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사랑은 편지를 타고. (2)
2018.05.01.
"카일, 멈춰요!!"
어딜 벌써 뜯으려고!! 내가 넘겨준 편지를 꽉 다시 쥐자 그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며 나를 봤다. 왜 선물상자를 바로 못 뜯게 하는지 의문인 아이의 표정이었다.
"내 앞에서 읽으면 그게, 그게 러브레터에요? 무드 없이!! 일하다 바쁘거나 힘들어서 내가 보고 싶을 때, 아니면 어디 멀리 성밖에 나갔는데 내가 너무 그리울 때 그럴 때 봐야죠!!"
"나는 항상 네가 보고 싶고, 그리운데 지금 보면 안 돼?"
"안 돼요!! 안 된다고요!!"
나의 필사적인 저항에 카일이 두 팔을 들었다.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나중에 나 잘 때 몰래 뜯어보기 없기!!"
"어..."
뭐, 우리는 오늘도 당연하다는 듯이 굿나잇 키스를 한 40분에서 한 시간 쯤 했나? 그러고 서로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
키스에 이렇게 체력이 많이 필요한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요즘 완벽한 숙면을 취하는 이유가 키스 탓인 듯했다.
아, 피곤해. 오늘도 카일의 품은 따뜻하니 좋구나, 음냐.
<내게는 어느 태양보다 밝고 찬란한 내 남편 카일룸.
여름이 끝나가는 이 길목에 당신과 나, 언제나 마주 보고 웃고 있네요.
사실 이렇게 당신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그거 알아요? 당신이 곁에 있어주면 그 어떤 어둠도 날 해치지 못할 것 같아서 늘 든든해요. 당신이 이렇게 내게 찬란한 빛이 될 거라고는 처음에 생각도 못했는데…>
이거. 꿈인가? 편지에 너무 신경을 많이 썼더니 꿈에서도 편지가 들리는구나. 흐음, 저 정도면 나쁘지 않네. 잘 썼어.
<나는 솔직히 당신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신기루일 것만 같아서 무서울 때도 있어요. 나는 겁쟁이거든요.
그래서 내가 가끔 도망 가려 하거나, 숨으려고 하면 당신이 내 손 잡아 줘요. 도망치지 못하게, 꼭 당신 곁에 붙잡아 주세요.
나는 내 세상이 어둠으로 덮여 끝나는 날까지 이제 당신과 함께하고 싶으니까.>
음. 내가 쓴 편지랑 정말 같은 내용이잖아. 구구절절 내 마음이네. 낮고 상냥한 카일의 목소리로 들으니까 더 좋다.
<언제 하늘이 당신과 나 사이를 질투해 갈라놓으려 애쓸지 모르니까, 하루하루 후회 없이 내 사랑 다 표현할 거예요. 그러니까 다 받아 줄 거죠?>
"사랑한다는 말로는 마음이 전부 전해지지 않아서 고민이다라. 나도 그런데, 후훗."
"카일... 당장, 당신 방으로 가요!!!"
"으악!!! 잘못 했어!!!!"
* * *
"그래서 어젯밤에 황태자께서 쫓겨나신 거예요?"
"응, 어쩜 그렇게 사람이 능청맞고 능글맞고 뻔뻔한지 몰라."
"그 점에 반하신 거면서?"
"어, 그건 그런 것 같아."
백번 지당한 말이다. 그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들이대지 않았음 내가 안 넘어갔지. 그건 사실이야.
"그래서 계속 각방 쓰시려고요?"
각방은 무슨, 일어날 무렵에 쫓겨난 게 각방이라고 하긴 그렇지 않나?
"벌로 답장 써오라고 했어. 오늘 밤에 내 방에 들어오고 싶으면."
"아하, 그래서 그렇구나."
"왜?"
"오늘 볼라드 공작과의 알현이 예정에 없었는데도 만나고 계시던데요?"
"그건 중립파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교섭 중이신 걸 거야."
카일이 황제가 되기 전 꼭 할 일이 황후와 황후파의 숙청이었다. 그 일을 위해서 루카스, 테일러와 같은 젊은 세력을 키우고 중립파를 포섭하고 있었다.
특히 요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중립파의 수장인 볼라드 공작에게 충성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내가 볼라드 공작부인을 자주 만나는 것은 그녀가 편한 이유도 있었지만, 카일을 위해서 이기도 했다.
"호호호, 아닐걸요? 제가 알기로는 볼라드 공작께서 사교계에 널리 알려진 애처가에 로맨티스트에요. 분명 연서 쓰는 방법 조언 받고 계신 걸 거예요."
"그으래?? 기대해야지."
카일은 그날 밤늦게야 내 앞에 나타났다. 최근 늘 함께하던 저녁도 걸렀다. 푸흡. 아 저렇게 쩔쩔매는 거 왜 이리 좋지?
나 가학성이 있나??
"저기... 세이, 받아줘!"
후다다다닥.
에? 뭐죠? 어디 인기 있는 오페라 남자 배우에게 팬레터를 주고 부끄러워하는 소녀 같은 저 뒤태는?? 잠깐 사이에 사라져 버린 그의 모습에 당황스러웠지만 곧바로 편지를 펼쳐들었다.
<나의 삶의 빛이자, 꿈이자, 희망인 내 사랑하는 요정님께.>
아 뭐야, 처음부터 손발이 오글거려!
<세이, 너의 아름다운 머릿결은 그 어느 보석보다 반짝이면서도 붉은 정열을 가득 담고 있어.
게다가 너의 그 푸른 눈은 운디네의 푸른 빛보다 더 깊고, 바다보다도 더 맑으며 사파이어보다 더 빛나지.
또 네 입술은 어떻고? 루비보다 붉고 매혹적인 네 입술은 벨벳보다 부드러워서 미칠 것 같아. 오죽하면 내가 네 입술을 맛보고 싶어서...>
크흡. 이 부분은 중략. 무슨 나에 대한 찬사로 편지의 절반 이상을 채우는 거야?
뭐, 틀린 말은 하나도 없네. 호호.
<네가 처음으로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 준 날 기억해? 좋아한다도 아니고, 사랑하다는 말을 네가 해줬을 때 처음으로 온 세상이 내 것이 된 느낌이었어.>
얼마 전이었다.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카일은, 내가 사랑한다 말했을 때, 거의 기절에 가까운, 넋을 잃은 상태가 됐었다.
그 표정 초상화로 남겼어야 했는데, 어쩜 그리도, 귀여운지. 후훗, 한 시간 가까이 키스를 한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내가 기습 고백을 하는 바람에, 그의 얼굴은 완전 달아오르기까지 했었다.
그때 나도 온 세상이 내 것 같았는데. 헷, 같은 생각을 했구나.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내일 일어나면 꿈이었을까 봐 나도 겁이 날 때가 있어.
그래서 꿈에서 깨기 전에 너에게 하나라도 맛있는 것을 더 먹이고, 더 예쁘게 꾸며주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게 해주려고.
너는 어두운 곳보다는 밝은 세상이 어울리는 요정이니까, 더 이상 울 일도, 아플 일도 만들지 않을게. 날 믿고, 날 사랑해준 만큼 나도 꼭 널 행복하게 해줄 테니까 나만 믿어 알지?
사실 내 욕심에 널 황궁에 가두고, 내 욕심에 네게 사랑을 갈구하고, 내 욕심에 널 내 울타리에만 가두고 있는 것 같아서 미안해.
그렇지만 이런 나를 미워하진 말아줘.
그땐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너를 내 곁에 두는 방법은 널 황태자비로 만드는 것 밖에 없었거든.
네가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고 온전히 내 곁에서 내 보호를 받으며 누리는 평온하고 행복한 삶, 꼭 네게 선물해 줄 거야.
물론 우리 세이가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다할 수 있게 해줄게.
그러니까, 이 오빠 믿고 같이 행복하게 살자. 알았지?
날 미치게 하고, 바보같이 만들고, 웃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지금 내 곁에 있는 너뿐인 거 잊지마.
사랑해.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나의 세이.>
아, 내 사랑하는 카일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특히 '지금 내 곁에 있는'이라는 말이 내 영혼을 울렸다. 좋아라, 어쩜 이렇게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할까?
불쑥불쑥 찾아오던, 그의 사랑이 닿은 곳이 아르세이아가 아닐까 하는 열등감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온전 한 그의 마음을 받은 착각이 들었다.
따뜻해. 카일의 마음이 전해져.
"저어기, 세이?”
"들어와도 돼요. 카일."
"마음에 들어?"
"흠. 내 외모를 찬양하는 멘트가 너무 진부하고 오글거렸어요."
"불합격이야?"
"아니요. 합격인데요? 훗."
순간 카일이 알비케라처럼 보였다. 꼬리를 마구 흔들며 주인에게 애교 부리는 애완견!!
"고마워 세이, 아 역시 내 아내뿐이야. 사랑해 진짜 사랑해."
"풉."
내가 다시 나가라고 할까 봐 잽싸게 들어와서 내 침대에 뛰어든 남자의 깜찍한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귀여운 내 남편, 이리와요."
* * *
"밤하늘을 비추는 작은 별, 황태자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어머, 볼라드 공작, 잘 지내셨나요?"
"더욱, 아름다워지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일정이었던 황태자비 수업을 끝내고 창공의 관에서 일하는 카일을 데리러 가던 참이었다. 가끔 마중 나가주면 좋아해서 내 일이 일찍 끝나면 데리러 가고는 했다.
"헬레니아가 비 전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습니다. 제국민을 사랑하고, 현명하고, 자애로운 분이라구요."
"어머, 과찬이십니다. 그저, 남편의 내조를 하다 보니 그런 좋은 평가를 듣나 봅니다."
"겸손함까지 갖추셨군요."
"과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공작부인보다 2살 연하라던 볼라드 공작은 훈훈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나야 사교계에 소문에 둔해서 몰랐는데, 이 젊은 공작은 정말 대단한 사랑꾼이었다. 3년 넘게 공작부인에게 한마음으로 구애를 했다지?
"세이!! 조금이라도 더 일찍 날 보려고 데리러 온 거야? 나 너무 좋아."
"황태자 전하 저도 있습니다만."
"어? 흠흠. 공작. 나의 비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푸흐흡. 갑자기 근엄한 말투로 바꾼 카일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서 내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미안해요. 차마 못 보겠어요.
난 못 봤다. 안 본 거다. 으휴, 저런 촐싹맞은 주군을 두게 생긴 공작이 지지 철회를 하면 어떡해? 카일은 못 말려.
"차갑고 냉정하기 그지없던 황태자 전하를 따뜻하게 녹이신 분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대단하십니다, 비 전하."
"제가 한 일이 없어서 이런 평을 들어도 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네 존재만으로도 내가 바뀐 거야."
저기, 루카스랑 테일러 앞도 아닌데 작작하시지요. 이 팔불출 남편씨!
"자신의 아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이들도 사랑할 수 있는 법이지요. 훨씬 인간미를 보여주시니 보기 좋습니다. 제가 모실 주군을 잘 선택한 것 같습니다."
에엑? 그리되는 건가?? 중립파 수장의 정신세계와 신념이 좀 독특한 것 같은데? 응?
"공작, 지금의 마음이 변치 않길 바라."
"두 분께서 지금처럼 서로를 위하시고, 그 자애로움을 제국에 떨치시는 한, 우리 볼라드 가문의 충성은 두 분께 닿아 있을 겁니다."
아, 다행이다. 진짜 볼라드 가문의 지지를 얻었나 봐. 나도 카일에게 조금은 도움이 된 거지? 괜시리 뿌듯하네.
"그나저나, 두 분 연서를 구경하려면 황태자궁의 집무실로 가면 됩니까?"
뭐야, 제국의 사랑꾼들은 죄다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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