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나의 사랑, 나의 빛
2018.04.28.
나를 부르는 낯익은, 그리고 걱정 어린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 눈앞에는 나에게 적금발을 물려준 중년의 기사, 비스 후작이 서 있었다.
"후자, 아, 버지."
후작님이 내게 빠른 속도로 걸어왔다.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얼굴로. 언제나 나를 볼 때의 감정 없는 눈이 아니라, 오랜만에 본 딸을 걱정하는 근심 어린 눈빛으로.
낯설었다. 아버지께 받아보는 관심이. 황제 폐하와 만찬을 할 때 카일이 느꼈던 감정이 이걸까?
후작부인에게 어머니를 빼앗기고, 이름마저 잃고 구박받고 학대 당하는 동안 그 모든 일을 방치한 아버지에게 이제서야 받는 관심이, 이렇게나 서러운 일이었을까?
내가 아르세이아를 대신해 이 자리에 있기에, 그래서 보이는 관심인가? 나와 내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에게 유감은 없었다. 미워하진 않았다.
귀족에겐 세력이 큰 집안과의 결혼 동맹은 필수였으니까. 숨어지내다 내가 문제를 일으키고 나서야 나와 내 어머니를 알게 된 아버지에게 바라는 것도 없었다.
쌍둥이 남매와 단란한 가정을 이룬 후작님의 평온을 깨트린 것은 우리 모녀였기에.
한 번씩 나를 안쓰럽게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생각했다. 다정하게 딸이라고 불러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후작님을 미워하지 않았다. 내 어머니가 그를 여전히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저렇게, 세상 다정한 아버지처럼 날 염려하며 다가오는 모습은 내가 감당하기 힘들었다.
"비 전하. 도대체 어찌하여 이렇게 야윈 겁니까? 어찌하여 이렇게 얼굴에 그늘이 진 것입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그저, 더위에 입맛을 잃은 탓입니다."
"황태자께서는, 도대체 비 전하를 어찌 대하셨기에. 제게 분명히, 아끼겠다고, 절대 아프지 않게 보호하고 사랑해주겠다고 하시며 제 반대에도 불구하고 데리고 가셔놓고는 비 전하를 이리도 힘들게 하신단 말입니까?"
그랬구나. 그는 아르세이아와 혼인하기 위해 반대파일지도 모르는 비스 후작님께 찾아갔었구나.
내 표정이 더 급격히 어두워지자 후작님의 얼굴에 작은 분노가 어렸다. 나는 그런 내 아버지가 적응되지 않았다.
"비 전하, 여기 서서 이야기하지 마시고 근처에 테이블을 준비할까요?"
"그래 모일라, 급히 부탁하네. 그리고 주변을 물려주게."
시녀장에게 부탁하여 멀지 않은 나무 그늘 아래에 급히 티 테이블이 세팅되었다.
"황궁에는 듣는 귀와 보는 이가 많아 길게 이야기 못합니다. 그 아이의 위치는 확인되었나요? ... 비스 후작님?"
내 마지막 호칭에 그의 미간이 좁아지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궁에 오기 전 단 한 번도 그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다. 그 습관이 남아 사람들이 물러난 뒤 아버지란 소리가 쏙 들어가 버렸다.
"죄송합니다. 비 전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쉽게 못 찾을 듯합니다."
"그렇군요. 도대체 언제 돌아오려는 건지..."
내가 먼 곳을 응시하며 씁쓸하게 말하자 후작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힘드십니까?"
"네?"
"황궁 생활이 힘드냐 여쭈었습니다."
"... 제 어머니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질 수 없는 이를 마음에 품고 평생 고통받는 제 어머니의 마음이오. 차마 이어지지 못한 뒷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후작님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 졌다.
"죄송합니다."
그 사과는 내가 아니라, 제 어머니가 받아야지요.
"어쩔 수 없으셨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가문과 자녀의 행복을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인 것 이해합니다. 가문에 피해 주지 않도록 철저히 노력할 테니 염려 놓으십시오."
"비 전하. 그만두고 싶으십니까?"
힘들었다. 카일을 마음에 품은 내가 힘들었다. 그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수 없음이 힘들었다. 서로의 마음에 남는 첫사랑도 될 수 없는, 언젠가는 그의 마음에서 지워질 내가 싫었다. 아니 나로서는 그의 마음에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 슬펐다.
그는 내게 각인되었는데, 그에게는 내 흔적도 남길 수 없는 가짜인 내가 너무 미웠다.
마음 상해 있을지도 모르는 그를 당장 웃게 해주러 가고 싶은데, 그가 웃는 것을 보면 내 마음을 멈출 용기가 나지 않아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내가 한심했다.
"그렇게 힘이 드시면... 지금이라도 저와 이곳 황궁에서 나가십시오."
"뭐라고요?"
"황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뒷감당은 제가 다 하겠습니다."
사라진 아르세이아를 대신해서 나를 이곳에 밀어 넣고 이제 와서. 어째서. 그럴 거면 처음부터 날 밀어 넣지 말지. 그랬으면 카일을 마음에 담지 않았을 텐데...
"어머니와 제 외숙들은요? 제가 나가도 그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나요? 마님께서 그리해 주시겠답니까? 후작님이 이제 와서 막으실 수 있었다면 애초에 제가 제 어머니와 떨어져 살지 않았겠죠. 저는, 후작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아르세이아!"
"저는... 아르세이아가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세이렌입니다.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의자에서 일어난 내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동안 비스 후작님의 표정에는 후회만이 흘렀다. 이제 와서, 이미 다 지나가 버렸는데 되돌릴 수 없는데...
"아...!"
"아르세이아!"
어지럼증을 느껴 비틀 거리는 나를 후작이 부축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시녀들이 놀라서 호들갑을 떨며 달려왔다.
"비 전하!!!!"
"괜찮아."
"괜찮기는요. 어서 방으로 돌아가셔서 쉬셔야 해요."
"모일라, 그저 어지럼증일 뿐이야."
"클리펠리움 영애, 어서 황궁의를 불러오고, 유베르 영애, 그대는 카일룸 전하께 알려요."
"카일에겐 알리지 마. 바쁘신데 걱정거리를 늘리기 싫어. 제 몸이 미령하여 배웅은 못해드릴 것 같습니다. 살펴가세요."
나는 후작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내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 손에서 빠져나간 나를 상처받은, 아픈 눈으로 지켜보는 내 아버지. 그는 내가 떠나고도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했다.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상태로 느린 걸음으로 내 방 침대로 돌아왔다. 시녀들이 얼마나 열심히 알렸는지 황궁의가 벌써 도착해 있었다. 하필, 첫날에 봤던 그 인간이었다.
내 손목을 한참이나 진맥하고 눈을 뒤집고 문진을 한 그가 말을 막 하려던 순간에 내 방문이 열렸다.
"세이!"
카일.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어찌나 열심히 달려왔는지 머리카락이 엉켜서 엉망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들어오지 못하고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르는 그의 표정에 황궁의가 말을 꺼냈다.
"비 전하께서 늦더위에 입맛을 잃으셨다더니 영양이 부족하여 현기증을 느끼신듯 합니다."
"괜찮은 것이냐?"
"예, 걱정 마십시오. 보양에 좋은 약을 올릴 테니 잘 드시면 금세 회복하실 겁니다. 다만."
"다만? 어서 말해라."
"그, 요즘 늘 같이 주무신다 하여 보고를 안드렸는데. 오늘 밤이 회임 확률이 높은 날입니다만 무리하시면 아니 되니 살살하십시오. 내일도 괜찮은 날이니까요."
저 황궁의!! 해고하고 싶다!!
내 얼굴 못지않게 카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우리를 보고 시녀들과 황궁의는 빠른 속도로 방에서 물러났다.
거의 일주일 만에 보는 카일의 얼굴이었다. 다들 빠져나가자 그가 머뭇머뭇 침대 옆으로 걸어왔다.
"괜찮아?"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보지 못하던 동안 조금씩 정리하려던 마음이, 억지로 막아둔 마음의 둑이 무너지려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주저앉고 쭈뼛쭈뼛 내 손을 감쌌다.
"아르세이아? 아파? 아직 어지러워?"
입을 뗄 수가 없어서 고개만 저었다.
"비스 후작을 만났다며?"
"어떻게?"
"그가 날 찾아왔어. 네가 쓰러졌다면서."
"쓰러지지 않았어요. 그저 어지러웠을 뿐이에요."
"후작이, 네가 너무 힘들어 보인다면서,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차라리 돌아갈까? 요양을 핑계로 이 남자를 벗어나 떨어져 있을까? 그 사이 아르세이아를 찾기만 하면. 그럼 오늘이 마지막이 되겠지.
"날 두고 갈 거야?"
그가 나를 올려다봤다. 눈에 슬픔이 가득했다. 주인에게 버려진 강아지의 눈빛이었다. 날 버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말은 직접 하지 않는데도 들리는 듯했다.
"네가, 그러니까 네가 힘들면 보내줄게."
오늘 후작님을 마주하고 났더니 그가 황제와 함께 식사할 때의 심정을 더더욱 이해할 수 있었다.
무관심하게 방치해 놓고는 이제 와서 아끼는 것처럼, 한없이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관심. 이제서야 없던 부성애가 생긴 걸까? 미안한 마음이 든 걸까?
우리의 마음은 이미 다치고 짓이겨졌는데...
그가 나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길 원했다. 그가 아플 때 곁에서 위로가 되고 싶었다. 그가 아픈 순간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 나였으면 좋겠다.
그가 사랑하는 것이 나이든, 아르세이아이든, 내가 원하는 것은 그가 밝게 웃는 것이잖아. 나를 보고 웃어주는 것뿐이니까.
작은 욕심을 부리고 싶어졌다.
그의 모든 것을 가지지 못해도 돼.
지금 그의 곁에 있는 것은 나니까. 그의 사랑은 받고 있는 것은 지금의 나라고.
"안가요."
"응?"
"안 갈 거라고요.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눈부시게 웃는 당신 곁에 내가 있어도 될까요?
누군가 나에게 동생의 남자를 탐냈다고 손가락질하더라도, 너는 가짜니까, 천하니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해도, 당신의 미소만 있다면.
아르세이아의 대역으로라도 당신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좋아요. 간택연 때 선택받은 게 내가 아니어도 좋아요.
지금 당신이 웃어주는 것은 당신 눈 앞에 있는 나니까.
그가 와락 날 껴안더니 그의 얼굴을 내 어깨에 묻었다.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응. 세이. 나도 좋아해."
"그 날, 갑자기 쌀쌀맞게 군 거 미안해요."
"아냐, 괜찮아."
"용기가 안 났어요. 당신 같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되는 것인지 나에게 확신이 안 갔어요."
"충분해. 너라는 존재 자체가 내 빛인걸."
"당신도... 내게 빛이에요."
카일이 나를 더 강하게 끌어안아왔다. 나도 살며시 그를 마주 안았다. 따스한 그의 체온, 상쾌한 그의 체향이 나를 가득 채워왔다.
"그런데 나는 그렇다 치고, 당신은 왜 날 피했어요?"
"당신 시녀가, 당신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게 좋겠다고 해서. 내 존재가 널 힘들게 해서, 네가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했거든."
"그거 에이린이죠? 걔도 참."
고마운 친구였다. 평소처럼 카일이 내게 들이댔다면 나는 도망치려했을지도 몰랐다. 떨어져 있어서, 그래서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갖고 싶은지 깨달았으니까.
뺏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그에게서 받은 사랑만큼은 온전히 돌려주고 싶었다. 이별은 없다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졌다.
내가 살며시 웃자 카일이 나보다 더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어줬다.
"나, 카일이 나만 보고 웃어줬으면 좋겠어요."
아르세이아한테도 싫어요.
"어. 난 너만 보고 웃을 거야. 언제까지고 영원히."
"다른 여자한테 웃어주기만 해봐."
"어. 그냥 루카스랑 테일러한테도 웃지 않을게."
당신의 미소만큼은 내 것이길. 내가 가질 수 있길...
"참, 맞다. 잠깐만요."
"응?"
"나랑 있었던 일. 밑에 수하들이 다 알게 티 내고 돌아다닐 거예요?"
"나, 아무 말 안 했어. 이번에는!"
으휴!! 이 바보.
"나랑 조금 사이 틀어졌다고 살기 막 풀고 수하들 괴롭히고 그럴 거예요?"
"잘못했어. 안 할게. 그런데 말한 놈이 루카스야 테일러야?"
"카일!!!"
내가 그의 등짝을 때리려는 순간 모일라가 수프를 들고 들어왔다.
"카일룸 전하, 비 전하 말 좀 잘 들으시죠?"
"유모는 이제 내 편이 아닌 것 같아."
"당연하죠. 자, 그러니까 우리 비 전하 속 썩인 벌로 식사 시중은 전하가 하세요."
"넵. 유모."
응? 모일라는 트레이를 카일에게 넘겨주고 나가버렸다. 카일은 유모한테 약하구나. 유모가 강한 건가?
"크큭, 모일라는 세이가 정말 마음에 드나 보더라고. 진짜 이젠 네 편인 것 같아. 자, 아."
그가 직접 떠주는 수프를 받아먹었다. 아기가 된 것 같아 조금 부끄럽긴 한데 좋았다. 맛있다. 그가 떠먹여줘서 더 맛있다.
한참이나 받아먹다 그의 흐뭇해하는 얼굴을 보았다. 어? 그런데 카일도 얼굴이 반쪽이 됐네?
"카일, 스푼 줘요. 얼른요."
주기 싫어하는 스푼을 억지로 뺏어든 나는 떠먹여 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그를 보며 짓궂게 웃었다.
"자. 카일도 아~"
그 말에 카일의 입꼬리가 풀리면서 입을 아하고 벌렸다. 귀엽다. 나의 아기 참새.
"카일도 식사 제대로 안 챙긴 거죠? 수프랑 스푼 더 갖다 달라 해야겠다."
설렁줄을 잡아당기자 유리아가 들어왔다. 카일은 유리아에게 스푼은 됐고 수프만 한 그릇 더 가져오라고 시켰다. 서로 떠먹여 주는 게 좋구나. 키득거리며 새 수프를 받아들었다.
"자, 카일. 다시 아~"
입에 듬뿍 수프를 떠 먹여줬다. 씩 웃으며 받아먹는 그가 참 이쁘다.
"이번에는 다시 카일이 먹여 줘요."
내가 스푼을 내밀자 그는 한가득 수프를 떠서 제 입에 쏙 집어넣었다.
"앗! 치사하... 읍!"
그가 겹쳐 온 입술 너머로 그의 체온만큼 따뜻한 수프가 넘어왔다. 그리고 그의 달콤한 것도. 한참이나 우리의 입은 서로의 수프를 나눠 먹었다.
"비 전하 약드셔야. 꺅 죄송합니다! 나중에 다시올게요!!"
으윽. 민망해. 그래도.
"더, 더 먹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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