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열일 하는 황태자비. (2)
2018.05.13.
뭐지? 심상치 않은 소리에 내가 마차를 세웠다.
"아, 저기 새들이. 펠 잠시만."
눈앞에 여러 마리의 까마귀들이 무엇인가를 공격하는 것이 보였다. 까마귀들이 달려드는 곳에는 하얀 새가 웅크리고 있었다.
"흰 까마귀?"
다들 놀란 표정이었다. 까마귀가 흰색이라니!
그래서 저 새는 공격받는 것이었다. 남들과 달라서 동족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것이었다.
"펠..."
"같이 가시지요."
펠과 내가 새무리가 있는 곳으로 조심스레 접근했다. 프리케도 우리 뒤를 경계하며 따라왔다.
까마귀들은 사람의 접근에 경계하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작고 여린 생명체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당장 그만둬. 저 아이가 너희에게 해를 끼친 것은 아니잖아."
나의 단호한 음성이 까마귀 무리에 퍼졌다.
동물들에게 사랑을 받고, 동물들과 교감을 나눈다고 해서 그들이 전부 내 말을 듣고 모두 내 친구인 것은 아니었다.
"저 아이는 내가 데려갈게. 저 아이가 너희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은 다신 없을 거야."
까마귀는 새들 중에서도 눈치가 빠르고 영민한 편이었다.
내 말 뜻을 알아들은 그들은 우리가 더 다가가자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만약을 대비해 검에 손을 올리고 있던 알리페르는 작은 탄성을 지었다.
까마귀가 날아오르자 나는 그곳에 홀로 남은 작고 하얀 새에게 달려갔다.
하얀 비둘기처럼 보일 만큼 하얀 까마귀의 몸 곳곳에는 붉은 핏자국이 있었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그 새를 내 손 위에 올렸다. 부들부들 떠는 새의 모습에서 나는 익숙한 그림자를 찾았다.
"누님. 괜찮으십니까? 떨고 계십니다."
"으응. 괜찮아. 그저 옛날 생각이 잠깐 나서. 왜 동물이고 인간이고 자신과 조금만 다르면 배척하는 걸까? 그렇게 태어나고 싶었던 게 아닌데. 이 아이도 친해지고 싶었을 뿐일 텐데. 가족에게도 버림받았겠지?"
"누님은,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알리페르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아 주었다. 그의 팔이 조금 든든했다.
"응. 고마워, 펠. 일단 이 새 치료부터 해야겠는데."
"응급처치용 약품을 상비하고 있습니다. 마차로 가시죠."
"인간의 약이 동물에게 완전히 같은 효과는 아니랍니다. 동생님."
나는 주변의 풀밭을 훑었다. 역시나 있었다. 인간의 것은 작은 생물이 쓰기에는 약효가 지나치게 좋았다. 과도한 약은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법이니까.
냉이과의 식물을 뿌리째 뽑으려고 하는데 잘 안되었다. 그러자 알리페르가 손을 빌려주었다.
짝짝짝, 역시 기사의 근력이란!
뿌리랑 잎을 분리해 각각 돌로 으깨서 뿌리는 새의 작은 입에 물려서 즙을 삼키게 했다.
그리고 잎을 상처가 난 부분에 발라줬다.
어깨와 이어진 날개 쪽 뼈가 살짝 빠진 느낌이었는데 프리케가 도와줘서 뼈를 맞추었다. 어릴 때부터 프리케는 이런 일을 종종 도와줬었다.
"음. 펠. 손수건은 내가 나중에 예쁘게 수놓아서 선물해줄게. 엉망이 되었네."
예쁘게는 장담은 못하지만.
"네. 누님."
새를 펠의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안아들고 마차로 향하자 유일하게 따라온 직속 시녀인 유리아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어머, 비 전하. 이 새는?"
"까마귀야. 색이 달라서 미움을 받고 있었나 봐."
"어머나. 이렇게나 예쁜데, 까마귀들이 자신보다 예뻐서 질투했나 봐요."
"그런가?"
"네, 누님. 그럴지도 모릅니다. 달라서가 아니라 부러워서, 시기를 해서 괴롭힌 걸 겁니다. 미워한 게 아닐 거예요."
펠, 고마워.
"응. 다들 기다리게해서 미안해요. 늦었으니 어서 출발하죠."
나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알비케라가 흰 까마귀에게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탐색하기 시작했다.
"알비, 아픈 아이야. 귀찮게 하면 안 돼."
"멍멍!"
까마귀를 알비가 앉던 쿠션에 조심스레 올렸다. 착한 내 강아지는 제 자리를 뺏은 새를 질투하지 않고 그 옆에 조심스럽게 앉아 온기를 나누어주었다.
"역시 착하네, 우리 알비."
까마귀는 아픔에 기절한 것일까?? 눈을 뜨지 못했다. 죽을 것 같진 않지만 안타까웠다. 제발 나처럼 버텨내길. 살아남으면 내가 잘 보살펴줄게.
내가 네 울타리가 되어줄 테니 힘내렴.
고아원으로 도착하자 아이들이 쪼름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후아, 긴장돼!!
"황태자비 전하!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개성 넘치는 개구쟁이들이 쭈뼛거리며 인사하는 것이 깜찍했다.
굴에 숨어 있다가 엄마 여우가 오면 기어 나오던 아기 여우들 같잖아. 아, 쓰다듬어 주고 싶어.
하지만 사랑만 받고 자라도 모자랄 판에,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버려진 아이들. 나와 같진 않았지만 알 수 없는 동질감이 들었다.
"환영해줘서 고마워요. 꼬마 신사, 숙녀님들."
나의 인사에 아이들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부끄러움으로 가득 찼다. 절로 미소가 나왔다.
아이들은 내가 미소 짓자 더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너무 예뻤다.
으아아악, 볼 꼬집어 보고 싶어. 어쩜 저리들 귀여울까?
계속 서있을 수는 없었다. 날 한참이나 기다렸을 아이들을 위해 바로 식당으로 이동하길 원장에게 청했다.
"카이샤 백작부인, 아이들이 나 때문에 점심을 굶고 기다리느라 고생했을 것 같군요. 얼른 식당으로 가요. 황태자궁의 요리사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솜씨를 발휘했답니다."
반조리 된 요리들은 고아원의 식당에서 완성되어 아이들에게 나누어졌다.
평소 내가 먹던 것과 질 차이가 나지 않는 훌륭한 닭고기 스튜와 맛있는 빵과 치즈, 햄은 아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디저트로 만들어 온 과자들도 아이들은 맛나게 먹었다.
역시 우리 요리사들!! 이번에는 무슨 상을 주나?
아이들에게 선물로 가져온 새 옷은 원장에게 감동을 주었다.
"어머, 비 전하. 이렇게 활용도가 좋은 옷이라니요. 대부분 귀부인들은 화려하여 평소에 입을 수 없는 대다가 입고 나갔다간 오해받고 해를 당할 법 한 옷들을 가져왔는데..."
그래서 단정하고 예쁘지만 장식은 없어서 보통의 평민들이 입는 옷으로 가져왔지요. 휴, 다행이다. 나 잘 했나 봐.
힘없는 자가 가진 부는 빼앗기기 십상이니까, 공주님, 왕자님 같은 옷은 가져올 수 없었다.
"마음껏 뛰놀아야 하는 나이니까요."
뿌듯하네. 카일한테 나중에 칭찬해 달라고 해야지.
배불리 밥을 먹은 아이들은 고아원 뒤편의 잔디밭에서 뛰어놀기 시작했다. 알비케라가 아이들 속으로 뛰어들자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부인, 저 아이들은 언제까지 고아원에서 살 수 있나요?"
"18살 성인이 되면 떠나야 합니다."
"그때까지 일을 찾아야 하겠군요."
"그렇지요. 성인이 돼서까지 돌볼 순 없으니까요."
"흐음. 그럼 주로 어떤 일을 하나요?"
"고아 출신은 귀족 가문에서 일하기가 힘든 편이라서요. 거의 몸을 쓰는 막일을 하지요. 여자아이들은 사실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아서 큰 음식점이나 상가 등에 허드렛일이라도 구하면 다행이지만..."
말꼬리를 흐리는 원장의 말에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힘없고, 재주 없는 아이들, 특히나 그중에서도 더 약자인 여자아이들의 미래는 뻔했다.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미소는 저렇게도 찬란하고 예쁜데.
나도 그나마 후작님이 찾지 못했다면 내 미래가 얼마나 더 비참해졌을지 알 수 없었다.
하긴 후작부인조차 날 황태자를 위한 창녀 취급하지 않았던가?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펠, 이 아이들이 제대로 된 기술이나 지식을 배운다면 삶이 달라질까?"
"물론이지요 누님. 이 아이들에게는 당장 먹고사는 것 외에도 미래를 대비할 기술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때 10살, 7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꼬마 여자아이 두 명이 내 앞에서 우물쭈물 망설이며 서있었다.
"예쁜 꼬마 아가씨들 하고 싶은 말이 있니?"
"저기, 여기 이거!"
들꽃을 꺾어서 만든 화관이었다. 작은 고사리 손으로 만든 예쁜 화관.
"예쁘구나. 나에게 주는 거니?"
꽃을 꺾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아이들의 마음이 가득 담겼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깨끗한 물을 보내주셔서 저희 자매가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아..."
"덕분에 리아와 제가 병에서 회복되고 이곳에서 살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더 큰 도움을 줬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먹을 것과 약도 잔뜩 보내주시고! 지금도 이렇게 도와주시고!! 저희 커서 꼭 이 은혜 갚고 싶어요. 음. 저희가 뭘 할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맑고 깨끗한 아이들이 그리는 미래가 밝았으면 좋겠다.
이 아이들을 돕고 싶다. 꼭, 이 아이들이 커서도 밝은 미소를 간직하게 만들래.
사랑하는 내 남편, 카일이 도와줄거니까 힘내자.
"그래, 그럼 은혜를 갚을 수 있을 때 다시 만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약속의 증표로 이 화관을 머리에 씌워주겠니?"
두 소녀는 밝게 웃으며 내 머리 위에 화관을 올려줬다.
"어때? 어울리니?"
"공주님 같아요!"
"리아, 이 분은 공주님보다도 높은 황태자비 전하야!!"
리아라 불린 소녀는 날 감동받은 눈으로 우러러보았다. 나같이 예쁜 여자 처음 보니? 이런, 카일에게 예쁘다 소리 듣다 보니... 부끄럽게도.
"후후, 동생의 이름은 리아이고, 언니 쪽은?"
"저는 루시에요."
"그래, 루시, 리아. 화관은 같이 만든 거지?"
"네!"
"둘 다 어린데 솜씨가 좋구나. 꽃의 색 조합도 좋고, 꽃을 꺾었을 때 최대한 상하지 않는 부분을 찾아 꺾어서 시드는 속도도 줄였어. 손재주뿐 아니라 식물에 대한 이해도도 높은가 보구나."
내 칭찬에 아이들의 뺨이 붉어졌다. 귀여워. 나도 이런 예쁜 아이 가지고 싶다. 꺄아, 카일 우리 얼른 노력합시다.
지키질 못할 수도 있는 약속은 하는 것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안되면 알리페르의 힘도 빌리지 뭐.
무려 후작가의 후계자님이신데 설마 나중에 모른척하진 않겠지.
"음. 나중에 이 언니가 학교를 만들면 첫 번째 학생으로 올래? 원예학과에서 나중에 황실이나 귀족가의 꽃 장식을 만드데 필요한 상식을 배우는 거지."
"네! 네! 네! 꼭 배울래요."
"그래. 약속하는 거다."
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루시와 리아가 서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어쩌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옷도, 구두도, 음식도 아닐지 몰랐다.
미래에 대한 꿈.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 이 작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잘 기억나진 않지만, 내게 그런 꿈이 케이였다. 그가 기다리라고,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기에 그 희망으로 몇 번이고 죽어버릴까, 다 포기할까 하던 순간을 버텨냈다.
그래서 결국 사랑하는 카일을 만났고, 알리페르라는 동생이 생겼다.
이제는 내가 이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되어주고 싶었다.
"저기, 펠. 혹시 날 도와서 같이 학교 만들지 않을래? 아, 기사단이랑 아카데미 일로 바쁘면 어쩔 수 없고."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와 페르데우스 소백작이 누님의 영민함을 칭찬하셨었습니다. 그런 누님과 일한다면 제게는 크나큰 명예지요."
알리페르의 칭찬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이, 적응 안 돼.
괜히 부끄러워서 아이들이 노는 틈에 끼어들었다. 역시 노는 게 제일 좋아.
더러워진 아이들을 수행원들과 씻겨주까지 했다. 으, 이건 좀 힘들었다. 운디네가 간절했다. 나, 진짜 오늘 열일하고 가는 것 같다.
모든 일이 끝나자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이 아쉬워하는 모습에 나는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대신 다음에 올 때는 글을 모르는 친구들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자 아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나도, 일행들도 모두 뿌듯해했다.
나도, 너희들에게 더 도움이 되는 황태자비가 될게. 꼭 다시 만나자. 알았지?
돌아가는 길에도 마차의 창문을 열고 알리페르와 이야기를 나눴다.
알리페르는 겉모습처럼 아주 단정하고,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여자들이 누구나 좋아할 만한 청년일 것이다.
이런 남자가 내 동생이라니! 어깨가 막 치솟았다. 알리페르랑 무도회장에 가면 여인들의 시선이 모이겠지? 안 그래도 황태자비라 질투 받을텐데, 대박이겠다. 호호.
"카일이 이제 유부남이 되었으니 사교계에서 네 가치가 마구 치솟겠는데? 마음에 둔 영애는 없어?"
"글쎄요. 있어도 어지간해서는 어머니께서 허락하지 않겠지요? 그래서 솔직히 마음을 비웠었습니다."
"하긴 그분 성정에..."
"어차피 정략혼을 해야 한다면 아버지처럼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에 고생하지 말고 여인을 마음에 담지 말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입니다. 누님과 매형의 신혼생활을 목격하다보니 혹시라도 마음에 드는 여인이 생기면 무조건 그 여인과 이루어지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중입니다."
"으응."
민망함에 아까 아이들이 줬던 화관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힘을 주자 꽃들이 싱싱해져 막 핀 것처럼 보였다.
펠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미소가 가득해졌다. 너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으앙, 펠 그만쳐다봐. 누나 민망해.
그런 시선조차 민망해 마차 앞쪽으로 내 시선을 살짝 돌렸더니 나무다리가 보였다. 좀 낡아 보이는데, 저리로 건너진 않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