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두 남자의 대련.
2018.05.19.
챙챙! 끼이이익!
으, 대련은 언제 봐도 무서웠다. 진검을 쓰던 카일과 테일러의 대련과는 달리 오늘은 날이 없는 대련용 검이었다.
그럼에도 두 기사의 검은 부딪힐 때마다 불꽃을 튀겼다.
검의 궤적에 따라 적당히 자세를 바꿔가며 싸우는 남자들의 모습은 눈으로 따라가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도대체가 왜 저 두 사람은 즐거워 보이는 거야?"
"좋아하는 걸 하고 있으니까."
그렇구나. 저렇게 무섭고도 숨 막히는 상황에서도 즐거움들을 느끼는구나. 어? 그런데 남편 언제 왔어요?
"카일도 대련 좋아해요?"
"아니, 옛날 생각나서 싫어."
여기서 옛날이란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의 이야기겠지? 안쓰럽게도... 나도 싫을 것 같았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과거의 아픈 기억이 떠오르면 너무 힘들 거야.
"그런데 왜 매번 테일러랑 대련해요? 그것도 진검으로..."
"언제 실제 상황이 될지 모르니까, 언제든 널 지킬 준비를 해둬야 하잖아. 내가 다시 대련하기 시작한 거 네가 황궁에 들어오고 나서 부터인걸"
"카일."
울컥하잖아. 날 위해서 그렇게 싫은 것도 다시 한다니까.
나만 해도 어릴 때 힘든 기억 때문에 후작 부인과 마주 칠 때마다 식은땀이 자동으로 나오고 숨이 막히는데...
형을 잃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싸웠던 카일은 더 힘든 고통을 갖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다시 검을 잡을 만큼 날 정말 사랑해주는구나 이 남자는.
나도 용기를 내야하는데...
"그렇게 안쓰러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돼. 네가 위험한 상황이면 나는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이라도 검을 들고 뛰어들 거야."
"카일..."
"감동하지 말래도."
"아니, 그건 자살행위니깐 하지 마요. 벼락 떨어지는데 누가 쇠를 들고 다녀요? 날 좀 맞춰달라랑 뭐가 다르담?"
후훗. 그래도 좋다. 날 위해선 뭐든 한다는 소리니까.
"난, 내 남편 벼락 맞아 요절하는 건 싫으니까 그런 상황에선 정령왕들을 불러서 해결해요, 차라리."
"네, 분부 받들겠습니다."
나의 과학적인 공격에 당황해서 입을 못 떼던 내 사랑은 뒷말에 좋다고 웃어주었다.
타타타닷! 챙!
다시 대련 중인 기사에게 눈을 돌렸다.
흐음, 프리케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프리케와 테일러경은 호각지세였다.
프리케가 검을 휘두르면 테일러가 막아냈다. 그러면서 그 힘을 흘려보내 프리케의 중심을 잃게 만든 뒤 반격했다. 그러면 프리케는 훌쩍 뒤로 한 걸음을 빼며 검을 피했다.
계속 비슷한 대치가 이어졌다. 공격하는 방향을 바꿔가며 치명적인 공격을 가한다고 노력하지만 서로의 방어가 만만찮았다.
이 대련 끝은 나려나?
"카일, 누가 이길 것 같아요?"
"일단 저 검둥이가 졌으면 해."
"저 기사에게는 프리케라는 이름이 있거든요?"
"이름마저 맘에 안 들어."
이름이 무슨 죄라고. 어쩌겠어요? 이런 질투심조차 내 남편의 한 부분인 것을.
단지, 프리케가 영원히 고통받을 것 같아서 미안할 따름이었다. 미안하다 친구여.
쾅!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일격으로 보이는 검격을 서로 펼쳤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머, 둘 다 검이 날아갔어. 무승부인가?"
같이 구경을 하던 시녀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시녀들이 모여 있는 것을 아는지 테일러는 땀에 절은 머리카락을 슬쩍 고갯짓으로 넘겼다.
윽, 더러워.
"꺄아, 테일러경!"
"프리케경이 더 멋져. 저 강인해 보이는 흑발이라니."
흐음. 역시 소녀들의 마음을 홀리는 건 기사들이구나. 하긴 저, 건장한 육체미라니. 좋아할 만해.
왜 갑자기 루카스가 떠오르는 걸까? 숙연해진다. 한동안 더 솔로 생활 즐겨요.
어? 그런데 의외로 에이린은 덤덤하게 응원했네? 전혀 얼굴이 상기되어 있지 않은데? 너 테일러경 좋다고 하지 않았었니?
"프리케가 테이러경이랑 무승부면 계속 내 호위하는 거죠? 실력 괜찮네."
저기요? 남편님? 제 질문에 답을 하셔야지 그렇게 눈썹과 손가락만 까딱까딱해도 되는 겁니까?
뭐가 불만인데요? 아니, 그 불만을 알 것 같긴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응?
"프리케경? 아직 지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랑도 대련할 텐가?"
응? 아니 비겁하게!! 당신 이런 남자였어?
"카일? 저쪽은 방금 격렬하게 대련을 끝냈는데 불리한 거 아니에요?"
"운디네! 자 이제 공평하지?"
아니, 아니! 이 사람이!! 쟤는 평범한 기사고, 너는 소드마스터잖아. 천하의 테일러도 당신한테는 매번 지던데!!
"좋습니다. 전하."
"진검으로 할까?"
미쳤어!! 이 인간들이!
"카일!!!"
"죽이진 않을게."
뭐라고요? 죽이진 않고 팔 다리 한 짝씩만 없애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저 눈빛은 뭐지? 저기요!
"마나는 사용 금지. 오로지 검술 실력만으로 붙는 거다."
"... 아셨군요?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둘이 뭐라는 거야? 혹시 프리케도 소드마스터인가?
진검으로 하는 대련이라서 그런지 둘 다 경갑옷으로 갈아입었다. 아,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두 남자가 너무 진지해서 말릴 수가 있어야지.
"비 전하, 걱정 마십시오. 저 프리케라는 기사 보통이 아닙니다. 저보다 뛰어날지도 모릅니다."
"카일이든, 프리케든 다치면 어떡해요?"
테일러경은 태평하게 말했지만 나는 불안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는 사람들인데 무기 들고 싸우게 해도 될까?
내 걱정을 뒤로 한채 두 기사는 서로 칼을 맞대며 인사를 했다.
휘이잉, 챙!
아니, 아까 대련용 검이랑 휘두르는 소리부터 다르잖아!! 말렸어야 했어.
소리를 지르며 꺅꺅대던 시녀들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지켜보기 시작했다. 다들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공기부터 달라진 분위기. 아까보다 더 치열해진 움직임에 시선을 뗄 순 없었다.
헉, 꺅, 휴우, 아니! 안돼! 어? 흐읍, 꺄악, 엄마얏.
으윽, 내 심장!! 저 남자들 서로 팔 하나는 밸 기세잖아. 아, 못 보겠어, 현기증 나.
"비 전하."
"세이!!"
카일이 어지러워하는 내 모습에 한눈을 파는 순간 프리케의 검이 카일의 급소를 노리고 찔러들어왔다.
"카일!!"
야 인간아 나한테 한 눈 팔면 어떡하냐고? 예전에도 그러더니!!
챙!! 하지만 프리케의 검이 오히려 큰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리고 프리케의 경갑옷의 가슴 부근이 부서지며, 안쪽 옷자락까지 찢어지고 말았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프리케의 가슴께에는 이미 큰 흉터가 보였다.
저거 뒤늦게 피나고 그러는 거 아니겠지? 괜스레 습격당했을 때 죽어가던 적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피비린내도.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하긴, 누군가가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처음 봤었으니, 쉽게 잊힐 리가 없지.
"아아..."
털썩. 눈앞이 순간 까매졌다고 느낀 건 내 착각일까?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프리케 내 친구. 결국 질투에 눈먼 내 남편에게 대련을 빙자한 살해를 당하는 것인가??
"세이!!"
"비 전하."
"프, 프리케, 죽은 거... 아니죠?"
"비 전하, 걱정 마십시오. 저 멀쩡합니다. 상처하나 없어요."
후읍, 후읍. 일단 심호흡을 하자. 목소리가 들리는 것 보니 내 친구 살아있네. 내 남편 살인자가 될 위기는 면했어.
"가, 갑옷이 부서졌잟아요. 마나 안 쓰기로 한거 아녜요?"
"안 썼어.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했잖아."
"그런데도 갑옷이 잘린다고요?"
"비 전하, 황태자께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오로지 힘과 속도만으로 밴 거예요. 그러면서도 제대로 컨트롤하셔서 살에 생채기 하나 없어요. 제가 오늘 한 수 배웠습니다."
그, 그런 거야? 다행이다. 아무도 안 다쳐서.
카일 실력이 대단하긴 한가 봐. 휴우... 가 아니라, 아무리 잘났어도 이런 식으로 대련을 꼭 해야 해? 위험하게!! 적당히들 해야지!!
"나, 다신 대련 구경 안 할래요."
"어, 하지 마, 너한테 해로워."
빠직! 당신 때문이잖아요!!
“나 안 보면 막 마음에 안 드는 기사들 팔다리 검으로 그어버리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안 그래. 약속할게."
"진짜죠?"
"그럼 그럼."
이참에 약속 하나 더 받자. 날 과부로 만들 셈인 거냐 남편?
"대련할 때 진검 쓰지 마요. 누구도 다치는 거 싫어요."
"어? 어, 그런데 애들 실전 경험 쌓게 하려면 진검이 최곤... 아니야, 알겠어,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할게."
나의 째려봄에 카일이 급히 꼬리를 말았다. 카일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자리에 편히 앉았다. 프리케 진짜 괜찮은 거야?
"프리케경. 그런데 가슴에 흉터는... 혹시 예전에 내 비밀 호위하다가 다친 거예요?"
"아닙니다. 비 전하를 만나기 전에, 습격을 받아서 다친 겁니다."
묘하게 거슬리는 상처였다. 가슴의 상처는 치명상 아닌가? 프리케도 카일처럼 죽다 살아남았구나.
그런데, 왜 계속 눈에 남지? 저런 상처 나 본 적이 있었나?
잠시 후 내가 진정된 뒤, 우리는 잠시 모여서 나를 습격한 무리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대귀족회의의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알리페르도 합류했다.
증거는 이미 인멸됐단다. 일부 귀족들은 우습게도 내 습격을 빌미로 후사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후궁 책봉을 서두르라고 했단다.
유사시에 황태자비 대행이 필요하다나?
이런 알비보다도 못한 귀족들!!
그리고 우리 훌륭하신 황태자님은 계획한 대로 아름답게 깽판도 치고, 져주는 척도 하고 왔단다.
"역시 우리 예상대로 그날 후궁을 뽑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네요."
"네, 역시 후궁 간택은 황후와 황후파의 주도였던 것 같습니다."
"카일은 시킨 대로 했어요?"
불만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카일을 보니 안타까웠다. 그저 그런 말을 하는 상황이 정말 싫은가 봐.
"볼라드 공작에게도 현재 상황을 언급해 두었습니다."
이제 안건은 나를 습격했던 그림자 군으로 넘어갔다.
"루피넬리아에 정식으로 항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나라도 지금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 왕권을 두고 내전이 일어났다고 하더라고?"
나도 모르게 프리케를 돌아 봤다. 프리케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음흉하고 정신 나간 놈이랑, 대놓고 미친 욕망 덩어리랑 맞붙었다는데. 그 나라도 정신이 없을 거야."
"대놓고 미친 2왕자는 왕권을 차지하면... 정복전쟁을 펼치려 할지도 모릅니다."
프리케가 착잡한 말투로 말했다. 안타까워하는 게 보이네. 프리케가 진짜 루피넬리아의 왕자라서 고통받는 자국민이 걱정돼서 저러는 걸까?
"1왕자가 왕이 되면 우리야 편하겠지만, 루피넬리아의 입장에선 괴롭기는 마찬가지일겁니다. 무능한데, 사치만 아는, 방탕한 왕재니까요."
"둘 말고는 왕자가 없어요?"
"지금은 죽은 왕비가 살아생전 왕의 후궁 소생들을 모두 처리했다더군. 대부분 죽었고, 막내 왕자는 생사를 알 수 없다던데?"
나도 모르게 프리케를 돌아봤다. 아니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하지만 그 시선을 받는 프리케는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무슨 생각 중인 거야?
"아마 살아있다면, 내가 보기엔 지금의 그 둘보다는 사라졌다는 막내 왕자가 더 왕재에 가깝지 않을까 싶어."
카일이 의미심장하게 말했지만, 프리케는 콧방귀를 뀌었다.
"제가 막내 왕자라면 그런 썩어빠진 나라에 돌아가지 않겠는데요?"
조금은 건방진 프리케의 태도에 테일러가 으르렁거리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야야, 네가 설마 진짜 왕족이라도 여기는 제국이잖아. 적당히 해.
"그림자 군을 고용한 게 누군지 몰라도 꼭 밝혀야 합니다. 황태자비 시해를 위해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다니 반역 아닙니까?"
알리페르의 말에 카일은 프리케를 응시했다.
"자네가 그림자군의 배후를 밝히는데 도움을 줄 것 같은데. 도와 줄 거지?"
"비 전하를 위해서라면, 제 정보망을 가동해 보죠."
프리케. 왜 괜히 그런 식으로 말해서 카일의 눈썹이 올라가게 만드는 거니? 어휴. 네 명을 왜 스스로 깎으려고 해?
아무튼 날 죽이려고 한 이들의 정체를 밝히는 시간은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그래도 황태자비의 습격은 반역인데...
콘스탄트 공작가와 몬테 공작가. 모두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은폐하려는 듯해서 화가 나려했다.
"이번에는 꼭, 그것들의 꼬리를 잡아내서 벌받게 만들 거야."
카일의 각오가 전해졌다. 그는 반드시 날 지켜줄 거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말자.
괜찮아 세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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