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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41화 (41/126)

42화. 파업을 꿈꾸는 남편 위로하기.

2018.05.12.

회의 준비로 바빴던 카일은 저녁을 먹을 때가 한참 지나고서야 돌아왔다.

"젠장, 다 때려치우고 싶다!!! 세이, 우리 황궁에서 도망칠까?"

"어머, 우리 전능하신 황태자께서 왜 이러실까요?"

"내일부터 지긋지긋한 공작들 면상을 보면서 일주일이나 싸울걸 생각하니 끔찍해서 그러지."

정말 싫은 기색을 드러내며 툴툴거리는 카일의 질 좋은 머릿결을 내가 살살 쓰다듬자 그가 내 손에 기대어 왔다.

"너에게 최고의 자리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음 진작에 황태자 자리 따위 갖다 버렸어."

"백성들이 알면 충격 받겠어요."

"솔직히 내게는 제국보다 네가 더 소중해. 너랑 함께 자연을 누비고 다니면서 힘든 사람들 돕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솔직히 내 욕심에 널 황궁에 가둬둔 거니까. 넌 더 자유로운 삶을 원할 텐데..."

그가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음... 자유롭게 사는 것도 좋긴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보호하에, 당신의 관심 아래에 사는 지금이 행복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구속인걸요."

"진짜?"

"그럼요."

내가 그의 손을 구속하듯 깍지를 끼고 꽉 잡아채자 그도 내 손을 꽉 잡았다.

"자, 이젠 우리는 영원히 서로 구속하는 거예요?"

내 말에 카일은 겨우 밝게 웃었다.

예쁘게 웃는 카일과 같이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둘만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니까 좋네.

충분히 그 시간만으로도 알콩달콩 좋았는데... 그런데 조금 부작용이 있었다.

"같이 씻으면 안 돼…?"

윽, 그의 사슴눈 공격. 이것에 지는 순간 시녀들 보기 민망해지는 순간이 오게 될 것이다.

에이린이 얼마나 놀릴지 예상이 되는데... 으, 그렇게 간절히 쳐다보면. 아, 저 우수에 가득 찬 애타는 눈빛 좀 봐.

"으응. 그, 그럴, 까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그가 너무 방방 뛰며 좋아했다. 애두 아니고. 그가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보는데 괜히 내가 더 빨개졌다.

왠지 내 인생은 카일에게 평생 휘둘릴 것 같다. 이건 망한 인생일까, 성공한 인생일까?

뭐, 그래도 나의 님이 좋아하니까... 괜찮은 거겠지?

나는 시찰 전날 아침, 녹초가 되어 침대에서 뒹굴었다. 망했다. 카일이 어제 밤새도록, 아니 해가 뜨도록 날 재우지 않았다.

흐어엉. 에이린이 두고두고 놀릴 거리를 또 생산했어.

운디네가 체력을 회복시켜줬다고 해서 잠까지 몰아내주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런데 왜 카일은 멀쩡히 아침 일찍 일어나서 회의에 나가냐고? 부럽다. 저 체력이!!

탕약도 꾸준히 먹고 있는데 왜 난 체력이 늘지 않는 건데??

나는 결국 점심때가 지나서야 깼다. 흐윽, 그런 날 바라보는 에이린의 시선이란. 부끄러워, 부끄럽다고!!!!!

그나마 시찰 준비는 마무리되어 있었고, 그저 하루 종일 맛있는 것만 먹으며 체력 회복만 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이제 일하고 퇴근하는 남편을 맞이하러 가볼까? 그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예쁘게 꾸몄다. 좋아하겠지? 입술 색도 좀 더 유혹적이게...

꺄악. 내가 점점 카일을 닮아가는 것 같아. 미쳤어 미쳤어. 적당히 하자. 이런 건 닮지 않아도 되는 거야.

"비 전하, 요즘 갈수록 아름다워지세요."

"고마워 유리아."

클리펠리움 영애와도 친해졌다. 테일러경의 여동생인 이 시녀는 제 오라버니보다 더 날 좋아하는 듯했다.

훗. 도대체 이 황태자 궁에는 나의 추종자가 몇인 거야?

그가 올 것으로 예상되는 길목에서 그를 기다리고 서있었다. 가을날의 오후라 햇빛이 제법 서늘해졌다. 바람도 기분좋게 살랑 거렸다.

생각보다 기다림이 길어지자 시녀들이 힘들어했다. 미, 미안. 내가 너희들에게 갑질하고 있었구나. 나야 사랑하는 사람 기다리는 거지만, 너희는... 상관이랑 더 윗사람 기다리는 거니 얼마나 힘들까?

그래서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오게 해서 차도 마시며 쿠키도 나눠 먹어가며 다들 앉아서 느긋하게 기다렸다.

시녀들이랑 떠들며 노는 것 참 좋네. 역시 수다는 즐거워.

"아, 저기 오시네요."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루카스와 테일러가 함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표정이 심각했다. 카일은 특히나 폭발 직전이었다.

아니, 감히 부인이 마중 나왔는데 인상 쓰기 있어?

"카일?"

"아. 세이."

그가 금세 표정을 풀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자동 반사인가? 나만 보면 웃네.

그런데 왜 표정이 안 좋았지? 일이 잘 안 풀렸나? 여름에 몬테령을 돕지 않은 것 때문에 몬테 공작이 시비라도 건 걸까?

"우리 진짜 황궁에서 도망칠까? 그럼 평민들처럼 맨날 사랑하는 사람이 해주는 밥 먹고 살 거잖아."

다짜고짜 왜 이러십니까? 어제의 2탄인가요?

"피, 매일 내가 해줘야 해요? 카일은 안 해줘요?"

"당연히 나도 해주지. 아침저녁은 내가, 점심은 세이가. 어때?"

"음. 나쁘지 않은 조건이네요. 어디로 갈까요?"

"일단, 지긋지긋한 인간들이 없는 곳."

진지하게 황궁 탈출을 꿈꾸는 우리를 그의 보좌관과 나를 따르던 시녀들이 경악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저기, 카일룸 전하. 아무리 오늘 회의 때문에 화나셨대도..."

"루카스, 나 지금 세이만 아니면 폭발하기 직전인 거 알지? 나는 세이랑 쉴 테니까 당장 대책 마련해 놔. 아니면 그놈들 약점을 찾아오든지."

루카스가 끙 신음소리를 냈다. 아주 심각한 일인가 봐?

"루카스님.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 아닙니다. 비 전하는 모르시는 게 낫습니다."

"카일?"

카일이 내 눈을 피했다. 나랑 관계된 일일까? 진짜 몬테 공작이 카일을 곤란하게 했나?

"세이, 나 배고파. 얼른 가서 쉬자. 나 완전 힘들었어."

일부러 말을 돌리는 것을 알았지만 진심으로 피곤해 보였기에 일단 모른 척하기로 했다.

"모일라, 저녁은 좀 든든한 걸로 부탁해."

"네, 전하."

그는 저녁 먹는 내내 내 눈치를 봤다. 귀족들의 개인 알현 요청은 다 깡그리 무시하고 내 곁에 붙어 있는 것이었다.

"저렇게 다 무시해도 돼요?"

"어, 무시해야지."

알현 거절 사유는 하나였다.

황태자비와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

"요즘엔 이렇게 좋아하는 티 안내도 카일이 나 좋아하는 거 아는데, 왜 그래요?"

"끄응."

대답을 못하는 그를 보니, 분명 회의 때 무슨 일이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왜 말을 못해! 말을 하라고!! 멱살 잡고 흔들면 말하려나?

"오랜만에 후원 산책 갈까요?"

"그대가 원하는 대로."

나와 그는 가을을 맞아 조성해둔 아스터 꽃밭에 섰다. 하얀색, 분홍색, 보라색의 화려한 아스터 꽃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민가의 여인들은 아스터의 꽃 잎을 한 장 한 장 뜯으면서 꽃 점을 본대요.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이 자신을 향하는지 아닌지..."

"우리 세이가 기함할 방법으로 점을 치는군. 죄 없는 식물을 산 채로 뜯다니."

"푸흡. 카일두 참. 내가 식물들을 좋아한다고 해서 남들에게 내 방식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나는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그도 내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내가 꽃향기를 맡자 그도 날 따라 킁킁댔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볼 꼬집으면 화낼려나?

일단 지르자!!

"세, 세이?"

"아 귀여워. 미치겠어."

다른 곳은 다 단단한 사람이 볼때기는 왜 이렇게 말랑한 거야?

"왜 이렇게 심각해요?"

"미안, 내가 그랬나?"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왔다. 아, 그런데 볼에 손가락 자국이 남았다. 어쩌지? 나 황족 시해죄로 잡혀가는 건 아니겠지?

일단 저기는 볼 뽀뽀로 은폐하자!

이미 키스 이상의 것도 할 만큼 한 사이에 뽀뽀만 해도 얼굴이 시뻘개 지는 건 뭣 때문이죠?

내 남편이지만 신기해.

나는 그가 덤벼들기 전에 다시 꽃으로 얼굴을 돌려버렸다.

"이 꽃의 꽃말은 믿는 사랑이래요. 사랑하는 사람을 믿는다면 점 같은 거 보지 않아도 되는데. 후훗."

"세이는 나 믿어?"

"음,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런 걸 왜 물어."

씨익 웃는 그의 미소가 보기 좋았다. 달빛이 그의 미소를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마법이라도 걸어버린 걸까?

이미 그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데, 또 새삼 저 미소에 반하게 된다.

"나도 세이를 믿어."

살짝, 내 양심이 요동쳤다. 나는 아직 그에게 고백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나의 신분, 그리고 내 능력.

언젠가는 말할 수 있겠지? 그래도 그는 날 사랑해 주겠지? 제발...

"고마워요. 이렇게 사랑해줘서, 이렇게 아껴줘서, 이렇게 믿어줘서."

"나야말로."

나를 구속한 나의 사랑. 그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다.

그와 손을 꼬옥 맞잡고 일어났다. 조용한 가운데 풀 속에 사는 오케스트라들의 연주만이 가을밤 하늘 아래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가 내 손을 그의 왼쪽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 손을 통해 전해지는 심장의 두근거림에 내 심장도 같이 뛰기 시작했다.

"널 실망시키지 않게 노력할 거야. 네가 속상해할 일 없도록."

"흐응? 수상한데? 도대체 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끄응. 나중에 알려줄게. 다 해결되고 나면."

그가 고개를 푹 숙이며 힘 없이 말했다.

수상한데? 왜 불쌍한 척까지 하는데?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해결한다고 했으니 잘 되겠죠. 내가 신경 쓰지 않길 바라니까 말 안 해주는 거죠? 그러니 묻진 않을게요. 카일을 믿어요."

내 말에도 여전히 좁은 미간에 내가 입을 맞춰주자 그제야 그의 얼굴이 펴졌다.

"찡그리지 마요. 내 잘생긴 남편 이마에 주름 생기는 거 싫어."

"어. 알았어. 웃을게."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어느새 닮아버린 미소를 서로에게 보냈다. 그가 달빛 아래에서 고개를 숙여왔다.

나는 당연하게도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내 목덜미를 받쳐 들고 깊게 파고드는 그의 키스를 받자 몸이 뜨거워졌다.

음, 내일 시찰 가야 하는데...

"카일, 안아줘요."

그의 귓가에 은밀히 속삭인 내 말에 급해진 그는 날 급히 들고 안았다.

"꺅! 카일?"

"저기, 내가 급해서 그러니까 놀라지 마."

단숨에 우리의 침실 창문 아래로 간 그는 훌쩍 뛰어올랐다. 아니 날아올랐다. 3층까지.

그를 믿었기에 나는 무섭지는 않았다. 창문까지 실프의 힘으로 연 그는 바로 침대 위로 직행했다.

"정말이지 실프가 이런 일을 위해 힘을 쓰는 거 알면 실망할 거야."

"이런 내가 부끄러워?"

"설마. 그럴 리가요."

그는 나에게 바로 덤벼들었다. 그리고 오늘도 능숙하게 내 드레스들을 벗겨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옷 잘 벗겨요?"

"이것도 실프의 도움이랄까?"

정말이지 못 말려. 그렇지만 그만큼 날 원하는 마음에 급해서 그런거니 타박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오늘 밤도 깊고 끝이 없을 예정이었다.

내일 시찰이 있던가? 에이린이 잔소리 할지도 모르는데... 에라 모르겠다. 혼나고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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