..."
"으휴! 이 변태."
"그, 그래서 싫어?"
"나한테만 이러는 거 알아서 싫지 않아요."
결국에 우리는 또 밤새 달렸다. 하하하.
카일은 어느새 숨소리가 일정해지더니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사실 잠이 오질 않았다. 대신 카일이 힘든 기억을 가지고도 나를 위해 용기를 내서 대련을 하고 있다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도 용기를 내야 하는데.
어릴 때 여러 번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배척당한 기억에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왜 이리 나약할까? 카일에게 왜 솔직해지지 못할까? 왜 이렇게 두려움만 많을까? 바보같이...
휴우, 그나저나 케이의 흉터는 뭐지? 내 생각대로 걔가 북부 왕국의 왕족이라면, 그들에게 쫓기다 입은 상천가?
후작님이 구해줬다더니 그때 상처인가 봐.
저런 상처 입은 사람, 예전에 만난 적 있는 것도 같은데, 도대체 언제지?
흐음. 그러고 보면, 카일은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던 사람치고는 몸에 상처가 거의 없어.
신기해. 내가 아직 구석구석 살피지 못해서 그런가? 부끄러워서 눈 감을 때가 많으니까.
흐음. 그래. 카일이 잠든 지금이 그의 곳곳을 살필 기회인가!! 꺄아, 탄탄한 복근이랑 팔뚝 맘껏 주물러야지.
"우웅, 세, 이..."
윽, 안되겠다. 이러다 저 인간이 깨면 또 늦잠 각이야.
자자. 얼른!!
내 힘을 고백할 용기가, 제발, 자고 일어나면 생겼으면 좋겠다. 날 사랑해주고 아끼는 사람에게 나도 솔직해지고 싶어.
"어떻게 저 아이는 들짐승들과 친하지? 불길해. 얼마 전 우리 집 닭이 사라진 것도 쟤 짓인 거 아냐?"
남의 것에 손대는 건 나쁜 아이랬어요. 나 그런 짓 안 해요.
"저번에는 메뚜기 떼들이 쟤네 집 텃밭만 빼고 주변 밭을 다 초토화 시켰어요. 저년 짓이 틀림없어."
진작에 알았음 멀리 보냈을 건데, 그래도 뒤늦게나마 멀리 보내서 우리 집 뒤쪽은 다 지켰는데 왜 그건 안 보이나요?
"박쥐떼들도 저 아이 근처에 자주 나타나던데, 진짜 마녀거나 괴물인 거 아니에요?"
날개 다친 아이를 치료해준 것뿐인 걸요.
"쟤가 싫어하는 애가 불에 타죽은 소식 들었죠?"
"지난 번에는 한 여름에 얼어 죽은 애도 있대요. 조심해요."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인데. 오히려 내가 그 애들한테 괴롭힘을 당했는걸.
게다가 나랑 놀아주던 숲속의 형제들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나 대신 혼내준다는 거 말리기까지 했는데... 왜 내탓인지…?
"쫓아내야 해요. 우리 마을에서!"
어떻게, 테오네가 저렇게 말할까? 그렇게 친했는데, 내 힘을 다해 메뚜기로부터, 맹수들로부터 당신들을 지켜왔는데...
마녀, 괴물, 저주받은 아이. 왜 내가 그렇게 불려야 하는지... 이런 말을 듣고 올 때마다 엄마는 아니라고 얼마나 고귀한 남자의 핏줄인데 그런 소리 하냐며 맨날 우셨었다.
"아르세이아, 너는 멋지고 신사다운 기사님의 고귀한 첫째 딸이란다. 울지 마. 언젠가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날 뒤늦게 찾아온 아버지란 사람은 내가 부끄러웠는지 저택에 가둬 키웠다. 그것은 과연 보호였을까?
아버지의 아내라는 사람이 날 보고 소리 지르고 엄마를 때렸는데... 아버지는 그때마다 곁에 없었잖아.
엄마랑 내가 얼마나 무서웠다고...
아무리 좋은 옷, 예쁜 인형이 많아도 그곳은 내 집이 아니었다.
아팠다. 어린 나는 결국 나 혼자만 아는 작고 어두운 동굴 어딘가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렇게 웅크린 채 소리 없이 울고 있는데 동굴 안으로 들어온 사람의 인영이 있었다.
"누구야?"
"으... 으윽."
신음소리. 사람의 그림자는 내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꺄아아악!"
검을 지닌 남자였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몸에는 가슴 부근에 커다란 베인 상처가 있었다.
제법 된 상처. 곪아버린 상처는 내버려 두면 썩어버릴 것이었다.
"뭐, 뭐야? 저기 정신 차려. 괜찮아?"
이 남자에게는 운이 좋게도 나는 이 동굴 속에 자라는 이끼가 이 남자의 상처에 있는 염증을 가라앉힌 다는 것을 알았다.
급히 이끼들을 긁어모아 돌로 짓이겨 즙을 만들어 남자의 입에 흘려 넣었다. 동굴 밖에서 급히 상처에 좋은 풀들을 모아서 짓이긴 뒤 남자의 상처에 덮어두었다. 열도 있어서 해열초도 찾아 먹였다.
아마도 쫓기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떤 남자인지도 모르면서,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냥 구해주고 숨겨주고 싶었다. 나처럼 고단해 보여서, 단지 그 이유였다.
"모른척 할 수가 없잖아. 게다가 예쁘게 생겼어. 예쁜 건 죽이면 안 돼."
동굴 입구로 가서 입구에 자리 잡고 살고 있는 식물들에게 부탁했다.
"우리를 꽁꽁 숨겨줘."
내 부탁에 식물들이 갑자기 무성하게 자랐다. 덩굴들도 빽빽하게 입구를 감쌌다. 아마 밖에서는 이 작은 동굴 입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칠 것이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르고 어둠 속에서 숨이 한결 편해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살아있는건가?"
"어? 일어났네? 여기 천국은 아니야. 조금 어둡지? 잠시만."
나는 입구로 가서 식물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빛이 조금 들어올 틈을 열어달라 했다. 마음속으로 뜻을 전하는 건 아직 어려워.
"누구야 너는? 누구길래 식물들에게 말을 거는 거지? 아니 이게 가능은 한 것인가? 네가 한 일이 맞는 건가? 밖에 다른 기척은 없는데?"
어떻게 들었는지 당황스러웠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 능력을 들키다니.
날 또 괴물처럼 생각하겠지? 내가 제 목숨을 구해줬는데... 그럼에도 마녀라고 하겠지?
역시 사람을 구하는 일 따윈 하지 말걸.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돌아 섰다.
"너... 혹시 요정이야?"
"에? 요정?"
"어. 요정. 그러니까 식물들이 네 부탁을 들어주는 거 아냐?"
"괴물이 아니라... 요정?"
"너처럼 예쁜 괴물은 본 적 없는데?"
처음이었다. 요정이라 불러 준 사람은.
헤에에에.기분 좋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절로 어렸다.
"내가 아는 괴물은 다른 생명을 해치고, 파괴하는 본성만 있는 것들이야. 너처럼 사람을 살리려고 노력하지 않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동물, 식물이랑 친하다고 괴물이라고 했는데, 마녀라고."
"동물이랑도 친해? 너 혹시 정령의 여왕이야?"
"정령? 여왕?"
"아, 너 같은 작은 꼬마 숙녀가 여왕은 아니겠네. 하지만 자연이랑 친한 것 보니까 정령과 관련된 것 아니야? 그럼 나 정령에게 소개해주지 않을래? 내가 힘이 필요해서."
"미안. 나 정령이 뭐인지 몰라."
아쉬워하던 남자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직 곪은 상처 안 나았어. 조금만 늦었어도 산 채로 몸에 구더기가 기어 다닐뻔 했거든? 소독도 해야 하고, 염증이랑 열이 가라앉을 때까진 움직이지 마."
"응? 꼬마 요정님은 의사인가? 나이도 어린데? 똑똑한가 봐?"
아닌데, 나 안 똑똑해. 그런데 의사? 나 멋진 건가?
"아, 사냥당해서 다친 동물들을 돌보다 보니까 알게 된 것뿐이야. 인간이나 동물이나 외상은 비슷한 편이거든. 그리고 글자도 모르데 똑똑하기는."
"글자를 몰라? 나이도 제법..."
"12살이야. 엄마가 공부를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아는 게 많아서 더 잘나면 눈에 뜨인다고 10살이 지나면 알려준 댔거든. 그런데 사정이 있어서..."
내가 조금 훌쩍이자 그가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은 저렇게 다쳐서 죽을 뻔 해놓고 왜 날 불쌍하게 본담? 자신이 더 불쌍한데?
"그런데 너 배고프지 않아? 잠시만 기다려 봐."
나는 동굴 입구로 가서 다람쥐를 불렀다. 그리고 곧 다람쥐는 친구들과 함께 커다란 사과를 여러 개 따서 가져다주었다.
"일단, 이것 먹어. 나도 저택에서 도망쳐 나온 상태라 과일 말고는 줄게 없어."
"고마워. 상처도 치료해주고, 먹을 것도 주고. 내 생명의 은인이네. 꼬마 요정님."
그가 계속 요정이라 불러주자 얼굴이 간질간질했다. 헤헷. 얼굴에 거미라도 붙었나 왜 이리 간질 한 거야?
"그런데 꼬마 요정님은 이름이 뭐야?"
"나? 그게..."
얼마 전까지는 아르세이아였는데. 이젠 그 이름이 내가 아니라 나를 빼닮은 다른 여자애의 이름라고 쓰지 못하게 했다. 그렇다고 지금 이름은 싫어. 그러니까, 음...
"세이."
"성은 없어? ... 아 미안."
평민에게는 성이 없다. 나는 평민은 아니랬지만 아직 성은 없었다. 소노르는 임시라 그랬고, 비스는...
내가 대답을 안 하니까 그는 내가 평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사과한 거겠지? 평민인 게 뭐가 어때서?
"아버지 성은 쓰기 싫어. 근데 너는 이름이 뭐야?"
"나는..."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한참이나 말하지 못했다. 망설이는 것이 보였다.
"음, 케이라고 불러줘."
"응. 케이."
나보다 키가 한참이나 크고 나이도 많아 보이긴 했지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사과를 다 먹고 난 그에게 이끼에서 즙을 다시 짜서 먹였다. 상처에 약초도 갈아줬다.
난 이미 볼 거 다 봤는데 약초를 갈 때 움찔하며 몸을 숨기려는 게 웃겼다. 건드리면 아파서 그런 걸까?
완전히 아가네. 아프다고 약초를 피하다니.
그는 약을 먹었는데도 열과 상처의 고통으로 밤새 앓았다.
악몽을 꾸는지 뒤척이고 잠꼬대로 누군가에 대한 욕을 하기도 했다. 애타게 부르는 이름도 있었다. 그 사람을 부를 때는 눈물도 흘렸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손을 잡고 토닥여 주었더니 그의 숨소리가 편해졌다.
사흘 정도를 그를 간호하며 지냈다. 그는 내가 해주는 치료를 말없이 받고 있었지만 그다지 의욕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내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케이, 낫기 싫어?"
"... 모르겠어."
"왜? 아픈 거 싫잖아."
"상처가 낫는다고 달라질게 있을까 싶어서."
"흐음. 케이네 엄마 아빠가 케이를 찾고 있지 않을까?"
"글쎄? 그러는 세이는 집에 안 가?"
나도 집에 안 가고 동굴에서 지내고 있긴 했다. 가출했으니까.
"가기 싫어."
"나도."
"그럼... 케이, 우리 이대로 둘이서만 같이 살까?"
내 말에 케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왜 그러지?
"왜 싫어? 케이도 나도 집에 가기 싫으니까 그냥 같이 숲에서 놀면서 지내면 안 돼?"
"어. 그래. 그러자."
"근데 케이 얼굴 왜 빨개졌어?"
"어? 아니 그게... 네가 너무 어려서... 순간 내가 쓰레기 같은 생각을 했거든."
응?
그저 케이가 웃기만 해서 그 의미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곪았던 가슴의 상처에 약을 갈아 주는데 열중했다.
상처부분을 닦아낼 때마다 움츠러드는 게 예전보다 커졌다.
아이 진짜, 상처도 많이 좋아졌는데 왜 이래?
"끙..."
"아파?"
"아니, 아니야. 우리 꼬마 요정님. 얼른 커."
"이래봬도 나 12살이야. 다 큰 거 아냐?"
"아직이야."
그날 이후 케이는 치료를 조금 적극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처가 그때부터 급격히 호전되기 시작했다.
"마음먹으니까 상처 빨리 낫잖아."
"아냐, 네 간호가 너무 훌륭해서 그런 거야."
그는 금세 기운을 차리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가슴 부위의 상처는 큰 흉터로 남을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동굴을 며칠에 한 번씩 바꿔가며 숨어지냈다. 나는 케이에게 내 늑대 친구들이랑 곰 아줌마를 소개해줬다.
숲속에 살던 형제들은 좀 위험하기도 하고 걔들이 워낙 사람들을 싫어해서 보여주지 못했지만 다른 친구들은 전부 케이에게 소개해줬고 케이도 친구들과 잘 지내서 좋았다.
우리는 행복했다. 하루 종일 예쁜 곳을 찾아 산책을 하거나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놀고, 밤에는 별을 보며 수다를 떨었다.
"세이, 네 눈에 별이 있어."
"그게 뭐야?"
"크크, 너 정말 예쁘다고. 왜 이런 말 싫어?"
"아니, 좋아. 자주 예쁘다고 해줘."
가끔 늑대 친구들이 약한 우리를 위해 사냥한 사슴고기를 나눠주면 꼬치에 꽂아 구워 먹기도 했다.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긁어가며 그에게 글을 배우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반대로 내가 식물이나 동물에 대해 알려주면 그는 경청해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누는 기쁨이 이런 거구나.
나는 날 예뻐해 주는 케이가 좋았다. 요정이라 부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그의 손길이 따스해서 기뻤다.
날 괴물이라 부르는 사람들 속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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