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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44화 (44/126)

45화. 습격, 이 저주 받은 힘으로...

2018.05.14.

"저기, 펠. 설마 저 낡은 다리를 건너진 않겠지? 저 나무다리, 흰개미집에게 너무 많이 갉아먹혔어."

"물론 마차가 지나갈 길은 아닙니다. 걱정 마십시오."

"응."

혹시나 흰개미가 붙어서 황궁까지 따라오면 안 되니깐 근처에 못 오게 해야겠다.

"어머, 눈을 떴구나. 다행이다."

까마귀는 갑작스레 얼굴을 들이민 알비 때문에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날개를 펼치고 경계의 눈빛으로 뒤로 물러나며 카악 거렸다.

쯧쯧, 알비야, 그리 들이되면 안 돼. 상대방이 싫어 하잤아.

"놀라지 마. 친구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그 말에 까마귀가 슬쩍 날개를 접었다. 그러고는 알비케라를 신기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알비케라의 목걸이를 콕콕 부리로 쪼으려했다. 역시 까마귀네.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것을 보니 딱 까마귀의 모습이었다.

까마귀의 특성을 모르는 알비는 까마귀가 쪼아대자 펄쩍 놀라 뒷걸음질 치다 엉덩방아를 찍었다.

"알비, 호호호, 너 겁쟁이였구나?"

오늘 시찰은 나름 성공적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긴 것도 만족스러웠다. 황태자비니까 이 정도는 해내야지.

이 가녀린 생명도 구했고. 알찬 하루구나. 좋다! 돌아가서 카일에게 마구 자랑해야지. 칭찬해주세요 남편님.

"까아아악!"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또 다른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흰 까마귀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워, 워 놀라지 마. 그런데 저 소리는? 이 아이의 부모인가?

"펠, 누군가가 숨어있는 것 같아."

내 말에 펠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기사단이 근접해서 마차를 호위하기 시작했다.

피융!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이 내가 타고 있는 마차의 옆을 맞고 떨어졌다.

"프리케, 누님 곁을 지켜라!"

"펠!!!"

"네, 부단장!"

그 사이 화살이 사방에서 날아왔다. 동시에 복면으로 얼굴을 감춘 남자들이 여러 명 나타났다. 당연히 그들의 손에는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황태자비를 생포해라. 생포가 여의치 않으면 죽여도 된다!!!"

명백히 나를 노리는 외침. 뭐지? 누구야? 왜 날 죽이려는 거지?

복면을 한 습격자들은 일제히 마차를 향해 달려왔다. 우리 쪽 기사들은 이미 검을 뽑고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다.

"렌, 창문 닫아. 황태자가 놈의 축복을 내렸었는지 마차에는 화살이 하나도 박히지 않아, 안전할 거야."

확실히 마차에 부딪힌 화살들은 다 튕겨져 나갔다. 단단한 금속으로 보호라도 받는 모양이었다. 카일이 곁에 있는 것 마냥 든든해졌다.

하지만 바깥 상황을 보지 못하면 불안할 것 같았다.

도대체 누구지? 어째서? 나를 대놓고 지목했으니 강도는 분명 아니었다.

강도가 저렇게 많은 궁수들을 갖추고 있을 리 없는데다가 나를 저렇게 대놓고 노릴 리가 없었다.

후작부인이라고 보기에는 알리페르가 위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누구지? 황후? 어째서? 카일도 아니고 나를 노리는 거지?

카일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아침에 본 것이 마지막이

되려나? 무서워.

이대로 저들에게 죽임을 당하면 홀로 남을 카일이 너무 걱정되었다. 싫어.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게다가 날 지켜주는 비스 기사단과 펠, 프리케까지 나 때문에 이런 위험해 처한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누구도 다치지 말아야 하는데...

비스 기사단은 다들 목숨을 걸고 상대와 싸우고 있었다. 진짜 가문의 레이디도 아닌, 가짜인 나를 위해.

"젠장, 화살이 너무 많아. 이러다 말들이 놀라면 큰일인데."

"프리케, 화살, 그거, 내가 해결해볼게."

"어떻게??"

"화살은 나무니까."

"아!"

흰개미 집이 분명 멀지 않았다. 눈을 마주하고 소리를 내는 것이 더 확실하겠지만, 개미는 군집이니까 병정개미들만 잘 이용하면 단체로 움직일 것이었다.

이 저주 받은 힘으로 남들을 도울 수 있다면...

제발, 제발 움직여줘. 다들 다치지 않게 도와줘. 빨리!!!!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점차 화살이 날아오는 속도가 느려졌다.

"렌, 성공했나 봐. 어떻게 한 거야?"

"아까 흰개미 집이 근처라 했잖아."

흰개미는 나무를 좋아하는 친구들이었다. 어차피 화살의 대를 다 갉아먹을 필요도 없었다. 시위에 걸지 못하게, 깃대 부근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반만 갉아먹어도 시위에 거는 순간 부러졌을 것이다.

또는 날아가다 깃대가 떨어져서 금방 추락하겠지.

"알리페르는 무사해?"

"어. 부단장님의 실력은 나쁘지 않아. 나까지 붙으면 금방 정리될 텐데, 나는 널 지켜야 하니까."

곳곳에서 비명소리와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아는 괜찮을까? 하녀들은?

화살이 날라오는 소리는 멎었지만 말들이 놀라 날뛰는 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나는 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괜찮아. 우리가 지켜줄게.

"꺅!"

마차 위에서 뛰어 내린 남자는 프리케의 검에 맞아 단칼에 목이 베였다. 프리케의 몸이 남의 피에 물들어 가는 것을 지켜보기가 너무 무서웠다.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창문 닫으래도, 못 볼 꼴 많이 보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도 있을지도 모르잖아."

심장이 벌렁거렸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광경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프리케가 최대한 살인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내 시야를 가려가며 싸웠지만 코 끝으로 번지는 피비린내와 소리까지는 막지 못했다.

마차 안에서 보호받는 나는 알비케라와 흰 까마귀를 내 품에 끌어안았지만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이대로 마차에 앉아서 보호만 받을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내가 할 일을 떠올리자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프리케, 내가 저들의 움직임을 늦출 수도 있어. 예전에 우리 술래잡기할 때 기억나?"

"어. 나쁜 생각은 아닌데..."

"대신, 광범위한 영역에 힘을 써야 하니 나 땅이나 풀을 직접 만져야 하는데, 엄호해줘."

다른 시중인들은 겁에 질려 마차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고, 기사단은 싸우기 바빠 내가 뭘 하든 관심이 없을 것이다.

봤다 해도 무슨 일어났는지 이해 못 할 거야.

프리케가 마차문을 열어 나를 잽싸게 꺼내어 문 뒤로 숨겼다. 그리고 문을 열어 앞을 막은 다음 뒤를 경계했다.

알비케라도 나를 따라 내려서 귀를 세우고 으르렁거리며 내 주변을 경계했다. 고마워. 알비.

나는 재빨리 풀에 손을 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치의 생명력의 축복을 내렸다.

그리고 이 축복을 받은 풀들이 적들의 발을 묶어 버리길. 나와 알리페르, 프리케에게 적의와 살의를 가진 자들을 방해해줘!!

나의 기원을 받은 풀들은 스스로의 몸을 움직여 적들의 발목을 걸었다. 비록 마차가 다니던 길이라 풀이 많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다.

발목에 생긴 거추장스러운 방해로 반 발자국 움직임이 늦어진 적들은 아군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에 점차 희생되었다.

"알리페르!!"

마차 문 뒤에서 얼굴을 살짝만 내밀고 돌아가는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알리페르와 맞붙은 남자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 듯했다. 대장인가??

저 남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습격자들이 처리되어가는 듯했다.

"숙련된 병사들이군. 부단장님. 그놈은 생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장인 듯한 이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건재하자 적들도 힘을 내서 생존자들끼리 전열을 가다듬는 모습이었다.

"펠!! 조심해."

아슬아슬 알리페르가 위험에서 벗어났다. 알리페르의 코앞에서 휘둘러진 검에 간담이 서늘했다. 죽이려고 덤비는 자와 생포하려는 자의 대결이라 알리페르가 불리해 보였다.

"프리케, 차라리 저자를 죽이고 나머지를 생포하는 게 낫지 않아?"

"끙. 이 일의 주모자를 찾으려면 저 자를 생포하는 쪽이 좋긴 하지만, 일단 저놈의 복면부터 벗겨서 면상이라도 확인해야 하는데!"

그때 마차에서 작은 소리와 함께 흰 까마귀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 새는 내 어깨로 날아오더니 내게 뺨을 비비며 말을 걸어왔다.

"저기, 프리케. 이 아이가 해보겠다는데, 복면 벗기는 거."

솔직히 다친지 얼마 되지 않은 새에게, 심지어 뼈까지 탈골되었던 아이에게 맡기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화살도 이제 없고, 무엇보다 은혜를 갚고 싶다는 까마귀의 간절한 소리, 그리고 알리페르를 얼른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은 마음에 허락했다.

"그럼, 제 신호에 맞춰 할 수 있는지 물어봐 주십시오."

프리케의 말에 까마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즉시 나는 까마귀를 하늘로 날렸다.

하얀 날개를 펼치고 날아 오른 까마귀는 경계하듯 위를 몇 바퀴 맴돌았다. 그리고 프리케의 손이 올라가는 순간! 빠른 속도로 내려가 발톱으로 머리까지 감싼 적의 복면을 감아 챘다.

알리페르에게 검을 휘두르던 상대는 갑작스러운 습격에 놀라 멈칫했고, 그의 복면은 까마귀의 발에 걸려 벗겨지기 시작했고, 곧 적은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는 묵직한 돌이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그 돌을 검을 들어 막아내는 순간 알리페르의 검에 그 남자의 검은 멀찍이 날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알리페르의 검은 적의 오른팔을 베어냈다.

"저자는!"

프리케는 옅은 신음소리를 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고, 대장을 잃은 암살자들은 순식간에 제압 되었다.

"누님!!"

"펠, 다친 곳은 없는 거야?"

"물론입니다. 누님은 어째서 마차에서 나오신 겁니까? 위험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서..."

"후우. 큰 도움이 되긴 했지요. 일단 마차에 오르시지요. 또 습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응."

내가 마차로 돌아가자 아까 날아갔던 흰 까마귀가 포르르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보던 알리페르는 미소를 짓더니 그 까마귀 앞에 고개 숙여 인사했다.

"도와줘서 고맙다."

까마귀가 부끄러운 듯 내 품에 쪼르르 앉자 마차 문이 닫혔다. 기사단은 다행히 피해가 크지 않았다.

생포한 자들을 꽁꽁 묶어서 비어버린 짐마차에 나눠 실은 뒤 다시 출발하기로 했다. 자살이나 입을 맞추는 것을 막기 위해 입에는 재갈이 물렸다.

좀 더 험악해진 경계태세로 돌아갈 준비를 끝냈다. 그러자 어느새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마차는 출발했을 때보다 더 덜컹거리며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못가 또 한 번의 습격이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아닌 짐마차에 대한 습격이었다. 아마도 생포된 자들을 구출하려는 움직임이었겠지.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그들을 죽이는 것이 두 번째 습격자들의 목적이었다. 마차에 화공을 퍼부었다고 했다.

"누님은 절대 나오시면 안 됩니다. "

알리페르가 창문을 꼭 닫고 멀어졌다. 불이란 소리에 나는 얌전히 안에 있었다. 황궁까지는 얼마나 남은 것이지? 무섭고 무서웠다.

내가 타고 있는 마차에도 불화살을 쏘면 어쩌지?? 나는. 불이 나면 꼼짝도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제발, 제발...

카일, 보고 싶어요.

"황태자 전하다!!"

"대단하다. 순식간에 불을 끄셨어."

그 순간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가도 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직 밖에 적이 있으면 어쩌지? 카일마저 위험해지면 어떡해? 마차 문 손잡이를 눈앞에 두고 망설였다.

말발굽 소리도 들리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매캐한 냄새도 전해졌다.

이미 어둑해질 시간인데도 주변은 밝았다. 그래서 나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밖에 아직 불이 있는 것 같았다.

벌컥!! 마차 문이 열리며 간절히 바라던 노란 눈빛이 내 눈을 가득 채웠다.

"세이!"

"카일. 카일!"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는 그런 나를 받아안았다. 따뜻했다.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났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서 그럴까? 너무 그리웠다. 그의 품이, 그의 체온이, 그의 향기가.

"괜찮아. 내가 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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