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비의 대역으로 살아남기-27화 (27/126)

28화. 여름비가 스며들 때. (3)

2018.04.26.

카일과 루카스는 전령을 통해 도착한 보고서를 심각하게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이번 전염병은 설사와 복통을 동반한 것으로 밝혀졌다. 내가 지난 우기 동안 담당한 빈민지역은 황실 직할령으로 몬테령과 이웃한 구역이었다. 내가 속으로 걱정하는 사이 세 남자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요사태를 막기 위해 헬리오스 경비대를 파견하였습니다."

군권의 대부분은 이미 황태자의 근위대장의 손에 놓여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아들에게 서서히 권력을 넘겨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그래도 황제의 근위대와 수도 방위대의 군권은 황제 손에 있지만.

그래서 신속한 조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왜 하필 몬테의 영지야? 도와주기 싫게."

"규모가 제법 커서 영지 내 빈민가뿐 아니라 평민 지구에서도 감염자가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직할령은요?"

내가 맡은 곳이라 초조하게 물었다. 그러자 루카스가 대신 답했다.

"비 전하의 영민한 대비로 감염자가 거의 없다시피하고, 걸린 이들도 조금 앓은 뒤 자력으로 회복되고 있다 합니다. 몬테 영지민들에게서 이미 다수의 사망자가 나온 것과는 달리요.”

"루카스님의 도움 덕분이에요."

내가 웃으면서 감사 인사를 하자 루카스가 기분 좋게 답했다.

"비 전하께서 황궁에 오셔서 참 다행입니다."

"비 전하, 왜 저놈만 이름을 불러주고 저는 이름을 불러주지 않습니까?"

"에... 네?"

그때 클리페울룸경의 얼굴이 치워졌다. 그리고 그를 향한 짜증 어린 카일룸의 얼굴이 드러났다.

"루카스 녀석 하나만으로도 짜증 나거든? 작작하지?"

이름 정도 가지고...

"카일, 그만해요. 그리고 몬테령에 어찌 도움을 줄지 고민해야죠. 다들 집무실로 가요. 루카스님, 음, 테일러경?"

"네네 비 전하. 신 테일러 여기 있습니다."

"같이 의논하실 거죠?"

"예, 비 전하 영광입니다."

잔뜩 삐친 얼굴의 카일이 보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카일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작게 말해 주었다.

"내가 애칭으로 불러주는 남자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에요."

빙긋. 삐졌던 얼굴이 금세 풀려 내 것과 닮은 미소를 짓는 그의 눈이 조금은 사랑스러웠다.

몬테 공작은 부랴부랴 황태자의 알현을 요청했다. 그런데 카일은 나와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며 급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불쾌함을 표시했다.

뭐, 시간을 보내고 있긴 했다. 그의 심복 둘까지 다 합쳐서 넷이서. 카일의 심기는 아주 불편해 보였다. 살짝 무서운 눈빛을 두 친구에게 보내는데 그들은 꿋꿋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카일, 공작을 계속 기다리게 해도 돼요?"

"보나 마나, 물로 전염되고 있는 병이니 몬테령의 수원에 정령의 축복을 내려달라는 걸 거야."

"안 해줄 거에요? 당신이 늦게 갈수록..."

정치적인 거래 때문인 것은 안다. 하지만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은 싫었다. 힘없는 사람들이 왜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가.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그때 희생되는 약한 자들의 억울함은?

내가 카일을 조금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보자 카일이 급 당황하면서 절절맸다. 어쨌든 몬테 공작은 아르세이아의 외숙부이지 않은가.

"갈 거야. 가긴 갈 건데. 아니 내가 가는 건 아닌데..."

"비 전하.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저, 조금 길들이는 중인 겁니다."

"하지만,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잖아요. 자신들의 잘못도 아닌데. 왜 권력자들의 다툼에 힘없는 이들이 희생돼야 하죠? 그들도 이 데피니토르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제국의 백성인데."

다들 날 쳐다보았다. 조금 부담스러웠다. 귀족파의 수장인 몬테 공작의 조카니까 하는 소리로 들리려나?

하지만, 나와는 사실 피 한 방울 안 섞인 공작이고, 집안의 정적인 콘스탄트령에서 일어난 일이었어도 나는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아니 콘스탄트 령이면 당장 가라고 화냈을 것이다. 몬테령이 황태자비의 외가라서 에둘러 말한 거지.

"외가의 영지라서 무조건 구해달라 부탁드리는 거 아니에요."

"알아, 그리고 걱정하지 마."

"네. 비 전하. 이미 지원은 출발했습니다."

내가 루카스를 쳐다보자 그가 안심하라는 듯 차분히 웃었다.

"이미 비 전하께서 대비하신 물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들은 이미 출발했습니다."

아, 카일에게 뽀뽀를 헌납하며 만든 정령의 축복이 담긴 물.

"그리고, 그것은 황태자비 전하의 이름으로 전해질 겁니다."

"네?"

"미리 전염병을 예상하고 대비를 충실히 한 황태자비가 만든 작은 기적으로 널리 알려지겠지.”

"카일, 당신이 다 한 건데요 그건. 저는 단지..."

"그대의 키스로 만들어진 물이니깐 세이, 네가 한 거야."

어쩜, 이리도 낯 뜨겁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게다가 키스랑 뽀뽀는 다른다고! 내 얼굴이 불타오르자 루카스가 그에게 눈치를 줬다.

"비 전하 화나시면 또 각방선언하십니다!"

"안돼!"

가끔 이 부끄럼을 모르는 황태자와 은근 눈치 없는 보좌관 때문에 황태자비 대역을 때려치우고 싶었다.

* * *

"몬테 공작, 오랜만이오. 직접 올 줄을 몰랐는데?"

"창공을 비추는 두 번째로 높은 태양과 밤하늘을 밝히는 작은 별, 두 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짧은 순간에도 나를 향한 경멸의 눈동자가 느껴졌다. 하긴, 제 누이와 조카가 벌인 어마어마한 일을 모르진 않겠지.

카일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아니, 그래도 공작인데, 계속 저 상태로 둘 생각인 건가? 내가 살짝 그의 옷자락을 잡자 그가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시오, 공작."

"감사합니다. 전하."

숙였던 몸을 세운 중년의 공작의 눈이 내게 향했다가 바로 카일룸에게 옮겨갔다. 잠시 나를 훑는 그 눈길에도 내 숨이 콱 막히는 듯했다. 그리고 손끝이 식는 느낌이었다.

그때 전해진 그의 온기. 그가 나를 지긋이 바라봐 주었다.

"황태자비께서는 국혼 이래 처음 뵙는군요."

"아, 제가 아직 배울 것이 많아서 시간이 부족하여 외숙의 알현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해해주시지요."

"나의 비가 황태자비의 덕목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나랑 만날 시간이 없어서 말이지. 우리는 신혼인데, 국혼 후 3개월을 영주들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문제들을 대신하느라 바빴지 않나."

카일의 말에 몬테 공작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 좋게 웃었다. 하지만 웃음 뒤에 숨겨진 한기가 내 눈에는 보였다.

"저의 조카를 이리도 아껴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뱀. 독을 숨기고 나를 공격할 틈을 노리는 뱀의 독니.

"그래, 급하게 나를 찾은 이유는?"

"제 영지에 전염병이 발생한 사실을 아십니까?"

"아아, 들었어. 물을 통해 전달된다지?"

"알고 계셨군요."

알면서도 이제서야 자신을 만난 것이냐는 책망이 눈에 담겼다. 그리고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려는 것을 카일이 막았다.

"아, 기다리느라 소식을 못 들었나 보군. 이미 황태자비가 외가의 위기를 돕기 위해 지원을 했는데 말이지."

"그렇, 습니까? 어떤 지원인지요?

"이미 전염병을 예상하여 깨끗한 물을 준비했었거든. 매일 밤 내게 축복이 담긴 물을 만들어 달라더니 이 일에 쓰게 될지 몰랐어."

카일은 나를 다정한 눈으로 보다가 공작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에게 이런 표정이 있는지 몰랐다. 무서우리만큼 차갑고 냉정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대단하지 않나? 그대의 조카는? 이리도 황태자비에 잘 어울리다니. 비스가에 이렇게 훌륭한 황태자비감이 있을지 어찌 알았겠나?"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몬테 공작의 무표정한 얼굴에 카일은 여전히 냉소로 응수할 뿐이었다. 서리가 내려도 이해가 될 정도였다. 정면으로 못 봐서 다행이야.

"우선 오염된 수원의 이용을 금지하고 황태자비가 보내는 정수만을 식수로 음용토록 할 것이야. 어느 정도 치유 효과도 있어 금세 진정될 터이니 걱정말게. 다, 황태자비의 덕택임을 잊지 말고 영지민에게 알려주게나."

"두 분 전하의 은혜에 제 영지민들이 무한한 감사를 올릴 것입니다."

루카스가 알려 준 바에 따르면 몬테령에서 전염병이 발생한 것은 시기가 꽤 되었다고 했다. 사실 황태자도 어젯 밤에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이를 철저히 숨긴 것은 몬테 공작.

황태자가 내려주는 정령의 축복은, 단지 물의 정화만이 아니었다. 정령이 정화시킨 물은 토지를 비옥하게 하고 풍요를 가져다준다. 수산 자원마저 풍족해진다고 했다.

그것을 노린 것이다. 상황이 악화되어 피해가 커지면 황태자가 나설 것이다. 그때까지 피해가 확산되도록 기다린 것이다. 조기에 차단이 가능했음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다른 이들의 피해를 방치했다.

결국 피해를 본 것은, 힘없는 빈민들이었고, 점차 평민 지구까지 그 피해가 확산되어 버린 것이다.

어차피 쓸모없는 빈민들 따위 전염병으로 정리되면 좋고, 덤으로 풍요롭고 성스러운 수원이 생기면 향후 몇 년간 얻을 영지의 이득이 늘어난다. 힘없는 자들을 희생시켜 더 큰 것을 얻으려는 것은 몬테 공작 혼자였다.

그 추악한 영주의 계획을 들은 나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카일이 축복을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했다. 영지민들도 제국의 일부이고,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에 내려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국을 위해 얼마든지 축복을 내렸다고 했다. 그런데 결국 돈 많고 힘 있는 귀족들이 축복을 받은 자원들을 독점한 탓에 축복을 최대한 아끼게 되었던 것이다.

대신 이번에 카일은 그 소식을 알자마자 내가 저장해둔 정령의 축복으로 정화된 물을 몬테령으로 보냈다. 그 물은 철저히 관리되어 힘없는 영지민들을 살릴 것이다.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 덕분에 몬테 공작의 욕심을 무위로 만들게 되었다면서 그는 좋아했다.

제국의 힘없는 백성을 구하려 하면서도, 욕심 많은 귀족을 벌하려는 모습에 가슴에 큰 울림이 전해졌다. 아주 큰 사람, 멋진 사람, 그런 사람이 카일이었다.

"외숙. 제가 전하께 부탁드려 최대한 지원이 닿도록 할 테니 심려 놓으세요."

몬테 공작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황태자비에게 빚까지 졌다. 게다가 그것이 하필 나였다.

아마 더 이를 부득 갈겠지. 자신의 여동생이 경멸하던 천박한 사생아인 나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그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을지 알만하다.

큰일이네. 후환이 좀, 걱정된다. 아 몰라, 카일이 저지른 짓이니까 카일더러 책임지라고... 할 수가 없네. 카일은 나와 몬테 공작의 관계를 모르니까, 에효

"참, 공작. 그대의 여동생이 나의 비가 잃어버린 결혼반지를 아직도 찾는다던데 말이야. 찾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게. 아주 제국 곳곳을 뒤진다는 소문이 있더군. 그렇게 온 제국에 나의 비가 실수한 것을 알릴 필요는 없네."

"네? 아. 예. 그러겠습니다."

결혼반지? 아, 그거 아르세이아가 잘라버렸다고 했는데.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반지의 존재를 아주 깔끔히 기억에서 지우고 있었구나.

혹시 아르세이아가 결혼반지를 진짜 도피자금으로 팔아 썼나? 그래서 결혼반지로 추적 중인 걸까?

긁적긁적, 내 잘못은 아니지만, 새 신부가 결혼반지를 잃어버리다니, 카일에게 미안해졌다.

"볼일이 끝났으면 이만 물러가시게. 우리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 말이야."

공작의 시선이 내게 닫는 순간 카일이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공작이 응접실 문을 나서자마자 내내 얼음장 같던 그의 표정이 마법처럼 풀렸다.

하하하, 나만 보면 헤실거리는거 좋긴 한데요. 좀 무서울 지경이에요. 표정을 그렇게 극적으로 바꾸면 다중인격이라도 되는 것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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