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열일 하는 황태자비. (1)
2018.05.13.
나의 시찰 일이 되었다. 대귀족 회의는 이틀째였다.
카일은 아침 내내 내 품에 안겨서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렸다.
하아, 도대체 누가 이 앙탈쟁이를 제국의 기적이라 한 거야!! 살살 달래고 꼬시고, 나중에 밤에 온갖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더니 벌떡 일하러 갔다.
이런, 아무리 생각해도 당했어. 어제도 투정 부리는 것에 당하고 말았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시찰을 나갈 단장을 시작했다.
"어휴, 시찰 나가셔야 하는 분이 새벽까지 안 자면 어떡해요?"
그건 내 죄가 아닌데... 아니 공범인가? 유발 죄던가??
"미, 미안."
그래도 카일이 체력은 다 회복시켜줬고, 멀쩡한데. 정신은 조금 멍 하긴 하지만, 다크서클도 없고, 흔적도 쇄골 위쪽에는 없는데.
그런데도 잘못한 기분이었다. 일단 얌전히 해주는 시중을 받자.
"아니, 다들 무슨 생각이야? 나, 오페라 극장에 가는 거 아니고 고아원이랑 빈민가를 도는 거야. 이런 화려한 옷차림이 말이 돼?"
"하지만, 황실의 위엄을 보이시려면..."
하아, 저기 시녀님들? 저는 우아하고 고귀한 여인으로 봉사하는 척만하고 올 예정이 아니거든요.
"마을 곳곳도 돌아다니고, 고아원에서 아이들이랑 뛰어놀아도 줄 거야."
분명 황후나, 가끔 봉사라는 이름으로 자기만족을 위해 취미생활을 하시는 귀족 부인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고아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뭐 그들은 후원금을 전달하고, 선물을 전달하고 끝이니까 우아하고 화려하게 차려입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나 기부하고 왔다 이런 이미지메이킹? 그딴 거 할 거면 직접 왜 가? 가문의 마차에 화려하게 짐 실어 보내고 말지.
"최대한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보석 장식도 다 떼! 아이들 안아주다가 얼굴에 상처 입힌다고!"
나의 절대적인 반대에 부딪혀 시녀들이 가져온 드레스들은 다시 고이 구석으로 치워졌다.
대신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가벼운 외출복에, 케이프 형태의 얇은 코트를 걸쳤다. 좋아, 만족해.
"그래도 귀걸이랑 머리장식 정도는 하시죠?"
시녀들이 울상을 지어 그것만 허락했다. 대신 날카롭게 커팅된 것은 다 제외! 진주 장식만 가볍게 했다.
구두도 뛰어다니기 좋은 굽 낮은 단화로 신었다.
흐음. 완벽해. 애들이랑 마구 뛰어놀아야지. 황궁에서 너무 갑갑하게 살았어. 오늘은 뛰어놀 기회야!!
"늦기 전에 출발해 볼까?"
"세이, 배웅하러 왔어."
"카일!"
흐음. 배웅이 문제가 아니라, 회의 땡땡이친 것 같은데? 어제 첫날 회의 끝나고 올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자. 마차까지 에스코트해줄게."
뭐, 모른 척해줘야지. 어릴 때부터 땡땡이가 습관이었으니 어쩌겠어?
"저녁 먹기 전까진 올 거지?"
"그래야죠. 어제처럼 성질부리고 돌아오지 말고, 적당히 눈에 힘 풀고, 말도 들어주고, 그래야 해요. 알았죠?"
강심장인 3대 공작들이야 상관없다. 하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힘없는 귀족들은 카일이 인상 쓰면 할 말도 못하고 돌아간다고요!
내 말에 그저 빙그레 웃으며 내 시선을 피하는 것 보니, 오늘도 귀족들은... 크흑 불쌍해.
"그나저나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다, 해결되고 나면... 말해줄게."
이 남자, 아무리 봐도 수상하다. 나랑 관련된 일인가? 왜 말 안하려는 거지?
카일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황태자궁 앞이었다. 마차가 줄지어 서 있었고, 두 번째가 내가 탈 마차였다.
"누님, 매형."
"펠!"
평상시 보다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공식적인 업무지만, 동생과 하는 첫 외출에 설렌 것 같았다.
"나보다 동생이랑 가는 게 그렇게도 좋아?"
"동생이랑 나가는 거니 당연히 즐겁죠."
삐지기는! 표정 봐. 으이구!
"다녀와서 나머지 시간은 당신이랑만 함께 할 거니까 좀 봐줘요. 알았죠?"
나의 볼 뽀뽀에 맘이 풀린 듯했다.
카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오르려는데 프리케의 경악한 표정과 펠의 흐뭇한 표정이 보였다.
아차, 내가 또 사람들 앞에서, 이런. 다 카일 때문이야!! 부끄러움은 왜 항상 내 몫이냐고.
카일은 펠에게는 격려를, 프리케에게는 경계를 남겼다.
그만 좀 으르렁 거리지.
하아. 친구야 미안. 좀 그래, 내 남편이 질투가 심하단다. 그런데도 내 개인 기사 할 거야?
우리는 배웅해주는 카일을 뒤로하고 마차를 출발 시켰다.
빨리 갔다 올게요.
마차 안에서 괜히 혼자 폼을 잡고 앉았다.
이제서라도 위엄 있는 황태자비인 척이라도 해야지...
알비, 얌전히 좀 가자. 놀자고 꼬시지 마. 나는 지금 우아한 황태자비 코스프레 중이란 말이야.
고아원 아이들이랑 나중에 충분히 놀 수 있어. 참자!
"누님, 심심하지 않으십니까?"
마차의 양쪽에서 호위를 하던 프리케와 펠 중 펠이 말을 걸어왔다. 창을 열고 나는 내 소중한 남동생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 그래도 펠이랑 가니깐 나쁘지 않아."
"저는 이제 보이지도 않은가 봅니다."
반대편에서 프리케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 원 참, 여긴 카일도 없는데 곳곳에서 내게 집착하는 소리가 들리네. 나 이렇게 인기 많았나?
"프리케, 부러우면 자네도 혈육들과 화해하지 그러나?"
"프리케의 가족들이 누군지 알고 있어?"
아, 그러고 보니, 프리케 저 자식!! 중간 성도 있었어! 왕족인가? 아니 왕족이 왜 비스 가문의 기사단이나 하고 있지?
마지막 성이 루피넬이었나? 루피넬, 루피넬리아. 설마! 북부 왕국의 왕족이야? 진짜?
"난, 가족 따위 없은지 오래됐습니다."
조금 화가 난 목소리. 흐으으음. 나랑 비슷한 처지인가? 펠, 네가 잘못했어 이건. 개인 가족사는 건드리는 거 아니다.
"펠, 프리케. 둘은 처음부터 기사가 꿈이었어?"
"저는 살아남기 위해서 배운 겁니다. 죽을뻔했었거든요."
아, 프리케는 후작님이 구해주셨댔지? 무슨 사연일까? 어린 나이에 목숨의 위협을 받다니... 진짜 왕족 출신이면, 카일과 같은 상황이려나?
"저는 비스가의 후계자니까요. 후계자가 아니었어도 멋진 기사였던 아버지를 보면서 그런 기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후작님은, 이제 황실에 충성하지도 않는데 뭐가 멋지다는 거야."
나도 모르게 후작님의 흉을 봤다. 아, 미안. 네 아버지인데 모욕해버렸네.
"누님. 아버지를 아직 원망하시죠?"
아니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누님을 지키려고 하셨습니다."
"저택에 감금하고, 숨겨두는 게 지키는 거야?"
"누님..."
"비 전하, 후작님은 그렇게 나쁜 분이 아닙니다. 그건 제가 보증하죠."
"누님, 기회가 대신다면 아버지와 독대를 하시지 않겠습니까? 두 분 사이 오해도 풀고요."
숨막힐 게 틀림없는데,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라고. 게다가 우리 사이 풀 오해가 뭐가 있어?
윽, 펠, 너 그거 우리 남편에게 배웠지? 우수에 찬 슬픈 눈!! 나, 그거에 약한데...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계속 그런 눈으로 날 계속 쳐다봤다.
"알았어. 생각해 볼게."
다들 날 만나러 올 때는 안대라도 쓰게 하던가 해야지. 제게 뭐야. 다들 눈이 너무 예쁘잖아!
한참을 달려 첫 번째 목적지였던 평민 지구에 도착했다. 마을 촌장은 우리를 열렬히 환영했다.
아니, 영감님. 제가 도와주러 와서 반가운 것은 알겠지만, 부담스러워요.
나는 오늘 황태자비로 온 거니까, 좀 어색하고 자신 없어도 열심히 사람들의 이야기와 불편사항을 들어야지.
"저희 마을은 평민 지구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빈민에 가까운 가난한 마을입니다."
그렇게 보였다. 허름한 마을은 길도 잘 닦여있지 않았고 대부분의 환경이 열악해 보였다.
"비 전하의 영민하심으로 여름 전염병도 피해 갔는데, 이렇게 마을까지 찾아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이 늙은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내게 절을 하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할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제발.
마을에 급한 것은 지난여름 폭우로 끊어진 다리의 보수였다. 뭐, 이 정도는 내가 지시하면 금방 끝내줄 수 있었다.
식수로 사용할 우물도 새로 파줘야지.
"저기 버려진 황무지는 뭔가?"
"원래 황실 소유의 땅으로 나라의 허락을 받고 농사를 지었었습니다. 그런데 소출도 적고, 점차 황폐해져서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흐음. 땅에도 휴식이 필요하고 영양을 충분히 줘야 식물들이 잘 자라는데.
당장 먹을게 급했던 사람들이 땅을 마구 써버렸구나. 저, 땅을 다시 살릴 식물들이 있을 텐데? 그래, 그거면 될 것 같기도 하고.
"누님, 무슨 좋은 생각이 있으신 거지요?"
고민에 빠진 날 보고 펠이 물어왔다. 동생이 주는 관심이라는 거, 기분 좋은 거구나.
내 손짓에 펠이 귀를 갖다 주었다.
"몇몇 아이디어가 떠오르긴 했는데, 음 황태자비가 여기 농민들보다 식물에 대해서 더 잘 알면 이상하지 않을까?"
"나중에 같이 황궁 서고로 가시지요. 가서 같이 책을 찾아서 매형과 페르데우스 소백작에게 보여주면 됩니다."
"같이 해주는 거야?"
"물론이죠."
카일 말고도 내게 든든한 지지자가 생겼다. 진작 친해졌음 더 좋았을 것을. 조금 아쉽긴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잘하면 되니까.
알리페르는 자신을 보고 기분 좋게 웃는 날 상냥하게 지켜봐 줬다.
"비 전하, 부단장님이 그렇게나 좋습니까?"
"그럼. 이렇게나 친절하고 상냥한 동생이 싫을 리가 없잖아. 동생이란 원래 이런 건가?"
"아뇨, 부단장님이 특이한 겁니다. 세상에는 저런 동생 없어요."
응? 왜? 다 이런 거 아냐?
프리케, 왜 그런 세상에 없는 걸 보는 눈으로 우릴 보는 건데? 우리가 그렇게 이상한 남매로 보이나?
"그건, 세상에 이렇게 신비하고 소중한, 아름다운 누나가 나의 누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흐익, 왜 펠과 시찰을 나왔는데 카일과 온 기분이 들지?
우리는 촌장과 함께 마을 곳곳을 돌아보고 지원을 약속한 뒤 고아원으로 서둘러 출발했다.
새벽부터 고생해 준 요리사들의 음식을 나누며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내가 푹 빠진 우리 요리사들의 요리를 먹으면 아이들도 좋아할 거야. 아무렴.
"누님, 아까 마을에서 아이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시는 듯하던데요."
"마을 주민들이 대부분 맞벌이를 하다 보니까, 아이들이 방치되어있더라고."
그중에는 나처럼 학대받는 아이들도 있겠지?
펠은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그것이 용기를 주었다.
"황태자비가 쓸 수 있는 예산이 아직 많이 남았거든. 그 돈으로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잘 하실 겁니다."
"아니야, 난 배움도 부족하고... 아직 모자란걸."
"하지만 누구보다 사람들을 아끼고 염려하시지 않습니까? 이미 충분히 훌륭한 황태자비이시고, 위대한 황후가 되실 겁니다."
내가 진짜 그럴 수 있을까? 카일에게 어울리는 황태자비는 되고 싶어. 할 수 있다면 황후까지도... 그렇게 카일 곁에 평생 머물고 싶다.
"으응. 옆에서 펠이 도와주고 격려해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젠 곁에서 누님을 항상 도울 겁니다."
응응. 내 곁엔 친구들도 있고, 카일도 있고, 동생도 있어. 이젠 혼자가 아냐.
펠과의 대화는 충분히 즐거웠다. 그래서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지겹지 않았다.
알비케라도 알리페르가 마음에 드는지 그 앞에서 꼬리도 흔들고 애교를 피웠다. 프리케에게는 그다지 애교스럽지 않았었는데.
한참을 달리는 동안 숲 옆을 지나게 되었다.
"까악!!!"
"까까깍!!!"
"카하아악, 까악"
무슨 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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