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35화 (35/126)

36화. 비스 기사단의 두 기사. (2)

2018.05.07.

"비 전하, 걱정 마십시오. 부단장님은 단장님, 그러니까 후작님의 명만 듣는 충직한 기사입니다."

"프리케, 적당히 해라."

우와 쟤 눈빛 좀 봐. 불쌍한 프리케, 너도 체하겠구나.

우리 카일 밑의 관료들도 프리케랑 같은 신세겠지? 수하들 종종 내가 챙겨야겠어.

"누님, 아까 제가 한 말은 잊으셔도 됩니다. 단지, 누님께서 황후가 되시기 위해 필요한 경계심이 부족하여 드린 말씀입니다."

"저기 그러니깐, 펠, 내가, 어 그러니까, 펠은 나와 걔가 바뀐 거 모르나요?"

"압니다. 큰 누님이신 거."

아니 그런데 도대체가, 왜?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 졌다. 얘 왜 이러는 거야?

황후라니,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카일의 곁에서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겼으니까.

우리 세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고 묵묵히 스테이크만 썰었다.

만찬도 아닌데 누가 스테이크를 이리도 알차게 올린 거야? 이 맛있는 거 먹는데 체하면 아깝잖아.

"프리케, 이제 식사가 끝났으면 잠시 나가 주겠나? 누님과 독대를 좀 하고 싶은데?"

"저도 비 전하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항명인가?"

"부탁 아니었습니까?"

"명령이었어."

우와, 카리스마. 저 말 많은 프리케의 입을 다물게 만들다니, 대단하네.

불만 가득한 표정의 프리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은데, 안 되겠니?

"비 전하, 저랑도 나중에 시간 내주십시오."

"그래요. 프리케경."

아, 어색하다. 미치겠네. 평소에는 딴 남자 만난다고 잘도 나타나더니, 오늘은 왜 카일이 오지도 않는 거야.

"누님."

"네?? 아, 네, 말씀하세요."

"저희 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손아래 동생에게 존대하실 겁니까?"

네게 반말하면, 후작부인이 경을 치는 걸.

"제가, 무서우십니까?"

응. 무서워. 아니, 네가 무서운 게 아니라, 네 어머니가 무서운 거긴 한데. 아무튼 좀, 그래.

라고, 어떻게 말하겠니?

"저기, 아르세이아, 그 아이의 소식은 없나요?"

"... 혹시 황궁 생활이 힘드십니까?"

아니, 지금은 할만한데, 카일한테 사랑도 듬뿍 받고 있고, 황태자비 업무도 나름 재밌고.

하지만, 아르세이아의 동생에게, 네 누이 대신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없잖아.

"힘드시면 이 번 시찰에 누님을 빼돌릴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네? 아니요. 아르세이아가 온 것이 아니라면, 괜찮아요."

"원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저희 비스 기사단은 누님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할 겁니다."

뭐가 뭔지...?

"왜요?"

갑자기 왜? 비스 기사단이 날, 비스가의 레이디로 인정하기라도 한 거야?

"제 아버지의 소중한 따님이시고, 제게도... 지키고 싶은 누님이시니까요."

"...??"

무슨 소리야 진짜. 알아듣게 해. 지금 아무도 없는데 왜 계속 아르세이아를 대하듯 하는 거야?

"사실, 독대를 청한 것은, 누님께 사죄를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네?"

"제, 어머니가 지은 죄, 아들로서 대신 사죄드리고 싶었습니다. 누님께서 어린 시절 받으시던 학대, 그리고 그를 외면한 죄도 용서를 빌고 싶었습니다."

"소후작님?"

알리페르의 눈에 죄책감이 가득했다. 나에 대한 연민과 가책이 뒤섞여 있었다.

사실 알리페르가 내게 사과할 일은 없었다. 우리는 전혀 얽힐 일이 없던 사이였으니까.

처음에 아르세이아와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알리페르와 만난 뒤에도 후작부인은 날 때렸었다. 고귀한 제 아들이 천박한 나 따위와 어울려서는 안 된다나?

그 후로도 어린 알리페르가 내게 상냥하게 말을 건 날 밤이면 채찍으로 맞았다. 결국 나는 그를 피해 다녔고, 알리페르 역시 특별히 나와 엮이려 하지 않았다.

"저도 작은 누님처럼 누님을 따르고 쫓아다니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누님에게 말을 건 날마다 제 어머니가 누님을 학대한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말이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리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무섭다는 이유로, 잘못을 방치하고 모른 척 한 것은 변명밖에 안된다는 것 압니다. 누님이 그렇게나 큰 상처와 아픔을 겪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그 아픔을 막지도 나누지도 못한 죄, 지금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알리페르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 무릎을 꿇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되돌릴 순 없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그래. 그저 진심이 담긴 사과였어.

죄 없는 알리페르가 해야 하는 사과는 아니었지만, 알리페르의 사과에 내 가슴속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게 느껴졌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누님의 곁에서 누님을 지켜드리는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알리페르 데 비스, 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저의 검과 명예를 누님에게 바칠 영광을 주십시오."

기사가 레이디에게 하는 맹세. 그 고귀한 맹세를 제 친누나의 자리를 빼앗고 앉아 온갖 호사를 누리는 내가 받아도 되는 걸까?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요. 고귀한 레이디도 아닌데..."

"누님처럼 자연과 교감하는 신비로운 여인보다, 그리고 상처를 딛고 가진 힘으로 제국민들을 보살피려 하는 황태자비 보다 더 고귀한 레이디는 없지요."

"알리페르. 고마워요. 말만으로도, 너무너무."

"제, 검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저같이 부족한 여인에게, 그대의 명예를 걸어 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그대의 명예를 빛낼 수 있는 레이디가 될 수 있게 노력하노라고 하늘과 대지에 약속합니다."

나는 알리페르가 내민 검을 양손으로 받아 들었다. 검을 받고 나자 그가 내 오른손을 받아들어 손등 위에 정중하게 키스해줬다.

그런 알리페르를 바라보는 내 눈에는 계속 눈물만 흘렀다.

"계속 우시면 매형께 제가 혼납니다."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나네요."

알리페르는 상냥하게 제 손수건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런데 누님. 언제까지 존대하실 겁니까? 저는 누님의 기사이기 이전에 하나뿐인 남동생이지 않습니까? 막내를 이렇게 딱딱하게 대하시면 저 삐뚤어질 겁니다. 작은 누님께는 편하게 대하지 않습니까?"

"저기, 알리페르, 그게, 갑자기 말 놓으라면 잘 안되는걸요."

"애칭으로 부르는 연습부터 하지요. 자, 다시 펠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얼른요."

"어, 저기, 펠. 나는 펠이 이런 성격인 줄 몰랐어요."

저기, 카일 복제품 같아. 얘가 원래 이렇게 능청맞고 뻔뻔하게 밀어붙이는 애였나?

"제가 누구의 쌍둥이인지 잊으신 것 같은데, 제 쌍둥이가 아주, 뻔뻔하지 않습니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맞아, 아르세이아는 좀 그랬지.

"웃으니까 보기 좋네요. 누님, 시간 되시면 저랑 잠깐 산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남매지간에 못 나눴던 이야기도 하고요."

"네, 아니, 응, 아직 시간 있어요, 아니 있어."

익숙해지려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스코트를 해주기 위해 내민 알리페르의 손을 잡는 순간 가슴에 온기가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카일과는 다른 듬직함이 내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제가 어릴 때 작은 누님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아십니까?"

"응?"

"누님이 매번 그 아이 앞에서만 꽃도 피워주시고, 나비도, 새도 불러주지 않았습니까?"

남들이 들을까 봐 작게 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카일이 귓속말할 때 느껴지는 간질거림이랑은 달랐다.

편안하고 상냥한 느낌.

"그거야, 걔가 매번 졸랐으니까. 네가 졸랐어도 해줬을 거야."

"그럼, 앞으로 제게도 보여 주실 겁니까? 아버지가 누님을 찾았을 때 신비한 소녀라면서 자랑하셔서 저도 기대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작은 누이 그게, 매번 누님을 가로채는 바람에 누님과 친해지지 못했잖습니까?"

"펠, 진짜로 그렇게 느낀 거야?"

"네? 뭐가요?"

"너, 그러니까 날, 신비하다 느낀 거야? 불길한 게 아니라. 그냥, 신비하다고?"

조금 웅얼거리고 말했다. 이건 내게는 좀, 많이 아픈 가시라, 내 동생이 되어준다 했지만 묻기 힘들었다.

제 어미가 날 얼마나 저주받았다며 무시하고 천대했었는데...

"그럼요. 제게 누님은 천사 같은 분이십니다. 아름답고, 신비해서 우러러보게 되는 그런 분이요."

"고마워."

빙그레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전하, 아니 매형은 잘해주십니까?"

매형? 헤에, 좀 낯간지럽다.

"응, 잘해줘. 과분할 만큼 사랑해주고 지켜주셔. 아, 미안. 이건 사실 내가 받아야 하는 게 아닌데."

"제게 왜 사과를 하십니까? 그리고, 둘째 누님이라면 좋아할 겁니다. 누님께 해주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었지 않습니까?"

"그래도..."

"제가 볼 때, 작은 누님은 지금 신나셨을 겁니다. 자유로운 삶을 원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 자유가 좋아서라도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거니 걱정 마십시오."

아르세이아와 나는 둘 다 자유를 원했었다.

물론 원하는 자유의 방향은 많이 달랐다. 보호받고 살던 집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잠시 일탈을 꿈꾸는 고양이와 원래 뛰놀던 초원을 그리워하는 야생마. 그게 우리였다.

갑갑한 예법과 가문에 묶여 귀족영애의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했던 아르세이아는 지금 행복할까?

나는 이제 초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카일이 쳐준 울타리 안에서 카일과 함께 있고 싶으니까.

하지만 아르세이아가 원하는 자유를 찾았다고 해도, 후작부인이 포기하지 않을 텐데. 나 카일과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을까?

"사실, 작은 누님이 떠나면서 제게 남긴 말이 있습니다. 나중에 큰 누님이 원한다면 황태자든, 황태자비든 다 가지라고. 자신은 황태자께 손도 안 댔으니 걱정 말라더군요. 그러니 마음껏 사랑하고 사랑받으세요."

"으응."

이건, 음, 카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인정해 버리는 건가? 부끄러워. 남동생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많이 어색한 일이구나.

그리고, 아르세이아... 고마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구나...

... 그럼 나한테 그런 편지를 쓰면 안 됐지! 걸리기만 해봐!!

"누님, 지금 얼굴이 붉어지셨습니다. 황태자 전하 이야기만 해도 그리 좋습니까?"

"아니, 아니, 펠. 그런 게 아니라아!"

"세에이~ 하루 종일 뭐 했어, 보고 싶었잖아."

도대체가 이 인간은 왜 이런 타이밍에 매번 나타나는 거야? 어디까지 들은 거야? 진짜!!!

"창공을 비추는 두 번째로 높은 태양, 황태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어, 처남. 오랜만이야. 그런데, 세이? 흐으음, 이제 그 손, 나한테, 응?"

야, 인간아 하다 하다 처남한테도 질투하냐? 어딜 오늘 생긴 내 소중한 동생한테 질투를 해?

"내가 남동생과 오랜만에 데이트 좀 하겠다는데 눈치 없이 끼어들 거예요?"

"데, 데이트?"

"펠, 저기 분수대는 가봤어? 장식이 참 예뻐. 보러 가자."

"페, 펠이라니, 세이가 나 말고 다른 남자한테 애칭을 불렀어."

"이봐요, 카일. 만약에 괜히 내 동생한테 질투하느라 우리 펠 괴롭히기만 해봐요. 한 달간 각방 쓸 거니까."

"세, 세이!!!"

"하하, 누님. 저러다 매형께서 진짜 질투하겠습니다."

그건 그래. 적당히 해야지. 그럼 나는... 양쪽에 멋진 남자들을 끼고 놀아보겠어.

결국 오른손은 카일이, 왼손은 알리페르가 에스코트하기로 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네. 호호. 예전에 데뷔탕트때는 벽의 꽃이나 돼서 조용히 찌그러져 있을 예정이었는데. 이렇게나 멋진 남성들을 양쪽에 데리고 있다니.

"매형, 누님의 표정이 아주 밝아지셨습니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는데, 다 매형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그 소리는 나도 관료들에게 매번 들어. 세이 덕분에 내 인상이 많이 누그러졌다고."

"두 분은 천생연분이신가 봅니다."

"그렇지?"

"누님 눈에 눈물나게 하시면, 황태자 전하라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누님의 기사인 제가 누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갈 겁니다."

"펠! 카일은, 절대로, 날 울리지 않을 거야. 걱정마."

내가 제 편을 들어주자 카일의 얼굴에 승리감이 번졌다.

바보.

"그리고 카일, 펠이 내 기사가 되어주기로 맹세했으니까, 절대 괴롭히지 말고 잘해줘요. 내가 무지 아끼는 동생이니까. 알았죠?"

"어. 알았어. 네가 아끼고 좋아하는 것들은 나도 좋아. 처남한테 잘할게."

"역시, 카일은 착해."

쓰담 쓰담...

으악, 남동생 앞에서 무슨 이, 남사스러운 짓을!! 깜박 잊고 평소처럼 굴어버렸어.

"푸흐흐흐."

"저기, 펠, 웃고 싶으면 마음껏 웃어."

"천하의 황태자께서 누님께 이렇게 꼼짝도 못하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하하하."

나도, 이 남자가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어. 그런데 네 매형 귀엽지 않니?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서 사랑받고 살려면 나처럼 해야 돼. 알았지 처남?"

"네, 매형 명심할게요."

알리페르와 처음 이야기를 나눌 때 가졌던 불안감은 어느새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카일만이 든든한 내 가족이라 생각했는데, 내게는 이제 또 다른 가족이 생겼구나.

"세이, 그렇게 동생만 보지말고, 나도 좀 봐줘. 하루종일 일 하느라 힘들었단 말이야."

든든하다는 말은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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