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뭐?? 후궁?
2018.05.15.
화재가 났던 마차는 이미 불이 꺼졌는지 연기만 올라왔다. 주변은 마법등으로 가득했다.
테일러 경이 근위대를 통솔해 주변을 정리하다 나를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내가 카일에게 안긴 채로 마차에서 내리자 주변 사람들이 시선을 피해줬다. 조금 민망했지만 그의 품에 안겨있자 불안했던 기운이 사라져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다친 곳은 없지?"
"괜찮아요. 놀랐을 뿐이에요. 펠이랑 기사님들이 지켜줘서 털끝 하나 안 다쳤어요."
"비스 기사단에게 크게 상을 내려야겠군. 처남! 일단 오늘은 같이 황궁으로 돌아가지. 기사단들 모두 황궁에서 쉬면서 오늘 일을 보고하는 것이 좋겠어."
"예. 전하. 그리하겠습니다."
"자, 세이, 그럼 이만 우리들의 집으로 돌아갈까?"
카일은 내게 마차에 다시 타길 권했다. 솔직히 무섭고 싫었다. 카일에게서 떨어지기 싫었다.
"그냥 같이 말 타면 안 돼요? 오늘은 마차 안에 더 있고 싶지 않아요."
"그래, 그러자."
나는 유리아를 불러 알비케라와 흰 까마귀를 부탁했다. 카일은 잠시 흰 까마귀에게 관심을 보였다.
"저희의 은인인 새입니다."
"나의 비를 지켜주었으니 잘 모셔야겠군."
알리페르의 말에 카일은 새에게 호감을 표했다. 혹시 저 새 때문에 내 힘을 들키진 않을까 순간 오싹해졌다.
하지만 카일은 다행히도 금세 관심을 거두었다. 그리고 곧 카일이 내 허리를 받쳐주어 나는 말에 올라탈 수 있었다. 바로 말에 오른 그가 내 등에 바짝 붙어 앉았다.
"꽉 잡아."
나는 그의 단단한 몸에 살짝 기댔다. 카일의 품에 갇히자 놀랍도록 안심이 되었다. 그의 팔에 의지하자 그가 말을 몰기 시작했다.
"카일, 데리러 와줘서 고마워요."
"미안,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큰일 날 뻔했어. 역시 테일러를 호위로 붙였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나 괜찮잖아요. 펠이랑 프리케가 정말 힘껏 나 지켜줬는걸요."
"그래, 처남은 제법 괜찮은 인재더라."
"네, 펠은 정말 멋진 동생이에요. 정말로."
내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에게 친절하고 정중한 펠은 기사로서의 모습도 멋졌다. 그런 남자가 내 동생이고 날 지켜준다고 약속도 했다.
"으으음."
카일의 퉁명스러운 신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분명 질투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바보.
내 동생이고 내 가족이라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쩜 이 상황에서도 이리 귀여울까?
카일의 평소 같은 폭풍질투를 보자, 비로소 내가 습격에서 살아남아 카일에게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런 멋진 동생이 있는데도 내가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남자는 카일뿐이라는 게 신기한 일이죠."
나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제쳤다. 카일의 입꼬리가 씰룩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좋아요?
그가 날 내려다보았다. 푸른 머릿결 아래로 비치는 저 노란 별빛 같은 눈동자가 내 것이라니.
쪽!
그의 붉은 입술이 내 이마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너무 빠르지 않게 모는 말위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함을 새삼 느꼈다.
"사랑해요."
"응. 나도."
"다신, 당신을 못 보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괜찮아, 이젠 누구도 널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게. 오늘 혼자 무서운 일 겪게 해서 미안해."
카일의 몸이 떨리는 것이 전해졌다. 형을 잃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일까? 안 그래도 힘든 사람인데... 나까지 무서워하면 더 속상해하고 힘들어하겠지?
"나, 이제 당신한테 매일 붙어 있을 거니까, 나 매일 지켜줘요. 절대 안 떨어질래. 어딜 가든 함께해요."
입꼬리를 끌어올려 카일을 향해 웃어주었다. 나, 떨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무섭지 않아.
당신을 위해서라면 절대로 다치지 않을 거야.
"비 전하!!"
"무사하신 거죠?"
모일라 시녀장과 에이린이 황태자궁 입구에서 날 발견하고 달려왔다. 두 사람 다 눈물이 흐른 자국이 있었다.
아, 내게는 소중한 사람이 여기에도 있었구나.
루카스도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카일이 먼저 말에서 내린 뒤 나를 안아들듯 내려주었다. 곧 알리페르와 프리케, 테일러경을 비롯한 기사들이 도착했다.
"응, 가문의 기사들이 목숨 걸고 구해줬어. 덕분에 다친 곳도 없이 안전해. 모일라. 시간이 늦어져서 가문의 기사분들을 오늘 황궁에서 쉬게 해야 할 것 같은데 급하게 가능할까?"
"네, 안 그래도 전하가 비 전하를 모시러 나가면서 언질 주셔서 준비를 해뒀습니다."
"그래, 그럼 부탁할게."
모일라는 황태자궁의 별궁으로 20여 명의 기사단을 이끌고 갔다. 알리페르와 프리케는 보고할 것이 있어서 남았다.
"집무실로 가지."
"나도, 갈래요."
"세이, 쉬어야 하지 않겠어?"
"절 노린 자들이잖아요. 누가, 왜 그런 건지 알고 싶어요."
카일의 망설이는 표정에 내가 고집운 피우며 우겼다.
후작부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나를, 아니 아르세이아를 노리는 것인지 궁금했다.
또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기사인 알리페르와 프리케를 고생시킬만한 적의 정체도 궁금했다.
이젠 피하지 않아. 무섭다고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을거야.
"알았어. 같이 가자."
"참, 에이린. 알비케라랑 함께 있는 하얀 까마귀도 챙겨줘. 신선한 과일이랑 뼈 없는 닭고기면 될 거야."
나는 간단한 지시를 내린 뒤 - 제일 안전한 황태자궁에서 왜들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 다섯 명의 남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집무실로 이동했다.
집무실의 소파에 다들 모여 앉았다. 나는 당연하게도 카일의 옆자리였고, 그런 우리를 펠은 다정한 시선으로, 프리케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봤다.
프리케? 뭐, 내가 내 남편이랑 붙어 있겠다는데, 그게 불만이야?
조금 민망해져서 카일에게서 좀 떨어져서 앉으려고 했다. 그러자 카일이 내 곁으로 붙어 앉았다.
"나 더러운데, 떨어져요 좀."
"내게는 운디네, 실프가 상시 대기 중이랍니다. 나의 비."
아 또 이런데 정령력을 낭비하다니. 깨끗해지고 상쾌해져서 좋긴 한데...
알리페르는 정말 대단한 것을 본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면서 아이처럼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아하, 저 아이, 이런 것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것이었구나. 그래서 날 이상하게 보지 않고 좋아한 거였어.
그나저나 나도 운디네랑 실프 얼굴 좀 보고 싶은데, 왜 난 안 보이는 걸까? 치이, 차별 심한 정령들.
"자, 처남, 그럼 보고해 주겠나?"
알리페르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보고했다. 공격받은 일부터, 적의 화살비가 갑자기 멎은 것, 그리고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 적의 대장을 생포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뒤에 기름 주머니와 불화살로 죄인들이 타고 있던 마차가 순식간에 타버리고 죄인들이 모두 죽은 일까지.
나는 슬쩍 알리페르와 프리케를 돌아봤다. 내 능력이라고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조금 원망스러웠다.
그들은 나를 단지 신기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고 이상하지 않다 여기지만 카일까지 그럴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잖아.
"그렇군, 결국 상대의 정체나 사주한 자에 대한 정보는 없는 건가?"
"있습니다."
프리케가 쥐어짜듯이 말했다. 그런 그의 목소리에 다들 시선이 모였다. 프리케의 표정은 많이 심각했다.
"그, 대장으로 보이는 자 말입니다. 제가 아는 자 같습니다."
"프리케, 자네가? 그렇다면 혹시."
알리페르도 아는 표정이었다. 뭐야, 왜 너희들끼리 아는 척이야?
"예, 북부 왕국, 루피넬리아의 더러운 일은 모조리 한다는 그림자 군의 분대장일 겁니다."
"북부 왕국이오? 허, 이거 전쟁하자는 것일까요?"
루카스가 분노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건. 아닐 겁니다. 북부 왕국의 그림자 군은, 음, 왕국의 돈벌이 수단이기도 하니까요. 의뢰를 받고 해결해주고, 뭐. 그런 거죠. 겸사겸사 스파이 짓도 하고."
프리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프리케는 도대체 어찌 저런 것을 아는 거지?
"그것들은... 내 형님을 습격했던 마법사가 있는 제국의 원수가 아닌가?"
아, 카일. 카일의 얼굴에 큰 분노가 서렸다. 그리고...
어쩌면 날 잃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번졌다.
그의 아픔을 이해하기에 마음이 아팠다.
나 무사해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내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며 카일의 손을 꽉 잡자, 카일도 날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마법사는 정예부대에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다시는 이 제국 땅을 밟지 못할 겁니다. 모든 마법사의 적이지 않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나는 모르는 일이 있었구나.
마법사들의 적이라면, 흑마법사인가? 사람을 해치는 마법. 대륙의 마법사들은 인간들의 삶을 개선하는 생활 마법을 연구하는데...
흑마법사가 카일의 형님을 해치는데 일조했구나.
"오늘의 습격자들은 군의 말단들이었습니다."
"군사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일사불란하더니. 까마귀와 자네가 돕지 않았으면 당할뻔했어."
"비 전하의 공이시죠. 그 까마귀를 구하고 화살을 못 쓰, 흡!"
저 프리케가 진짜!!! 나도 모르게 건너편에 있던 프리케의 발을 밟았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리자 나는 크게 당황했다.
"그게, 까마귀는 똑똑한 생물이잖아요. 알리페르와 함께 구해줬는데 알리페르가 공격당하자 은혜를 갚는다고 도움을 준 것 같아요. 그, 그런데 누가 절 죽이라 의뢰한 걸까요? 절 납치하거나 안되면 죽이라고 할 만큼 원한 받을 짓은 안 하고 살았는데."
타국의 군대에 나를 죽이라고 의뢰할만큼 아르세이아에게 원한이 큰게 누굴까?
아르세이아? 너 나쁜짓 하고 살았니?
"원한 문제가 아니야, 세이. 역시, 널 황궁으로 데려오긴 이른 것이었나? 다 쓸어버리고 정리하고 데려왔어야 했는데."
"카일?"
"전하, 비전하를 습격한 일이 어제 일과 떼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협박인 거겠지."
"무슨 일인데요 대체?"
뭐야? 뭘 숨기는 건데?
카일이 우물쭈물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그리고 알아서 해결할 테니 믿어 달라 했었지. 내가 그에게 대답을 재촉하자 루카스가 대신 답했다.
"대귀족회의에서 전하께 후궁을 들여야 한다는 안건이 올라왔습니다."
"네?!"
아하. 그래서 어제 카일이 안절부절했구나.
"혼인한지 이제 겨우 6개월 밖에 안됐는데 말이죠. 후계가 안정되지 않으니 빈을 들여서 후손을 보라고. 난리였습니다."
"어차피 적통이 아니면 후계가 아닌데 미친 것들."
펠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펠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만 몰랐구나.
이 남자들 어째 또 단체로 날 과보호하는 느낌인데?
"매일 밤 황태자께서 비를 찾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은 비 전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냐며 후궁에게서 황자를 보면 비 전하가 그 황자를 양자로 삼거나 후궁을 황후로 세우면 된다 등등의 개소리들이 오갔습니다."
테일러 경도 화가 났는지 좀 험하게 말을 했다.
우리, 이제 아기 갖겠다고 노력하기 시작한지 한 달도 안됐는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임신을 하든, 후궁이 들어와서 임신을 하든 후작부인이 가만히 안 있을 것 같은데...
임신하면 천한 것이 임신했다고 난리하고, 후궁이 임신하면 카일의 마음을 잡지 못했다고 매질을 당하겠지.
어느 쪽이든 후작부인의 분노는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내 얼굴이 점차 일그러져가는 게 느껴졌다. 스스로 표정관리가 도무지 되지 않았다.
"나는 완강히 반대했어. 내게 여자는 세이 너뿐이라고!!!"
흐으응, 우리 카일 내가 당신한테 화난 줄 알았어요?
카일이 루카스와 테일러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내게 변명했다.
자, 그렇다면 회의장에서도 황태자는 이를 거부했으니 귀족들의 원망은 내게 향했겠군.
나 원망의 화살 받이 인가?
"그래서 차라리 절 납치해서 후궁을 들이는 것을 협박하려 한 거군요. 뭐, 내가 죽어버리면 황태자비를 새로 뽑아야 하니 상관없었을 것이고."
"그, 그렇겠지?"
"그 빈인지 뭔지 후궁을 뽑으면 제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줄까요?"
"아니, 그렇진 않겠지."
어차피 뽑아도, 안 뽑아도 자신들이 원하는 세력의 여인이 황후가 되고 후계자를 낳을 때까진 계속될 위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루카스, 그들이 만약 후궁을 원하는 이로 들이고 후계자를 얻는다면 그녀를 황후로 만드는 것, 그것으로 만족할까요?"
"글쎄요. 상대가 누구이냐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는 이번 일, 황제파, 아니 황후 쪽에서 벌인 일이겠죠? 그렇다면 그쪽에서 카일을 이을 유일한 후계가 태어난다면 그땐 카일에게 해를 입히려고 할지도 모르겠네요."
자신들을 적대하는 카일 대신 자신의 가문 출신의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겠지. 루카스가 내 말에 동의했다.
그 말을 듣고 나자 내 결심이 섰다. 그래서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다면 차라리 후궁을 받아들인다 해요."
내 선언에 다섯 명의 남자들의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루카스는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테일러는 못마땅, 프리케는 의외라는 표정이었고, 펠에게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카일은 경악 그 자체였다. 미안, 카일. 일단, 내 이야기를 듣...
"싫어, 절대 싫어. 널 두고 왜 내가 다른 여자를 받아들여야하는데?"
"어차피 황제가 되면 정치적인 목적에서 후궁을 두기도 하잖아요."
"나는 죽어도, 내 아내가 될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차라리 황태자를 때려치우고 너랑 이 황궁을 떠나고 말지, 절대 싫어. 안돼!"
내 말을 끝까지 들어요!
그의 결사적인 반대에 나도 모르게 그를 보고 미소 지었다.
남들은 혼인하고도 애인을 두고, 첩을 두고 바람피우려 난리인데, 이 남자는 황태자 위까지 버리겠다며 화를 냈다.
왜 이 상황에 웃음이 나고 행복할까?
"카일, 받아준다고 말하랬지, 뽑으라고는 안 했어요."
내 말에 다섯 남자의 눈빛이 마법등이 켜진 듯 반짝였다.
훗, 나 제법 똑똑한 것 같아. 만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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