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번외편 - 제 아내를 소개합니다.
2018.05.03.
가을인데도 하늘에 잔뜩 먹구름이 끼고 바람이 스산한 날이었다. 벌써 17년이나 지났는데도 이런 날씨에는 적응이 안 된다.
아마 곁에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오늘도 잔뜩 인상을 구기고 다녔겠지.
"나는 이런 날 싫지 않은데?"
"왜요?"
"그분이, 날씨가 궂으면 날 찾지 않았거든."
그녀의 목소리에 순간 기운이 빠진 것이 느껴졌다. 여기서 그분이란 비스 후작부인이겠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여자.
세이, 조금만 참아. 널 고통스럽게 했던 여자는 내가 꼭 그보다 더한 고통을 받으며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기게 만들어 줄게.
"내일은 전 황후폐하의 기일이죠?"
"응, 그래서 카일이 요즘 기운이 없어."
응접실 너머로 내가 듣고 있는지도 모르고 재잘대는 그녀의 목소리가 새소리보다 고왔다. 내가 내실의 문이 닫히면 아무것도 못 듣는다고 생각하는지 그녀의 심복과 있을 때면 속마음도 곧잘 이야기하고는 했다.
오늘처럼 내 이야기가 시작되면 곧, 내 칭찬이 시작되겠지. 내 앞에서는 잘 안 하면서 제 시녀에게는 내가 좋은 이유를 곧잘 말해서 지금처럼 듣고 있는 것이다.
훔쳐 듣는 거 절대 들키지 말아야지. 분명 들키면 각방쓰자고 할지도 모른다. 세이가 각방쓰자고 할 때가 제일... 무섭다. 천둥소리보다도 무서운 소리다.
"내일 그분 뵈러 가기로 했어."
"어머니께 사랑하는 여인을 드디어 소개하는 날이네요."
"저기, 그 아이는 안 갔었어?"
"네. 비 전하만 가시는 거예요."
늘, 제 여동생과 자신을 비교한다. 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한 이후에도... 아직 불안한가 보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일부러 편지에 지금 내 곁에라는 말을 강조하기까지 했는데, 눈치 없는 내 요정은 못 알아 들었나 보았다.
"흐음, 전 황후 폐하에 대해 모일라에게 물어봐야겠어."
윽, 문 뒤로 숨자. 다행히 그녀의 시녀만 밖으로 나왔다. 그녀와 유모는 문 뒤에 숨어 있던 날 보고는 웃으면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고마운 유모. 그리고 그녀의 시녀 유베르 영애. 그들의 도움이 컸다. 그녀가 내 곁에서 이렇게 날 사랑해 주기까지 그녀의 옆에서 나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내게 조언도 아끼지 않았지.
"저기, 모일라, 전 황후폐하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면 안 돼? 어떤 분이셨어?"
"일단, 모성애가 아주 강하신 분이셨답니다."
저기, 유모. 적당히 이야기해. 어린 시절에 망나니같이 굴지 않은 남자가 어딨었다고, 그렇게 개구쟁이처럼 공부하다 뛰쳐나간 이야기를 세이에게 마구 하는 거야?
"크크큭, 어릴 때부터 땡땡이치는 건 타고났었구나."
세이가 좋아하는구나. 나도 네 어린 시절 이야기 듣고 싶은데, 하지만 너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면 많이 아파하겠지?
그래서 묻지 않으려고.
"하루는 1황자님이 검술 훈련을 하시는 걸 구경하겠다고 나무 위로 카일룸께서 기어 올라가셨어요."
"그래서?"
"올라는 갔는데, 겁이 많으셔서 내려 오질 못하신 거예요. 그 모습을 그레이스 마마께서 먼저 발견하신 거죠."
"혼내셨어? 어머니께서 막 엄하신 분이셨던 거야?"
"엄하신 것은 아닌데, 다른 궁인들을 속이고 혼자 올라갔으니 내려올 때도 혼자 내려오라며 아무도 돕지 못하게 하셨죠."
그래, 그랬지. 어마마마는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무조건 스스로 해결하라고 했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받는 습관이 들면 질 나쁜 황족이 된다고, 늘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사고를 치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어찌 됐는데? 설마 카일이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검사라서 풀쩍 뛰어내리고 그런 건 아니지?"
"호호, 비 전하도 참.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다가 나무 위에서 엉..."
"모일라, 그만!!!"
내 흑역사는 거기까지라고!! 안돼!! 비록 어린 시절이라지만 나는 멋진 모습만 세이한테 보여주고 싶다고.
왜 막아?라는 세이의 외침이 얼굴에 새겨져 있었다.
"끝까지 해줘, 모일라."
"안돼, 내 흑역사를 나의 비에게 다 말할 필요는 없잖아!!"
"꼬마 시절의 카일이잖아요. 더 듣고 싶다구요! 모일라."
"비 전하, 카일룸 전하께 마저 들으세요. 호호."
모일라와 시녀들이 내 눈짓에 급속히 자리를 비워줬다. 대신 나의 사랑하는 여인의 입은 불만으로 삐죽해졌다.
어째서 저런 모습도 사랑스럽지?
"그래서 어찌 됐어요?"
"어찌 됐긴, 늠름하게 뛰어내렸지."
눈에 불신이 가득 새겨져 있네. 그러나 어떻게 말하겠어? 꼬마 시절의 나는 울보에 겁쟁이여서, 나무에서 내려가지도 못하고 엉엉 울었다는걸.
"거짓말쟁이! 흥!!"
"흠흠, 그런데 왜 갑자기 내 어린시절이 궁금해진 거야?"
이럴 때는 웃자. 세이는 내 미소에 아주 약해. 아직 침대에서는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평소에는 다 넘어 온다고.
역시 통했어. 살짝 얼굴에 홍조도 띠고, 눈에 미소가 돌잖아.
"당신의 어린 시절보다는, 음... 당신 모후께서 어떤 며느릿감을 좋아하실지 궁금해서요."
아아, 이래서 나는 내 눈앞의 작은 여인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기왕이면, 당신을 사랑하고 아껴주신 어마마마를 하늘나라에서도 만족시켜 드리고 싶거든요."
"세이."
"응? 왜요?"
"이미 충분히 만족하실 거야. 어마마마는, 너처럼 착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 곁에 있다는 것에 행복해하고 계실 거야."
내 말에 부끄러운 듯 미소 짓는 아르세이아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다. 그런데 잠시 스쳐지나간 그 아이의 눈빛에 그리움이란 감정이 보였다.
아, 나의 요정이 잠시라도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후작을 불러다가 닦달을 좀 해야겠다. 진척이 이리 없어서야.
세이가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줄 알았을 때야 내가 약자였지만, 세이가 날 사랑하는 이상 내가 후작에게 혼날일은 없겠지?
"에이, 당신이 나만 보면 막 팔불출같이 굴어서 걱정하실 것 같은데요?"
"그건, 그런가? 하하."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어제와 달리 겉보기에는 날씨가 좋았다. 저 멀리 뭉게구름이 높게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나머지 반쪽의 파란 하늘색이 무척이나 예뻤다.
"날씨가 좋네요."
"꼭, 그날 같네."
그날도 이렇게 오전에는 날씨가 좋았다. 오전에는 어마마마의 병세도 좋아졌었는데, 갑작스럽게 변한 날씨와 함께 어마마마가 돌아가셨었지.
"내가 곁에 있을 거니깐, 나만 믿어요."
나의 불안해하는 기색을 느낀 내 소중한 요정. 그녀의 말에 기운이 날 것 같았다. 세이만 곁에 있다면 무서울 게 없었다.
"어. 나 갑자기 너 막 끌어안고 그럴지도 몰라."
예전에는 이런 말 하면 정색했는데, 요즘에는 대놓고 말하진 않아도 좋아하는 티가 난다. 크큭, 어여쁜 나의 세이.
"알비, 너도 가서 예쁘게 인사드리고 오자. 우리 카일을 우리에게 보내 준 고마우신 분이니까."
"월! 월!"
저 개는 세이에게도 내게도 한결같다. 충성스러운 녀석. 암컷이라서 더 좋다. 수컷이었으면 영지로 돌려보냈을 건데.
"알비케라 같은 부하들이 있어야 하는데."
"알비케라는 당신을 아빠처럼 여기는데 부하라뇨!!"
"아빠?"
"그럼요, 나는 엄마. 당신은 아빠!"
아, 빠? 어쩌지? 얼굴이 너무 빨개진다. 하, 미치겠네. 우리 진도 좀 빼도 되려나? 세이한테 말해볼까?
"나는, 어... 저기. 진짜 아빠가..."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그래요. 아, 근데 카일 뭐라고요?"
젠장, 타이밍을 놓쳤어. 여기서 다시 이야기 꺼내면 예전처럼 막 파렴치한으로 보려나? 싫어하면 어쩌지? 겨우 마음 터놓고 지내는데. 에잇.
"어휴, 어마마마가 내 꼴 보시면 한심하다 하긴 하겠네."
"응? 갑자기 왜요?"
"내가 너만 보면 정신 못 차리고 바보 되니까."
"안돼요! 어마마마께서 나 못마땅해 하실 거야!!"
"이미 늦은 것 같아. 나 사랑에 빠져서 허우적대느라 이미 글러먹은 것 같거든."
"카일!!"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마차에서 끊이질 않았다. 처음 같은 마차에 탔을 때는 내 시선을 피해 다니기 바빴던 그녀가 내 눈을 맞춰 오는 게 좋았다.
이제 끝을 향해 가는 이 여름 동안 우리는 너무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내가 말만 걸어도 제 정체를 들킬까 봐 움찔움찔했었는데...
"그만 좀 꼬물딱대요!!"
변하지 않은 것도 있네. 뭐, 그래도 말만 저러고 자기도 같이 만지면서. 크큭, 귀여운 나의 요정.
"여기야."
황궁에서 멀지 않은 작은 언덕. 그 위에는 미로로 만들어진 정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만들어진 작은 추모관과 그 안에 놓인 두 개의 대리석 관.
"왼쪽은 내 어머니, 오른쪽은 내 형님."
"아, 1황자님의 묘지도 여기였군요."
"응. 어마마마, 그리고 형님. 제 아내 아르세이아에요. 예쁘죠?"
어린 시절의 나를 가장 사랑해 주었던 두 사람. 어마마마, 그리고 형님.
어마마마, 그 말썽꾸러기 막내아들이 이제 이렇게 장성해서 며느리를 데리고 왔어요. 계속 긴장만 하고 신경 곤두선 채로 살던 제게 웃음을 찾아 준 여인이에요. 마음에 드시죠?
그리고 형님. 형님의 목숨을 거둬간 하늘이 제게 보내 준 아이에요. 늘 감사하게 여기고 있어요. 그때 형님이 절 살려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세이와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안녕하세요. 아르세이아입니다."
우리는 두 관에 화려한 꽃다발을 놓았다. 세이가 정성껏 골라서 만든 꽃다발이었다. 꽃을 꺾어서 잠시 장식했다 버리는 걸 싫어하는 그녀가 신중히 고른 꽃다발이었다.
이 꽃들은 말라도 여전히 고운 자태를 뽐내는 드라이플라워로 이용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찾지 못해도 묘지를 지켜줄 거라며 직접 화원에서 가져왔다. 반쯤 시들어지기 시작할 때 꺾은 꽃임에도 새로 피었을 때나 다름없는 자태였다.
"이렇게 잘생기고, 상냥하고, 멋진 남편 제게 보내주셔서, 그리고 살려주셔서 감사해요."
"나, 진짜 멋져?"
"그럼요. 세상에서 날 제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니까 멋지죠."
"들었죠? 어마마마, 형님, 저 장가 잘 간 것 같아요."
그녀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여인을 내 가족에게 소개해주는 것이 뿌듯한 일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내가 더 시집 잘 왔는데요? 어머님, 그리고 아주버님. 제 남편이 얼마나 잘났냐면요."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에 대한 칭찬을 해댔다.
이 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너와 나, 이렇게 마주 보고 웃고 떠들고. 별것 아닌 이 시간이 내게는 너무도 소중하고 간절했다.
역시 너는 나의 빛이야. 세이.
"세이, 이리 와 봐. 보여줄 거 있어."
오랜만에 찾은 곳이었다. 내 어린 시절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뒷 방.
"나랑, 형이랑 놀고 있는 걸 지켜보는 어마마마야."
초상화를 보는 세이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즐거워 보였다. 보여주길 잘했네.
"황제 폐하도 계시네요. 형제를 지켜보는 부모님들의 눈이 참 따스해요."
"그런가?"
"어마마마를 많이 닮았네요. 아주버님은 폐하를 닮고."
나는 지금껏 황제 폐하를 닮았단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세이의 눈에는 달라 보이나 보았다.
"꼬마 카일은 더 귀여웠구나. 꺄아, 한 번 만나보고 싶다."
아이를 좋아하는구나. 좋아 이 타이밍이야. 다시 시도해 보자.
"리틀 카일을 만나면..."
우르릉! 쿠구쿵 콰앙!! 쏴아아아!
이런. 갑자기 소나기라니? 게다가 왜 천둥까지 치는 거야!! 하필 세이 앞에서 또 망신이잖아.
"카일, 이리 와요."
세이가 양팔을 벌리고 나를 그녀의 따스한 품으로 안아주었다. 그리운 어머니의 품만 같았다.
결국 우리를 닮은 아이를 갖고 싶다는 말은 못하고 그녀의 따뜻한 가슴에 매달려만 있었다. 보드랍고, 달콤하고, 향기롭구나. 좋다. 네가 이렇게 곁에 있어서...
"어마마마, 형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형님의 억울한 죽음, 꼭 그 원흉을 잡아 죗값을 치르게 할 겁니다. 그리고, 제 아내를 평생, 잘 지키며 행복하게 살게요. 지켜봐 주세요."
"카일이 행복하도록, 곁에서 잘 보살필게요."
내가 그녀의 손을 잡자 마주 잡아오는 손길이 좋았다. 나의 빛이 이제 내 곁에서 나를 비춰주는 것이 행복했다. 이 빛이 다시 어두워지지 않게, 더 밝게 빛나게 지켜줘야지.
사랑하는 나의 아르세이아. 나의 하나뿐인 반려. 나의 아내.
우리, 행복하자.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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