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36화 (36/126)

37화. 비스 기사단의 두 기사.(3)

2018.05.08.

알리페르가 내 진짜 동생이 되어주기로 한 다음 날, 프리케가 찾아왔다.

"프리케경 어서 와요."

"밤하늘을 비추는 작은 별, 황태자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아, 어색해. 이 뻘쭘함. 우리 사이가 이렇게나 멀었나? 한 계절이 지났을 뿐인데, 우리 너무 어색해졌어.

"일단, 차 좀 마셔요."

"네, 비 전하."

프리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내게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알리페르가 보낸 호위 계획서였다.

"펠은 정말 꼼꼼하구나."

"..."

쟤 왜 저리 조용해? 아주 수다스러운 녀석이 저러니까 염려되잖아.

"저기, 프리케... 경? 왜 이렇게 조용해요? 평소의 당신답지 않게?"

"비 전하시니까요."

그 전에 우리는 친구였는데, 나는 진짜 황태자비도 아닌데 왜 우리가 거리감을 느껴야 하는 거야?

"우리는 그래도 어린 시절 친구 아닌가요?"

"이제는 친구처럼 지내면 안 된다 했습니다."

"누가요? 친구라는 관계가 신분과 관계있다던가요? 아니, 그런 게 어딨어. 너 나랑 다시 안 볼 거야? 내가 타고날 때부터 황태자비였던 것도 아니고, 네가 내 사정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뭐가 문젠데? 너랑 나랑 다를 게 뭔데? 지금 뒤집어쓰고 있는 신분이 사람의 본질이야? 어휴, 그럼 황족들은 친구 하나도 없어야겠네. 외로워서 그냥 죽으라는 거구나? 응?"

내가 막 쏘아붙이자 프리케의 볼에 점점 바람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푸, 푸하하하. 여전하구나, 렌."

"그 있잖아. 나의 옛 애칭을 궁 안에서 쓰는 건 자제하자. 날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아, 미안 미안, 비 전하. 조심할게."

표정이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긴장했었구나. 하긴, 견습 기사로 몇 년을 살다가 정식 기사 되자마자 황궁 출입이라니 긴장할 만도 하네.

그런데 프리케가 온 건 알리페르의 배려인가? 하긴, 다른 기사들이 왔으면 완전 불편하지. 아무렴.

"잘 지낸 거야? 갑자기 어떻게 정식 기사가 된 거야? 사생아라 뒷배가 없어서 매번 시험에 떨어졌다며."

"비 전하가 갑자기 유부녀가 되어 황궁으로 떠났잖아. 널 곁에서 계속 지키려면 내가 따라오는 수밖에."

"어? 고마운 소리네. 그런데 그거 우리 카일 앞에서는 하면 안 된다. 질투가 무지 심해서 너 해코지 할지도 몰라."

진담이야, 친구야. 내 남편이지만 나도 그 끝없는 질투는 제어가 안 돼서 말이야.

"행복해?"

"응, 여기서는 다들 날 예쁘다 그러고, 잘한다 그러고 늘 칭찬만 해줘. 특히나 카일이 매일 날 웃게 해주는 걸?"

"너... 그를 계속 애칭으로 부르네?"

"응. 소중한 사람이니까."

응? 너 왜 그런 표정인데? 서운해?? 아, 서운할 것 같긴 하네. 프리케는 매번 자신의 애칭인 케이로 불러 달랬는데, 내가 거절했었지.

하지만 케이는, 나만의 왕자님에게만 불러주는 이름이었는걸. 그게 애칭인지 진짜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애칭이 케이만 아니었어도 너도 불러줬을 거야. 내 친구니까."

어? 왜 더더더 섭섭한 표정인데?

"그래, 그렇구나. 내가 너무 늦어버렸구나. 아니다. 그래도 나 네게 맹세했었으니까."

"프리케가 내게 맹세했었어? 언제?"

프리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 나 너와 관련된 기억 중에 중요한 걸 지워버렸나 봐.

미안해... 프리케.

화재사건 이후, 나는 너무나도 큰 고통에 시달렸고,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었다. 그런 내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괴로운 기억들을 스스로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비겁한 방법이지만 내 영혼을 살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부작용으로 내게 소중했던 과거들 중 일부도 지워졌다.

그래서 케이의 얼굴도 기억 못 하게 됐는데...

"뭐, 상관없어. 네가 기억 못 해도, 다시 맹세하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어? 무슨 맹세? 엄마얏!! 이거 어제 본 자센데, 데자뷔인가? 저기 프리케?

"나, 프리케 사크라리움 루피넬, 밤하늘을 비추는 작은 별, 황태자비 전하께 제 명예와 검을 바쳐 그대를 수호하는 기사가 되고자 합니다. 나의 충성은 그대의 아래에서만 빛이 발할 것이니 제 생명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프리케의 맹세는 어제 알리페르에게 받았던 것과는 무게가 달랐다. 뭐라 말하기 힘든 부채감.

그리고 뭘까? 들어 본 것 같은데?

"나는... 프리케, 네 맹세를..."

"이번에도 거절하실 참인가요?"

내가, 네 첫 맹세도 거절한 거야? 어쩌지?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앞은 기억나지 않지만, 또 거절하면 상처받겠지?

어쩌지? 알리페르야 비스 기사단이 우선이고, 개인 기사라는 느낌은 아니라서 동생의 기사 맹세를 받았었다. 충성서약은 아니니까.

"그냥, 레이디의 기사가 된다는 의미이지, 주군으로 모시겠다거나 그런 의미는 아닌 거지?"

"주군이 되어 달라는 말입니다."

차라리, 이쪽이 나은 건가?

"내가, 네 주인이 되면, 너에대한 모든 책임은 내게 생기는 거 맞지??"

"그렇지요. 제가 황태자비의 개인 기사가 되는 것이니까요."

내게 개인 기사가 생기면 주급이나, 장비 등은 다 내가 지급해야 하는 거던가?

어디보자, 내 품위 유지비에서 얼마 정도 예산이 남더라?

나 사치는 안 하고 있었고, 혹시나 해서 모아둔 재산이 많긴 한데, 흐음...

친구를 개인 기사로 승급시키면 지연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하지... 않겠지. 얘가 내 친구인 걸 아는 건 기껏해야 비스가 식구들과 에이린 뿐이니까.

"저기, 비 전하. 제 실력이 못 미더우신가요?"

"응?"

그러고 보니 서약이라는거 하고 부터 존댓말이네. 으윽, 진짜 날 주군으로 삼으려는 거야?

"사실, 지금까지 말씀 못 드렸는데, 저, 비스 기사단의 수석 기사입니다."

오오! 나 없는 동안 열심히 했나 봐? 맨날 견습 기사더니!!

"정확히는 제가 황태자비 전하를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요. 비스 기사단의 최연소 수석 기사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날 처음 봤을 때면 5년 전이잖아. 프리케가 나랑 에이린보다 1살 많으니까, 15살 때 수석 기사였다고?? 어? 그게 말이 돼?

"최.연.소 수.석 기.사.를 개인 기사로 부릴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실력만으로는 황태자 근위대 단장에게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뭐야, 나한테 분명 견습 기사라고 했잖아.

"왜, 지금껏 거짓말한 거죠?"

급 공손해졌다. 왠지 친구처럼 굴면 안 되겠는데?

하! 아니 그런데!! 간택연 때 내가 혼자 가려는데, 견습 기사라서 연회 한 번 못 가봤다고 불쌍하게 굴어 놓고는!

비스 기사단의 수석 기사면, 평민이면 기본으로 가문에서 자작 작위도 주고!! 대단한 대접 받는 자리잖아!!

"후작님이 부탁하셨습니다. 비 전하의 호위를요."

뭐라고? 그분이 왜 내게 호위를 붙여? 저절로 고개가 갸웃해졌다.

"무슨 소리?"

"3개월간 혼수상태에서 깬 뒤 비 전하께서는 심리적으로 불안하셔서 1년 넘게 칩거하셨었죠."

그랬지. 밖에 나갈 수도 없었는걸.

"그래서 제 정체를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비스가문과 관계된 사람만 봐도 경기를 하셨잖습니까."

그랬지. 그때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나는 세상과 격리 된 채 죽어갔을 거야. 에이린이 날 밖으로 꺼내줬고, 프리케가 날 세상으로 데리고 다녀줘서 살았으니까.

"그래서 신분을 속이고 5년이나 내 곁에 있었나요?"

고마움 반, 배신감 반.

"죄송합니다. 처음에는 후작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암울한 과거를 가지고도 밝게 살기 위해 애쓰는 아가씨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끝내 말씀 못 드렸습니다. 곁에 있고 싶어서요."

그래, 그러고 보니 프리케는 처음에 날 아가씨라 불렀던 것도 같다. 후작님이 보낸 사람이었기 때문이구나.

"실력은 문제가 아니에요. 개인 기사는, 기사와 주인의 신뢰문제지요."

"5년간 신분을 속인 것 때문에, 안되는 겁니까?"

어머, 네가 이렇게나 시무룩한 표정도 지을 줄 알았어? 늘 곁에서 구김살 없는 모습만 보다가 이러니깐 정말 낯설다.

"그렇죠. 그걸로 점수 엄청 많이 잃었죠. 하지만, 대신 친구로 곁에서 머물러 주면서 새로 쌓은 신뢰가 있잖아요. 그걸로 신뢰 점수는 회복이에요."

"그럼??"

눈에서 빛이 나네? 윽. 미안해 프리케, 진짜 미안해.

"조금만 더 고민해보면 안 될까요? 그게, 경도 알다시피, 내가 진짜도 아닌데 개인 기사를 고용해도 될지 모르겠고..."

"만약에 그만두시더라도 아가씨를 따를 겁니다. 이번 임무에 자원한 게 그 이유입니다. 후작님께서 비 전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 황궁을 탈출하게 해주라 하셨습니다. 저는 받아만 주시면 언제든, 무슨 일이든 따르겠습니다."

저기 내가 대역 그만두면 나 백수 되고 너한테도 주급 못 줘. 그런데 어떻게 그러라는 거야?

난 널 책임질 자신이 없다.

"그래도, 며칠만 더 고민할게요. 시찰 다녀오고 나서 대답하면 안 될까요?"

"네..."

"자, 그럼 프리케? 이거 먹어봐. 여기 황태자궁의 요리사들 솜씨가 진짜 좋아."

빨리 먹고 가야 네 신상에 좋을 거야. 얼마 안 있으면 누가 올 것 같거든.

곧, 나는 댄스 수업이 있었다. 귀족영애로 자라지 못했으니까 제대로 사교춤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 내 여동생이 간택연에서 아주 멋들어지게 춤을 춘 바람에, 에효.

그래서 탄생연을 앞두고 열심히 배울 수밖에 없었다. 비교되면 안 되잖아.

문제는 내가 몰래 춤솜씨를 갈고 닦으려는데, 내 남편이란 사람이 거기에 매번 끼어든다는 게 문제지. 그래서 곧 수업 가자고 쪼름히 나타날 예정이었다.

"절, 빨리 돌려보내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뜨끔. 검사들은 죄다 독심술이라도 하는 거야? 카일도 기가 막히게 내 마음 잘 짚어내는데.

"아니, 내가 뒤에 춤 연습을 해야 해서. 탄생연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내 춤솜씨가..."

"형편없었지. 내가 너한테 가르쳐주다가 밟힌 내 발등을 생각만 해도 어휴."

"야! 나 그래도 왈츠는 잘 추거든?"

"그게 신기하단 말이야. 누구한테 배운 적도 없댔는데, 잘했지. 혹시 잃어버린 기억 속에 배운 적 있는 거 아냐? 잘 생각해봐. 나같이 잘생기고 늠름한 기사도 넘치는 신사에게 배운 거 아냐?"

"글쎄?"

내가 배웠을 만한 사람이라면 케이인데... 걔도 나도 귀족은 아니었을 텐데? 케이가 글을 가르친 것은 확실하지만.

"야! 그리고 네가 잘생긴 신사라니! 지나가던 알비가 비웃겠다. 우리 카일정도로는 생겨야 진짜 잘생긴 거고, 몸도 우리 남편 정도는 되야 늠름하지."

안겨보니까 알겠더라. 우리 남편 가슴 진짜 단단해. 여름에 가끔 팔뚝 봤었는데 막 조금만 힘줘도 예쁘게 꿀렁거렸어. 그 정도는 돼야지.

"이야, 우리 황태자비 전하 진짜 사랑에 빠졌구나. 그분이 그렇게 좋아?"

"응? 으응. 좋아. 지금은 그가 곁에 없을 내가 상상이 안 갈 만큼..."

"내가 네 곁에 없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 상상은 영원히 안 해도 돼. 세이."

윽, 이 인간은... 어째서 매번 중간에 끼어드는 거냐고? 앞에 시녀들은 뭐 하는 거야? 다시 정신교육 시켜야 해?

하긴, 죄 없는 시녀들이 무슨 잘못이야. 내 눈앞의 남자가 이 황태자궁의 갑이신데...

그래도 문 닫았을 때의 이야기는 못 듣는 것 같으니 괜찮겠지 뭐.

"카일. 왔어요?"

"창공을 비추는 두 번째로 높은 태양께 인사 올립니다."

"왜 처남이 안 온 거지?"

헉, 저 남자가 왜 살기를 뿌리려는 거야? 이봐요 남편 스톱!!

"비스 기사단 일로 바빠서 수석 기사가 대신 왔대요. 카일, 일 다 끝났으면 얼른 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왜 이리 늦게 온 거에요?"

내가 냉큼 팔짱을 끼자 카일의 기운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아니 근데 왜 이 두 남자, 표정들이 극적으로 차이 나는 건데? 승리자와 패배자?

저기 프리케. 네가 이해해. 네가 나의 몇 안 되는 친구지만 어쩌겠니. 이분이 내 남편이신 데다가 질투가 워낙 심하단다.

나의 사랑을 위해 우정은 잠시 접어두자.

배신자라고 생각하지마.

다... 그런 거 아니겠니?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