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40화 (40/126)

41화. 그가 일하는 곳에는.

2018.05.11.

황궁은 내일부터 시작될 대귀족회의 준비로 들썩였다.

회의장은 이곳 만월궁에서 한참 떨어진 영광의 홀이 될 예정이었다.

"다들 바쁘네, 기합이 들어가 있어."

귀족회의가 끝나고 나면 바로 카일의 탄생연이었다. 궁의 고용인들이 바쁠 수밖에 없었다. 까다로운 귀족들 비위도 맞춰야지, 연회 준비하느라 홀이랑 정원도 꾸며야지.

힘들겠다. 황실에서 대우는 잘 해주겠지?

당연히 나도 바빴다. 우어어어.

내 시찰 준비도 바빴지만, 카일의 대 귀족회의 지원도 할 일이 많았다. 내조를 해야 하니까.

덕분에 우리 부부는 데이트를 할 시간도 없었다. 늘 함께하던 산책도 혼자 할 때가 많아졌다. 물론 밤에는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튼 결국 어제도 점심때나 잠깐 카일을 봤다.

원래 알비케라랑 점심을 먹으려던 나는 그의 방문에 진심으로 기뻤다. 잉, 그리웠어요.

불쌍하게도 알비케라는 우리 둘만의 시간을 위해 밖으로 쫓겨났다.

비록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이었지만 알차게 보냈다. 왜냐하면, 흠흠, 우리는 점심과 함께 서로를 먹어치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미쳤지. 대낮에 이런 짓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으아악, 진짜 미쳤었나 봐. 남편 잘못 만나서 이 무슨 민망한 짓이냐고!!

결국 한껏 흐트러진 탓에 난 카일을 째려보고 말았다. 날, 악의 세계로 끌어드린 원흉!

하지만 나는 끝내 그를 혼내지 못했다. 루카스에게 끌려가고 말았거든. 어찌나 불쌍한 표정을 짓던지, 이긍.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황태자 자리에 쫓겨나도 저런 표정은 안 지을 것 같단 말이야. 호호.

"두 분 뒤늦게 불붙어서, 대낮부터 참 민망하기 그지없네요."

에이린의 타박에 내 얼굴은 용광로가 되고야 말았다. 으아아 부끄러워. 남편 잘못 만나서 이 무슨 망신이야.

쫓겨났던 알비케라도 들어와서 불만스럽게 배를 깔고 엎드려 날 쳐다보고 있었다. 삐, 삐졌니? 미안, 이젠 내게 1순위가 카일이다 보니, 하하하.

그러나 다시 우아하게 빗질을 하고 화장을 고쳐주는 에이린의 표정에는 뿌듯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너, 어째 이 상황을 좋아하는 것 같다?"

"모시는 두 분의 사랑이 깊어져 이렇게 하나가 되었으니 좋은 게 당연하지요. 제가 얼마나 기쁜데요."

생글생글 웃었다. 부끄럽지만 에이린이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것이 느껴져 나도 풉 웃음이 나왔다.

내가 대역인 것을 아는 내 친구, 그럼에도 내가 카일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지지해주던 내 친구.

"에이린. 사랑해!!"

"사양할게요. 황태자 전하의 라이벌이 되고 싶진 않아요."

쳇.

"월! 월! 월!"

"알비가 뭐래요?"

"아까 쫓아낸 거 누구의 뜻이냐고."

"누군데요?"

"어?? 그게, 부부는 말이야, 일심동체라. 하하하."

친구도 곁에 있고, 사랑하는 남편도 있고 난 행복한 여자야.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오늘은 불행해.

"카일 보고 싶어."

오늘 카일이 바빠서 아침부터 한 번도 얼굴을 못 봤다. 얼마나 바쁜지 나와 카일이 힘들게 얼굴 보고 손에 깍지라도 끼려는 찰나, 루카스가 나타나 카일을 데려가 버렸다.

나쁜 보좌관. 두고 봐. 에이린한테 나쁜 소리만 해댈테닷!!

"우리 비 전하, 그렇게 전하가 보고 싶으면 점심 도시락이라도 만들어서 갖다 드리지 그래요?"

"응?"

솔깃하는데 이거? 좋은 아이디어야.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내 솜씨가..."

엉엉 울고 싶을 만큼 엉망인데. 요리사들의 도움을 많이, 아주 많이 받아야겠다.

주방으로 갔더니 황태자궁의 요리사들은 모두 내가 내린 모자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내가 워낙 황태자궁의 요리에 홀려서 내린 상이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황궁 생활 적응의 일등공신들이지, 아무렴. 나는 당신들을 격하게 아낀답니다.

"비 전하. 어서 오십시오!"

"내가 도전할만한 쉬운 요리가 있을까?"

나는 요리사들의 도움을 받아 스테이크를 구워 얇게 썬 뒤 샐러드를 만들었다.

또 식빵을 바싹하게 구운 뒤 블루베리잼을 바르고 햄과 치즈가 층층이 들어가도록 만든 토스트를 예쁘게 삼각형으로 잘랐다.

과일즙과 과육을 섞은 젤리도 디저트로 만들었다.

"비 전하, 요리에 소질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헤에."

다행이야. 내 손이 불곰 아줌마의 앞발은 아니었어. 먹는 것만 잘하는 것은 아니었구나.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바구니에 예쁘게 담는 것까지 끝낸 뒤 메시지 카드를 썼다.

< 처음 해봐서 맛은 보장 못해요. 그래도 맛있게 먹고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 봐요♡ 사랑스러운 아내가 >

좀 민망한가? 하지만 좋아할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민망함쯤이야 무시할 수 있었다.

카일을 만나러 영광의 홀로 향했다. 오늘은 거기 있는 댔지? 아, 신난다. 카일 보러 간다.

"밤하늘을 비추는 작은 별, 황태자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콘스탄트 공작, 잘 지내녔습니까?"

아, 이 심술 맞게 생긴 아저씨. 우씨, 기분 잡쳤어. 카일 보러 가는 길에 하필. 근처에 몬테 공작도 있는 건 아니겠지?

"황태자 전하께 가시나 봅니다."

"네, 그이가 아직 점심을 들지 못했다 해서요."

"허허, 신혼이시라 깨가 쏟아지는군요."

"뭐, 아직 국혼 이후 반년 가까이 밖에 안됐으니까요."

제 아내보다는 덜하지만, 역시나 나를 향한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입이 웃음 뭐 하나? 눈은 진실을 비추는 거울인 것을.

"행복한 신혼생활이 오래 가길 기원하지요."

"감사합니다. 전, 이만."

뭐야? 행복하라는 말 뒤에 숨겨진 꿍꿍이가 뭐지? 뭔가 구린내가 나는데? 기분이 좋질 않았다. 눈빛이 너무 오싹했다. 불길해.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라 더러워서 일단 피하는데, 기분 나빠. 눈이 썩을 것 같아. 얼른 카일로 정화해야지.

...오늘 일진이 왜 이래? 이번에는 몬테 공작이었다. 하아, 마가 끼었나?

"외숙,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니, 그래도 주변에 사람들도 많은데, 예는 갖추셔야 하는 것 아님? 허!

하긴, 내가 날 경멸하는 사람에게 뭘 바라겠어?

"황태자께 가는 길이냐?"

"공작께서는 비 전하께 예를 갖추시죠?"

날 따라왔던 모일라가 눈을 부릅뜨고 공작에게 항의했다. 에이린과 유리아도, 다들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 다들 고마워요.

공작의 눈매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하하하. 이를 어쩌나,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계속 절 막대하시면 안 될 것 같네요.

"비, 전, 하. 지난번 전염병 때의 은혜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덕분에 황태자 전하의 도움 없이 가볍게 일을 마무리했습니다."

아, 이게 물에빠진 거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그 상황이구나. 어쩌라고요? 그러게 왜 죄 없는 사람들 죽였대?

카일은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좋아...

"다, 황태자 전하의 혜안이었답니다. 저야 그분을 도울 뿐인걸요."

"이젠, 가문도 부흥시키셔야지요. 그래서 우리 가문이 적극적으로 황태자비가 되시는데 도움을 드린 것을요?"

뭐래? 아르세이아는 카일이 선택했는데. 설마...? 내가 여기 들어오게 된 게 몬테가의 수작이었던 거야? 약점을 잡으려고 한 걸까?

아르세이아가 고분고분 몬테 공작의 말을 듣는 애는 아니었을 테니까. 그래서 만만한 나를 보낸 것일지도 몰랐다.

"외숙, 저는 아직 고작 황태자비일 뿐입니다. 그리고 중립을 지키는 것이 황실 여인의 덕목인 것을요."

나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살짝 숙인 뒤 그의 곁을 지나쳤다.

"감히, 천한 것이!!"

내 귀에만 들리도록 작게 말하는 소리가 꽂혔다.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떨지 않았다.

나는, 카일이 사랑하는 아내야. 당당해도 돼.

"그런 저에게 어찌 가문을 맡기려 하십니까?"

"건방진 것, 네 정체를 밝혀도 좋은가 보구나."

"그리하면 공작님의 소중한 여동생과 공작님의 가문은 무사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시녀들이 들리지 않게 말을 이어가는 내 손에 식은땀이 맺혔지만 나는 당당하게 그의 눈을 노려봤다.

이 일은 그들도 쉽게 입 밖으로 내밀 수 없을 것이다. 절대로. 아르세이아가 돌아 오지 않는 이상은 그들도 이 사실을 밝힐 순 없을 거야.

내 예상처럼 몬테 공작은 날 노려보다가 결국 먼저 몸을 돌려 떠났다.

비록 당신들의 수작으로 카일을 속이고 이 자리까지 왔지만 더 이상 당신들에게 휘둘리는 나약한 세이렌이 되지 않겠어.

그리고 누구보다도 사랑받고 사랑하는 황태자비가 될 거야. 꼭.

"비 전하, 괜찮으세요?"

몬테 공작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에이린이 물어왔다.

"여름에 카일에게 축복을 받아내지 못 한걸로 외숙의 마음이 상했나 봐. 난 괜찮아. 아, 저기 카일이다. 카일!!"

윽, 나 오늘 운이 나쁜 날인 게 틀림없어. 왜 하필 카일이 비스 후작과 함께인 건데?

프리케나 에이린의 말에 따르면 날 생각하고 걱정하신 것이 틀림없지만... 그래도 많이 불편해.

"세이, 어쩐 일이야?"

"비 전하, 건강해 보이십니다."

"아, 버지도 계셨네요. 카일, 점심 거를까 봐 걱정돼서, 챙겨왔어요."

그래, 바구니만 주고 가자. 카일 미안. 카일 얼굴 봤으니까 나는 괜찮아요.

"자요."

내가 시녀들에게서 넘겨 받은 바구니를 주자 카일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후작, 당신 딸이 날 위해 도시락을 가져왔대."

어? 저거 약간 놀리는 말투인데?

"카일? 거기, 메시지 카드는 나중에!!"

이 성급한 남자! 너는 어쩜 이렇게도!!! 진짜, 우이씨.

"세이가 처음으로 직접 만든 거라고? 우와 우와!! 후작! 세이가 날 위해 직접 요리한 거래."

"저는 제 딸의 손에 물이나 묻히라고 황궁으로 보낸 게 아닙니다. 전하."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야지, 괜히 무게 잡기는? 후작, 당신 딸이 처음으로 한 요리인데 같이 먹지?"

"그래도, 됩니까?"

"아, 넉넉히 싸왔으니 같이 드세요."

이제 그만 가자...

"세이, 저기 나무 그늘 아래 휴식공간에 테이블이랑 의자 있어. 그리로 가자."

"네? 아, 난 바빠서."

"모일라, 다음 일정 미룰 수 있지?"

"네, 이미 30분 여유가 있고, 최대 한 시간 까지 미룰 수 있습니다."

윽, 모일라. 내 편 이래놓고는!!

게다가 이 눈치 없는 남자!! 자기가 황제 폐하 불편해 하는 만큼 나도 후작님이 불편한데!!

싸온 음식은 예쁘게 펼쳐졌고 여느 때처럼 카일이 정령을 불러 음료를 시원하게 바꿔줬다.

음, 역시나, 시원해. 내 남편 능력이 좋단 말이야.

"후작, 아니 장인. 이거 너무 맛있지 않나?"

"그렇네요. 제가 먹어 본 것 중 가장 맛있는 샐러드입니다. 맛있네요. 정말."

카일은 좋아서 싱글벙글이었고, 후작님은 뭐랄까? 감동? 놀라신 건가? 울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복잡해서 잘 모르겠다.

"세이, 왜 많이 못 먹어? 어디 아프거나 한거 아니지?"

"비 전하, 아프신 겁니까?"

"아니, 아니에요. 요리하면서 간을 본다고 많이 먹어서 배불러서 그래요."

"네가 아프면 나 장인어른한테 또 혼나. 너 데리고 간다고 하시면 곤란하니까 어디 안 좋으면 미리 말해. 운디네 부를게."

후작님의 눈치를 보면서 말하는 카일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역시 내 남자의 매력은 귀여움이랄까?

후작님 앞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꽃이 피었다. 역시 카일은 내 미소를 부르는 남자였다.

"아파도 나는 카일 옆에서 아플 거니까, 걱정 마요."

후작님 앞에서 이러면 곤란하려나? 아르세이아가 누려야 할 것을 뺏은 건 나니까. 과연 자신의 딸이 내게 모든 것을 양보하겠다고 한 것을 후작님은 알까?

"비 전하, 황태자께서 잘 해주시나 봅니다."

"네..."

도저히 눈을 맞출 수가 없어 고개 숙인 나를 후작님은 계속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의 비는 부끄럼이 많단 말이야."

"전하께서 아껴주시니 걱정을 덜었습니다."

"장인어른, 내가 꼭 세이를 행복하게 만들 거라고, 잘 지킬 거라고 하지 않았나? 이 사위를 좀 믿지?"

"그런 것 같습니다. 펠이 그러던데 비 전하가 이제 많이 웃으신다고 하더군요. 계속 믿고 제 딸을 맡기겠습니다."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아직은 너무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후작님이 이렇게나 내게 다정하신 건지, 날 염려해주시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몬테 공작이 정말로 진실을 밝힌다면 후작님은 내 편을 들어 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스며들었다. 그게 너무 싫었다. 바보 같아.

... 혹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후작님의 모습이 있는 걸까? 날 그냥 방치만 한 게 아니라 또 다른 모습이 있으셨던 걸까?

"카일, 나 이제 갈게요. 지금 즈음 손님들이 왔을 거예요."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후작님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자 가슴이 찌르르 아파왔다.

어머니와 후작님, 그리고 나.

우리는 함께 행복할 순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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