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사랑은 편지를 타고. (1)
2018.04.30.
내가 용기를 낸 이후, 우리는 더 급격히 가까워졌다. 다시 매일 아침, 저녁은 꼭 같이 먹고, 같이 잠이 들었다가 같이 눈을 떴다.
비록 아직 육체적인 관계의 진전은 키스까지 였지만, 그는 키스만으로도 황홀한 밤을 보내게 해주겠다며 잠들기 전에 꼭 키스를 해주었다.
그게, 어엄, 진짜 좋았다. 꺄아, 부끄러워. 진작할걸. 그를 사랑하고 나서 받는 키스는, 진짜 진짜, 황홀했다.
한바탕 냉전 아닌 냉전 기간이 끝나고 우리 사이에 다시 봄날이 오자 궁인들과 그의 관료들도 기운이 났는지 늘 싱글벙글이다. 그때 일은 부부싸움을 좀 심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부싸움은 누구나 하는 거지. 아무렴.
"이게 아니야. 맘에 안 들어!"
"아, 이건 유치한 것 같아."
내 주변에는 이미 찢겨나간 종이의 잔해가 가득했다. 내 손에 희생된 불쌍한 아이들. 다 식물에서 추출했다던데. 흐으윽, 미안해.
"너 때문이야! 네가 괜히 카일 앞에서."
사건의 발달은 그저께였다. 아직 무더위가 온전히 물러나지 않아서 예전만큼 야외에서 산책을 하거나 말을 타기 힘들었다.
게다가 카일은 여전히 바빴다. 괴수 퇴치도 다니고, 행정적인 일에, 외교에 바쁘기 그지없었다.
"서로 사랑고백하면 뭐 해. 얼굴도 보기 힘들고, 심심하고!!"
"그니까, 귀족 영애들의 취미생활을 즐겨보라니까요."
"자수는 영 소질이 없는 걸. 천과 내 불쌍한 엄지손가락에게 할 짓이 아니야."
흑, 불행히도 소질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자수와 바느질로 먹고 살 정도로 잘하셨는데.
난 누굴 닮은 거야? 에효. 분명 그 빌어먹을 비스가의 피 때문이 틀림없었다.
"요즘 젊은 영애들 사이에, 편지지 예쁘게 꾸며서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게 유행이래요."
아, 예전에도 저거 추천하긴 했었지? 그땐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이 몰라!
"어떻게 꾸미는데?"
"꽃이나 낙엽을 압화해서 넣기도 하고, 솜씨 있는 영애들은 편지지를 직접 만들기도 한다더라고요. 거기에 자신이 즐겨 쓰는 향수는 필수에요."
"내 손은 아주 그냥, 불곰 아줌마 앞발인데. 먹을 때만 섬세해. 과연 가능할까?"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자신이 없었다. 카일이 좋아할 것 같긴 한데, 끙.
"그걸 받는 연인들은 그걸 액자로 만들어 놓는다던데요?"
"으악, 부끄럽게 왜 그래?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사랑을 과시하는 거죠. 사랑하는 연인에게 받는 러브레터, 너무 낭만적이지 않아요? 황태자 전하도 받고 싶어 하실걸요?"
"어. 받고 싶어. 꼭! 그거 집무실에 걸어 둘 거야!!"
"창공을 비추는 두 번째로 높은 태양,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유베르 영애, 물러나도 좋아."
히익!! 표정 왜 그래요? 기대하지 마! 제발!!
"안 그래도 요즘 젊은 관료들이 연인에게 편지 받았다면서 자랑하더라고."
"우와, 그걸, 당신 같이 무서운 상관 앞에서 그런 자랑을 해요? 군기가 빠졌네."
외면. 졸라도 들어주지 말자.
"써, 줄 거지?"
반칙!! 눈을 그렇게 크고, 동그랗게 떠서는!! 그 길고 반듯한 속눈썹을 천천히 내리깔면서 깜박깜박 거리면!!
"써드려야죠. 아무렴요. 수하들에게 져선 안되죠. 그럼요."
하아, 저 눈빛 상당히 위험해. 저 표정에 내가 약하다는 것 눈치챈 것 같단 말이야? 으윽!
"대신, 언제 써드릴지 몰라요."
그래서 시작된 편지 쓰기였다. 러브레터라. 써본 적이 있어야 쓰지. 도대체 연서에는 어떤 내용을 쓰는 거야?
카일에게 처음 받았던 장미 화분에서 꽃잎이 떨어질 때마다 받아서 잘 말려놨었다. 그걸로 예쁘게 꾸미면 될 것 같긴 한데.
내용이 문제였다.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는 나의 카일룸께, 늘 날 예쁘다..."
"읽지 마!!!!!!!"
구겨서 버린 것을 왜 읽냐고! 알비케라! 너까지 지금 비웃는 거야? 숨소리가 왜 그렁그렁해?
"푸하하. 아, 닭살 돋아."
"네 탓이야. 네가 카일 앞에서 그런 소릴 하는 바람에!!"
"호호호, 비 전하가 사랑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모습 구경하는 게 이렇게나 즐거울지 몰랐네요."
"두고 봐. 너 남자친구 생기는 그날, 모조리 복수할거야."
"비밀연애해야겠네요."
"치사해. 그런데 나 편지 어찌 써야 할지 모르겠어. 좋아하는 마음을 쓰려니까, 막 닭살 돋아서 못쓰겠고. 그렇다고 일상만 쓰려니 카일한테 내 마음이 안 전해질 것 같고.”
에이린이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개냐?
"닭살 돋고, 손발이 사라질 것 같더라도 좋아하는 마음 풀풀 풍기면 더 좋아하실 거예요."
"그걸... 액자로 만들 기세잖아. 집무실에 걸어놓는다는데에!! 어떻게 유치한 사랑타령만 해? 남들이 볼지도 모르는데. 더 고급스럽지만, 사랑은 막 막 느껴지게, 그렇게 쓰고 싶어."
"로맨스 소설이라도 읽으실래요?"
"응?"
어머어머, 무슨 키스 장면이 이렇게 노골적이야? 어머 어머, 괜히 몸이 후끈해졌다. 너무 두근거렸다.
읽다 보니 최근 밤마다 이어지고 있는 카일과의 키스가 떠올라 괜히 손발이 꼬물거려졌다.
"더 못 읽겠어."
두근거리긴 한데, 하하, 민망해서 원. 게다가 저 뒤에 잠깐 본 삽화가. 어머어머. 우린 아직 그런 관계도 아니고, 카일이 육체관계는 참아주기로 했단 말이야.
괜히 이거 보다가 걸리면 오해받기 십상이야. 치워버려야지.
"이것들 당장 서고에 되돌려놔!"
아니! 황실 서고에 저런 책들이 왜 있냐고. 손으로 파닥파닥 부채질을 하는데도 얼굴이 쉬 가라앉지 않았다.
"에이린, 너 일부러 그런 책만 가져다 준 거지?"
"우리 비 전하는 너무 순수하셔서... 하아, 불쌍한 황태자 전하."
"야!!"
솔직히 카일에게 고백하고 나니까, 마음은 편해졌지만, 아직은. 끙. 그러니까, 걸리는 상황도 많고.
에효. 차라리 어른들의 사랑은 모를래. 카일도 사랑이 육체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랬다구. 흥!
"그나저나, 편지 어쩌지? 잔뜩 기대하고 있을 텐데."
"일단, 볼라드 공작부인과의 만남 준비를 하시죠?"
다른 귀족들과의 사적인 만남은 일절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그나마 만나고 있는 것이 볼라드 공작부인이었다.
이제 막 30대가 된 그녀는 내게 요즘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내게 호감을 표하고 친절하지만, 무례한 요구는 하지 않아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편하게 만나는 중이었다.
"밤하늘을 밝히는 작은 별, 황태자비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어서 와요. 부인."
"어머, 무슨 심기가 불편하신 일이 있으신가요? 눈가가..."
헛, 다크서클이 어디까지 내려간 거야? 화장으로도 안가려지는 거야? 아까 괜한 책을 읽고 기가 빨려서 그래.
"사실은요."
내가 고민을 털어놨다. 카일이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편지에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아마 황태자께서는 비 전하께서 이름만 적어서 줘도 좋아하실걸요?"
"그렇겠지요. 하아."
그건 맞는데, 잘하고 싶은 건데, 아무도 내 맘을 몰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미사여구로 장식하려고 하지 말고요. 그저 고마웠던 점, 그분이 사랑스러웠던 점. 아니면 같이 하고 싶은 일을 써드리세요. 진심이 전달되면 훨씬 더 좋아하실 거에요."
"고마워요, 부인."
"그나저나, 두 분 요즘 황도에 출몰하신다면서요? 목격담들이 어마어마하던데요."
나름 변복하고 간다고 허름하게도 입고, 로브로 머리도 가리고, 밤에 몰래도 나가봤는데 다 걸렸다.
"하하하, 어찌나들 저희를 잘 알아보는지. 저흰 나름 숨어서 다닌 건데요. 저희 때문에 피해줄까 봐요."
"두 분의 외모가 워낙 튀니까요. 제국 제일의 미남미녀 커플이시잖아요."
아이, 낯부끄럽게. 우리가 그런 칭호를 듣는구나.
"그이가, 비 전하가 오신 뒤, 황태자께서 많이 자애로워지시고, 더 현명해지신 것 같다면서 칭찬이 자자하답니다."
"그야, 카일이 워낙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탓인걸요."
"어머, 정령의 물을 미리 비축하고 전염병을 예방하신 비 전하의 내조가 없었다면 황태자께선 여전히 냉철하단 평가만 들으셨을 거예요. 저희 가문과 일파에서는 이런 두분을 많이 존중한답니다."
아, 중립파에서 카일의 편을 들어주겠다는 뜻인가??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요."
"말씀하세요. 비 전하."
"그때 봄에 주셨던 안대에, 혹시 정령의 축복 리필은 안 되나요?"
하하하하하하!
"볼라드 공작부인은 정말 재밌는 분이에요."
"공작도 괜찮은 사람이지."
"공작이 더 연하라면서요?"
"어. 부인에게 꽉 잡혀 산대."
"어머 그래요?"
소파가 좁지도 않은데 도대체가 왜 저런 불편한 자세로 있는지 모르겠다. 내 무릎에 머리를 베고는 다리는 의자밖으로 빼고 누워있었다.
언제나처럼 내 손을 잡고 꼬물딱 거리면서. 옛날에는 막 손잡고 그러는 거 진짜 소름돋고 싫었는데, 지금은 헤헷. 아이 간지러.
"공작부인이 그대가 마음에 든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공작에게 언제나 우리 편 들어주라고 성화래."
"흐음. 부인에게 안대를 무한 리필 해줘야겠는데요? 당신을 위해서."
"그거 어차피 축복은 내가 내리잖아. 생색은 세이가 내는 거야?"
"대신 대가는 치르잖아요. 정령한테 치르는 대가는 얼마되지도 않으면서."
아니, 이젠 뽀뽀 정도로는 해주지도 않는다. 이러다가 내 입술이 퉁퉁 붓다가 터지겠다고!!
뭐, 카일 혼자 좋은 것은 아니지만. 크흡. 어찌나 잘하는지.
"크큭. 쪽!"
"카일. 이러다 내 입술 닳아서 없어지면 어쩌려고 이렇게 들러붙어요? 이그!"
"운디네한테 미리미리 치료해 달라 하지 뭐. 자, 그럼 다시 한번 해 볼까요? 이리 오시죠. 나의 빛"
내가 그의 가슴을 콩콩 쳤다. 아픈척하던 내 남자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내게 매달려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우읍!
근데 이남자, 이 자세로 얼마나 버티려고? 애매하게 할거면 시작하지 말라고!!
그래, 그런 걱정을 내가 왜 했지? 내 입술이나 걱정할걸. 소드마스터의 근력은 30분쯤 윗몸일으키기 자세로 버텨도 털끝 하나 떨리지 않았다.
"그런데 편지는 언제 완성해서 줄 거야?"
"호, 혼자 볼거죠?"
"액자로 만들어서 집무실에 걸면 안 돼?"
"싫어요! 당신에게 전하는 마음은 당신만 봤음 좋겠단 말이에요!"
"나는 자랑하고 싶은데..."
옥신각신 말다툼 끝에 내가 이겼다. 액자로 만들어 전시하는 순간 각방에, 다신 편지 써주지 않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을 터였다.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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