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그남자가 사라지는 이유.(2)
2018.05.10.
소파에 몸을 기대고 카일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오늘 갑자기 케이의 꿈은 왜 꾼 걸까?
어제오늘 기사들의 맹세를 받아서 그런가?
흐으음. 케이가 나한테 맹세도 했고, 나름 청혼도 했었구나. 12살짜리 꼬마에게 그런 맹세와 청혼이라니.
카일급의 뻔뻔함이었어.
어쨌든 지금은 케이 대신 카일이 날 지켜주고 있고,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걸. 어린 시절의 추억은 이제 묻어 둘 수 있을 것 같아.
"헤에에, 카일이 있어서 좋다."
"나도 세이."
"엄마얏! 뭐예요?? 매번 기척 좀 하고 다녀요."
"충분히 하고 있었습니다만? 네가 딴 생각하느라 못 들은 거지. 무슨 생각한 거야?"
"음, 카일이 키스 후에 왜 사라지는가에 대한 의문?"
"크흑, 콜록콜록!"
카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때마침 저녁식사가 차려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해산물이 가득 들어 있는 부야베스였다. 산골에 살던 나는 민물생선 말고는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황궁에서 먹는 해산물은 신세계였다.
"맛있겠다!"
"그렇게 좋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를 상상하게 해주는 맛이잖아요. 짭조름하면서 탱탱한 식감도 좋고."
"겨울에 남쪽 마르세이아에 있는 별궁에 갈까? 거긴 온화하고 바다도 있고 해서 겨울에 귀족들이 많이 가는 곳이야."
아차. 비스가에도 거기에 별장 하나 있는데, 내가 못 가봤다고 하면 이상하게 여길 텐데. 요즘 너무 편히 지내서 잊고 있었어. 내가... 가짜라는 걸. 이제라도 조심하자.
아르세이아가 양보했어도 넌 가짜야, 세이렌. 아르세이아가 모든 것을 다 줬어도, 방심해선 안돼. 긴장하자.
카일에게 들키는 날에는, 알리페르에게까지 불똥이 튈거야. 에이린도 프리케도. 난 지켜야 해.
"아, 그러고 보니 우리 가문에도 거기에 별장이 있었네요. 호호, 그런데 카일은 바쁜데 거기까지 갈 여유가 돼요?"
"널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시간 낼 수 있어."
흐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러다 내가 천하의 요부가 될 것 같았다. 성실했던 남편을 방탕하고 게으르게 만든 여자!
카일이 소파에 앉아있던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 짧은 거리에도 에스코트를 늘 해주는 그의 신사다움이 늘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참, 세이, 낮에 비스가의 기사랑, 음, 무슨 이야기 나눴어?"
"응? 아까 말했잖아요. 시찰 호위 문제요."
"그게 끝이야?"
"글쎄요.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복수다! 당신도 화장실 간다고 나가서 뭐하는지 안 알려줬잖아! 흥흥흥!
아니나 다를까 그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는 게 보였다. 아이 귀여워. 좀 더 놀릴까?
"어릴 때 알던 기사에요. 비스 기사단의 수석 기사고 친구처럼 지냈던 애거든요. 몰랐는데 어릴 때부터 절 비밀호위 하면서 지켰더라고요?"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으이구 질투쟁이, 또 시작이에요?
"그래서 다시 제 호위기사가 되고 싶다며, 충성 맹세를 했어요."
내가 앉을 의자를 밀어주던 그의 손길이 덜컹했다.
"바, 받았어?"
"고민해 보겠다 했어요. 내가 개인 기사를 책임질 수 있는 그릇인지 확신이 안 서서요."
"실력이 별로 일지도 모르잖아."
"본인은, 테일러 경이랑 붙어서 지지 않을 자신 있다 던데요?"
크크크크, 아, 표정 보고 싶다. 찡그렸을까? 동공이 활발하게 춤출까? 아니면 미간이 파르르 혼자 흔들릴까? 궁금하다!
"카일? 의자 좀?"
"아, 미안. 그런데 그 기사랑 많이 친해?"
무슨 생각인지 카일은 의자를 밀어주고도 계속 뒤에 서있었다. 좋아, 이제 마지막 한방만 날려야지.
"친한 편이었어요. 절 괴롭히던 사람들을 대신 혼내 주기도 하고, 밖에 데리고 가서 놀아주기도 하고. 가끔은 지가 내 어릴 적 은인인 척 우겼다니까요. 자기 애칭도 케이라면서."
우지끈!
엄마야 무슨 소리야?
"카일!! 손!! 괜찮아요?"
"어? 어, 괜찮아."
"왜 그런 거예요?"
"그놈이 진짜 자기가 케이라 그랬어?"
윽, 저기서 화난 거야? 아씨, 아까 꿈꾼 것 때문에 나도모르게 케이 이야기를 했구나.
세이렌, 이 바보!!
케이를 카일이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니. 황궁에 처음 왔을 때 실수로 말 한 것 외에는 한적 없었는데.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만 했어요. 그리고 그럴 리도 없고. 아니 케이이든 말든 상관도 없고."
카일 손에 피는 안 나? 가시가 박혔으면 어쩌지? 힝, 카일,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 때문에 화나서 이런 거죠? 당신이 질투하는 게 좋아서 그런 건데. 내가 잘못했어요. 아이 어떡해, 다친 거 아냐? 손 펴봐요. 빨리요. 나 카일이 다쳤으면 날 용서 못할거야."
조금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왔다. 난 왜 이리 바보 같을까, 좋아하는 사람이 질투하는 모습 보겠다고 상처나 입히고.
여러분, 괜히 질투심 자극하지 맙시다.
"괜찮아 세이. 안 다쳤어. 봐."
그가 부러진 의자의 등받이를 치우고 손을 폈다. 조금 빨개지긴 했는데 다치진 않은 것 같았다.
속상한 마음에 그의 손바닥에 짧게 키스를 해줬다. 카일은 간지러움 때문에 살짝 웃다가 눈물 맺힌 내 얼굴을 보고는 괜찮다고 계속 달래줬다.
그런데도 내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바보같이 내가 잘못해놓고 울기까지 하다니, 난 멀었어.
바보 바보 바보!
울상 짖는 날 보고 카일이 계속 잘게 웃더니 내 눈에 키스를 해주며 밝게 웃었다.
"진짜 괜찮아. 놀래켜서 미안. 세이 이제 밥 먹자. 네가 좋아하는 부야베스가 식겠어."
내가 한숨을 푹 쉬고 새 의자를 갖다 달라고 설렁줄을 당기려는데 그가 말렸다.
윽, 갑자기 왜 그런 뇌쇄적인 표정인 건데? 저기요 남편님? 뭐 하시려고? 우리 밥 먹으려는 중이었거든요?
"자, 우리 어여쁜 비께서 날 약 올려서 의자를 없앴으니, 제 무릎에 앉으셔야겠는데요?"
아, 뭐야. 내가 슬슬 긁은 건 맞지만 힘쓴 건 당신이거든요? 뭔가 억울해. 누가 들으면 저 산산조각을 내가 낸 줄 알겠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카일한테 안겨서 밥 먹기! 좋은데?
"네, 그럴게요."
일단 최대한 불쌍하게 굴어야지. 잊어라 카일룸. 내가 질투하게 한다고 했던 말들 싹 다 잊어주세요. 내 가여운 표정 탓인지 카일의 표정이 많이 누그러졌다.
"세이, 나 먹여줘. 너 떨어질까 봐 안고 있어야 해서 손 못쓰겠어."
"그래요. 자, 아!"
옆으로 안겨서 그의 얼굴을 보는 것도 제법 좋았다. 잘생겼어. 진짜, 정말, 최고로.
아, 왜, 그런데 이렇게, 음식 삼키는데 목선이, 으, 보지 말자. 마음이 이상해지는구나. 이런 늦었어. 이미 봐 버렸어. 어쩜 저렇게 목울대가 예쁘게 움직이냐? 저기에 뽀뽀하면 안 되나?
"세이는 안 먹어?"
"먹고 있어요."
에잉, 옆으로 앉아서 먹으니 불편하네, 입에 막 묻잖아. 냅킨이 어딨...??
"읍!"
밥 먹다 말고 이러믄!!!! 좋네요. 그래요. 좀 식은 거 먹으면 어때요? 일단 즐기자!
"으음, 카일."
아까 질투하라고 잔뜩 자극해서 그런가? 더 깊고, 강렬하잖아. 으윽, 힘들어.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키스한지 얼마 안 됐는데, 왜 또 잔뜩 자극되고 아득해지려는 거지?
근데 싫지 않아. 더 카일에게 다가가고 싶고, 더 깊게 파고들고 싶어. 조금만 더 가까이 가도 되겠지?
"으읏, 세이, 잠시만."
내가 좀 더 그에게 달라붙는 순간, 그의 키스가 멈춰버렸다. 그리고는 달랑 들려져서는 의자에 앉혀졌다.
저기요? 중간에 끊는 게 어딨어요?
"카일?"
"미안, 나 화장실!"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가 급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왜 내 침실 옆에도 화장실이 있는데 밖으로 나가냐고!
황당함에 잠시 넋을 잃었다.
아니다. 이럴 때가 아냐. 쫓아가자!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알아낼 절호의 기회였다.
"전하가 어디로 가셨지?"
입구에서 대기하던 시종에게 묻자 그가 방향을 알려줬다. 황태자의 드레스룸으로만 쓰이는 그의 방!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빠르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조용히 그의 화장실을 찾았다.
내 방이랑 구조가 대칭이니까 오른쪽 끝의 문!
고양이처럼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가 화장실 문에 귀를 댔다. 방음이 잘 되는 방이어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그가 탄식하는 소리 만큼은 똑똑히 들렸다.
"젠장,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이러냐고! 세이가 날 그것만 밝히는 쓰레기라고 생각할 거 아냐!!!!"
뭐가? 뭘 밝혀? 그리고 뒤이어진 그의 살짝 들리는 괴로운 신음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런데 그의 신음소리에 어쩐지 내 얼굴이 빨개졌다.
다시 조심조심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내방으로 돌아오며 그의 말을 곱씹는데 아까의 상황이 떠올랐다. 아니 최근의 일들이 전부.
그, 그, 그니까 내가 키스를 하다가 그의 몸을 더듬거나 밀착했을 때마다 그가 화장실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화악!!!
갑자기 동물 친구들의 짝짓기가 떠오른 것은 내가 구체적으로 아는 육체적 관계가 그것뿐이기 때문이었다.
구애를 하는 수컷이 받아준 암컷과 짝짓기를 성공하는 것은 몇 번 우연히 목격했다. 그때 수컷들의, 어, 그니까, 그걸 본적도 있었는데 그게...
카일이 괴로워하는 게, 나 때문이었던 거야! 어떡해!!! 구애를 하다가 거절당한 수컷은 어찌 됐더라?
애초에 동물들은 구애를 거절당하면 그게, 그렇게 되질 않았던가? 모, 모르겠어. 저거 괜찮은 거야? 몇 주 된 것 같은데. 어쩌지?
걱정과 민망함이 몰려왔다. 동시에 예전에 에이린이 가져다준 로맨스 소설의 삽화가 떠올라 버렸다.
어떡해!!
그는 도대체 왜 참은 거지?
아. 내가 허락하기 전엔 초야를 안 치르겠다 해서 참은 거구나. 그럼 물어나 보지!!!!!
......
나... 방금 그랑 관계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 어쩌지? 세이렌, 진심이야? 너, 괜찮겠어? 아니, 모르겠어. 나 그래도 되는 걸까?
아씨, 갑자기 알리페르가 조카가 보고 싶다고 한 말은 왜 떠오르는데? 펠의 말에 따르면 아르세이아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 아이는 이미 카일의 아내가 되는 것을 포기했으니까... 내가 갖고 싶으면 다 가지라고 했다잖아.
이젠 내가 카일의 황태자비야. 신분은 속였을지라도, 그의 황태자비는 나뿐인 거야.
게다가 알리페르도 우리 사이를 지지해 주는 거니까.
예전에는 이해가 되질 않았던 내 어머니의 마음이 이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임신했을 때 날 지워버리고 새 삶을 살아도 됐는데, 날 포기하지 않은 이유.
나는 어머니에게 후작님과 이어진 끈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실.
나도, 카일과 나를 반반 닮은, 우리의 사랑의 결실을 만나고 싶어. 꼭...
얼마나 귀여울까 리틀 카일이 생기면...
아, 카일이 아직은 아이 갖지 않겠다고 한 것도 같은데.
아니야. 나라의 지존이신 황제 폐하께서 얼른 황손 안겨달라 하셨어. 황명이 우선이라고!!
아, 미치겠어. 나, 원래 이렇게 자기합리화 잘한 거야?
점점 심장이 두근거려. 꺄아, 어쩌지? 뭐부터 해야 하지?? 방안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 안 있음 카일이 돌아올 텐데...
결심을 했다. 그리고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음식들 치워줘. 그리고 씻을 거야. 준비해줘. 그, 그리고 카일한테 씻고 침실로 바로 오라고 해줘."
온몸이 화끈화끈 민망했다.
미안해요 카일, 그동안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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