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37화 (37/126)

38화. 그남자가 사라지는 이유.(1)

2018.05.09.

"황태자 전하, 박자가 틀리셨습니다!"

풉, 이 남자 오늘 왜 이래? 나보다 못 하다니!

우리는 지금 코투리스 남작의 지도하에 탄생연에서 선보일 첫 춤을 연습 중이었다.

연회에서 연주될 춤곡의 순서는 미리 정해놨었다. 내가 심혈을 다해 고른 첫 곡은 최근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 샤를뮤트의 왈츠 변주곡 2악장이었다.

부제는 정령의 여왕. 제국에 구전으로 전해지는 정령들의 여왕에 대한 서사시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작고 여린 생명의 탄생부터, 고난의 시기를 거쳐 행복을 손에 넣기까지의 인생이 담긴 노래.

정령의 왕을 다루는 그의 인생과 닮아서 내가 고른 곡이다. 그의 생일에 걸맞은 곡.

내가 골랐지만 참 센스가 남달라. 호호.

그런데 그만큼 곡이 길고, 변주가 많아 스텝의 변화도 잦아 왈츠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곡이었다.

"곡이 길어서 좋다니까. 세이랑 오래 붙어 있을 수 있어서 완전 좋아."

카일의 이 곡에 대한 평이었다.

처음에 이 춤이 너무 어려워서 카일의 발을 많이도 밟았지. 크흑.

간택연때와 달리 실력이 어설퍼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에효.

그내서 내가 틈틈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해서 완벽해졌는데, 왜 당신이 틀려요? 응?

"카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라 놓쳐요?"

"검정개, 아니 아니, 아무것도 아냐. 미안. 이번에는 잘할게."

"흐으응, 나한테 집중 안 해주면 나 서운해요. 나는 지금 당신만 보고 당신에게만 의지해서 춤추는 건데."

"쪽, 잘못했어."

"아이참, 남작도 있는데."

옛날에야 황태자비의 지위를 위해 공개적으로 애정행각을 벌리랬지만, 이제는 우리 자제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오오, 브라보. 역시 댄스는 파트너와의 애정과 호흡이 결정하지요. 역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십니다."

윽... 카일과 함께하면서 민망함이 내 숙명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으으으, 민망하다. 민망해.

"자, 다시 시작해 보시지요."

카일과 다시 손을 맞잡고 살짝 그에게 기대듯 안겨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세이, 탄생연 때 나랑만 춤춰야 해."

아니, 뭐, 상관은 없는데. 어차피 내게 춤 신청할 사람들이 있겠어요?

"당연하죠. 우리끼리만 춰요."

내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다시 박자를 맞춰나가기 시작하는 카일의 동작이 멋들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리드가 좋아지자 덩달아 내 동작도 더 자연스러워졌다.

허밍으로 멜로디도 따라 하네. 우리 남편은 노래를 시켜도 잘할 것 같아. 어쩜 이리 목소리도 좋을까?

음... 나 콩깍지가 드디어 제대로 씐 것 같았다.

이 연주곡이 나온 지 10년 됐다던가? 자장가로 어머니가 불러주셨던 것 같은데. 나중에 카일에게 잘 때 또 불러달라 해야지.

"자,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두 분, 정말 퍼펙트하십니다."

"고마워요, 남작."

"수고했네."

열심히 춤 연습을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카일은 아직 마무리 안된 일이 있다며 행정관으로 돌아갔다.

카일은 저녁은 꼭 같이 먹자며 내 이마에 뽀뽀를 해주며 정령들을 불러주고 갔다.

만능 정령님들. 아직 얼굴은 서로 트지 못했지만 늘 고마워하는 거 알죠? 덕분에 귀찮게 씻고 옷 갈아 입고 이런 거 안 해도 돼서 감사합니다.

남편이 능력 있으니까 편하구나. 이런 남편 위해서 나도 잘해야지. 탄생연 준비를 잘해서 카일의 체면 잘 살려야겠다.

그래 시찰 준비도 잘하자.

"에이린, 고아원 아이들 옷 준비는 끝났지?"

"네. 말씀하신 대로 화려한 장식을 다 뜯어낸 대신에, 질기고 튼튼한 옷감으로 지었어요."

"모일라, 아이들이 예쁜 옷 기대하고 있을 텐데 실망하지 않을까?"

"아닙니다. 비 전하. 입지도 못 할 화려한 옷보다는 실용적인 옷이 더 나은 선택입니다."

그래도, 예쁜 옷을 좋아할 텐데... 아쉬워하겠지?

"음, 인형이랑 장난감들도 충분하지?"

"네. 말씀하신 목탄 연필과 종이들도 충분히 준비했어요. 걱정 마세요."

"내일 아이들 먹일 간식들 맛도 볼 수 있게 준비해줘. 너무 맛만 있거나, 영양가만 있는 건 안되니까."

"네, 요리사들에게 일러두겠습니다."

그래, 잘하고 있어. 힘내자 세이렌!

"그리고, 저기 에이린. 따로 물어볼게 있는데..."

내 말에 다른 시녀들이 눈치 있게 물러나 주었다.

"왜 그러세요?"

"있잖아. 프리케 말이야. 비스 기사단의 최연소 수석 기사라는 거, 너도 알고 있었어?"

"네. 비 전하만 모르셨을걸요?"

허얼! 대박, 나만 몰랐다고? 나 그렇게 눈치 없고 둔했나?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이린을 보자 그녀는 날 조금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내, 내가 잘 못 한 건가?

"후작님께서 프리케가 14살이었던 봄에 기사단에 데리고 왔었어요. 큰 부상을 입었던 모양인데, 후작님이 치료해주고 종기사로 거둬 주셨죠."

그가 14살이면 내가 13살 때니까, 화재사건 후, 의식을 되찾은 직후였다. 그때의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거부하며 식음까지 전폐했었다. 아마 에이린이 없었으면 그 길로 폐인이 되었겠지.

"그런데, 실력이 어마어마했나 봐요. 15살 되던 해에 바로 수석 기사가 됐죠. 그리고 받은 첫 임무가 비 전하의 호위였어요."

"사생아로 보이는 기사에게 날 맡긴 거구나? 사고칠까 봐. 하긴, 귀족 출신 기사들이 사생아인 날 맡겠다고 하지 않았겠지."

"저기, 언제까지 후작님을 오해하실 거예요? 후작님은 비 전하를 아끼셨어요."

오해는 무슨. 기사랑 드레스 몇 번 보내줬다고... 그게 날 아낀 거야? 정작 후작부인이 날 학대하는 것은 못 막았으면서. 엄마도...

"아무튼 그래서 프리케는 그 이후로 쭉, 날 지킨 거야?"

"네. 얼마나 애썼는데요."

에이린이 들려준 프리케의 노력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내가 상상도 못할 만큼.

후작부인이 내가 있는 곳에 오면 그녀가 오기 전에 날 데리고 어디 뒷산으로 도망쳤다.

그때 나는 그저 그가 나의 능력을 보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 꽃을 피우고 새를 불러달라며 놀자 했었는걸. 내 능력을 신비해하고 좋아해 준 그였기에 의심한 적이 없었다.

몰래 채찍을 고장 내기도 했단다. 그녀가 탄 마차를 고장 내서 못 오게 한 적도 있고.

"게다가, 그, 후작부인이, 음, 하인들을 시켜서, 비 전하에게 몹쓸 짓을 하게 하려고 했는데."

"뭐라고??"

그런 짓도 했다고? 어떻게 그런 일을... 아무리 내가 미웠어도, 어찌... 소름과 함께 분노로 몸이 떨려왔다.

"그걸 알아챈 프리케가 그 하인들을 모조리, 다신 남자구실 못 하게 했죠."

어? 어. 그랬구나. 전혀 몰랐어. 나는 은혜도 모르는 나쁜 아이였다. 미안해, 프리케. 그리고 고마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받기만 했네."

"비 전하를 데리고 도망칠 생각도 했었잖아요."

"그거, 농담인 줄 알았어."

"진담이었을걸요?"

도대체 걔는 수석 기사이면서 가문의 사생아를 데리고 도망칠 생각을 하다니, 무슨 생각이었던 거지??

"걔가 나한테 주군으로 모시겠다며 충성 맹세했어."

"어머 정말요? 걔도 참, 한결같네요."

"아직, 허락은 안 했어."

"왜요?"

"내 기사가 되면, 내가 걔를 책임져야 하잖아. 그럴 책임감도 없고, 걔 앞길 방해하는 것도 같고. 나는 지난 5년간 이미 그 아이의 출세를 방해한 거잖아."

나 때문에 그 아이의 미래를 망치게 할 순 없어. 어찌 되었든 내가 가짜 황태자비인 걸 세상이 알게 되면 그 아이의 평판이 떨어질게 뻔한데.

"프리케는, 음, 비 전하의 곁에 있는 것을 더 바랄걸요? 출세를 바랐다면 이미 떠났을 거예요."

"그런데, 걔가 나한테 벌써 두 번 째 맹세를 했다는데 넌 알아?"

"아, 그거요? 저도 몰라요. 프리케가 둘만의 추억이라며 말 안 해주던데요?"

프리케에게 미안한 마음을 따지자면 그의 바람을 들어 주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짜 황태자비인 나의 신분이 걸렸다.

아르세이아가 양보해줬다 한들, 언제든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카일의 사랑도 내 위치도 다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까.

끙...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일단 좀 쉬자.

"나 잠깐 자도 돼? 머리도 복잡하고, 춤 연습하느라 힘들었어."

"네, 알비케라 데리고 올게요."

역시 내 친구. 알비나 카일이 없으면 잠 설치는 것 알고있구나...

"카일 오기 전에 깨워줘. 눈곱이라도 끼거나 침이라도 흘린 모습으로 만나고 싶진 않아."

이미 민낯은 다 본 사이지만,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으니까. 헤헤.

"세이, 나 케이의 몸과 마음은 오늘로부터 그대를 위해서만 움직이고, 그대를 지키기 위해서만 희생할 것입니다. 나의 주인은 오직 그대이기에, 영원한 마음을 맹세합니다."

케이의 맹세. 갑자기 이게 왜 들리지?

"네가 성인이 되면 신부로 맞이하러 올게. 이 지옥에서 널 구하러 올 테니까, 조금만 참고 버텨. 나도 버텨낼 거니까, 널 위해 살아남을 거니까."

케이!! 어딨어?? 응?

새카만 어둠 속에서 케이의 맹세와 약속만이 울렸다. 내가 있는 공간은 금방이라도 어둠에 먹힐 것만 같았다.

무서워, 케이, 어딨는 거야?

"세이, 나 여기 있어."

"케이, 걱정했잖아. 이젠 안 아파? 돌아다닐만해?"

"응. 네 덕분이야. 네가 구해 준 약초들은 알려진 약들 보다 효과가 뛰어난 것 같아. 벌써 이렇게나 움직일 수 있으니까."

"자! 과일. 든든한 고기를 먹어야 빨리 나을 건데.”"

"세이가 주는 거면 뭐든 맛있고 건강해질 것 같아. 그리고 네 친구들을 잡아먹을 순 없잖아."

여전히 새카만 꿈속에서 앳된 소녀의 목소리와 상냥한 남자의 목소리만 울렸다. 조용하고 차분한, 그러나 들떠 있는 목소리.

"새알이라도 먹으라니까."

"아기 새들이 태어날 수도 있어서 넌 안 먹는다며? 네가 싫어하는 것은 나도 안 해."

"케이, 헤헷. 나 네가 너무 좋아."

"크큭, 나도 네가 좋아. 얼른 커서 나한테 시집와라. 내가 너 안 울게 해줄게."

"진짜?"

"응. 맨날 웃게 해줄게, 진짜로."

소녀가 소년의 말에 꺄르륵 웃었다. 청아하고 맑은 웃음소리는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세이렌 넌 그때 행복했구나, 케이와 함께.

"세이, 이제 일어나야지. 저녁 먹자."

어둠 속에 갇힌 나를 빛을 향해 부르는 상냥한 목소리. 세이렌, 너는 지금이 더 행복한 거지?

"으음, 왔어요? 나의 황태자님."

내가 뻗은 팔로 그의 목을 감싸자 그가 날 가볍게 안아올렸다. 산뜻한 카일 냄새. 너무 좋아.

그저, 카일의 곁이라서 나 너무 행복해.

"왜 아무도 날 안 깨운 거야?"

"네가 잠든 얼굴 옆에서 지켜고 싶어서 못 깨우게 했지."

"너무해, 나도 카일 얼굴 마구 들여다보고 싶은데!"

"그럼 보시든지요?"

"그럼 누워요, 여기."

카일이 마구 키득거리면서 얌전히 내가 가리키는 곳에 누웠다. 좋아. 이제 잘생긴 그의 얼굴의 곳곳을 뜯어 보자.

"흐음, 우리 남편은 이마도 예쁘고, 속눈썹은 왜 이리 길대요? 지나가던 여자들 홀리게?"

"나는 너만 유혹하면 되는데?"

"코도 반듯하고, 입술은 너무 섹시하잖아, 반칙이야."

"다 나의 비에게만 허락했습니다만?"

"흐으응, 당신 입술 내 거라고 확인 도장 좀 찍어놔야겠어요."

내가 고개를 숙이고 그의 유혹적인 입술로 바로 달려들자 그가 팔을 뻗어 내게 더 밀착시켜왔다.

둘만의 은밀한 대화. 말은 없지만 서로를 향해 고백하는 키스는 끝날 기미가 없었다. 그저 이 순간, 우리만을 위해 시간의 요정이 잠시 태엽을 감는 것을 잊은 것만 같았다.

나에게는 당신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계속해서 나는 카일에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런 나를 받아주고 응해주는 카일에 의해서 내 숨은 더욱 거칠어지고, 내 체온은 점점 달아올라만 갔다.

프리케의 거취에 대한 고민도, 조금 전 꿈에 대한 생각도 잊힐 만큼 아득하고도 달콤한 시간.

음, 카일에게 더 닿고 싶어.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자세를 고쳤다.

"으음, 세이, 이제 밥 먹자. 이러다 내가 널 잡아먹겠어."

에잉. 좀 더 하고 싶은데. 배에서 꼬르륵거리기는 하니까, 일단 여기까지. 자기 전에 더 해야지.

"나,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응? 이거 좀 낯익다? 요즘 키스하고 나서 화장실에 꼭 가네? 왜지?

게다가 그럴 때마다 나 피하더라? 뭐야? 수상해!!

오늘은 내 기필코 매번 무엇을 하는 건지 답을 알아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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